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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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개봉 63

언어의 여백 _ 폴라로이드 일기, 김채윤 감독

# 0. 언어로는 온전히 채울 수 없는 삶의 흔적들을 탐구하는 여정 김채윤 감독, 『폴라로이드 일기 :: Polaroid Diary』입니다. # 1. '일기'는 일상적이고 회고적인 뉘앙스만을 전담하는 일종의 그릇이라 보는 게 맞을 겁니다. 핵심은 그런 일기를 형용하는 '폴라로이드'죠. 폴라로이드는 회사명임에도 불구하고 즉석 사진을 뜻하는 보통 명사로 쓰이는 것이 일반적인데요. 이 작품에서의 쓰임 역시 그러하다 해야 할 겁니다. 사진은 순간순간의 단편적 장면들이 파편화되어 있는 상황을 건조하게 의미합니다. 구태여 '즉석' 사진이라 설정한 것은, 영화가 활용하려는 사진이라는 개념에 불필요한 예술성 따위를 배제하고 현장감과 생활감, 즉시성 따위만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이해할 수 있겠죠. 영화는 가정 폭력이라는 ..

Film/Drama 2023.09.04

학생출입금지 _ 착한 사람은 거짓말 하지 않는다, 조중건 감독

# 0. 그때의 나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었을까. 조중건 감독, 『착한 사람은 거짓말하지 않는다』입니다. # 1. 애매합니다. 이야기는 분노를 일정하게 독려하는 방향으로만 흘러갑니다. 메시지는 제목의 역설에 과도하게 집착합니다. 인물 구도는 도식적이고, 선악 관계는 이분법적입니다. 감상의 대부분이 각자의 '어떤 선생'을 떠올리며 성토하거나, 혹은 교사를 이런 식으로 싸잡아 매도하지 말라 두둔하거나의 이지선다라면 분명 문제가 없다 할 순 없는 거겠죠. 영화를 보는 동안 작품 자체의 내러티브보다, 씨발... 그 새끼 아직 잘 살까?라는 식의 PTSD가 더 크게 느껴진다는 건 관객에게도 감독에게도 서글픈 일임에 분명합니다. 다양한 층위의 다양한 요소들이 동원됨에도 그래서 이 영화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

Film/Drama 2023.07.30

질문이 아니라 협박이죠 _ 다우팅 토마스, 윌 맥파든 감독

# 0. 물론 의심한다면 너는 인종차별자가 된다는 것만 알아둬. 윌 맥파든 감독, 『다우팅 토마스 :: Doubting Thomas』입니다. # 1. 뼈대만 덩그러니 있는 듯한 영화입니다. 백인 부모 아래 태어난 흑인 아기라는 설정과 인종차별 메시지 정도를 제외하면 의미 있는 정보를 거의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죠. 영화의 전개란 시나리오 단계에서 설정된 인물 관계의 내막을 주인공 등이 순차적으로 제공받는 과정으로 점철됩니다. 그로 인한 갈등이나 변화, 고민, 선택 따위는 사실상 전무해 대부분의 인물들은 내내 제자리에 멈춰있는 것과 다를 바 없죠. 서사가 존재하지 않으니 플롯이라 부를 만한 것도 없구요. 장르적 효과도 당연히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작품의 목적이 네가 톰이라면 어떤 ..

Film/Drama 2022.10.26

애프터 디어 _ 야생동물병원 24시, 다넬 엘펠레그 / 우리엘 시나이 감독

# 0. Dedicated caretaker of people and wildlife. He spread light to all despite his own suffering. 다넬 엘펠레그 / 우리엘 시나이 감독, 『야생동물병원 24시 :: Pere』입니다. # 1. 이스라엘의 야생동물병원입니다. 우리말 제목의 '24시'라는 말처럼 낮도 밤도 따로 없습니다. 사슴에서 하이에나까지, 오리부터 펠리컨까지 가리는 동물도 없습니다. 수많은 동물들이 도움을 받지만 대부분은 생사의 경계에 있습니다. 다수의 의료진 가운데 수의사 아리엘라와, 수석 간호 책임자 슈멀릭을 중심으로 다큐멘터리는 흘러갑니다. 안타깝게도 개봉되기 직전 슈멀릭 씨가 급작스레 사망했다 하는데요. 때문에 슈멀릭에게 바친다라는 애도의 말과 함께 작..

