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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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개봉 40

한탕 주의 _ 유마 카운티의 끝에서, 프란시스 갈루피 감독

# 0. 죽은 사람들의 한탕주의(主義)와 살아남은 사람의 한탕 주의(注意) 프란시스 갈루피 감독,『유마 카운티의 끝에서 :: The Last Stop in Yuma County』입니다. # 1. 영화는 시작부터 서부극의 문법에 충실하다. 벌판 한가운데 외딴 건물은 서부극 특유의 황량함을 세팅한다. 주요 무대인 레스토랑은 살롱을 계승한 공간이다. 둔탁한 미닫이문이 열리고 문 위에 달린 종이 울릴 때면 마치 총잡이가 살롱 문을 박차고 들어서는 듯한 인상을 주는 데, 그럴 때마다 미리 자리한 손님들이 외부인을 경계하는 구도는 서부극의 전형적인 긴장감을 정석적으로 조성한다. 바 형태의 카운터를 중심으로 몇몇의 인물들이 대치하거나 흩어지는 활용 또한 서부극의 공간 연출을 답습하는 것이다. 테이..

안부 전화를 해요 _ 줄스, 마크 터틀타웁 감독

# 0. 어떤 영화는 소박해서 훌륭하다. 마크 터틀타웁 감독,『줄스 :: Jules』입니다. # 1. 전형적인 미국의 마을에는 전형적인 미국인 할아버지가 살고 있고 그가 사는 전형적인 미국식 저택 뒤뜰로 전형적인 회색빛 우주선이 추락한다. 다들 뒤뜰에 먹다 남은 외계인 하나쯤은 있을 테니 그리 이상할 것 없는 평범한 이야기다. 요염한 자세로 쓰러진 진지한 표정의 외계인과 그가 타고 온 우주선의 꼬락서니만 보더라도 이 영화가 얼마나 소박한 것인가를 가늠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니 SF가 아니다. 외계인이 초능력으로 강도의 머리통을 폭파시킨다거나, 수상한 노인 둘이서 죽은 고양이 시체 7구를 트렁크에 모은다거나, 검은 옷 빼입은 요원들이 문을 부수고 들이닥치는 등 몇몇의 사소한 장면들만..

Film/Comedy 2025.04.20

작위 부작위의 법칙 _ 바질과 데이지, 정수진 감독

# 0. 모든 작위에 대해 크기는 같고 방향은 반대인 부작위가 존재한다. 정수진 감독,『바질과 데이지 :: Basil and Daisy』입니다. # 1. 성당 문을 빼꼼 들여다보는 오프닝은 안정적이다. 어색한 소녀는 이내 인자한 인상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풀어놓는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를 겪은 화자의 내적 성찰임을 표현하는 작품들의 익숙한 플롯이다. '오이를 붙이고 있었어요, 오이를.' 작품의 인상을 결정하게 될 첫 대사는 힘준 티가 너무 나서 어색하다. '아, 그전에 말씀을 드리면 저는 엄마랑 단 둘이 살아요, 3년 전부터. 아빠는 돌아가셨구요, 되게 오래 아프셨거든요. 그래서 준비를 했었어요, 예상했던 이별이었으니까.' 로 이어지는 도치 4연타가 어색함을 한껏 ..

Film/Drama 2025.04.12

저스트 베이시스트 _ 온리 걸 인 더 오케스트라, 몰리 오브라이언 감독

# 0. Don’t ask me... I’m just the bass player.        몰리 오브라이언 감독,『온리 걸 인 더 오케스트라 :: The Only Girl in the Orchestra』입니다.     # 1.  내가 오린을 사랑하는 건 오케스트라에서 빛을 내뿜기 때문이다. 오린은 음악에 전적으로 몰입하며 그쪽을 바라볼 때마다 오린도 항상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경이로운 집중력이다. 비결이 뭘까? 우리가 연주하는 모든 곡의 베이스 파트 음을 전부 외웠나? 그건 기적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일이다. -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1918-1990). 전설적인 음악가에게 기적이란 찬사를 받은 사람은 오린 오브라이언. 1966년 뉴욕 필하모닉 정규 단원으로 고용된..

