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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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세계 _ 연희, 백해선 감독

# 0. 잔인하고 곤혹스러운 시인의 세계 백해선 감독,『연희 :: Yeon hui』입니다. # 1. 몇몇의 배우들은 삶의 특별한 순간 감정적으로 격해질 때면 습관적으로 거울을 찾는다 한다. 자신이 어떤 감정으로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비춰 기억하기 위함이다. 보통의 사람들이었다면 외면하거나 망각하고 지나쳤을 감정들. 자연인으로서 두 번 경험하고 싶지 않을 끔찍한 순간에조차 그 안에 담긴 모든 추악함까지 들여다보고 끄집어내어 새긴다는 건 마치 맨 손으로 선인장을 움켜쥐는 것만큼이나 아프고, 그래서 고단한 일이다. 어느 대학의 문예창작과 수업. 무명의 시집에 담긴 시를 베껴 교수와 동기들에게 인정받던 학생 연희의 수업에 청강생 강희가 들어오며 단편은 시작된다. 교수의 칭찬과 동기들의 부..

Drama 2025.05.14 0

어지르는 재미 _ 레이더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 0. 세상에서 제일 가슴 뛰는 영화의 어지르는 재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레이더스 :: Raiders of the Lost Ark』입니다. # 1. 첫 편의 제목은 의외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탐험가의 이름이 아니다. '잃어버린 성궤의 침입자'라는 뜻의 양심적인(?) 제목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 해리슨 포드가 협업한 영화 레이더스는 1930~40 펄프 픽션과 시리얼 필름의 문법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틀에 성공적으로 이식한 작품이라 평가된다. 복잡하고 심오한 주제의식을 파고들기보다 직관적으로 즐길 수 있는 모험과 액션, 유머, 로맨스 등을 영리하게 조합한 끝에, 위험천만한 상황들을 재치와 용기로 헤쳐나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대리만족의 쾌감을 한껏 선사한다. 물론 직관..

Action 2025.05.10 0

Mystery & Thri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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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탕 주의 _ 유마 카운티의 끝에서, 프란시스 갈루피 감독

# 0. 죽은 사람들의 한탕주의(主義)와 살아남은 사람의 한탕 주의(注意) 프란시스 갈루피 감독,『유마 카운티의 끝에서 :: The Last Stop in Yuma County』입니다. # 1. 영화는 시작부터 서부극의 문법에 충실하다. 벌판 한가운데 외딴 건물은 서부극 특유의 황량함을 세팅한다. 주요 무대인 레스토랑은 살롱을 계승한 공간이다. 둔탁한 미닫이문이 열리고 문 위에 달린 종이 울릴 때면 마치 총잡이가 살롱 문을 박차고 들어서는 듯한 인상을 주는 데, 그럴 때마다 미리 자리한 손님들이 외부인을 경계하는 구도는 서부극의 전형적인 긴장감을 정석적으로 조성한다. 바 형태의 카운터를 중심으로 몇몇의 인물들이 대치하거나 흩어지는 활용 또한 서부극의 공간 연출을 답습하는 것이다. 테이..

Mystery & Thriller 2025.05.08 0

고통스러운 진실, 절망스러운 성찰 _ 뉴 오더, 미셸 프랑코 감독

# 0. 불편한 진실과 비관적 성찰을 집요하게 추궁하는 광기 어린 야심 미셸 프랑코 감독,『뉴 오더 :: New Order』입니다. # 1. 논쟁적인 영화는 시작부터 관객을 몰아세운다. 형이상학적인 미술과 헐벗은 여성의 오프닝을 지나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세계, 호화로운 상류층 결혼식과 그 너머 폭력이 뒤섞여 제시된다. 깨끗하고 풍요로운 저택은 견고한 성처럼 보이지만 이미 위태롭다. 직관적으로도 불안한 녹색의 침입이다. 수도꼭지에서는 녹색 물이 흘러나오고 페인트를 뒤집어쓴 손님이 도착하는 등 외부의 오염과 분노가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스며들고 있음이 상징적으로 연출된다. 감독은 파티에 모인 상류층 사람들의 이미지를 통해 구체제를 성실히 묘사한다. 여성들의 화려한 원색 드레스를 통해..

Mystery & Thriller 2025.05.02 0

브레히트와 세 번의 기적 _ 더 원더, 세바스찬 렐리오 감독

# 0.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세바스찬 렐리오 감독,『더 원더 :: The Wonder』입니다. # 1. 기나긴 역사 속에서 운명은 수차례 인간을 짓밟았고, 19세기 초 아일랜드에 들이닥친 대기근은 유독 가혹한 것으로 기록된다. 터무니없는 결핍에 내동댕이쳐진 인간은 합리적인 대응 따위로는 벗어날 수 없고, 한계에 다다른 인간은 필연적으로 이 모든 위기를 단숨에 해결해 줄 기적에 종착한다. 따라서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수많은 이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기적은 보통 아름다운 것으로, 환상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그것은 그르지 않다.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로 인해 진보된 숱한 역사가 증명함이다. 다만 기적의 대상이 가뭄을..

Mystery & Thriller 2025.04.18 0

장르는 퍼즐 _ 머시니스트, 브래드 앤더슨 감독

# 0. ⓧ 버튼을 눌러서 조의를 표하십시오.        브래드 앤더슨 감독,『머시니스트 :: The Machinist』입니다.     # 1. 위키는 작품을 스릴러로 소개하고 있고 대부분의 관객 역시 그러하겠으나, 개인적으론 달리 해석한다. 이 영화의 메인 장르는 '퍼즐'이고 그 뒤로 호러, 액션, 어드벤처가 적절히 혼합된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이렇게 들으면 번뜩 거부감이 들 것이다. '미스터리도 아니고 퍼즐은 뭐래. 무슨 게임도 아니고...' 그렇다. 필자는 크리스찬 베일이 살 빼느라 개고생 한 것으로 유명해진 영화를, 숄더뷰로 진행되는 3인칭 호러 퍼즐 게임의 시네마틱 모음이라 주장하려는 것이다. 사실 영화의 내러티브는 평이하다. 자수하고 광명 찾자가 전부다. 되려 작품의 매력은 공포의 주체와 ..

Mystery & Thriller 2025.04.02 0

아포페니아의 아포페니아 _ 계시록, 연상호 감독

# 0. 아포페니아를 지적하고 싶었던 교수님의 아포페니아 연상호 감독,『계시록 :: Revelations』입니다. # 1. 아포페니아를 탐구하는 영화가 아니다. 정확히는 '세상 사람들이 아포페니아와 확증편향에 빠져 있다'라는 감독의 진단을 관철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영화다. 목사 성민찬의 캐릭터가 어느 정도 자리 잡히자마자 이야기의 주도권이 형사 이연희에게 홀랑 넘어가버리는 이유다. 연희의 환각과 환청이 민찬과 본질을 공유한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다시 권양래의 실체로 이야기의 흐름이 넘어가버리는 이유다. 대부분의 내러티브는 사람들을 ‘묘사’하거나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수집’함으로써 ‘증명’하는 방향으로 짜여있다. 목사 정국한과 아영의 부모 등 보조적 캐릭터를 배치해 볼륨을 보강..

Mystery & Thriller 2025.03.28 0

그렇게 어른이 된다 _ 보이, 호르헤 M. 폰타나 감독

# 0. 그날 이후, 내가 알던 모든 것이 달라졌다        호르헤 M. 폰타나 감독,『보이 :: Boi』입니다.     # 1. 이름은 보이. 마지막 스펠링은 i다. 짓궂은 농담에 익숙하다는 듯 y가 아니라 답하지만 사실 그렇기에 y다. 누가 보더라도 보이가 아니라면 질문받을 일도 답할 필요도 없다. 영화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다시피 거대한 분기를 눈앞에 둔 소년의 성장 영화다. 전반부는 인물의 미숙함과 미숙한 존재가 느낄 당혹스러움을 다방면에서 묘사하고 있고, 후반부는 방황하던 소년이 몇몇의 타협과 결심 끝에 자신의 자아를 조금씩 되찾아가는 과정으로 귀결된다. 생소한 스페인 영화는 다각도에 걸친 메타포를 과격한 내러티브에 얹어 불친절하게 묘사하지만, 로네츠의 명곡을 번안한 를 비롯한 ost, 고..

Mystery & Thriller 2025.03.22 0

비열한 망각에 복수하다 _ 복수는 나의 것,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 0. 안식과 풍요에 숨은 비열한 망각에 복수하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복수는 나의 것 :: 復讐するは我にあり』입니다.     # 1. 박찬욱의 영화를 기대한 독자에겐 유감을 표한다. 이 글은 1979년작에 대한 이야기다. 송강호와 신하균이 열연한 박찬욱의 그것은 정직하게 복수에 대한 것이었던 반면,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복수와 무관한 연쇄 살인에 대한 것이다. 실제 주인공 에노키즈와 대부분의 희생자들 사이에는 뚜렷한 원한이 없고, 심지어 느슨하게나마 호의를 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희생자들은 하나같이 선량하고 무고한 사람들이며, 이는 경찰에 붙잡혀 스스로 말하듯 에노키즈 역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감독은 자신의 이야기를 '복수는 나의 것'이라 이름 ..

Mystery & Thriller 2025.01.12 0

Hor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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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페라투의 신부 _ 노스페라투, 로버트 에거스 감독

# 0. 외로운 우리는 죽음을 결심하지 못하기에 두렵고, 그래서 슬프다. 로버트 에거스 감독,『노스페라투 :: Nosferatu』입니다. # 1. 혹시 그런 적 있을까. 어둡고 고요한 밤 익숙한 잠자리에 누워 잠에 들려던 찰나. 스스로 내는 한 모금 한 모금의 숨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며 죽어가고 있음을 선명히 자각하는 경험 말이다. 사랑하는 부모와 친구와 가족 모두 필연적이고 불가역적인 이별에서 벗어날 수 없고, 마침내 나 역시 죽음을 눈앞에 둔 10초 전, 9초 전, 8초 전에 반드시 도달해 그 순간을 선명히 느끼게 될 것이라는 공포. 그럴 때면 두려움에 번쩍 몸을 일으켜 방을 배회하며 스스로에게 간절히 요구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 벗어날 수..