소녀는 개의치 않았다 _ 프로방스, 카토 드 뵈크 감독

# 0. 소녀와 소년입니다. 푸르른 녹음, 맑은 물, 웃음소리, 선명한 색감, 밝게 부서지는 빛 따위는 공통적으로 순수성을 상징합니다. 아이들은 천천히 관객의 방향으로 다가옵니다. 더디지만 신중하게 커 나갑니다. 성장을 이야기하는 영화들의 정석적인 오프닝이죠. '카토 드 뵈크' 감독, 『프로방스 :: Provence』입니다. # 1. 여름방학, 11살 소녀 카미유와 오빠 투르는 가족과 함께 프로방스에 있는 캠핑장에 가게 됩니다. 네덜란드에서 온 두 십 대 소녀를 만나게 되고 카미유는 사랑하는 오빠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 2. 성숙한 두 언니들과 2차 성징이 채 오지 않은 어린아이가 대조됩니다. 여성 속옷이 아직 필요치 않은 카미유와 멋들어진 비키니를 입은 언니들입니다. 네덜란드라는 국적..

Film/Drama 2022.04.06

아비뇽의 남녀들 _ X&Y, 안나 오델 감독

# 0. " 저는 정체성이 뭔지, 인간다움이란 뭔지 알아보려 합니다. 저는 예술가로서 배우 미카엘 페르스브란트와 세트에서 일정 기간 함께 살 겁니다. 실험에만 집중하고 외부 요인을 통제하기 위해서죠. 우리는 내가 보는 나와 남이 보는 나를 알아볼 겁니다. 미디어에 비치는 모습의 이면으로 다가가 진정한 나를 찾는 게 이 실험의 목적입니다. 세트장에는 취조실이 하나 있는데 절대적 진실을 밝히는 장소로 사용됩니다. 미카엘과 저의 또 다른 자아들을 다른 배우들이 각각 맡아서 저희의 다양한 면을 연기할 겁니다. 또 다른 자아를 보면서 우리가 그동안 걸어온 인생을 되돌아보고 현재의 모습과 원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을 겁니다. 세트장에는 상담실이 두 개입니다. 이곳에서 미카엘과 저는 각자의 심리학자를 만나서 세트장..

Film/Thriller 2022.03.18

상하 좌우 반전 _ 하이 라이프, 클레어 드니 감독

# 0. 우주 SF입니다. 디테일한 미술과 세심한 설정과 쫀쫀한 서사로 빚어낸 환상의 공간을 여행하는 아이 씐나! 어드벤처 물이거나, 철학적이거나 제의적이거나 관념적인 코드들로 이리저리 엮어낸 교수님스러운 스릴러 드라마인 경우가 일반적이죠. 물론 세부적으로 나누자면야 더 많은 분류가 가능할뿐더러 위의 두 분류 역시 칼같이 나눠지지 않고 겹쳐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만, 알잘딱 넘어가도록 합시다. '클레어 드니' 감독, 『하이 라이프 :: High Life』입니다. # 1. 후자의 교수님스러운 영화 그중에서도 매운맛입니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이미지와 분위기에 주력하고 있을 뿐 디테일은 과감히 생략하고 있기도 하구요, 펜로즈 과정 따위를 잠시 찍먹 하긴 하지만 그마저도 몰입을 위한 과학적 디테일이라기..