사그라드는 제국의 선율 _ 클로징 다이너스티, 로이드 리 최 감독

# 0. 팔아선 안될 것들을 파는 동안 사그라드는 제국의 선율        로이드 리 최 감독,『클로징 다이너스티 :: Closing Dynasty』입니다.     # 1. 위력적인 단편의 결말은 두 가지 이미지의 중첩이다. 하나는 퀴니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식당이 문을 닫는다는 것, 다른 하나는 소녀가 하루종일 벌어들인 돈을 부모님의 금고에 넣었다는 것이다. 전자를 세계에 대한 감독의 진단이라 한다면, 후자는 그 진단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이자 원리다. 즉발적인 감동은 제목의 언어유희와 관련된 폐업을 앞둔 다이너스티의 꺼진 간판에 있을지 모르나, 그럼에도 영화의 본질은 소녀가 돈을 버는 방식과 그 이유에 있다. 저연령 빈곤층 이민자라는, 연령과 계급과 신분을 복합적으로 은유하는 퀴니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교..

Film/Drama 2024.12.20

뉴식이 두마리 치킨 _ 루프 트랙, 토마스 세인즈버리 감독

# 0. 뉴질랜드산 특대사이즈 오골계 2마리 28000원. 계란 추가(+3)        토마스 세인즈버리 감독,『루프 트랙 :: Loop Track』입니다.     # 1. 태만하게 못 만든 호러 영화는 짜증스럽지만, 열심히 못 만든 호러는 의외로 재미있다. 특유의 진지함이 나름 귀엽기도 하고, 열심히 해 보려는 과정에서 벌어진 황당한 부분들이 되려 코믹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생소한 뉴질랜드산 크리처 영화는 문자 그대로 열심히 못 만든 호러다. 대체 뭘 했길래 제작하는 데 7년씩이나 걸린 건지 알 수 없지만, 비장의 무기였을 크리처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쉴 새 없이 웃음이 터져 나온다. 만약 이 영화를 보는 모습을 누군가 몰래 지켜봤다면, (2024)을 볼 때만큼이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발견했을지도 모른..

Film/Horror 2024.12.04

시간과 격려 _ 라스트 버스, 질리스 맥키넌 감독

# 0. 맞닥뜨리는 죽음에서 받아들이는 죽음으로        질리스 맥키넌 감독,『라스트 버스 :: The Last Bus』입니다.     # 1. 시작과 출발이 정해진 노인의 여행은 무릇 인생을 은유하기 마련이나, 티모시 스폴의 이야기는 다소 이질적이다. 아내의 죽음에서 시작해 자신의 죽음으로 끝난다는 면에서, 탄생에서 죽음까지 훑어나가는 '인생'보다는 '죽음' 그 자체를 들여다보는 것에 가깝다. 또한 죽음에도 서사가 있으며, 출발점으로서의 죽음과 도착점으로서의 죽음이 달리 존재함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입에서부터 그러하듯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관한 것이다. 브리튼섬 서남단 랜즈엔드(Lands' End)에서 시작된 사랑이 동북단 존 오그로츠(John o' Groats)로 숨어든 것은 눈에 넣..

Film/Drama 2024.11.02

카타르시스 _ 아일린, 윌리엄 올드로이드 감독

# 0.  콤플렉스의 교도소. 트라우마의 지하실. 성탄절의 카타르시스        윌리엄 올드로이드 감독,『아일린 :: Eileen』입니다.     # 1. (2017)를 통해 억눌린 욕망과 반동을 서슬 푸른 광기로 그려낸 감독은, 차기작에서도 음습하고 내밀한 욕구를 억누르며 사는 여인 아일린에게 주목한다. 주인공 역은 세상의 모든 불안을 담고 있는 듯한 눈망울의 토마신 맥킨지가 맡았다. 레베카 역은 매 순간 관객의 시선을 장악하는 앤 해서웨이가 연기한다. 오테사 모시페그의 원작 소설에서 영감을 얻은 윌리엄 올드로이드는 뛰어난 두 배우와의 협업을 통해 엄격하고 배타적인 환경과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내면 사이 유리된 자아의 혼란을, 급작스러운 범죄 사건에 얹어 탐구한다. 아일린은 보수적인 1960년대 미국 ..