Horror 2025.04.26 0

게으르고 지루하다 _ 서브스턴스, 코랄리 파르자 감독

# 0. 중독된 것은 미모도 인기도 파괴도 아닌 지적인 게으름        코랄리 파르자 감독,『서브스턴스 :: The Substance』입니다.     # 1. 푸른색 배경에 계란 하나. 노른자에 주사를 꽂자 분열하더니 둘로 나뉜다. 나란히 놓인 노른자 두 개와 흰자의 실루엣은 무언가의 얼굴처럼 보이는데, 그것의 정체는 알 수 없으나 은연중 불쾌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문제작 서브스턴스의 오프닝이다. 영화는 도입에서 경고하듯 강렬한 이미지를 난사하는 방식으로 일관한다. 비슷한 주제의식을 미리 다뤘던 단편 와는 썩 대조적인 시도다. 쏟아지는 이미지 속에서 함의를 찾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비단 디스플레이뿐 아니라 모든 프레임들, 이를테면 광고판이나, 액자, 창문, 통로, 주요하게는 거울까지 모두 각..

Horror 2025.03.08 0

부끄부끄 _ 오퍼나지 비밀의 계단,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감독

# 0. 부끄부끄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감독,『오퍼나지 비밀의 계단 :: The Orphanage』입니다.     # 1. 물론 제작자의 명성이 성공을 보장하진 않는다. 오히려 노련한 관객들은 수상할 정도로 스타 제작자의 이름값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에 강한 경계심을 내비칠 정도다. 그럼에도 몇몇의 작품들은 왜 저 양반이 이 영화를 선택한 건지 알겠다 싶기도 한데, 스페인 감독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의 데뷔작은 좋은 예라 할 수 있겠다. 고아원(Orphanage)에서 펼쳐지는 잔혹 동화를 특유의 서정성으로 엮어낸 작품이다.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린 아들을 찾아 헤매는 간절한 어머니의 이야기로, 나름 호러로 분류됨에도 불구하고 휘발적인 몇몇의 효과에 의존하는 대신 진중하게 ..

Horror 2025.02.20 0

보호자용 _ 사탄의 베이비시터 킬러 퀸, 맥지 감독

# 0. 사춘기사용설명서 [보호자용]        맥지 감독,『사탄의 베이비시터 킬러 퀸 :: The Babysitter Killer Queen』입니다.     # 1. 겁 많은 어린이가 사춘기를 내딛는다는 내용의 따뜻한 성장 영화다. 대체 무슨 의도로 사탄이란 무시무시한 말을 가져다 붙인 건지 모를 고약한 배급사의 모함에 속기 쉽지만 원제는 담백한 베이비시터로, 우리 시대의 로멘티스트, 아리 에스터의 이나 처럼 온 가족 오손도손 함께 보기 좋은 가족 드라마되시겠다. 속편의 부제가 킬러 퀸이라는 게 조금 찝찝하지만 이 역시 오해다. 뮤직비디오 연출자 출신의 감독이 퀸의 팬이었을 뿐이다. 실제 절정부에 다다르면 프레디 머큐리가 부르는 킬러 퀸이 웅장하게 흘러나와 아들과 아버지의 가슴 뭉클한 화해를 서정적으..

Horror 2025.02.14 0

아동용 _ 사탄의 베이비시터, 맥지 감독

# 0. 사춘기사용설명서 [아동용]        맥지 감독,『사탄의 베이비시터 :: The Babysitter』입니다.     # 1. 호러 코미디의 탈을 쓴 성장 드라마다. 원제목은 로 영미권의 관객들은 엉큼한 10대 소년과 관능적인 베이비시터의 몽정기 정도를 기대했을 테니, 하이틴 로맨스의 탈을 쓴 호러 코미디의 탈을 쓴 성장드라마라는 이중트릭이라 하는 게 맞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유약한 12살짜리 주인공이 어찌어찌 악당을 물리친 후 더 이상 베이비시터가 필요하지 않다 말하며 끝나는 영화에서 성장이란 코드를 끌어내는 건 어렵지 않다. 폭력은 감독의 이력처럼 충분히 경쾌하고 스타일리시함에도, 겁 많은 소년이 마주하게 될 다양한 성장의 분기를 도식화한 것에 불과하다. 또래들과 달리 마지막까지 베이비시터..

Horror 2025.02.10 0

해석과 권력 _ 피사체, 하태민 감독

# 0. 해석할 수 있는 권력에 반기를 들다        하태민 감독,『피사체 :: Subject』입니다.     # 1.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해서 매번 눈에 불을 켜고 사진을 찍는 건 아니다. 단지 카메라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짐을 느끼는 게 즐겁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주변의 사물들을 조금 더 몰입해서 보게 되는 데, 그것이 마치 세상의 해상도를 높이는 듯한 착각을 준달까. 처음엔 건물, 꽃, 간판, 장식, 음식 따위만 찍어도 즐겁다. 점점 구도나 화각, 렌즈, 보정도 달리해보고, 같은 사물이 빛의 드라마틱한 효과에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에 매료되는 것도 즐겁지만, 결국엔 예정된 갈증에 도달한다. 역동성이 없는 사진들을 돌려 보는 동안의 공허함. 살아있는 사람의 ..

Horror 2025.01.26 0

뉴식이 두마리 치킨 _ 루프 트랙, 토마스 세인즈버리 감독

# 0. 뉴질랜드산 특대사이즈 오골계 2마리 28000원. 계란 추가(+3)        토마스 세인즈버리 감독,『루프 트랙 :: Loop Track』입니다.     # 1. 태만하게 못 만든 호러 영화는 짜증스럽지만, 열심히 못 만든 호러는 의외로 재미있다. 특유의 진지함이 나름 귀엽기도 하고, 열심히 해 보려는 과정에서 벌어진 황당한 부분들이 되려 코믹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생소한 뉴질랜드산 크리처 영화는 문자 그대로 열심히 못 만든 호러다. 대체 뭘 했길래 제작하는 데 7년씩이나 걸린 건지 알 수 없지만, 비장의 무기였을 크리처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쉴 새 없이 웃음이 터져 나온다. 만약 이 영화를 보는 모습을 누군가 몰래 지켜봤다면, (2024)을 볼 때만큼이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발견했을지도 모른..

Horror 2024.12.04 0

Com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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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Portrait) _ 소피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나인 안티코 감독

# 0. 제대로 배우지 않아 엉망이지만 그래서 개성적인 우리들 나인 안티코 감독,『소피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 Playlist』입니다. # 1. 프랑스의 만화가 나인 안티코의 감독 데뷔작은 파편화된 청춘의 일상을 만화가 특유의 독특한 리듬으로 그린다. 원제 'Playlist'가 그러하듯, 영화는 주인공 소피가 마주하는 삶의 여러 문제들—불안정한 직업과 미래, 복잡 다난한 대인 관계, 갑작스러운 건강 이슈, 열악한 주거 환경 등—을 예측 불가능하게 뒤섞인 트랙처럼 불규칙하게 배치한다. 감독의 만화가적 기질이 반영된 듯 일련의 분절적 구성은 단순히 시간순의 줄거리 나열이 아닌, 소피가 체감하는 현실의 무질서함과 미래의 불확실함, 그로 인한 내면의 혼란을 복합적으로 암시한다. ..

Comedy 2025.05.06 0

안부 전화를 해요 _ 줄스, 마크 터틀타웁 감독

# 0. 어떤 영화는 소박해서 훌륭하다. 마크 터틀타웁 감독,『줄스 :: Jules』입니다. # 1. 전형적인 미국의 마을에는 전형적인 미국인 할아버지가 살고 있고 그가 사는 전형적인 미국식 저택 뒤뜰로 전형적인 회색빛 우주선이 추락한다. 다들 뒤뜰에 먹다 남은 외계인 하나쯤은 있을 테니 그리 이상할 것 없는 평범한 이야기다. 요염한 자세로 쓰러진 진지한 표정의 외계인과 그가 타고 온 우주선의 꼬락서니만 보더라도 이 영화가 얼마나 소박한 것인가를 가늠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니 SF가 아니다. 외계인이 초능력으로 강도의 머리통을 폭파시킨다거나, 수상한 노인 둘이서 죽은 고양이 시체 7구를 트렁크에 모은다거나, 검은 옷 빼입은 요원들이 문을 부수고 들이닥치는 등 몇몇의 사소한 장면들만..

Comedy 2025.04.20 2

간귀 _ 데드 탤런트 소사이어티, 존 쉬 감독

# 0. 맛은 평범하지만 간은 귀신같이 맞췄다.        존 쉬 감독,『데드 탤런트 소사이어티 :: Dead Talents Society』입니다.     # 1. (1989)를 대화하다 보면 꼭 따라붙는 이야기가 있다. 제목에 대한 비하인드다. Dead Poets는 죽은 시인이라기보다는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1819-1892)과 같이 오래전에 죽은 옛날 시인에 가깝고, Society는 모임이나 협회를 뜻하는 것이기에 '고전 시인 협회' 정도가 적당함에도 그것을 냅다 직역하며 생긴 오역이라고 말이다. 다만 세태를 두루 관조하는 면이 없잖아 있었던 내러티브와, 특유의 비장한 뉘앙스가 작품이 받은 사랑에 보탬이 되었다는 아이러니를 첨언하면 대충 교양 있는 스몰 토크가 완성된다.  의 제목은..

Comedy 2025.04.04 0

범죄의 재구성, 보급형 _ 킬 미 쓰리 타임즈, 크리브 스텐더스 감독

# 0. 이 동네에서 정신병자 집회라도 있냐?        크리브 스텐더스 감독,『킬 미 쓰리 타임즈 :: Kill Me Three Times』입니다.     # 1. 코미디의 심벌이 되어버린 몇몇의 배우가 총 들고 멋있는 척하고 있다면 어지간해선 밥값은 한다. 미모의 테레사 팔머와 앨리스 브라가 사이에 서 있는 미어캣 닮은 저 남자처럼 말이다. 검정 슈트 빼입고 겁나 큰 스코프 달린 저격총 들고 선 남자, 누가 봐도 스티커로 붙인 듯 어울리지 않는 콧수염의 사이먼 페그가 세상 모든 미인을 10분 만에 꼬실 수 있다는 듯 치명적인 표정으로 카메라를 직시하고 있다? 오케이, 일단 합격. 급전이 필요한 도박쟁이 남편과 보험 사기가 천직인 사이코 패스 아내가 등장한다. 은행보다 금고가 편한 분조장 의처증 남편..