Film/SF & Fantasy 2022.03.14

쓰레기를 태우는 불 _ 14개의 사과, 미디 지 감독

# 0. 불면증에 시달리는 만달레이의 사업가 왕 신홍에게 한 점쟁이가 수도원에서 14일을 보내라고 조언한다. 자동차와 불룩한 지갑을 뒤로하고 그는 하루에 사과 한 알 만을 먹는 수도승의 삶을 살게 된다. 이는 현재 미얀마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시골의 수도원에 도착한 왕 신홍은 머리를 깎고 붉은 수도복을 입는다. - 2018년 제15회 EBS 국제 다큐영화제 '미디 지' 감독, 『14개의 사과 :: 14 Apples』입니다. # 1. 자동차 안에서 시작됩니다. 차 안은 말끔한데 반해 밖은 먼지가 자욱한 시장통입니다. 분리된 두 공간입니다. 멀쑥한 양복에 멋들어진 선글라스를 쓴 남자입니다. 차에서 내려 과일가게에서 사과를 삽니다. 사과의 원산지를 살핍니다. 필요한 14개만 사며 불필요한 소비를 하지 ..

Documentary/Social 2022.02.16

무시하는 겁쟁이 _ 오목소녀, 백승화 감독

# 0. 촉망받던 유망주였지만 바둑 대회에서 실패를 겪은 후 기원 알바를 전전하던 주인공이 생활고를 극복하기 위해 오목 대회에 도전하는 영화입니다. 전반적으로 짧은 호흡의 가벼운 말장난 개그로 승부 보는 코미디물인데요. 57분 내내 한방의 훅 없이 잔펀치만 집요하게 때리다가 마지막에 따뜻한 메시지로 반창고를 붙여주는 영화라 말씀드린다면 무난하겠네요. '백승화' 감독, 『오목소녀 :: Omok Girl』입니다. # 1. 2014년 이후 만들어진 바둑과 인생을 엮는 다른 모든 창작물들처럼 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작품입니다만 감독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아예 패러디물로 가볼까?' 라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듯합니다. 알파고 드립과 같은 잔잔한 농담뿐 아니라 후반부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나 드립 등은 특히 노골..

Film/Comedy 2021.08.18

내일도 날씨는 맑음 _ 병훈의 하루, 이희준 감독

# 0. 오염 강박과 공황 장애를 앓고 있는 병훈은 남들에겐 별일 아닌 숙제를 전쟁처럼 치러낸다. 하루의 끝에는 그를 위한 진짜 선물이 있었다. 병훈은 늘 가지고 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제대로 보지 못했던 선물을 재발견하고 이 순간에 감사를 느낀다. '이희준' 감독, 『병훈의 하루 :: Mad Rush』입니다. # 1. 이희준 감독 작품입니다. 이희준이란 이름은 배우밖에 모르신다구요? 네, 그 사람 맞습니다. 영화는 제목 그대로 '병훈'의 하루입니다. 시나리오 특성상 메시지는 주인공을 묘사하는 방식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고 묘사의 완성도는 다시 배우의 연기력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역할을 담당한 배우가 바로! 이희준이죠. 감독도 하고 주연도 하는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

Film/Drama 2021.08.04

따뜻한 이미지, 희미한 메시지 _ 종천지모, 최한규 감독

# 0. 종천지모 [終天之慕] 이 세상(世上) 끝날 때까지 계속(繼續)되는 사모(思慕)의 정 '최한규' 감독, 『종천지모 :: 終天之慕』 입니다. # 1. 낡은 괘종시계가 오래된 무언가를 은유합니다. 시곗바늘이 가리키는 늦은 저녁 9시는 누군가의 시간이 저물어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시계의 옆면에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붓으로 쓴 것이 아니라 조각도로 파 놓았다는 점은 불변성과 정성 등을 상징합니다. 글귀 는 작품의 제목이자 주제의식입니다. 천천히 죽을 쑤는 할아버지입니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과 그 시간을 녹여 더한 공덕입니다. 건더기를 넣지 않은 듯한 맑은 죽은 할아버지의 정성에 순수성의 이미지를 더합니다. 쌓인 약병은 식사하실 분이 많이 아프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겠죠. 낡은 칫솔 두 개가 가지런히 ..