독의 촉감 _ 독, 웨스 앤더슨 감독

# 0. 결국 뱀에 물리고만 의사였다.        웨스 앤더슨 감독,『독 :: Poison』입니다.     # 1. 넷플릭스가 주도하고 웨스 앤더슨이 연출한 4편의 로알드 달 단편 프로젝트 중 하나다. 에서 자유로운 이야기의 역동성을, 에서 절륜한 문장력의 위력을 증명했던 감독은 을 통해 간결한 이야기로 녹여낸 인간 탐구를 서늘한 촉감으로 구현한다.  인도 땅에서 인도 뱀의 위협을 피해 인도 의사의 도움을 받게 된 영국 군인 해로 포프의 이야기다. 해리의 부름을 받은 우즈와 함께 영화는 시작되는 데 이후로도 우즈는 사건의 관찰자로서 화자를 겸한다. 침대에 곧게 누은 해리는 배 위에 치명적인 독을 가진 우산뱀이 잠들어 있어 옴짝달싹할 수 없다. 깜짝 놀란 우즈는 잠시의 혼란 끝에 의사 간더바이에게 도움을..

Film/Comedy 2024.10.24

길 잃은 남자 _ 고립된 남자, 바실리스 카추피스 감독

# 0. 그 사람이 바로 나예요.        바실리스 카추피스 감독,『고립된 남자 :: Inside』입니다.     # 1. 고백하자면 나는 영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보는 동안 적어도 두어 번 이상 길을 잃었다. 이후의 글은 그 과정만을 간신히 옮긴 것이다.  자, 일단 스릴러는 아니다. 주인공은 처음 보는 늙은 도둑이고, 그의 위기를 걱정해야 할 동인이 없는 상황에서 긴장은 성립할 수가 없다. 호화로운 펜트하우스에 갇혀 말라죽어가는 윌렘 데포를 보며 안타까워할 사람보다는 연기에 감탄할 사람이 훨씬 많을 거라 예상하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실험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작위적 환경과, 감상을 어지럽히는 난해한 암시 탓에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면의 알레고리를 탐색하게 되는 데, 감독은 그 부분에서 ..

Film/Drama 2024.10.14

캡사이신 우유 _ 렌필드, 크리스 맥케이 감독

# 0. 유리멘탈 현대인을 위한 다정하고 매콤한 캡사이신 우유        크리스 맥케이 감독,『렌필드 :: Renfield』입니다.     # 1. 브램 스토커(Bram Stoker)의 소설 (1897)의 등장인물 렌필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호러, 코미디, 액션, 판타지 영화다. 한창 유행인 리메이크나 리부트가 아닌 보조적 인물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라는 것, 특히 외전 격의 이야기 대신 기존 서사를 전복시켜 독자적 주제의식을 가진 작품에 도전했다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다. 영화는 야심에 걸맞게 고전의 고풍스럽고 음습한 분위기를 대신하는 컬트적이고 경쾌한 현대적인 모습이다. 완성도와는 별개로 말이다. 감독은 드라큘라 신화를 현대 사회의 권력 구조와 종속 관계에 대한 알레고리로 재해석한다. 드라큘라와 렌..