Comedy 2025.03.04 0

모범적인 연착륙 _ 핸섬가이즈, 남동협 감독

# 0. 능숙하고 매끈하게 안착한 오컬트 코미디의 모범사례        남동협 감독,『핸섬가이즈 :: Handsome Guys』입니다.     # 1. 호평을 받았던 (2010)을 리메이크한 영화는 잘 짜인 미국식 장르 영화의 맛을 훌륭한 현지화로 이식하는 데 성공한다. 이민재 감독의 (2019)이나 신정원 감독의 (2020)과 비슷한 야심을 가진 작품으로, 개인적으론 두 작품보다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 평가하고 있고 세간의 평도 크게 다르진 않은 듯하다. 거친 표현을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당장 포스터만 봐도 안다. 유달리 세월을 정통으로 처맞은 이성민과 이희준의 섹도시발 표정을 보고도 주먹구구식으로 흘러가는 병맛 코미디 외에 다른 장르를 기대했다면 그건 관객이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놀란 건 표현..

Comedy 2025.02.26 0

노스탤지어의 풍경화 _ 문라이즈 킹덤, 웨스 앤더슨 감독

# 0. 사진이 아닌 그림이고 설명이 아닌 문학이며 대화가 아닌 음악이다.        웨스 앤더슨 감독,『문라이즈 킹덤 :: Moonrise Kingdom』입니다.     # 1. 사소하다. 뉴 펜잔스 섬의 곳곳도, 카키 스카우트의 야영장도, 낡은 경찰서와 항구도, 사랑의 도피를 떠난 샘과 수지도, 그들의 탐험과 낙원도 모두 작고 사소하다. 웨스 앤더슨은 그 심각성이 사소해 보일 수 있도록 다운스케일링된 이야기를 최대한의 사랑스러움으로 가다듬어 인형의 왕국을 축조한다. 사소함을 역설하는 달뜨는 왕국에서 감독은 무엇을 찾고 싶었던 걸까. 무엇을 담고 싶었던 걸까. 세계는 안전함과 별개로 구속적이다. 바다에 둘러싸인 섬이 그러하다. 울타리에 둘러싸인 야영지가 그러하다. 스카우트의 규율과 규율을 증명하는 무..

Comedy 2025.01.30 0

정신적 보톡스 _ 백 인 액션, 세스 고든 감독

# 0. 현기증을 유발하는 보톡스 냄새        세스 고든 감독,『백 인 액션 :: Back in Action』입니다.     # 1. 당신은 마피아다. CIA 소속 비밀요원이 조직의 행사에 잠입해 중요한 키를 탈취했다. 열심히 스파이들을 뒤쫓았지만 유능한 요원들을 붙잡는 덴 역부족이다. 다행히도 보스는 스파이들이 타게 될 비행기를 포섭하는 데 성공했고, 당신에게 비행기에 올라 가방 안에 들어있을 키를 회수하라 지시한다. 명령을 받은 당신은 비행기에 탔다. 기다리던 요원들을 능숙하게 제압해 화장실에 집어넣는 데까지 성공했다. 때마침 스파이가 도착했다. 감쪽같은 변장 덕에 당신을 CIA 요원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스파이는, 한껏 방심한 상태로 대화를 나눈다. 자, 여기서 질문.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해야..

Comedy 2025.01.22 0

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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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르는 재미 _ 레이더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 0. 세상에서 제일 가슴 뛰는 영화의 어지르는 재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레이더스 :: Raiders of the Lost Ark』입니다. # 1. 첫 편의 제목은 의외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탐험가의 이름이 아니다. '잃어버린 성궤의 침입자'라는 뜻의 양심적인(?) 제목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 해리슨 포드가 협업한 영화 레이더스는 1930~40 펄프 픽션과 시리얼 필름의 문법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틀에 성공적으로 이식한 작품이라 평가된다. 복잡하고 심오한 주제의식을 파고들기보다 직관적으로 즐길 수 있는 모험과 액션, 유머, 로맨스 등을 영리하게 조합한 끝에, 위험천만한 상황들을 재치와 용기로 헤쳐나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대리만족의 쾌감을 한껏 선사한다. 물론 직관..

Action 2025.05.10 0

도이치 메트로배니아 _ 엑스테리토리얼, 크리스찬 주버트 감독

# 0. 독일 공무원 중에 가장 서윗한 척하는 더러운 콧수염 크리스찬 주버트 감독,『엑스테리토리얼 :: Exterritorial』입니다. # 1. 영사관에서 벌어진 전직 군인 엄마의 아들 실종 사건은 익숙한 스릴러의 틀 속에서 굴러가는 듯 보인다. 모성으로 무장한 강인한 여성 주인공이 폐쇄된 공간에서 지지고 볶는 동안 겸사겸사 거대한 음모까지 파헤친다는 시놉은 기시감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하지만 실제 영화를 보다 보면 의외로 액션 스릴러 장르에 대한 합의된 기대들이 반복적으로 엇나간다. 그것도 생각보다 자주 말이다. 전통적인 서사 구조로 볼 때, 인물의 갑작스러운 행동 변화나 일부 설정에서의 비약, 플롯 진행을 위해 도구적으로 활용되는 캐릭터 배치 따위는 비판의 소지가 있고, 실제로도..

Action 2025.05.04 0

나에게로의 초대 _ 아메리칸 울트라, 니마 누리자데 감독

# 0. 망가진 내게도 내일이 있을까        니마 누리자데 감독,『아메리칸 울트라 :: American Ultra』입니다.     # 1. 스파이니 울트라니 하는 것들은 본질적이지 않다. Merry me? 로 시작해 Propose 하며 끝나는 영화는, 결혼을 앞둔 커플의 달콤한 로맨틱 코미디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관계 중심적인 보편의 영화들과 달리 남자에게 균형이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 결혼할 수 있을까? 보다 '내가' 결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에 대한 영화랄까. 따라서 컬트적인 액션 코미디 아래로 달콤한 로맨틱 코미디를 흘려보내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다시 그 아래 숨겨진 성장 영화라 이해해도 무리는 없다.  도입에서 수사관은 사진을 몇 장 보여준다. 숟가락, 컵라면, ..

Action 2025.03.30 0

설산에 홀로 헐벗은 듯 _ 레버넌트,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

# 0. 실존하는 인간의 생이란 매 순간 가감 없이 선명한 것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 The Revenant』입니다.     # 1. 〖 1823년 8월, 그랜스 강 유역에서 곰에게 습격당해 살해당한 줄 알았던 아일랜드 이민자 출신 휴 글래스가 6주 동안 320km를 이동해 극적으로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입니다. 〗 당시에도 신문 같은 것이 있었다면 대충 이런 식이지 않았을까. 기사를 읽은 사람들은 적잖은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느꼈겠으나, 그럼에도 실제 경험한 이에 비하면 심드렁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것은 비단 19세기 사람들만의 무신경함이 아니다. 지금도 누군가의 비장한 사건이 두어 문장에 실리는 동안 사람들은 찰나와 같은 감상 끝에 흘려보낸다..

Action 2025.03.20 0

액션의 순정 _ 프로젝트 A, 성룡 감독

# 0. 이미 완성되어 있었던 그의 액션 미학        성룡 감독,『프로젝트 A :: Project A』입니다.     # 1. (1978), (1984), (1985), (1998) 등과 함께 액션스타 성룡을 대표하는 시리즈. 라고는 하지만 인지도가 살짝 부족한 건 사실이다. 딸기코의 소화자가 인상적이었던 취권만큼 개성적이지도 않고 폴리스 스토리나 러시 아워만큼 친숙하지도 않거니와, 일단 특유의 무심한 제목도 한 몫하지 않았을까. 여타 작품들에 비해 당대 홍콩의 지역색과 시대성이 강하게 묻어나는 작품이기도 하고 말이다. 물론 상대적으로 아쉬운 인지도와 별개로 작품성만큼은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 수많은 영화 팬들이 80년대 홍콩 액션 영화의 명작으로 꼽을 정도. 이전까지 고전적 캐릭터를 기능적으로 수..

Action 2025.03.16 0

그것도 두 번씩이나 _ 더 캐니언, 스콧 데릭슨 감독

# 0. 굳이 노력해서 더 재미없는 곳을 향해 추락한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스콧 데릭슨 감독,『더 캐니언 :: The Gorge』입니다.     # 1. 영화는 크게 세 파트로 나뉜다. 협곡 위, 협곡 아래, 다시 협곡 위다. 첫 번째 파트의 주인공은 인물이다. 두 번째 파트에서는 협곡의 실체와 관련된 설정이고, 세 번째 파트에서는 폭탄이다. 내러티브를 인간에서 설정으로, 다시 폭탄으로 추락시키면서 관객의 몰입이 다운그레이드되지 않길 바랐다면 솔직히 미련한 것이고, 애석하게도 감독은 최선을 다해 미련한 길을 내달린다. 전반부는 두 주인공을 관객에게 소개한 후 공간에 안착시키는 과정으로 점철된다. 리바이는 아무런 관계도 추억도 없어 인생의 기반이 없는 사람이다. 반복되는 ptsd는 군사 작..