Film/Drama 2021.07.11

버퍼링 주의_ 우로보로스, 계영호 감독

# 0. 제목이 강스포군요. '계영호' 감독, 『우로보로스 :: Ouroboros』입니다. # 1. '우로보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자기 꼬리 물고 있는 형상의 무한동력 마조히스트 뱀을 뜻합니다. 통상 캐릭터보다는 순환이나 윤회, 완전성 따위를 상징하는 심벌로서 더 많이 소비되는 친구인데요. 고딕풍의 호러나 오컬트물 등에서 보통 원형 문고리를 얘 조각으로 만들어두는 경우가 많죠. 감독의 셀프 스포일러대로 인과가 서로의 꼬리를 무는 초현실적 상황 속에서 공포를 발견하는 작품입니다. 시나리오 상 특기할 만한 점은 여타 작품들은 두 개의 분리된 세계를 다루는 데 반해 과 그리고 이라는 '세 층위'가 교차한다는 점 정도를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나 편집입니다. 현실과 꿈을 그림..

Film/Horror 2021.06.13

현실은 더 잔인하다 _ 다운, 이우수 감독

# 0. 늦은 나이에 임신한 부부. 기쁨도 잠시 양수 검사 결과 태아가 다운증후군이라는 사실을 듣게 된다. 배는 점점 불러오고, 이대로 낳을 수도 지울 수도 없는 상황에 부닥친다. '이우수' 감독, 『다운 :: Down Syndrome』입니다. # 1. 현실은 상상보다 더 잔인하고, 잔인한 현실은 예고없이 찾아옵니다. 작품은 중반부 아내가 의사에게 건네는 대사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 거 같으세요?" 이 질문은 감독이 배역의 입을 빌어 스크린 너머 관객 개개인에게 직접 건네는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황을 발견하고 그 속에 놓인 인물의 심리와 시선에 집중한 연출이 섬세합니다. 윤리와 현실과 책임과 각기 다른 책임을 지는 방식들과 특정한 책임을 강요하는 법의 폭력 사이의..

Film/Drama 2021.06.11

누가 돌봐주고 있어? _ 클레오 & 폴, 스테판 드무스티에 감독

# 0. 쌍둥이 남매 '클레오'와 '폴'이 길을 잃는 영화입니다만 사실 아이들은 길을 잃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길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죠. 부유하고 있을 뿐입니다. 방황과는 다릅니다. 방황에는 갈등과 번민이 포함되지만 이 아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화 내내 쌍둥이 모두 부모의 품이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식 자체가 거의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저 둥둥 떠다니고 있을 뿐이죠. '스테판 드무스티에' 감독, 『클레오 & 폴 :: Allons enfants』입니다. # 1. '클레오'와 '폴'은 부모가 아닌 보모의 아래 있습니다. 보모 '엘사'는 보모로서의 적합한 능력도 책임감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울고 있는 '클레오'를 달래줄 사람은 누군지 알 수 없는 행인이고, 처음 손을 맞잡은 사람은 공원에 ..

Film/Drama 2021.05.01

안경을 흘러내리는 그림자 _ 할아버지 할머니의 봄, 박재인 감독

# 0. 살찐 고양이입니다. 녀석, 선풍기에 발이라도 넣었던 듯 붕대가 메여 있네요. 초여름의 기분 좋은 족욕입니다. 쓰다듬 듯 커튼을 흔드는 바람입니다. 빵 종이의 바스락 거림입니다. 화분을 어루만지는 햇살입니다. 녹아내려 달그락 흔들리는 설탕입니다. 안경을 흘러내리는 그림자입니다. '박재인' 감독, 『할아버지 할머니의 봄 :: Our Spring』입니다. # 1. 문득 올려다보는 가을의 높은 하늘입니다. 책장에서 삐져나오는 낙엽입니다. 소담하게 나누는 차 한잔입니다. 겨울의 바게트와 수프. 오늘의 저녁거리는 고구마 대신 단호박입니다. 매일같이 산책하던 길에 걸터앉아 즐기는 가을의 낙엽. 한점 한점 나눠 먹는 샤부샤부. 눈사람의 코가 되어버린 당근입니다. 남겨진 발자국입니다. 신중하게 고르는 수박. 조..

