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당신의 사회는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가.

지타 갠브히르 감독,
『완벽한 이웃 :: The Perfect Neighbor』입니다.
# 1.
살다 보면 이해가 가지 않아 의아한 규칙들을 더러 맞닥뜨리곤 한다. 그럴 때면 잠시 영악한 악마에 빙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 규칙을 악용해 이익을 볼 방법이 없을까 추론해 보는 것인데, 겉으로 보기엔 다소 번잡해 보였던 '그 규칙'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유를 생각보다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도 참 머리가 아프겠군...이라는 류의 휘발적인 반성과 함께 말이다.
지타 갠브히르의 작품은 논쟁적인 스탠드 유어 그라운드법(Stand-your-ground Law)에 대한 비판적 스텐스의 사회고발 다큐멘터리이다. 영화가 지칭하는 '완벽한 이웃'은 새로운 법을 악용해 사람을 살해한 것으로 25년형을 선고받은 플로리다의 백인 여성 수잔 로린츠와, 그녀에게 소극적이었던 당국을 함께 일컫는다.
'네가 서 있는 곳을 지켜라'는 뜻의 스탠드 유어 그라운드는 미국의 정당방위 법률 중 하나다. 미국과의 물리적 거리도, 정당방위와의 법률적 거리도 먼 우리에게 생소한 것도 무리는 아니니 짚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대충 캐슬 독트린(Castle Doctrine)을 공공장소까지 확대한 개념이라 이해하면 훌륭하다. 생명에 위협을 느낄 경우 자신이 있는 장소에서 피하지 않고 상대를 향해 치명적인 물리력(무기 사용 등)을 사용하는 것을 정당방위로 인정하는 내용인데, 감이 좋은 사람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낄 경우'라는 표현의 애매모호함에 쎄함을 느꼈을 것이다.

# 2.
사건은 2023년 플로리다주 오캘라의 평범한 임대 마을에서 벌어진다. 시니컬한 외톨이 수잔은 이웃집 아이들(대부분 흑인)이 집 앞 잔디밭에서 시끄럽게 논다는 이유로 근 2년 동안 수십 차례 신고한다. 백인 여성이 흑인 아이들을 향해 인종차별적인 욕설을 퍼붓는 모습을 경찰은 '위협'이 아닌 '골칫거리'로 취급하며 방치했고, 안타깝게도 그녀의 인종차별적인 분노는 경찰의 생각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사건 당일 수잔은 아이들을 향해 롤러스케이트를 집어던지고 이를 알게 된 엄마 아지케 오웬스는 수잔의 집문을 두드리며 항의한다.1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수잔은 잠긴 문을 향해 총을 발사했고, 아지케는 그 자리에서 숨진다.
제목이 무색하게도 수잔은 전혀 완벽하지 않다. 주변 이웃들을 향한 표현만 과격할 뿐, 오히려 비겁하고 허술하고 나약하고 다분히 비열하다. 그래서 아지케의 죽음은 더욱 비극적이다. 완벽한 악마에 의한 치밀한 악용이 아니라, 아주 허술한 누군가에 의한 악용인 것이고, 이 악용은 너무나도 허술해서 어렵지 않은 몇몇의 조사(인터넷 사용 내역)와 간단한 추론(타임라인 분석)만으로도 들통이 나지만, 그 악용의 결과가 하필 절대적이고 비가역적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내 조금도 완벽하지 않았지만, 이 악마적인 상황을 완성시키기에는 충분히 완벽했던 것이다.

# 3.
다큐멘터리는 대단히 자신만만하다. 일례로 작품에는 조금의 해설도, 인터뷰도 없다. 여타의 다큐들이 그러하듯 직접 나서 적극적으로 주창하는 대신, 2년 치 경찰 바디캠을 통해 국가의 감시 카메라가 국가 시스템의 실패를 고발하는 아이러니를 펼쳐낼 뿐이다. 영화는 흑인 아이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비추는 대신, 그들의 순수함과 활기를 담아내어 공동체가 있었음을 담담히 기록한다. 경찰의 권위를 추켜 세우는 대신, 그들의 무력함과 방임을 낱낱이 기록한다. 백인 여성의 공포를 정당화하는 대신, 계산된 분노를 철저히 폭로한다. 성과는 명확하다. 관객이 스스로 배심원이 되어 판결하게 하는 것이다. 관객은 감정적 선동의 대상이 아닌 사건의 목격자가 되고, 그것에는 공동체의 지성에 대한 감독의 신뢰가 담겨있다.
작품을 가득 메운 증거 영상들은 가해자의 서사를 하나하나 해체하며 스스로 논증한다. 수잔은 수사 과정 내내 자신을 연약하고 병들고 공포에 질린 피해자로 포장하지만, 그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또 다른 전문가를 내세우는 대신 그녀 자신의 목소리와 행동을 증거로 내미는 식이다. 이를테면 911에 전화할 때의 연약하고 조작된 목소리와, 경찰인 줄 모르고 문밖의 인기척에 내지르는 악마적인 비명과의 섬뜩한 대조 따위다. 영화 내내 수잔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오가는 지킬 앤 하이드 같아 보이지만, 감독은 그녀에게 낙인찍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자기 합리화는 최소한의 논리 기반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수잔의 폭주를 가능케 한 것은 스탠드 유어 그라운드법이고, 따라서 영화의 착점 역시 그곳에 고정되어 있다. 작품으로 말미암아 법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사건의 공모자로서 고발된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는 주관적 감정만 증명하면 된다는 법의 조항은, 편견을 가진 이에게는 살인 면허가 될 수 있음이다. 트레이본 마틴 피살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건재한 법이 어떻게 다시 한번 무기화되는지를 영화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명징하게 직시하며 주장한다.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수잔은 지킬 앤 하이드이지만, 그녀 앞에 소극적인 미국 또한 지킬 앤 하이드다.

# 4.
다큐의 동력은 분명 분노와 정의감이지만 그럼에도 희망을 발견하는 것 역시 등한시하지 않고 있고, 이는 작품이 가진 두터운 힘이다. 서로의 아이들을 '모두 내 아이들'이라 부르며 함께 돌보는 다인종 공동체의 따뜻함, 경찰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아이들의 순수함과 당당함, 총성이 울린 그 밤, 위험을 무릅쓰고 뛰쳐나와 아지케를 감싸고 아이들을 보호하려 했던 이웃들의 용기. 감독은 세상엔 수많은 수잔들이 있지만, 이웃과 같은 사람들이 더 많이 있다 말하는 걸 잊지 않는다. 완벽한 이웃들이라고 말이다.
물론 일련의 사건은 태평양 건너 우리와 무관해 보인다. 하지만 영화가 던지는 화두들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당신의 공동체는 갈등을 어떻게 중재하는가. 당신의 시스템은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어떻게 듣고 있는가. 당신의 사회는 사소한 균열이 파국으로 치닫기 전에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가. 당신의 시선은 혐오와 분노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존재하는 사랑을 뚜렷이 발견하고 있는가. end.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Netflix, Tving, WatchaPlay, CoupangPlay, Appletv,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 본 블로그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글에서 다루는 작품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댓글, 포스트를 자신의 블로그로 유인하는 데 이용하려는 댓글, 무분별한 맞팔로우 신청 댓글 등은 삭제 후 IP 차단될 수 있습니다.
좋아요, 댓글, 구독
은 블로거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
- 법정 증거물로 제출된 아동용 스케이트의 발랄한 디자인은 만감이 교차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