Action 2025.03.06 2

흠... 그정둔가 _ 이퀼리브리엄, 커트 위머 감독

# 0. 배꼽이 큰 건지, 배가 작은 건지.        커트 위머 감독,『이퀼리브리엄 :: Equilibrium』입니다.     # 1. 망한 영화라 해야 할지 성공한 영화라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배(영화적 완성도)보다 배꼽(건 카타 액션)이 크다는 것에는 호평하는 사람과 혹평하는 사람 사이에 합의가 있는 듯 하나, 그것이 배가 지나치게 작아서인지 배꼽이 크고 뛰어나서인지는 갑론을박이 있다. 호평하는 사람들은 당시 범람하던 매트릭스의 마이너 카피와 반대되는 방향의 액션 표현을 선보인 것에 점수를 주는 모양새고, 혹평하는 사람들은 어쨌든 박약한 이야기의 완성도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작품의 주제의식은 당시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제법 낡고, 구현 역시 태만하다. 단단히 망한 근미래를 이야기..

Action 2025.01.04 0

SF &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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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카뽕에 꼬라박으면 _ 퍼시픽 림,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 0. 덕중에 덕은 양덕일지니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퍼시픽 림 :: Pacific Rim』입니다. # 1. 장편 영화 하나를 냅다 메카뽕에 꼬라박으면 어떤 결과물이 만들어질까. 퍼시픽 림이다. 진부한 스토리를 대충 방기한 채 거대 로봇 액션에 몰빵한 영화라는 것엔 호평하는 사람도 혹평하는 사람도 이견이 없겠으나, 다소 둔탁해 보이는 경험에 비해 작품의 시청각적 스펙터클의 스펙트럼은 생각보다 다채롭다. 글에선 그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해보려 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가 연출한 메카 영화의 정체성은 어쨌든 예거다. 각각의 예거는 다양성을 위한 다양성의 무작위적 수집이 아닌 대표하는 국가의 문화적 인상, 군사적 역사, 장르적 전통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기체마다 서사 안에서 맡은 바 책임을..

SF & Fantasy 2025.04.28 2

숨겨둔 카이에 대하여 _ 미키 17, 봉준호 감독

# 0. 더더욱 잔인해진 봉준호와, 숨겨둔 카이에 대하여        봉준호 감독,『미키 17 :: Mickey 17』입니다.     # 1. 본론에 앞서 유독 개인적인 견해임을 밝힌다. 어떻게 봐도 좋을 다면성은 봉준호의 가장 큰 매력이고,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수많은 관객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영화를 즐기고 있듯 말이다. 다만 그럼에도 인간에 대해 논하는 영화라 생각지는 않는다. 박찬욱이 인간을 본성을 이겨내지 못하는 가여운 짐승으로 보는 것처럼, 봉준호에게 인간이란 지배적 맥락에 종속된 나약한 장기짝에 불과하다. 그에게 인간이란 발버둥 치는 존재들의 페이소스일 뿐, 언제나 논평하는 건 개개인을 포획하는 지배적 맥락으로서의 환경과 시스템이다. 기념비적인 (2019)의 끝이 탁월함과 별개로 헛헛한 것은..

SF & Fantasy 2025.03.14 0

하책의 최대치 _ 콘스탄틴, 프란시스 로렌스 감독

# 0. 빌어먹을 악마에게 법규 날리는 한 해 보내시길        프란시스 로렌스 감독,『콘스탄틴 :: Constantine』입니다.     # 1. 상책은 근사한 세계 위로 멋들어진 이야기를 펼쳐내는 것이다. 중책은 좋은 이야기를 만들지 못했더라도 세계만큼은 매력적인 경우나, 혹은 그 역이다. 하책은 고유의 이야기도 세계도 구축하지 못한 채 설정 놀음에 빠지는 것인데, 콘스탄틴은 명백히 하책의 영화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라면 누구나 알다시피 이야기라 부를 만한 것은 없다. 전개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독할 정도로 설정 나열에 의존한다. 비장한 기독교적 주제와 기괴한 오컬트적 소재와 수려한 주인공의 미모를 끌어다 비벼보려 하지만, 본질은 그런 것들로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가라앉는 영화를 다..

SF & Fantasy 2025.01.02 0

잊음으로써 완성되는 _ 더 문, 덩컨 존스 감독

# 0. 잊음으로써 완성되는 소모되는 가장의 서글픔        덩컨 존스 감독,『더 문 :: Moon』입니다.     # 1.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처럼 가장의 삶을 은유한 휴머니즘 드라마다. 클론의 사용기간 3년은 일생을 축약하는 것으로도, 쏜살처럼 지나버린 듯한 당사자의 인식을 표현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소소한 이목을 끌었던 기지의 이름 [사랑(SARANG)]은 자신의 헌신이 사랑의 또 다른 방식이라 되뇌는 간절함이다. 그것을 굳이 생소한 한국어로 적은 건 익숙한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쑥스러움을 은유한다. 달리는 러닝머신은 지루한 일상의 반복, 같은 자리를 맴도는 무력감, 내달리고 싶은 무의식적 욕망을 두루 은유하는 친근한 메타포다.  나무로 조각한 모형은 고단함 끝에 보상이 있으리라는 기대다..

SF & Fantasy 2024.12.18 0

역부족 _ 오블리비언, 조셉 코신스키 감독

# 0. 뚜렷한 매력에도 불구하고        조셉 코신스키 감독,『오블리비언 :: Oblivion』입니다.     # 1. 스토리는 지루하고 메시지는 진부하다. 황량한 지구를 방황하는 톰 크루즈의 영화는, '비단으로 누더기를 만든 듯하다'라던 어느 평론가의 우악스러운 비아냥을 설득력 있는 것으로 만든다. 장르의 바이블과 같은 (1968)나 (1977)까지야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인간의 기억과 정체성에 대한 서사로서의 (1999)와 (1982)를 비롯해 (1996), (2005), (1990), (1968) 등 지나치게 유명한 고전 SF의 아이디어가 뭉텅이로 발견되는 경험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각각의 요소는 양적으로만 풍부할 뿐 재해석되지도 재구성되지도 못한 채 전형적인 플롯과 설정을 빌려오는 수준..

SF & Fantasy 2024.12.02 0

괜찮을 거라는 격려, 마음을 담은 헌사 _ 소스 코드, 덩컨 존스 감독

# 0. Everything is gonna be okay.Thank you for your service.        덩컨 존스 감독,『소스 코드 :: Source Code』입니다.     # 1. 10년도 더 지난 영화의 플롯을 이제와 설명하는 건 지루하다. 러틀리지 박사의 설정놀음을 걷어내고 나면, 결국 통 속의 뇌에다 죽은 사람의 기억을 접붙이기한 후 파생되는 문제들은 평행우주로 돌파했을 뿐이다. 물론 창의적이고 도발적인 발상, 스피디한 편집과 미술적 성취, 제이크 질렌할의 불안과 소명, 미셸 모나한의 사랑스러움, 백투백 홈런을 날리는 듯한 반전 카타르시스는 인정받아 마땅한 것임에 분명하지만 말이다. 다만 의외인 것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키스신에서 영화를 끝냈으면 좋았을 것이라 이야기..

SF & Fantasy 2024.08.30 0

이자나미 _ 인피니트 맨, 휴 설리번 감독

# 0. 금단의 환술을 벗어날 방법은 초콜릿과 꽃 한 송이        휴 설리번 감독,『인피니트 맨 :: The Infinite Man』입니다.     # 1. 시간과 자아의 복잡한 관계를 독특한 시각으로 탐구한 영화 은 제1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 프로그래머 추천작 중 하나다. 가난하지만 재기 발랄한 호주 감독은 황량한 들판에 놓인 폐모텔 한 채와, 독특하다는 말도 부족한 이상한 인물 셋을 동원해 난해한 시간 여행 패러독스 속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천재과학자 딘은 괴팍한 완벽주의자다. 연인 라나와의 황홀했던 기념일을 벽에 걸린 액자처럼 완벽하게 재현하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풍화된 세계는 딘의 집착을 허락하지 않는다. 완벽했어야 할 기념일이 최악의 하루로 치달아버린 것에 좌절한 딘은 ..

SF & Fantasy 2024.07.30 0

D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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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세계 _ 연희, 백해선 감독

# 0. 잔인하고 곤혹스러운 시인의 세계 백해선 감독,『연희 :: Yeon hui』입니다. # 1. 몇몇의 배우들은 삶의 특별한 순간 감정적으로 격해질 때면 습관적으로 거울을 찾는다 한다. 자신이 어떤 감정으로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비춰 기억하기 위함이다. 보통의 사람들이었다면 외면하거나 망각하고 지나쳤을 감정들. 자연인으로서 두 번 경험하고 싶지 않을 끔찍한 순간에조차 그 안에 담긴 모든 추악함까지 들여다보고 끄집어내어 새긴다는 건 마치 맨 손으로 선인장을 움켜쥐는 것만큼이나 아프고, 그래서 고단한 일이다. 어느 대학의 문예창작과 수업. 무명의 시집에 담긴 시를 베껴 교수와 동기들에게 인정받던 학생 연희의 수업에 청강생 강희가 들어오며 단편은 시작된다. 교수의 칭찬과 동기들의 부..

Drama 2025.05.14 0

간절히 평범하려는 자의 쓸쓸함 _ 시스터스 브라더스, 자크 오디아르 감독

# 0. 청산되지 않는 폭력과 부정되지 않는 희망 사이에서 자크 오디아르 감독,『시스터스 브라더스 :: The Sisters Brothers』입니다. # 1. 오랜 시간 서부극은 자신의 신화를 반복해 왔다. 광활하고 황량한 대지와 피도 눈물도 없는 무법의 시대, 이를 개척하거나 지배하려는 마초 영웅의 신화다. 시스터스 브라더스 역시 표면적으로는 익숙한 서부극의 신화를 계승하는 듯 보인다. 1850년대 오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청부 살인업자 형제의 폭력과 파멸을 정직하게 따라간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는 덴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균열의 징후는 제목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Sisters'라는 형제의 성(姓)은 영화의 방향을 조용히 비튼 과정에서 생긴 흉터다. ..