Film/Animation 2021.04.13

차라리 게임을 하자 _ 12피트, 맷 에스칸다리 감독

# 0. 자매가 수영장에 갇혔습니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스릴러군요. '맷 에스칸다리' 감독, 『12피트 :: 12 Feet Deep』입니다. # 1. 이 같은 영화들은 크게 두 가지 타입으로 분류됩니다. 하나는 극단적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강하게 추적하는, 로드리고 코르테스 감독의 나 대니 보일 감독의 같은 심리극 스타일을 들 수 있을 테구요. 또 다른 타입은 관객과 함께 생존 방법을 논리적으로 모색하는 재난 영화 스타일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알폰소 쿠아론의 나 '리들리 스콧' 감독의 을 떠올리셨다면 적절하겠네요. 어느 쪽으로 흘러가든지 간에 장르가 작동하기 위한 1차적인 기반은 감정이입입니다. 내가 저런 상황에 놓인다면 참... ㅈ같겠다. 라는 감정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Film/Thriller 2021.03.21

메타포 찾는 퍼즐 놀이 _ 판문점 에어컨, 이태훈 감독

# 0. 판문점에 설치된 고장 난 에어컨을 고치는 수리기사의 이야기입니다. '이태훈' 감독, 『판문점 에어컨 :: Air Conditioner in PANMUNJEOM』입니다. # 1.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이야기 위에 은유가 맛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에 영화가 매몰되어 있다는 점일 겁니다. 런타임 내내 배경이나 등장인물, 대사, 연기, 전개 모두 메세지를 돕는 메타포로서만 기능합니다. 본론에 앞서 분단의 비극이라는 비슷한 소재를 다루고 있는 박찬욱 감독 작 를 잠깐 살펴보죠. 박찬욱 감독이 제안하는 영화 속 상황 또한 이 작품 못지 않게 도발적입니다만 적어도 그 상황 속에 놓인 인물들. '경필', '수혁', '성식', '우진'의 행동만큼은 각자에게 할당된 설정에 부합하는 합리성을 철저히 따릅니다..

Film/Drama 2021.03.19

붕괴 _ 솧, 서보형 감독

# 0. 영화를 보기도 전에 기분이 조금 상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류의 제목을 썩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죠. 고어 '솧'은 일상적이지도 직관적이지도 않으니까요. 영화 제목은 뭐가 되었든 기본적으로 관객을 위한 마중물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감독이 발견한 메시지에 대한 가치판단과는 별개로, 관객의 입장에서 제목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작품인지 전혀 유추할 수 없다면 그건 제목이라 할 수 없죠. 시니컬하게 말하자면 '거푸집'이라는 의미로 사전을 뒤지다 '심연深淵'이라는 또 다른 의미에 꽂혀 즉흥적으로 지은 것과 뭐 그리 다르냐 빈정댄다 하더라도 딱히 할 말은 없을 겁니다. '서보형' 감독, 『솧 :: Soh』입니다. # 1.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앞서서의 고까운 감..

Film/Drama 2021.02.11

소품집 _ 톰과 제리 헐리우드 가다!!!, 윌리엄 해나 / 조셉 바베라 감독

# 0. 2018년 개봉한 『톰과 제리』 시리즈의 극장판입니다. 극. 장. 판... 네, 기대감이 바닥을 뚫고 내려갈 법하죠. 애니메이션 시리즈 극장판이라 하면 보통 주인공 캐릭터들만 뚝 떼서 가져 올뿐 본작의 매력이나 작법, 설정을 개무시한 채 지 마음대로 만든 영화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요. 『톰과 제리』가 뛰어다니는 동안 당연히 나와야 할 찰진 음악은 온 데 간데없고 그 빈자리를 쥐와 고양이가 되지도 않은 목소리로 치는 대사가 메우고 자빠져 있는 걸 보면 작품과 하등 상관없는 관객마저 모욕을 당하고 있는 기분이 들게 됩니다. 만, 극장판에 대한 걱정은 MGM 로고 속 사자가 해치웠으니 안심하라구! '윌리엄 해나', '조셉 바베라' 감독, 『톰과 제리, 헐리우드 가다!!! :: TOM AND JERRY』..

