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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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188

시인의 세계 _ 연희, 백해선 감독

# 0. 잔인하고 곤혹스러운 시인의 세계 백해선 감독,『연희 :: Yeon hui』입니다. # 1. 몇몇의 배우들은 삶의 특별한 순간 감정적으로 격해질 때면 습관적으로 거울을 찾는다 한다. 자신이 어떤 감정으로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비춰 기억하기 위함이다. 보통의 사람들이었다면 외면하거나 망각하고 지나쳤을 감정들. 자연인으로서 두 번 경험하고 싶지 않을 끔찍한 순간에조차 그 안에 담긴 모든 추악함까지 들여다보고 끄집어내어 새긴다는 건 마치 맨 손으로 선인장을 움켜쥐는 것만큼이나 아프고, 그래서 고단한 일이다. 어느 대학의 문예창작과 수업. 무명의 시집에 담긴 시를 베껴 교수와 동기들에게 인정받던 학생 연희의 수업에 청강생 강희가 들어오며 단편은 시작된다. 교수의 칭찬과 동기들의 부..

Film/Drama 2025.05.14

작위 부작위의 법칙 _ 바질과 데이지, 정수진 감독

# 0. 모든 작위에 대해 크기는 같고 방향은 반대인 부작위가 존재한다. 정수진 감독,『바질과 데이지 :: Basil and Daisy』입니다. # 1. 성당 문을 빼꼼 들여다보는 오프닝은 안정적이다. 어색한 소녀는 이내 인자한 인상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풀어놓는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를 겪은 화자의 내적 성찰임을 표현하는 작품들의 익숙한 플롯이다. '오이를 붙이고 있었어요, 오이를.' 작품의 인상을 결정하게 될 첫 대사는 힘준 티가 너무 나서 어색하다. '아, 그전에 말씀을 드리면 저는 엄마랑 단 둘이 살아요, 3년 전부터. 아빠는 돌아가셨구요, 되게 오래 아프셨거든요. 그래서 준비를 했었어요, 예상했던 이별이었으니까.' 로 이어지는 도치 4연타가 어색함을 한껏 ..

Film/Drama 2025.04.12

아포페니아의 아포페니아 _ 계시록, 연상호 감독

# 0. 아포페니아를 지적하고 싶었던 교수님의 아포페니아 연상호 감독,『계시록 :: Revelations』입니다. # 1. 아포페니아를 탐구하는 영화가 아니다. 정확히는 '세상 사람들이 아포페니아와 확증편향에 빠져 있다'라는 감독의 진단을 관철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영화다. 목사 성민찬의 캐릭터가 어느 정도 자리 잡히자마자 이야기의 주도권이 형사 이연희에게 홀랑 넘어가버리는 이유다. 연희의 환각과 환청이 민찬과 본질을 공유한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다시 권양래의 실체로 이야기의 흐름이 넘어가버리는 이유다. 대부분의 내러티브는 사람들을 ‘묘사’하거나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수집’함으로써 ‘증명’하는 방향으로 짜여있다. 목사 정국한과 아영의 부모 등 보조적 캐릭터를 배치해 볼륨을 보강..

숨겨둔 카이에 대하여 _ 미키 17, 봉준호 감독

# 0. 더더욱 잔인해진 봉준호와, 숨겨둔 카이에 대하여 봉준호 감독,『미키 17 :: Mickey 17』입니다. # 1. 본론에 앞서 유독 개인적인 견해임을 밝힌다. 어떻게 봐도 좋을 다면성은 봉준호의 가장 큰 매력이고,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수많은 관객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영화를 즐기고 있듯 말이다. 다만 그럼에도 인간에 대해 논하는 영화라 생각지는 않는다. 박찬욱이 인간을 본성을 이겨내지 못하는 가여운 짐승으로 보는 것처럼, 봉준호에게 인간이란 지배적 맥락에 종속된 나약한 장기짝에 불과하다. 그에게 인간이란 발버둥 치는 존재들의 페이소스일 뿐, 언제나 논평하는 건 개개인을 포획하는 지배적 맥락으로서의 환경과 시스템이다. 기념비적인 (2019)의 끝이 탁월함과 별개로 헛헛한 것은..