Drama 2025.04.30 2

작위 부작위의 법칙 _ 바질과 데이지, 정수진 감독

# 0. 모든 작위에 대해 크기는 같고 방향은 반대인 부작위가 존재한다. 정수진 감독,『바질과 데이지 :: Basil and Daisy』입니다. # 1. 성당 문을 빼꼼 들여다보는 오프닝은 안정적이다. 어색한 소녀는 이내 인자한 인상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풀어놓는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를 겪은 화자의 내적 성찰임을 표현하는 작품들의 익숙한 플롯이다. '오이를 붙이고 있었어요, 오이를.' 작품의 인상을 결정하게 될 첫 대사는 힘준 티가 너무 나서 어색하다. '아, 그전에 말씀을 드리면 저는 엄마랑 단 둘이 살아요, 3년 전부터. 아빠는 돌아가셨구요, 되게 오래 아프셨거든요. 그래서 준비를 했었어요, 예상했던 이별이었으니까.' 로 이어지는 도치 4연타가 어색함을 한껏 ..

Drama 2025.04.12 0

무소유 _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 소아전 감독

# 0. 소유와 교환 사이에서 필요를 깨닫는다        소아전 감독,『타이페이 카페 스토리 :: Taipei Exchanges』입니다.     # 1. 우리는 소유하며 살아간다. 자산을 가지고 능력을 가지고 경력을 가진다. 공간과 시간, 생각, 기억, 기회를 가지고, 이 모든 것들의 총체로서 이야기를 가진다. 삶은 소유의 범위를 최대한 넓혀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여긴다. 역행하는 것은 불안하다, 심지어 불행하다 평가하길 꺼리지 않는다. 교환이라는 행위가 재미있는 건 언제고 굳건해 보이는 소유하는 마음이 해체되는 몇 안 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버리는 것과는 다르다. 버린다는 것은 가치가 없음을 전제하지만 교환은 여전히 가치 있다 여김에도 필요치 않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가진 무언가를 교환하기로..

Drama 2025.04.10 0

헤어지는 중입니다 _ 휴먼 보이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 0. 예술로 사색한다는 것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휴먼 보이스 :: The Human Voice』입니다.     # 1. 폭이 넓은 붉은 드레스의 틸다 스윈튼이다. 건조한 스튜디오를 걸어 의자에 앉는다. 창백해서 더욱 미술적인 마스크 위로 강한 그림자가 떨어진다. 검은색 드레스로 갈아입은 배우는 다시 스튜디오를 가로지른다. 오프닝이다. 푸른 정장의 여자는 도끼를 산다. 영수증은 거절. 교환할 일은 없다. 볼일을 마친 여자는 키우는 개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집을 수놓고 있는 수많은 그림들을 뒤로한 채. 개는 줄지은 여행가방의 냄새를 맡는다. 여자는 4년간 사귀었던 애인과 사흘 전에 헤어졌다. 책과 앨범을 정리한 그녀는 스튜디오의 콘크리트 벽이 눈앞에 펼쳐진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운다. ..

Drama 2025.03.24 0

스코틀랜드의 횃불 _ 맥베스, 저스틴 커젤 감독

# 0. 거스를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처절한 횃불은 스스로 피고 진다        저스틴 커젤 감독,『맥베스 :: Macbeth』입니다.     # 1. 우리는 맥베스를 욕망의 화신이라 이해하고 있고, 그 욕망엔 별다른 불순한 것의 개입이 없음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욕망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어떤 면에선 지령과 달라 보이지 않는 마녀의 예언에서부터, 광기 어린 맥베스 부인의 몰아치는 추궁과 독려, 모두의 선망 위에 군림하는 던컨 왕을 향한 시기, 혈통만으로 왕위가 예정되어 버린 부조리한 말콤 왕자의 존재와, 이미 얻은 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표독스러운 집착까지. 이 모두는 맥베스가 욕망하는 분명한 이유임과 동시에 어느 것도 명징한 대답은 되지 못한다. 욕망은 어디에서 오는가...

Drama 2025.03.02 0

간음한 여인 _ 창녀와 크리스마스, 페트라 비온디나 볼프 감독

# 0.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페트라 비온디나 볼프 감독,『창녀와 크리스마스 :: Dreamland』입니다.     # 1. 크리스마스이브, 스위스 취리히에 사는 외로운 네 가족의 이야기다. 매춘부 담당의 사회복지사이지만 늦은 밤이면 애인 몰래 다른 남자들과 성관계를 가지는 주디스. 남편이 매춘했음을 알게 된 부유층의 임산부 리나. 이혼의 괴로움과 외로움을 매춘을 통해 해소하려는 롤프. 남편과 사별한 후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친구 주앙을 유혹하는 마리아. 이들 네 가족의 이야기는 모두 불가리아 출신 창녀 미아와 연관이 있다. 짐짓 근대문학의 제목 같기도 한 창녀와 크리스마스는 한국의 배급사가 지어 붙인 이름으로 원제는 드림랜드, 꿈나라다. 대부분의 ..

Drama 2025.02.04 0

Rom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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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사랑의 빛과 어둠 _ 롤라, 자크 드미 감독

# 0. 사랑은 내 시간을 기꺼이 건네주는 것이다. 작가 이기주        자크 드미 감독,『롤라 :: Lola』입니다.     # 1. 진부한 표현이지만.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것이다. 고약한 사랑은 제멋대로 나타나 제멋대로 싹트기에 어찌할 도리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처지인지, 사랑받는 사람이 어떤 처지인지에도 관심은 없다. 우연히 들린 출장지에서, 우연히 걷던 길가에서, 우연히 찾은 서점에서 만난 사람과 언제든 사랑에 빠질 수 있다. 당장 다음 출항지로 떠나야 하는 수병의 사정도, 급작스레 직장을 잃고 해외로 나가게 된 백수의 사정도, 7년씩이나 아내를 찾아올 수 없었던 남자의 사정도 아랑곳 않는다.  그때와 다른 시간에 만났더라면 우리의 사랑은 달랐을까. 그때와 다른 곳에서 시작했더라면 ..

Romance 2024.09.16 0

감독놀음 _ 은밀한 공범, 죠죠 히데오 감독

# 0. 평범한 소재로 비범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도 있지만,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내다 버리는 경우도 부지기수입니다. 죠죠 히데오 감독, 『은밀한 공범 :: 恋のいばら』입니다. # 1. 은 수입사가 지어 붙인 이름입니다. 원제는 恋のいばら. 그러니까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군요. 참고로 영어 제목은 Thorns of Beauty인데요. 이쪽이 그나마 더 직역에 가까운 번역이기는 합니다. 실제 영화의 핵심은 '가시'로 은유된 각자의 마음에 있다는 면에서, 관계 중심적인 뉘앙스가 강한 '공범'이라는 우리말 제목은 썩 정밀해 보이지는 않죠. 양가적 감정에 놓인 두 여자의 갈등을 그린 작품입니다. 원제에 긍부정이 배치되는 두 개념을 접붙여둔 이유죠. 모모는 켄타로에게 집착과 파괴를 함께 느낍니다. 수차례 복제하고 ..

Romance 2024.03.30 0

도메크의 망원경 _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 0. 마그다의 정신을 들여다보는 도메크의 망원경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 A Short Film About Love』입니다. # 1. 어지간한 변태가 아니고서야 이름 외우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생소하신 분들도 이나, 시리즈는 한 번쯤 들어보셨을 텐데요. 그 작품들 만든 동유럽 영화계를 대표하는 거장이죠. 30여 년 전, 성경의 십계를 주제로 각색 제작된 데칼로그(Dekalog)라는 폴란드 Tv시리즈가 있었는데요. 그중 6번째, 간음을 주제로 한 에피소드에 분량을 추가 개봉한 작품입니다. 관음은 작품의 핵심적인 설정입니다. 멀리는 히치콕의 이창, 가까이는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에 이르기까지 엿보기는 에로스를 다룬..

Romance 2024.03.04 0

결혼 바이럴 _ 조립, 신택수 감독

# 0. 여름밤, 부부는 완수해야 할 과제가 있다. (2019년 제23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신택수 감독, 『조립 :: assembly』입니다. # 1. 감독은 평범한 사람들의 결혼 생활이라는 것을 크게 세 가지 감정으로 규정합니다. 비좁다. 피로하다. 그럼에도 사랑한다. # 2. 창백한 도시는 피로감을 상징합니다. 멀찌감치 지나는 지하철을 내려다보는 구도로 담아 그들의 삶을 작고 소소한 것으로 연출합니다. 지하철에서 내려 트인 공간을 걷는 장면은 의식적으로 생략됩니다. 곧장 엘리베이터라는 좁은 공간에 인물을 집어넣고 그마저도 구석에 몰아 고립시킵니다. 인물을 거울에 반사시켜 안 그래도 좁은 공간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들어차 있는 듯한 착시를 일으킵니다. 지쳐 고개를 숙이는 순간 거울 너머 함께 고..

Romance 2023.12.14 0

푸른 밤의 사색 _ 여섯 개의 밤, 최창환 감독

# 0. 모든 여행은 여행자가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목적지가 있다. 최창환 감독, 『여섯 개의 밤 :: The Layover』입니다. # 1. 오스트리아 철학자 마틴 부버의 글귀와 함께 시작됩니다. 해당 글귀를 인용함은,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여행자로 규정한다는 의미임과 동시에, 작품을 통해 탐구하고자 하는 바가 눈에 드러나는 목표가 아닌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목적지'라는 것에 있음을 의미하는 거겠죠. 알 수 없다는 것은 통제 불가능한 불확실성을 의미할 텐데요. 예측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개인의 나약함으로도, 계획 밖의 영역에 대한 가능성과 풍요로움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영화가 탐구하려는 목적지란 것이 문자 그대로의 장소라거나 성취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타인과 함께 하는 ..

Romance 2023.11.12 0

헤어진 그녀와의 인터뷰 _ 선우와 익준, 양익준 감독

# 0. 찰나의 감정마저 이토록 두터운데 양익준 감독, 『선우와 익준 :: Sunwoo and Ikjune』입니다. # 1. 선우와 익준은 함께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자, 9년을 만난 연인입니다. 두 사람은 익숙함과 별개로 지나온 긴 시간만큼의 차이를 가지고 있고, 이는 오프닝에서부터 시선, 표정, 자세, 동선, 걸음의 속도, 배경 등 다양한 표현을 통해 부드럽게 은유됩니다. 오늘은 여자 수인이 남자 재석에게 이별을 고하는 신을 촬영하는 날. 두 사람은 완만한 오르막을 무겁게 걸으며 잠시 후 있을 촬영에 대해 논의합니다. 선우는 헤어지자 말하는 여자 수인을 두둔합니다. 익준은 그런 수인의 잔인함을 지적합니다. 촬영이 진행되고 감독 선우는 배우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요. 수인 역의 진서는 되려 수인이 비겁한 ..