Film/Animation 2020.09.08

뱀과 사다리 _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우에다 신이치로 감독

# 0. 자칫 간과하곤 합니다만 이해력에도 한계는 있습니다. 일정 범위, 규모, 시행을 넘어서는 정보에 대해선 취합해 정리하는 것은커녕 아예 이해를 포기하게 되죠. 백조 천조가 넘어가는 돈의 규모에 단위 감각 자체가 사라진다거나 수십만 수백만 광년을 넘나드는 우주적 스케일 앞에 현실 감각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우에다 신이치로' 감독,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 カメラ を止めるな!』입니다. # 1. '합의된 허구로부터 어떻게 리얼리티를 설득해 낼 것인가' 라는 질문은 창작자에게 있어 벗어날 수 없는 필연적 화두일 겁니다. 창작의 자유로움과 관객에 대한 존중을 위해 자신이 풀어놓는 이야기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충분히 합의하면서도 동시에 가상의 세계관으로..

Film/Horror 2020.07.22

너무 단순한 은유는 직설만 못하다 _ 그림자 도둑, 김희예 감독

# 0. 너무 단순한 은유는 직설만 못하다 라는 제가 방금 대충 만든 명제의 훌륭한 예라 할 법합니다. '김희예' 감독, 『그림자 도둑 :: Shadow Thief』입니다. # 1. '화창한 날씨, 화려한 마천루' 아래 행복한 '인형'이 등장하는 'TV 채용 광고'와, 그걸 보고 있는 어두컴컴하고 삭막한 '지하철' 속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비슷한 외모, 비슷한 스타일'의 사람들은 외향과 대조되는 각기 다른 모양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고 그런 사람들이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옮겨지죠. 면접장에서 주인공은 열심히 '이야기'를 하지만 결국 채용은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그림자의 모양에 의해 결정되게 됩니다. '규격화된 모양'에 맞춰 그림자를 억지로 '늘리고 조으고' 묶는 동안 주인공은 자신의 '한계'와 '..

Film/Animation 2020.07.13

그렇게 말랑하진 않았어 _ 무정, 정민지 / 조서정 / 최선민 / 최효정 감독

# 0. 저도 이별이란 걸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진짠데요. 아, 안 믿네. '정민지', '조서정', '최선민', '최효정' 감독, 『무정 :: Unfeeling 』입니다. # 1.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 남자가 헤어진 연인과의 추억이 깃든 물건들과 그 물건들에 겹쳐진 미련을 담아 버려 내는 순간을 그린 4분짜리 짧은 단편입니다. 만, 글쎄요. 영화를 본 후의 감상을 솔직히 말하자면 딱히 감흥은 없더군요. 아이템과 그림체만 존재할 뿐 감독이 포착한 세밀한 정서는 사실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별 직후의 감수성이라는 게 영화가 그리는 것처럼 그렇게 말랑말랑하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 2. 오랜 연애 후 이별을 하게 되면 "온 세상이 너였다"라는 말이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대단히 노골적인 직설이었..

Film/Romance 2020.07.04

갈라파고스의 혁명가 _ 나는 스모 선수입니다, 맷 케이 감독

# 0. 육중하고 단호한 모래산입니다. 화면 너머 한기가 전해질 듯 차갑고 거친 파도입니다. 음울하면서 고압적인 분위기의 짙고 푸른 하늘이 강압적으로 짓누릅니다. 오랜 시간 동안 부서지고 퇴적되었을 보수적인 무언가들과, 잠시도 쉬지 않고 몰아붙이는 거센 풍파가 쉬지 않고 휘몰아치지만 여기 한 명의 스모 선수, 여자 스모 선수 '곤 히요리'는 굳건히 다리를 내디딘 채 상대를 노려봅니다. 그녀는 상대 선수뿐 아니라 그 뒤의 보이지 않는 사회적인 무언가들까지 모조리 도효 밖으로 밀어내려 합니다. '맷 케이' 감독, 『나는 스모 선수입니다 :: Little Miss Sumo』입니다. # 1. 오프닝 연출이 심적적 측면에서도 문학적 측면에서도 사회학적 측면에서도 대단히 효과적입니다. 운동선수로서의 모습과, 여성 ..