Film/Action 2024.09.08

신의 주사위 놀이 _ 똑똑똑, M. 나이트 샤말란 감독

# 0. 뭐시 중헌디        M. 나이트 샤말란 감독,『똑똑똑 :: Knock at the Cabin』입니다.     # 1. 언제 봐도 놀라울 정도로 거대한 바티스타와 그의 팔뚝만 한 귀여운 소녀의 만남으로 시작되는 영화, 이다. 영화는 원천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의 떡밥과, 사실상 떡밥의 의인화나 다를 바 없는 인물들을 쉴 새 없이 던진다. 그렇다면 그렇구나 하는 수밖에 없는 일방적인 세계관과, 늘 관객보다 두어 발짝 앞질러가는 불친절한 전개는 언제나와 같은 샤말란이다. 인류의 운명을 거론하는 수상하기 짝이 없는 침입자 무리, 단란한 가족 중 한 명이 희생해야 70억 인류를 살릴 수 있다는 우악스러운 설정, 피해자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 스스로 자해하는 아이러니, 작지만 구체적..

현대영화 _ 킬 룸, 니콜 페이온 감독

# 0. 어. 느새. 부터. 미. 술~~ 은 안 멋져.        니콜 페이온 감독,『킬 룸 :: The Kill Room』입니다.     # 1. 현대미술이 영화에 머리채를 잡히는 건 연례행사다. 끝없이 관념적으로 뻗어나가는 현대미술 일체를 스노비즘(snobbism)으로 치부하거나, 부자들의 친목 모임 뒤에 숨겨진 재산 은닉과 탈세에 복무하는 시종이라 조롱하는 식이다. 때문에 제 아무리 이런저런 킬링포인트를 추가한다 하더라도 큰 틀에서의 작동은 죄다 거기서 거기다. 예술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이 대충 만든 작품을 미끼로 던져 놓은 후, 그 황당한 작품에 허망한 형용을 난사하는 업계를 조소하는 구조로 흘러간다. 코미디언 장동민이 잭슨 폴록의 드리핑을 흉내 낸 그림에 미학자 진중권이 진땀 흘렸던 모 예능을..

Film/Comedy 2024.07.02

죽거나 혹은 미치거나 _ 어메이징 디지털 서커스, 구스웍스 감독

# 0. 글리치 프로덕션(Glitch Productions)을 아시나요?        구스웍스 감독,『어메이징 디지털 서커스 :: The Amazing Digital Circus』입니다.     # 1. 닐 블룸캠프의 오츠 스튜디오 이후 오랜만에 스튜디오 소개글이다. 물론 하꼬 블로거 따위가 '소개'하기엔 지나치게 월클이지만 말이다.  글리치 프로덕션(Glitch Productions)은 다채롭고 개성적인 디자인, 매콤한 블랙 코미디, 재기 발랄한 스토리로 미래지향적인 가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호주 국적의 인디 애니메이션 제작사다. 초기작 (2019)와 (2021) 이후, 미국의 애니메이터 리암 빅커스(Liam Vickers)가 총괄로 합류한 (2021)으로 도약한 글리치는, 작년 또 다른 애니메이터 쿠퍼..

Series/Animation 2024.06.28

노 아담 플리즈 _ 노 하드 필링스, 진 스텁닛스키 감독

# 0. 아담 샌들러가 꼭 필요한 거야? 진 스텁닛스키 감독, 『노 하드 필링스 :: No Hard Feelings』입니다. # 1. 죽지도 않고 또 오는 게 엿장수만은 아니다. 세상엔 잊을만하면 돌아오는 것이 너무나 많지만, 할리우드식 로맨틱 코미디는 그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수도 없이 반복된 탓에 레시피도 공개된 것과 진배없다. 배경은 보통 휴양지인데 기왕이면 바닷가가 좋다. 부자를 시기하고 부러워하는 서민이 주인공이지만, 연기하는 배우들이 그 시기와 질투의 대상인 백만장자라는 것은 괘념치 않는다.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통속적인데, 철없는 주인공과 비슷한 수준의 친구 하나가 옆에 붙어 코미디를 전담하는 동안 주변을 배회하는 노년의 현자가 틈틈이 교훈을 토해낸다. 영화는 뜬금 이벤트 당첨이나, 우연한 헌..