Romance 2023.10.10 2

그녀의 고백 _ 흐르는 대로, 치쿠마 야스토모 감독

# 0. 숨겨뒀던 책갈피를 꺼내다.        치쿠마 야스토모 감독,『흐르는 대로 :: の方へ、流れる』입니다.     # 1. 오프닝입니다. 흔들리는 버스 손잡이에 간신히 매달린 손은 연약함과 위태로움 따위를 은유합니다. 창밖으로 지나치는 풍경은 거대한 흐름을 의미합니다. 무엇이 지나간 건지 모를 정도의 빠른 속도와, 흘러가는 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던 수동성입니다. 이내 여자의 뒷모습이 카메라에 담깁니다. 뒷모습은 숨겨뒀던 솔직한 마음일 수도, 혹은 뒤돌아 서있게 만드는 부끄러운 치부일 수도 있을 겁니다. 여자 옆에 한 남자가 섭니다. 여자는 어깨너머로 책을 훔쳐봅니다. 두터운 책의 두께는 사연의 깊이, 몰래 훔쳐보는 것에서는 느슨한 호기심이 발견됩니다. 책갈피입니다. 흘러가던 흐름을 잘라 멈춰 세우..

Romance 2023.09.2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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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 최강자 _ 천공의 성 라퓨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 0. 세게관 속 최강자 말고 세계관 만들기 최강자라는 뜻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천공의 성 라퓨타 :: 天空の城 ラピュタ』입니다.     # 1. 을 극장에서 봤던 순간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난쟁이 둘의 눈물겨운 장거리 하이킹, 대단한 걸로 대단한 절대 반지의 존재감, 둘이어도 넷이어도 안될 것만 같은 삼총사의 우정, 스텟을 잘못 찍은 게 분명한 힘법사 간달프와, 뜻하지 않게 작품의 마스코트가 되어버린 골룸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소년의 눈망울을 반짝이게 하는 즐거움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가장 매력적인 건 톨킨에 의해 창조된 세계 그 자체다. 평화로운 호비튼의 언덕에서부터 황량한 운명의 산에 이르기까지. 음습한 팡고른 숲에서부터 폭압적인 아이센가드 탑에 이르기까지. 배수진..

Animation 2025.02.22 2

경이로운 세계 _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 0. 大丈夫、怖くな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바람계곡의 나우시카 :: 風の谷の ナウシカ』입니다.     # 1. 온종일 비행하듯 자유롭지만, 마스크 없인 숨 쉴 수 없을 정도로 구속적이다. 붉은 눈의 오무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공포, 푸른 눈의 오무는 숲을 지키는 수호자다. 압도적인 곤충은 두렵지만, 가볍고 튼튼한 허물은 요긴한 것이기도 하다. 독을 내뿜는 숲은 스스로를 희생해 땅을 정화하고, 인간은 자신의 죄악을 대신 갚는 줄도 모른 체 숲을 증오하며 불태운다. 평화로운 구름 속엔 매서운 번개가 몰아친다. 바람은 포자를 실어 나르는 무서운 것임과 동시에 막아내는 고결한 것이다. 문명은 풍요의 이유이자 멸망의 이유다. 쌍둥이 여동생을 거둔 줄도 모르고 나우시카를 공격하던 아스벨은 이내 ..

Animation 2025.02.18 0

점, 선, 면 _ 모노노케 우중망령, 나카무라 켄지 감독

# 0. 차원을 뛰어넘어 메마른 마음에 닿기를        나카무라 켄지 감독,『모노노케 우중망령 :: モノノ怪 唐傘』입니다.     # 1. 일본식 전통 화지(和紙) 텍스쳐는 관객을 에도 시대 두루마리 속으로 초대한다. 동시에 적절한 CGI를 활용, 현대적인 개성을 함께 도모하고 있기도 하다. 축제 날짜가 다가올 때마다 미닫이가 닫혔다 열리는 건 대표적이다. 시퀀스를 구분하기 위함도 있겠으나, 극 안에서 밖으로 관객을 밀어냈다 넣었다를 반복해 운동성을 환기하기 위함이다. 이차원적인 작화와 삼차원적인 운동의 결합뿐 아니라 전통적인 질감과 현대적인 표현의 결합 역시 고유의 미감에 기여한다. 배경이 되는 오오쿠의 카리스마와, 오오쿠를 집어삼키는 모노노케의 카리스마, 모노노케를 퇴치하는 약장수의 카리스마, 작..

Animation 2024.12.14 0

경이로운 순간 _ 와일드 로봇, 크리스 샌더스 감독

# 0. 올해 가장 기억에 남을 순간 중 하나가 아닐까.        크리스 샌더스 감독,『와일드 로봇 :: The Wild Robot』입니다.     # 1. 언젠가부터 영화에 완벽이란 말을 붙이는 걸 꺼려함에도, 숨겨지지 않는 사랑과 재채기처럼 찬사를 가릴 도리가 없다. 올라가는 앤딩 크레디트를 보며 확신한다. 좋은 영화를 많이 본 한 해지만 올해의 애니메이션은 이 작품, 와일드 로봇이다.  특별히 모자라거나 과한 바 없는 영화는 완벽이란 평가가 민망하지 않을 정도로 탁월하다. 드림웍스 최고작이란 평가엔 이견의 여지조차 없고, 적당한 시간이 흘러 2020년대에는 어떤 영화들이 만들어졌는가 물었을 때 그 대답 중 하나에 들어가더라도 부족함이 없다. 그때의 인류는 어떤 시점에서 어떤 생각과 어떤 고민 끝..

Animation 2024.11.06 0

죽음에 관하여 _ 피노키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 0. 고르는 것과 남겨진 것으로 말하는 유한한 생명에 대하여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피노키오 :: Pinocchio』입니다. # 1. 다정한 부자의 이야기는 아들 카를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시작한다. 제페토의 소나무는 카를로의 죽음 위에 피어난 존재고, 피노키오는 다시 그 소나무를 베어 쓰러트린 죽음에서 태어난 존재다. 이후로도 누구와 만나 무슨 일을 겪는가와 별개로 단계마다 피노키오는 죽었다 살아나길 반복한다. 죽지 않는 피노키오가 그럼에도 죽음을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제페토를 죽음으로부터 구하기 위해서다. 생동감 넘치는 애니메이션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에 관한 영화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가 인간이 됨은 돋아난 새살이 아닌 오직 '죽음'으로서 증명된다. 귀뚜라..

Animation 2024.10.12 0

뚜찌빠찌뽀찌 _ 미니언즈, 카일 볼다 / 피에르 코팽 감독

# 0. 몰리카노~ 마케라로젠보~보케라도빠찌~~~~~~ 오페라도비~~마~~ 키~~~~~~        카일 볼다 / 피에르 코팽 감독,『미니언즈 :: Minions』입니다.     # 1. 자원과 기술이 흘러넘치는 시대에,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굳이, 억지로 일부러 아득바득 흑백 영화를 만든다면 만든 놈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미친놈일 가능성이 높다. 시간을 쓰는 사랑과 기다림의 의의, 죄책감과 남성성의 프로이트적 분석을 그린 영화를 두 편 연속 보고 나면,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쉬어갈 필요가 생긴다.  자크 드미와 로버트 에거스의 연타로 인한 심신 미약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선 적절한 처방이 필요했고, 그럴 때면 다 때려죽이는 액션 혹은 귀염뽀짝 애니메이션이 딱이다. 오늘의 알약은 D..

Animation 2024.09.22 0

꿈과 광기의 세계 _ 영화 너무 좋아 폼포 씨, 히라오 타카유키 감독

# 0. ようこそ。夢と狂気の世界へ。        히라오 타카유키 감독,『영화 너무 좋아 폼포 씨 :: Pompo, The Cinephile』입니다.     # 1. 제목처럼 진솔한 영화는 말랑말랑한 표현과 달리 영화 제작의 세계를 진지하게 묘사한다. 우연히 기회를 얻은 젊은 영화인의 이야기 이면엔, 예술과 상업의 균형, 이상과 현실의 조율, 협업과 성장의 가치 등이 폭넓게 다뤄진다. 영화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작품은 비단 영화뿐 아니라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통용될 선량한 응원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작품이 정의하는 영화를 만들고 보는 행위의 의의로 환원된다. 폼포는 '날'리우드가 주목하는 천재 프로듀서다. 그녀는 예리한 직관과 산업에 대한 통찰을 가진 인물로, 진과 진의 눈을 빌린 관객들로 하여금 상업..

Animation 2024.09.06 2

Documen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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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트 베이시스트 _ 온리 걸 인 더 오케스트라, 몰리 오브라이언 감독

# 0. Don’t ask me... I’m just the bass player.        몰리 오브라이언 감독,『온리 걸 인 더 오케스트라 :: The Only Girl in the Orchestra』입니다.     # 1.  내가 오린을 사랑하는 건 오케스트라에서 빛을 내뿜기 때문이다. 오린은 음악에 전적으로 몰입하며 그쪽을 바라볼 때마다 오린도 항상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경이로운 집중력이다. 비결이 뭘까? 우리가 연주하는 모든 곡의 베이스 파트 음을 전부 외웠나? 그건 기적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일이다. -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1918-1990). 전설적인 음악가에게 기적이란 찬사를 받은 사람은 오린 오브라이언. 1966년 뉴욕 필하모닉 정규 단원으로 고용된..