Film/SF & Fantasy 2025.03.14

모범적인 연착륙 _ 핸섬가이즈, 남동협 감독

# 0. 능숙하고 매끈하게 안착한 오컬트 코미디의 모범사례 남동협 감독,『핸섬가이즈 :: Handsome Guys』입니다. # 1. 호평을 받았던 (2010)을 리메이크한 영화는 잘 짜인 미국식 장르 영화의 맛을 훌륭한 현지화로 이식하는 데 성공한다. 이민재 감독의 (2019)이나 신정원 감독의 (2020)과 비슷한 야심을 가진 작품으로, 개인적으론 두 작품보다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 평가하고 있고 세간의 평도 크게 다르진 않은 듯하다. 거친 표현을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당장 포스터만 봐도 안다. 유달리 세월을 정통으로 처맞은 이성민과 이희준의 섹도시발 표정을 보고도 주먹구구식으로 흘러가는 병맛 코미디 외에 다른 장르를 기대했다면 그건 관객이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놀란 건 표현..

Film/Comedy 2025.02.26

밥 짓는 밤 _ 밥정, 박혜령 감독

# 0. 밥 한끼에 추억과밥 한끼에 사랑과밥 한끼에 쓸쓸함과밥 한끼에 동경과밥 한끼에 시와밥 한끼에 어머니, 어머니,        박혜령 감독,『밥정 :: The Wandering Chef』입니다.     # 1. 식사는 놀랄 만큼의 고봉밥과 짭조름한 반찬 몇 가지다. 간식은 쌀알을 튀긴 것이나 밥을 쪄서 치댄 것이고, 마실 것은 밥을 엿기름에 삭힌 것, 술은 누룩에 삭힌 것을 먹었으니 밥심으로 살아낸 사람들이라 해도 무리는 없다. 검은색 옷을 즐겨 입는 요즘 사람들을 보노라면 백의(白衣)의 민족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백반(白飯)의 민족이라는 흔적은 여전히 굳건하다. 반가운 첫인사는 밥 먹었냐는 것이고, 아쉬운 끝인사는 언제 밥 같이 먹자 말하는 사람들의 나라. 끔찍한 범죄 용의자에게 건네는 원망의 한마..

해석과 권력 _ 피사체, 하태민 감독

# 0. 해석할 수 있는 권력에 반기를 들다 하태민 감독,『피사체 :: Subject』입니다. # 1.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해서 매번 눈에 불을 켜고 사진을 찍는 건 아니다. 단지 카메라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짐을 느끼는 게 즐겁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주변의 사물들을 조금 더 몰입해서 보게 되는 데, 그것이 마치 세상의 해상도를 높이는 듯한 착각을 준달까. 처음엔 건물, 꽃, 간판, 장식, 음식 따위만 찍어도 즐겁다. 점점 구도나 화각, 렌즈, 보정도 달리해보고, 같은 사물이 빛의 드라마틱한 효과에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에 매료되는 것도 즐겁지만, 결국엔 예정된 갈증에 도달한다. 역동성이 없는 사진들을 돌려 보는 동안의 공허함. 살아있는 사람의 ..

Film/Horror 2025.01.26

실망입니다 _ 더 납작 엎드릴게요, 김은영 감독

# 0. 기대가 배신되면 관객은 반드시 실망한다.        김은영 감독,『더 납작 엎드릴게요 :: Will you please stop, please』입니다.     # 1. 사람은 누구나 선입견을 가지고 있고 영화를 대하는 관객 역시 다르지 않다. 제목의 개성이든, 시놉시스의 창의성이든, 감독의 스타일이든, 배우의 명성이든, 박스오피스의 성적이든, 작품의 규모든 그 근거가 뭐가 됐든 말이다. 이때의 선입견은 다시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예측이고 다른 하나는 기대다. 예를 들어 조커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 가정할 때 '배트맨도 나오지 않을까?'라는 것은 예측이고 '겁나 멋진 조커가 나를 가슴 뛰게 하겠구나!'라는 건 기대다. 예측은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예측한 대로 배트맨이 나온다 해서 문제 될 ..