Film/Comedy 2024.04.18

감독놀음 _ 은밀한 공범, 죠죠 히데오 감독

# 0. 평범한 소재로 비범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도 있지만,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내다 버리는 경우도 부지기수입니다. 죠죠 히데오 감독, 『은밀한 공범 :: 恋のいばら』입니다. # 1. 은 수입사가 지어 붙인 이름입니다. 원제는 恋のいばら. 그러니까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군요. 참고로 영어 제목은 Thorns of Beauty인데요. 이쪽이 그나마 더 직역에 가까운 번역이기는 합니다. 실제 영화의 핵심은 '가시'로 은유된 각자의 마음에 있다는 면에서, 관계 중심적인 뉘앙스가 강한 '공범'이라는 우리말 제목은 썩 정밀해 보이지는 않죠. 양가적 감정에 놓인 두 여자의 갈등을 그린 작품입니다. 원제에 긍부정이 배치되는 두 개념을 접붙여둔 이유죠. 모모는 켄타로에게 집착과 파괴를 함께 느낍니다. 수차례 복제하고 ..

Film/Romance 2024.03.30

오스카가 또 _ 디 애프터, 미산 해리먼 감독

# 0.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미산 해리먼 감독, 『디 애프터 :: The After』입니다. # 1. 나이지리아계 영국인 사회 운동가 겸 사진작가인 미산 해리먼 감독의 데뷔작입니다. 2015년 개봉된 영화 에서 마틴 루터 킹 주니어를 연기한 데이비드 오예로워가 주인공 다요 역으로 참여합니다.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18분짜리 단편 영화인데요. 올해 아카데미 단편영화 부문에 노미네이트 된 작품이기도 하니, 시상식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제목을 들어보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수상은 웨스 앤더슨의 가 차지합니다.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작품이었죠. 묻지 마 테러의 참상 이후를 그립니다. 전반적으로 평이하고 예측가능한 전개이지만 사안의 심각성과 시의성이 관객을 안정적으로 몰입하게 합니다. 테러로 아내와 ..

Film/Drama 2024.03.18

노을이 지난 후에도 _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미야케 쇼 감독

# 0. 처연하고 찬란한 노을이 지난 후에도 이어져 나갈 소중한 것들에 대하여 미야케 쇼 감독,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 ケイコ 目を澄ませて』입니다. # 1. 오가와 케이코. 도쿄 아라카와구 출생. 선천적 감음 난청으로 양쪽 귀가 모두 들리지 않는다. 2019년 프로복서 라이선스 취득. 데뷔전 1라운드 1분 52초 KO 승리. 선천적 청각장애인 여성 복서 오가사와라 케이코의 자서전 를 원작으로 합니다. 청각장애인 여성 복서라는 캐릭터가 목적의 전부였다면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요. 감독은 구태여 영화라는 형식을 선택하고 있죠. 비슷한 경우 왜 굳이 그녀의 이야기를 영화로 각색한 걸까. 조금 더 정밀하게 질문하자면 감독은 그녀의 인생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있는가. 에 대한 대답을 탐미해 보는 ..

Film/Drama 2024.02.26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_ 믿을 수 있는 사람, 곽은미 감독

# 0. 박한영은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곽은미 감독, 『믿을 수 있는 사람 :: A Tour Guide』입니다. # 1. 정착을 꿈꾸는 20대 이방인 한영의 서울 생존기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믿음'이라는 개념에 대한 고찰이기도 합니다. 믿음은 통상 신뢰, 신앙, 신념, 신용 등 다양한 의미를 가지는데요. 작품에서는 신뢰와 신용을 선택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신뢰는 개인 간 주고받는 다정함에 대한 기대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겁니다. 신용은 사회인으로서 합의된 사항을 충실히 이행하는 도리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죠. 영화는 북한을 신용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로, 탈북민은 신용을 경험해 보지 못해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한국을 외국인 손님들에게 소개하는 일이 영광스럽..