기막힌 영화 _ 브라 이야기, 바이트 헬머 감독

# 0. 부정적인 면에서도 긍정적인 면에서도 괴기합니다. 인상적인 화면과 음향, 대사 없이도 유려하게 흘러가는 동화적 이야기, 관능적인 아이템들과 순간순간 터져 나오는 독특한 코미디. 이 모든 걸 품어내는 아제르바이잔의 황홀한 전경이 독보적인 매력을 확보하게 합니다. 동시에 대단히 불친절한 은유들과, 통념을 벗어난 행동들로 인한 핍진성의 부재, 밑도 끝도 없이 널을 뛰는 플롯과 이 모든 걸 한층 심화시키는 '대사가 없음으로 인한 불편함'이 관객의 집중력을 흐트러트리죠. 어떤 분들에겐 영화제에서 상 탈만하다 싶은 인상적인 영화가 될 테지만, 누군가에겐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불쾌한 경험이 될 수 있어 보입니다. 다만 하나 확실한 것은 이 영화를 좋게 보신 분들도 단점들을 부정하지는 못하시리..

Film/Comedy 2020.02.19

코믹스 맛 _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밥 퍼시케티 / 피터 램지 / 로드니 로스먼 감독

# 0. 영화에 만화나 소설을 그대로 이식하게 되면 괴작이 되기 십상입니다. 이재용 감독의 , 오기환 감독의 , 덩컨 존스 감독의 , 이 분야 끝판왕 황예유 감독의 과 같이 남들이 무수히 나자빠지는 걸 보면서도 굳이 똥인지 된장인지를 찍어먹어 보던 이 영화들은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겠죠. 이런 류와 같이 엮이고 싶지 않은 대부분의 감독들은 코믹스의 캐릭터나 플롯, 주제의식 따위들만을 선택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가져온 후 영화적 문법으로 재해석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최동훈 감독의 나 박찬욱 감독의처럼 말이죠. '밥 퍼시케티', '피터 램지', '로드니 로스먼' 감독,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 Spider-Man Into the Spider-Verse』입니다. # 1. 영화는 앞서 나열할 작품들과는 ..

Film/Animation 2019.11.07

에피타이저 탕수육 _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아녜스 바르다 / JR 감독

# 0. 사실 작년에 본 영화입니다. 독립극장의 예술영화관에서 봤었죠. 하지만 리뷰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꿀잠을 잣기 때문입니다. 나랑 안 맞는 영화였나 보다 하며 잊고 지냈는데요. 최근 넷플릭스에 이 영화가 걸렸더라구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이 영화의 무엇이 20년 차 모범 불면증 환자인 저마저 숙면에 빠트리게 한 것일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쌩돈 들여 간 영화관에선 잠을 쳐 잔 영화를 스트리밍으로 다시 보고 말았습니다. 물론 2017` 칸 특별부문 초청작이라는 걸 알고선 마음이 조금 더 동하기도 했구요. 권위에 굴복한 것 맞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아녜스 바르다', 'JR' 감독,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 Visages, Villages』입..