Humanism 2025.03.10 0

밥 짓는 밤 _ 밥정, 박혜령 감독

# 0. 밥 한끼에 추억과밥 한끼에 사랑과밥 한끼에 쓸쓸함과밥 한끼에 동경과밥 한끼에 시와밥 한끼에 어머니, 어머니,        박혜령 감독,『밥정 :: The Wandering Chef』입니다.     # 1. 식사는 놀랄 만큼의 고봉밥과 짭조름한 반찬 몇 가지다. 간식은 쌀알을 튀긴 것이나 밥을 쪄서 치댄 것이고, 마실 것은 밥을 엿기름에 삭힌 것, 술은 누룩에 삭힌 것을 먹었으니 밥심으로 살아낸 사람들이라 해도 무리는 없다. 검은색 옷을 즐겨 입는 요즘 사람들을 보노라면 백의(白衣)의 민족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백반(白飯)의 민족이라는 흔적은 여전히 굳건하다. 반가운 첫인사는 밥 먹었냐는 것이고, 아쉬운 끝인사는 언제 밥 같이 먹자 말하는 사람들의 나라. 끔찍한 범죄 용의자에게 건네는 원망의 한마..

Humanism 2025.02.12 0

망각된 순간의 시간들 _ 군다, 빅토르 코사코프스키 감독

# 0. 순간의 가축을 누리기 위해 망각하고 있었던 시간 속 동물들        빅토르 코사코프스키 감독,『군다 :: Gunda』입니다.     # 1. 노르웨이의 한 농장에서 태어난 암퇘지와 새끼돼지, 한쪽 다리가 없는 닭, 건장한 소 몇 마리는 작품에 등장하는 전부로, 90분의 런타임을 동물들에 대한 애정에 정직하게 할애한다. 폭압적으로 단순화되어 버린 존재들의 외면하고 있던 복잡성에 대한 성실하고 끈질긴 조우가 평화롭게 그려진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개성적 미학이 돋보이는 작품에서, 가축은 소비되기 위한 상품으로 재해석되기 이전의 자율적 존재로 회귀한다. 전향적인 생태주의 실천가로 알려진 호아킨 피닉스가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한 것처럼 목적은 명확하다. 복종적이고 도구적인 가치로만 치부되던..

Social 2025.02.02 0

짓궂은 우연 _ 마리우폴에서의 20일, 므스티슬라우 체르노우 감독

# 0. 여기 독재자가 있다.        므스티슬라우 체르노우 감독,『마리우폴에서의 20일 :: 20 Days in Mariupol』입니다.     # 1. 한때나마 유능하고 마초적인 모습으로 어필했던 그는 총기를 잃은 지 오래다. 독재자는 편협하고 극단적이며 반복적이고 농축적인 정보만을 탐닉한다. 내뱉는 어휘와 행동들은 이미 정상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 있다. 몇몇의 담화나 전언에서 확인되는 세계에 대한 인식은 망가져도 단단히 망가져 있다. 암약하는 악을 처단해 민족을 지키는 것을 자신의 사명이라 주장하지만, 동의하는 사람은 전체주의에 대한 황망한 향수를 가진 몇몇의 노년층 극단주의자들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의 존재야 말로 민족의 안녕을 위협하는 가장 치명적인 악이다. 주변에는 직언할 사람 없이..

Historical 2024.12.06 0

한겨울에도 듣는 _ 한여름밤의 재즈, 아람 아바키안 / 버트 스턴 감독

# 0. 한여름에만 듣기엔 너무나 아까운 1958년의 노스탤지어        아람 아바키안 / 버트 스턴 감독,『한여름밤의 재즈 :: Jazz on a Summer's Day』입니다.     # 1. 1958년 로드아일랜드 뉴포트에서 열린 재즈 페스티벌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이듬해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첫 상영된 이후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작품은, 1999년 미국 의회도서관에 의해 국립영화등록소 보존 대상으로 선정된다. 한국에서는 배급사 찬란에 의해 수입되어 2022년 개봉한다. 덕분에 우리 관객들도 리마스터링 된 귀한 자료를 즐길 수 있었다. 정직한 공연 실황에는 한여름 선선한 밤공기 같은 재즈의 매력이 가득하다. 무대와 이미지에 최대한 집중한 작품은, 관객을 시간과 공간을 넘어 페스티벌의 참여자로..

Art 2024.11.30 0

낙원의 비명 _ 그날, 패러다이스, 드레아 쿠퍼 / 재커리 카네파리 감독

# 0. 검붉은 화마에 집어삼켜진 낙원의 비명        드레아 쿠퍼 / 재커리 카네파리 감독,『그날, 패러다이스 :: Fire in Paradise』입니다.     # 1. 2018년 11월.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 패러다이스(Paradise)에서 벌어진 대규모 산불재해의 기록이다. 이른 아침의 산불은 캘리포니아 역사상 가장 큰 산불 중 하나로 꼽힌다. 늦가을의 건조한 기후와 강풍에 맞물려 빠르게 번져나간 불길은 당국의 통제를 벗어나 삽시간에 도시를 전소시켰고, 수많은 사람들이 대피하는 가운데 상당 숫자의 인명 피해를 야기했다.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 화마의 이름이 캠프파이어라는 아이러니와, 참극이 벌어진 도시의 이름이 패러다이스라는 아이러니는 무자비한 자연 앞에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

Social 2024.10.30 0

거미와 아기새 _ 베나지르를 위한 세 개의 노래, 엘리자베스 미르자에이 감독

# 0. 뭐라도 해 봐야지. 쟤네들은 왜 저렇게 사는 거야?        엘리자베스 미르자에이 / 굴리스탄 미르자에이 감독,『베나지르를 위한 세 개의 노래 :: Three Songs for Benazir』입니다.     # 1. 체념의 미로 속에서 길 잃은 거미다. 좌절의 철장에 갇힌 아기새다. 하늘을 부유하는 감시선은 당사자에겐 고압적인 현실, 관찰자에겐 무신경한 타인이다. 뭐라도 해 봐야지. 쟤네들은 왜 저렇게 사는 거야?라는 속 편한 이야기를 잔혹한 현실을 지켜본 카메라가 물리치는 덴 긴 시간이 필요치 않다. 아프가니스탄 카불, 전쟁 피난민 캠프의 샤이스타와 베나지르는 사랑의 결실을 품은 다정한 신혼이다. 흙벽돌을 만들어 파는 청년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국군에 지원하려 하지만 녹록지 ..

Historical 2024.09.14 0

Se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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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거나 혹은 미치거나 _ 어메이징 디지털 서커스, 구스웍스 감독

# 0. 글리치 프로덕션(Glitch Productions)을 아시나요?        구스웍스 감독,『어메이징 디지털 서커스 :: The Amazing Digital Circus』입니다.     # 1. 닐 블룸캠프의 오츠 스튜디오 이후 오랜만에 스튜디오 소개글이다. 물론 하꼬 블로거 따위가 '소개'하기엔 지나치게 월클이지만 말이다.  글리치 프로덕션(Glitch Productions)은 다채롭고 개성적인 디자인, 매콤한 블랙 코미디, 재기 발랄한 스토리로 미래지향적인 가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호주 국적의 인디 애니메이션 제작사다. 초기작 (2019)와 (2021) 이후, 미국의 애니메이터 리암 빅커스(Liam Vickers)가 총괄로 합류한 (2021)으로 도약한 글리치는, 작년 또 다른 애니메이터 쿠퍼..

Animation 2024.06.28 0

하우프루빗 _ 포커페이스, 라이언 존슨 / 나타샤 리온 감독

# 0. 누가 범인인가 (who done it?)의 미스터리를 대신하는 어떻게 범인을 밝힐 것인가 (how prove it?)의 서스펜스 라이언 존슨 / 나타샤 리온 감독, 『포커페이스 :: Poker Face』입니다. # 1. 을 본 사람치고 니키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오뉴블을 제법 재미있게 본 저 역시 나타샤 리온은 썩 좋아하는 배우입니다. 여유롭고 정겹고 온화하면서 동시에 세상에서 서너 발짝 떨어진 듯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특유의 톤이 매력적인 배우죠. 등장하는 모든 장면을 장르물로 만들어버리는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헤어스타일과 허스키한 목소리도 멋지구요. 다만 그녀의 캐스팅만을 근거로 작품을 고르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닙니다. 선구안이 좋은 배우는 못 되거든요. 시리즈를 크게 기대했던..

Mystery & Thriller 2023.08.04 0

사이다의 성분 _ 피지컬 100, 사이렌 불의 섬

# 0. 왜 재미있는 거지? 넷플릭스 버라이어티 시리즈, 『피지컬 100, 사이렌 불의 섬』입니다. # 1. 그놈의 K-타령을 썩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일부의 호들갑이 나름 이해가 갈 정도로 영상 콘텐츠들의 글로벌 시장 확대가 두드러진 근년이긴 했습니다. 이젠 이야기하는 것조차 지치는 기생충을 비롯한 수많은 영화들 뿐 아니라, 킹덤에서 시작해 오징어 게임의 메가히트로까지 이어진 웰메이드 드라마 시리즈,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권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가벼운 로맨스 드라마들도 꾸준히 나오고 있는데요. 최근엔 예능까지 주목받는 듯한 양상이죠. 최근 BTS의 뷔를 섭외해 해외 시장에 도전 의지를 비친 바 있는 나영석 PD의 서진이네는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다 해야 할 겁니다. 그중에는 개인적으로도 흥미로웠던,..

Action 2023.06.06 0

엄숙주의의 울타리 너머 _ 컹크의 색다른 지구 이야기

# 0. 엄숙주의의 울타리를 호쾌하게 넘는 코미디의 힘 넷플릭스 모큐멘터리 『컹크의 색다른 지구 이야기 :: Cunk on Earth』입니다. # 1. 인류의 문명사를 2시간 30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앙상하게 핥아내는 모큐멘터리입니다. 문명 발생에서 시작해 종교, 문화, 근대화를 지나 세계 대전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을 유럽인의, 보다 정확히는 영국인의 관점에서 편협하게 전개됩니다만 뭐 어쩔 수 없는 거겠죠. 지들이 만든 거니까요. 처음엔 필로미나 컹크(Philomena Cunk)가 뭔가 싶었는데요. 코미디언 '다이앤 모건'의 부캐였더라구요. 얼핏 보고선 아이티 크라우드의 캐서린 파킨슨인 줄 알고 살짝 반가웠습니다만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고선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찾아봤더니 컹크라는 부케로 ..