Film/Drama 2024.01.26

가장 사소한 우주 _ 애스터로이드 시티, 웨스 앤더슨 감독

# 0. 그놈은 그냥 돌멩이를 던져분 것이고, 자네들은 그것에 놀라 확 달아난 것이여. 웨스 앤더슨 감독, 『애스터로이드 시티 :: Asteroid City』입니다. # 1. 가장 사소한 우주 영화입니다. 통상의 우주 SF라면 웅대한 우주를 탐험하는 초라한 인간의 대비라는 식으로 풀어가기 마련일 텐데요. 웨스 앤더슨은 독특하게도 스케일의 역전을 시도합니다. 우주의 구조를 도식화해 미니어처처럼 끌고 내려온 후, 관객으로 하여금 이를 내려다보게 만들어 관조적으로 삶과 우주의 원리를 통찰해 볼 것을 제안하는 것이죠. 작품은 연극을 준비하는 무대 뒤 흑백 화면과, 그렇게 실현된 연극의 컬러 화면으로 구분되는 극중극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데요. 사실 수많은 관객들이 혼란스러워했던 것처럼 구체적인 레이어는 그보다 ..

Film/Comedy 2024.01.04

혁신은 없었다 _ 팟 제너레이션, 소피 바르트 감독

# 0. 파스텔 빛 미래에 대한 사소하지 않은 고민들이 잎사귀처럼 차곡차곡 쌓인다. 소피 바르트 감독, 『팟 제너레이션 :: The Pod Generation』입니다. # 1. 아이를 가졌다. 아이를 낳았다. # 2. ...가 영화 속 상황의 전부입니다. 그저 엄마의 자궁 대신 '팟'이라는 이름의 인공자궁에서 아이가 키워질 뿐이죠. 기술적인 문제 혹은 우려는 의도적으로 배제됩니다. 안전상의 걱정 없이 자궁을 온전히 대체할 수 있는 가상의 시스템이 존재한다 가정한 상황에서의 윤리적 문제에 천착한 작품이라는 것이죠. 자연스럽게 중요한 것은 기술이 어디까지 인간을 대체할 수 있을까라는 화두일 텐데요. 영화 속 인공지능 기술은 인간과의 거리를 기준으로 크게 네 단계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가장 낮은 층은 '집에서..

Film/SF & Fantasy 2023.12.10

파스텔색 울타리 _ 스크래퍼, 샬롯 리건 감독

# 0. 혼자라는 오해가 만든 파스텔색 울타리를 사랑스럽게 넘는다. 샬롯 리건 감독, 『스크래퍼 :: Scrapper』입니다. # 1. 큰 틀에서는 가족영화 겸 성장영화라 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일찍 엄마를 여읜 열두 살 배기 엄복동 조지와, 뜬금 나타나 아빠라 주장하는 짝퉁 에미넴 제이슨이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는 식의 가족영화이구요, 동시에 각자 나름의 자기 성찰에 도달한다는 면에서 성장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죠. 비슷한 경우 결말에 이르러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립한다는 식으로 흘라가기 마련입니다. 내내 퉁명스럽던 사람들이 팀워크가 요구되는 어떤 극적인 사건을 겪은 끝에, "...아빠...", "...우리 딸..." 뭐 이런 식의 눈물 폭발 엔딩은 익숙하죠. 그렇게 변..