Documentary/Art 2019.10.06

천재감독이 빙의물을 만들면 _ 퍼스트맨, 데미안 샤젤 감독

# 1. 좋아하는 영화감독 있으신가요? 없으시다구요? 저런. 사람들과 이야기 하다 보면 가뭄에 콩 나듯 영화 얘기를 하게 될 때가 있는데요. 그럴 때 배우가 아니라 감독, 그것도 외국 감독 이름을 몇 개 얘기하면 아는 게 없어도 뭔가 있어 보일 수 있습니다. 이름 몇 개 붕권마냥 질러두고 이후엔 다 안다는 듯이 팔짱 끼고 고개만 끄떡이면 지식인의 완성이죠. 메모해 두세요. '존 도'라는 희대의 또라이를 만든 '데이빗 핀처'나 스칼렛 요한슨을 캐스팅해서 목소리만 뽑아 쓰고 버린 her의 '스파이크 존즈', 주드로, 메이슨 총리, 레아 세두, 볼드모트, 에드워드 노턴 같은 배우들을 불러다 단역으로 쓰면서 주연은 웬 처음 보는 과테말라계 미국 배우에게 맡긴 '웨스 앤더슨', 사람 못 죽여서 안달 난 '쿠엔틴 ..

Film/Drama 2019.10.03

안소희의 마스크뿐 _ 아노와 호이가, 이재용 감독

# 0. 여성주의 영화라고 합니다. 대체로 무슨 '주의'가 붙은 영화들은 모 아니면 도입니다. 이념적 목적성에 철저히 복무하는 한심한 영화거나, 이야기의 결과가 이념이 지향하는 가치를 증명하는 멋진 영화거나. 과연 이 영화는 모일까요 도일까요? '이재용' 감독, 『아노와 호이가 :: Anu and Huyga』입니다. # 1. 최고의 장점은 단연 '안소희'입니다. 그녀의 얼굴, 눈매, 표정, 목소리, 머리카락, 붉은 홍조는 그 자체로 최고의 설득력을 가집니다. 한국인 둘이서 밑도 끝도 없이 몽골로 날아가 어색한 전통의상을 빌려 입고 벌이는 이야기를 관객에게 설득해내야 한다. 라는 난해한 미션은 배우 혼자 몽땅 해결합니다. 풍경도 기가 막힙니다. 몽골 전통 가옥 특유의 분위기와 질감이 대단히 포근하게 묘사됩..

Film/Romance 2019.09.26

내가 너를 놓쳤어 _ 먼 훗날 우리, 유약영 감독

# 0. 왕가위 감독의 , , , , 진목승 감독의 , 혹은 오우삼 감독의 시리즈와 같은 냄새입니다. 개인의 곤궁함으로 모자이크 된 화려한 도시를 부유하는 청춘들의 이야기. 거부할 수 없는 흐름 속에 표류하는 사람들의 위태로움과 발버둥. 그 아래 흐르는 처연하고 섬세한 서정성과, 처절하고 육중한 고독감 등을 꺼지기 직전 가장 밝게 빛나는 불꽃처럼 눈부시게 그려내던 그 시절의 그 영화들 말이죠. 유약영 감독, 『먼 훗날 우리 :: 後來的我們』 입니다. # 1. 물론 정서의 결은 살짝 다릅니다. 홍콩 영화는 반환을 앞두고 거대한 집단이 통째로 입양되는 듯한 긴장감,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의하지 못하는 존재들의 불안함, 정착하지 못하고 버려진 존재들의 고독감,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것들에 대한 짙은 회의와 허무함..

Film/Romance 2019.09.20

떡밥 덩어리 _ 업그레이드, 리 워넬 감독

# 0. 떡밥입니다. 이 영화는 떡밥덩어리입니다. 떡밥의 떡밥에 의한 떡밥을 위한 영화입니다. 인물도 떡밥이고 서사도 떡밥이고 대사도 연출도 플롯도 설정도 몽땅 떡밥입니다. 배우 출연료를 떡밥으로 줬다 해도 믿을 수 있을 겁니다. 이 영화는 떡밥을 뿌릴 수 있는 데까지 뿌리고 그걸 수습하는 걸로 시나리오를 한번 조져보자! 라는 마인드로 만든 게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재밌냐구요? 네. 재밌습니다. '리 워넬' 감독, 『업그레이드 :: UPGRADE』입니다. # 1.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만약 1막에서 벽에 걸린 라이플을 소개했다면 2막이나 3막에서는 반드시 쏴야 한다." "If you say in the first chapter that there is a rifle hanging on the wall,..

Film/Action 2019.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