Comedy 2023.02.08 0

근본으로의 회귀 _ 러브, 데스, +로봇 시즌 3

# 0. 회초리의 효과는 굉장했다!! 애니메이션 앤솔로지 『러브, 데스 + 로봇 시즌 3 :: Love, Death + Robots Vol. 3』입니다. # 1. 어울리지 않게 15세로 간을 봤던 지난 시즌은 결국 혹평으로 마무리되고 말았습니다. ⑴ 스타일리시한 화풍과 다이내믹한 액션으로 빚어낸 뛰어난 영상미. ⑵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아이템을 과감하게 동원하는 참신한 서사. ⑶ 허무와 냉소를 테마로 한 철학적 주제의식이라는 세 축이 모조리 흔들리며 죽도 밥도 아닌 시즌이 되고 말았다 말씀드린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군요. 로튼 50%가 무너지며 회초리를 세게 맞은 효과가 굉장했나 봅니다. 전 시즌에 훼손된 평판을 복구하려는 듯 첫 번째 시즌에서 호평받았던 장점들을 노골적으로 답습합니다. 특히 호러와 액션 묘..

Animation 2022.05.26 2

수집형 RPG _ 퓨어 시즌 1, 채널 4 제작

# 0. 선명한 아이템이 있다. 선명한 아이템만 있다. 채널 4 드라마, 『퓨어 :: PURE』입니다. # 1. 선명한 아이템이 있습니다. 성 강박장애를 다룬 드라마군요. 일상에서 실시간으로 소집되는 정보를 최대한 자극적인 형태의 성적 메시지로 재구성해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되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단순히 '저 사람과의 잠자리는 어떨까?' 라는 정도의 수위는 아득히 넘어섭니다. 대상에 대한 분별 능력 역시 전혀 작동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춘기 즈음을 지나며 거치게 되는, 자신이 가진 성적 지향성을 구분하고 해석하고 정의하는 일체의 작업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관객에게 시리즈를 소개하는 첫 번째 화의 첫 번째 시퀀스로, 기념일을 맞은 부모가 자신 혹은 타인과 변태적 성애를 나누는 상상을 연..

Drama 2021.09.17 0

참 쉽죠? _ 밥 로스의 그림을 그립시다

# 0. 전설의 레전드가 왓챠에 올라왔군요. PBS 예술 교양 프로그램 시리즈, 『밥 로스의 그림을 그립시다 :: The Joy of Painting』입니다. # 1. 문득 반갑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리 큰 기대를 하진 않는 듯한 미묘한 태도로 1화를 보기 시작합니다. 두어 편 보다 말겠지 생각했는데요. 어디 보자...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서브 모니터에 16화 이 흘러나오고 있군요. 언제 잠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부드럽고 차분한 김세한 성우의 목소리, 뾰족한 산과 침엽수와 호수의 무한복제가 만들어 내는 시간이 멈춘듯한 목가적 이미지, VHS 비디오 대여점이 주름잡던 시절의 그것과 같은 낡은 화질, 그리고 한없이 따뜻하고 선량한 메시지입니다만 재미있어요. 이걸 내가 왜 재미있어하고 있는지 모르겠..

Art 2021.08.26 0

Bla-b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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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위기에 봉착한 스타 사업가의 오너리스크

# 0. 알려주고 도와주는 캐릭터에서 지적하고 평가하는 캐릭터로        『캐릭터 위기에 봉착한 스타 사업가의 오너리스크』     # 1. 연일 부정적 기사가 이어진다.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언론의 상투적 비방이라기엔 커뮤니티의 반응도 유튜브 댓글의 반응도 심상치 않다. 사업가 겸 방송인 백종원 씨다. 영화를 즐기다 보니 인간사 내러티브의 측면에서 보는 못된 관성이 있는 데 이번엔 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백종원의 인지도는 과 함께 시작되었다 해도 틀리지 않다. 초기의 백종원은 철저하게 '알려주고 도와주는 캐릭터'로 기억한다. 가난한 연인들에게 깻잎으로 모히또를 만드는 법을 알려주는 사람이었고, 자취생에게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 만드는 법을 알려주는 사람이었으며, 한 푼..

Bla-bla-bla 2025.02.06 2

갈등을 배우지 못해서

# 0. 한국인에게 당할 줄 몰랐다.        『갈등을 배우지 못해서』     # 1. 가 연일 화제다. 이후 오랜만에 만나게 된 요리 예능은 필자 역시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20명의 스타셰프와 80명의 은둔고수가 뒤엉켜 자웅을 겨룬다는 콘셉트의 버라이어티 쇼는 걸출한 캐스팅, 컬트적 캐릭터, 각각의 드라마에 힘입어 폭발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다만 1차 공개분(1회~4회)까지만 하더라도 호평 일색이었던 것과 달리 점점 비판도 늘어가는 듯한 모양새다. 2차 공개분(5회~7회)의 팀전에서 드러난 다소의 혼란을 지나, 3차 공개분(8회~10회)의 장사 미션룰은 인간성을 기망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크게 받고 있는 데, 불쾌감을 표하는 사람들의 지적은 개인적으로도 무리 없이 동의하게 된다...

Bla-bla-bla 2024.10.04 0

천사의 속삭임

# 0.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울어라, 영화관 혼자 울 것이다.        『천사의 속삭임』     # 1. 배우 최민식은 손석희와의 인터뷰에서 특유의 소탈한 말투로 나라도 티켓값이 부담스럽겠다 말한다. 녹록지 않은 관객의 주머니 사정을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그럼에도 만드는 이들이 작가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지적하는 모습은 많은 이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평론가 이동진은 을 비평해 달라는 팬들의 짓궂은 농담에 살려달라는 유머러스한 답변을 남겼다. 충성도 높은 수많은 어린이 관객들과 컬트적 현상에 호기심을 느낀 몇몇의 일반 관객층에 힘입어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도전하는 하츄핑에 대한 영화팬들의 반응은 유쾌하면서 일견 자조적이다. 얼핏 무관해 보이는 두 사건은 결국 영화계의 위기를 접..

Bla-bla-bla 2024.08.22 0

20세기 소년의 회상

# 0. 2024년 3월 1일. 조산명(鳥山 明) 선생이 향년 68세의 일기로 타계하셨습니다. 『20세기 소년의 회상』 # 1. 그날따라 유난히 낯설게 느껴지는 서재. 먼지 소복한 귀퉁이에서 묵혀지고 있던 드래곤볼을 담담히 읽어나갔죠. 인이 박힐 정도로 많이도 봤던 익숙한 그림체와 익숙한 캐릭터와 익숙한 대사들은 책을 읽는 건지 책 위를 미끄러지는 건지 모를 정도로 책장을 넘기게 만듭니다. 둔하게 읽으리라는 다짐이 무색하게도 한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야속한 42권의 마지막 장을 덮었는데요.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양반의 비보임에도 많은 분들이 소감 하시듯 참 헛헛하더군요. 문화의 본질이란 결국 연결인 걸까요. 그러고 보면 영화 개봉을 겸해 다시 읽은 슬램덩크도 얼마 전이었던 것 같은데요. 그것도 작년 1월..

Bla-bla-bla 2024.03.26 0

야만의 세월, 도마 위에 오른다는 것

# 0. 배우 이선균 씨가 향년 4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야만의 세월, 도마 위에 오른다는 것』 # 1. 이원석 감독의 를 이야기하며 연기 정말 잘한다 감탄했었는데요. 그것이 마지막 코멘트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이제와 구태여 사건의 추이를 값싸게 나열할 생각은 없습니다. 고인의 사생활에 대해 가타부타 윤리적 가치판단을 한다거나, 수사도 종결된 마당에 혐의와 관련된 가치판단을 할 생각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저 쓸쓸한 마지막에 '헛헛하니 아쉽다' 정도의 끝인사를 놓아두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사실 보름 전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글을 쓸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것이 소위 어그로를 끌어 검색량을 늘리기에는 나았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약간의 텀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

Bla-bla-bla 2024.01.06 0

빼앗긴 호러에도 여름은 오는가

# 0.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텐트폴까지는 고사하더라도 어째 호러가 한편도 없네? 『빼앗긴 호러에도 여름은 오는가』 # 1. 2023 여름 텐트폴은 류승완 감독의 밀수, 김성훈 감독의 비공식작전, 김용화 감독의 더 문,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입니다. 티켓값이 만만찮은 요즘인 데요. 없는 살림에 전부 극장에서 봤다는 것이 내심 스스로 대견스럽군요. 티켓값에 반비례한 관객의 인내심이 점점 낮아지는 탓에 스코어는 더 엄격하고 냉정해지는 듯합니다. 밀수와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제 예상보다 조금 더 선전하는 것 같구요, 비공식작전과 더 문은 손익분기점을 크게 밑도는 모양새인데요. 갈수록 흥행 성적과 작품성의 괴리가 좁혀지는 듯한 느낌도 있군요. 밀수와 비공식작전은 공통적으로 충무로 특유의 안전제일..

Bla-bla-bla 2023.08.28 0

도박을 포기한 관객들과 다음 영화의 풍경

# 0. 개별 작품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지 조금 넓은 영역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가급적 블로그에 이런 류의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는데요. 그래도 새로운 영화가 제작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은 팬에게도 뼈 아프다는 점에서 한 번쯤 고민하고 넘어가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했습니다. 유럽 영화, 아시아 영화, 중동 영화, 남미 영화. 온갖 영화 다 보는 터라 자막에 크게 거리낄 것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기왕이면 자막 없는 영화가 보기 편한 것이 당연합니다. 기왕이면 우리 정서를 배경으로 한 우리말 나오는 우리 영화가 좋은 건 인지상정이죠. 『도박을 포기한 관객들과 다음 영화의 풍경』 # 1. 한국 영화의 침체를 놓고 다양한 진단들이 나오는 듯 보입니다. 관객은 소비자의 입장에서,..

Bla-bla-bla 2023.04.18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