Film/Drama 2023.11.24

블루 얼럿 _ 더 킬러, 데이비드 핀처 감독

# 0. 봉준호의 진단에 답하는 데이비드 핀처의 서슬 푸른 경고 데이비드 핀처 감독, 『더 킬러 :: The Killer』입니다. # 1. 아무래도 킬러 영화들은 '킬러에게 표적이 된 사람의 서스펜스'라거나 '킬러가 엮인 특별한 사건의 스릴러'이기 마련일 텐데요. 본 작품은 제목에서처럼 킬러가 직업인 사람의 멘탈리티를 중심으로 풀어나갑니다. 혹자는 이야기가 심심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듯도 보이지만, 주인공의 생각과 감각을 추적하는 데 최대한 집중할 뿐 그 외의 타깃이나 사건은 중요하지 않기에 의도적으로 비워두고 있다 판단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위플래시와 라라랜드로 익숙하실 데미안 셔젤의 영화 중에 이라는 작품이 있죠.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을 탐구하고 체험하는 것에 최대한 집중하는 작품이기에, 그가 경험하..

문장의 모습, 소리, 그리고 맛 _ 쥐잡이 사내, 웨스 앤더슨 감독

# 0. 그 양반이 얼~마나 뛰어난 문장가였냐면 말이다~ 웨스 앤더슨 감독, 『쥐잡이 사내 :: The Rat Catcher』입니다. # 1. 로알드 달 원작의 단편입니다. 의 글에서도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넷플릭스가 로알드 달 스토리 컴퍼니(RDSC)를 인수한 후 웨스 앤더슨을 섭외해 진행한 네 편의 결과물 중 하나인 작품이죠. 본론에 앞서 프로젝트의 성격을 짚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시도일 겁니다. 감독 입장에서 한꺼번에 영화를 네 편씩이나 만들어야 한다면, 각각의 작품 이전에 프로젝트 자체에 대해서도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테니까요. 비슷한 프로젝트들의 경우 지난 시대의 작가를 새로운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고, 해당 프로젝트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

Film/Comedy 2023.10.18

분명한 퇴보 _ 발레리나, 이충현 감독

# 0. 넷플릭스 산 K-액션 누아르의 익숙한 그 냄새 이충현 감독, 『발레리나 :: Ballerina』입니다. # 1. 1시간 30여분 내내 과장된 스타일과 피상적인 이미지가 범람합니다. 분홍색과 민트색 네온사인, 네 병의 술과 다른 색깔 빨대, 발레슈즈가 담긴 선물상자, 비밀스러운 sns 대화, 줄 달린 이어폰의 갬성, 잔뜩 기울이다 못해 심심하면 뒤집어지는 화면, 부담스러운 클로즈 업, 어지러운 공간 미술, 착란을 유발하는 눈뽕 테러와, 주요 세일즈포인트였을 GRAY의 사운드까지. 이 무지막지한 물량공세는 그 자체로 진입장벽처럼 느껴질 지경입니다. 누군가 정신이 없다며 중도에 낙오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죠. 그렇게 쏟아부은 이미지 모두는 '모순적인 형용'과 '대결적인 관계'로 구축됩니다. ..

Film/Action 2023.10.08

모성 만세 _ 노웨어, 알베르트 핀토 감독

# 0. 눈부신 모성을 우러르는 눈물겹고 집요하고 처절하고 지독한 신화적 예찬 알베르트 핀토 감독, 『노웨어 :: Nowhere』입니다. # 1. 요 며칠 깜냥에 맞지 않는 어려운 영화를 연이어 보았는데요. 모처럼 날로 먹는 글이 될 것 같습니다. 나이스. 모성 만세! 모성에 대한 영화라 말하기도 뭣한 게 그냥 모성이 전부입니다. 아빠는 잘 모르겠고 아무튼 엄마 최고예요 엄마 사랑해요 노래를 부르는 작품이죠. 제한적인 영화라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노골적입니다. '연약한 여자'였던 주인공이 '강인한 엄마'로서의 모성을 각성한다는 내용이고, 영화는 그 목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일련의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한 폭력적인 장치들, 이를 테면 위험천만한 컨테이너에..

z의 감각 _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 웨스 앤더슨 감독

# 0. 웨스 앤더슨이 선사하는 기상천외함이란 웨스 앤더슨 감독,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입니다. # 1. 오랜만에 넷플릭스에 걸린 단편입니다. 누가 봐도 '그 이름'이 떠오를 법한 독특한 화면 한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오이형의 모습은 관객의 눈길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죠. 영국의 소설가 로알드 달(Roald Dahl)의 동명 단편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인데요. 한편도 아니고 , , 까지 무려 4편이 연달아 공개되었습니다. 참! 잘했어요. 알고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두 해전쯤 로알드 달 스토리 컴퍼니(Roald Dahl Story Company, RDSC)를 넷플릭스가 인수했다는 소식이 있었는데요. 해당 사업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되겠군요. 혹여 문..

Film/SF & Fantasy 2023.10.02

놀랍게도 전현무 아님 _ 빨간 모자, 여행을 떠나 시체를 만났습니다

# 0. 가시가 있는 것들도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있구나 후쿠다 유이치 감독, 『빨간 모자, 여행을 떠나 시체를 만났습니다』입니다. # 1. 일본의 작가 아오야기 아이토의 동명 단편 소설을 실사화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해당 분야에 조예가 없어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흔히 말하는 라노벨(ライトノベル)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듯한 제목이군요. 대충 찾아보니 나름 시리즈물인 듯합니다. 를 시작으로 본작 , 를 지나 올해 8월 나온 신간의 제목 역시 라고 하는데요. 역시, 여행이라면 시체 하나쯤은 만나야 제맛이죠. 그림 형제의 동화 빨간 모자에서 여행자의 이미지를, 머리에 뒤집어쓴 붉은 두건에서 탐정의 이미지를 추출하겠다는 아이디어는 썩 직관적이고 효과적인 듯 보입니다. 고전적인 테마를 끌고 와 만들어 낸 어릴 적 한..

Film/SF & Fantasy 2023.09.20

어쩌면 그 이상 _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호아킴 도스 산토스 외 2인 감독

# 0. 스파이더맨에게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 어쩌면 그 이상. 호아킴 도스 산토스 / 켐프 파워스 / 저스틴 K. 톰슨 감독,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입니다. # 1. 스파이더맨하면 뭐가 떠오르실까요. 북미 만화 특유의 역동적인 그림체가 떠오르실 수 있겠죠. 코믹스에 대한 접근성이 높지 않은 한국 관객들은 실사 영화 시리즈들을 먼저 떠올리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화풍으로 그려낸 작품들도 많거니와, 비단 작화가 아니더라도 레고 블록이나 동물, SD풍 데포르메 따위로 변주한 굿즈 상품들도 즐비하죠. 에피소다마다 아예 다른 설정으로 리뉴얼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라 나이도 성격도 능력도 각양각색인 경우도 많습니다. 멀티버스 메타가 성행한 이후론 진짜 막 나가는 모양새입니다. 빌런이..

Film/Animation 2023.08.20

옳음과 올바름 _ 패러다이스, 보리스 쿤츠 감독

# 0. 합리의 구심력에 저항하는 윤리의 원심력 SF적 상상력을 끌어내리는 현실의 중력 보리스 쿤츠 감독, 『패러다이스 :: Paradise』입니다. # 1. 수명을 거래하는 SF 영화라면 앤드류 니콜의 이 생각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파과적 상상력과 아만다 사이프리드, 저스틴 팀버레이크의 캐스팅으로 이목을 끄는 데까진 성공했었는데요. 태만한 세계관 연출과 어색한 액션, 괴랄한 전개에 방점을 찍는 허무한 결말로 실망스러운 평가를 듣고 만 작품이었죠. 언젠가부터 소재의 자극성과 주연 배우의 미모에 힘입어 [결말 포함] 딱지 붙인 싸구려 유튜브 등지에서 소비되고 있는 듯한데요. 아무리 망작이라지만 썩 가혹하군요. 여하튼 아이템의 창의성이 핵심 동력이라는 점에서 이미 선점한 영화가 있다는 점, 특히 그 영화가..

Film/SF & Fantasy 2023.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