Film/Drama 2024.11.28

빚지지 않는 편안함 _ 극한직업, 이병헌 감독

# 0. 수중엔 100만 원밖에 없다. 이병헌 감독,『극한직업 :: Extreme Job』입니다. # 1. 부모님께 150만 원짜리 안마의자를 선물하려 하는 데 수중엔 100만 원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단순하게는 부업을 하면 된다. 힘들고 피곤하겠지만 정직하게 50만 원어치 더 일해서 소득을 늘릴 수만 있다면야 뭐, 이상적이다. 아니면 부모님께 50만 원을 빌릴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당신을 위한 선물이니 말이다. 양해를 구할 염치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나중에 150만 원짜리 안마의자를 돌려드리면 기뻐하실 게 분명하다. 상황을 조금 바꿔보자. 이번엔 영화감독이다. 당신의 시나리오 초안엔 100만큼의 재미가 담겨있지만 관객에게 150만큼의 재미를 선사하려 한다. 어떻게 하..

Film/Comedy 2024.11.24

육조거리의 무녀 _ 전, 란, 김상만 감독

# 0. 붉게 타오르는 분노와 푸르게 침몰하는 희망 사이에서 체제를 논할 뻔하다. 김상만 감독,『전, 란 :: Uprising』입니다. # 1. 주인공은 강동원의 천영도, 박정민의 종려도 아니다. 신분제를 포함한 조선의 법도라는 체제(體制) 그 자체다. 인물들은 체제를 대하는 각기 다른 방식들로 분류되어 배치되어 있고, 액션은 체제에 대응하는 방식들 간의 갈등 관계를 물리적으로 대신할 따름이다. 때문에 보다 보면 전혀 다른 장르임에도 마틴 맥도나의 (2022)가 계속 머리에 맴돈다. 허무를 대하는 각각의 방법론을 개인에 투사해 그 관계를 관찰했던 것과 본 작이 체제를 대하는 방식은 제법 유사하다. 허무를 놓고 절친이 피 흘리던 영화의 제목을 이니셰린의 벤시라 한다면, 체제를 놓고 절친..

Film/Action 2024.10.18

시점의 전환 _ 밤낚시, 문병곤 감독

# 0. 사물과 생물을 구분 짓던 과거를 지나 마침내 펼쳐진 새로운 미래 문병곤 감독,『밤낚시 :: NIGHT FISHING』입니다. # 1. 전기 털어먹고 다니는 미상의 비행체와, 정체불명의 낚시꾼이 벌이는 하룻밤 사투다. 고작 13분짜리에 손석구를 태운 영화는, 숏폼 트렌드에 발맞춰 멀티플렉스에 정식 상영된 단편으로 이목을 끌었다. cj뿐 아니라 현대자동차와 협업한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염치도 없이 아이오닉 5가 크레디트에 올라가는 게 뻔뻔하긴 하지만,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작위적이지 않게 녹아 있어 광고 영화 특유의 불쾌감은 덜 하다는 것이다. 〈세이프〉(2013) 이후 오랜만에 돌아온 문병곤 감독의 야심은 '시점의 전환을 통한 인식의 확장'이다. 영화는 일관되게 생물과 사물을 ..

Film/Horror 2024.10.06

그리움에 대하여 _ 이름 없는 다방에서, 정수지 감독

# 0. 이제 다시는 싫어. 웃는 것도 싫어졌네. 정수지 감독,『이름 없는 다방에서 :: Heyday』입니다. # 1. 레트로 잡지와 오려 모은 스크랩. 십수 년은 더 돌아갈 금성사 선풍기. 한 장씩 뜯어 넘기는 달력. 엔틱 가구와 레이스 커튼. 둥근 다이얼의 전화기. 무자비한 괘종시계. 푹신하면서 불편했던 신기한 소파. 이젠 생소해져 버린 커피 배달.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던 보자기. 때 묻은 팔토시. 분홍색 머리띠. 노란색 드레스. 노른자 한 알 곁들인 모닝커피. 200자 원고지 위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 꼬깃한 종이에 수기로 쓴 주소. 팔각 성냥. 담배 연기. 이 모든 것들로 어우러진 1986년의 이름 없는 다방. 우리의 다방은 당신의 스타벅스보다 아름답다. 시간과 공간은 이야기와..

Film/Drama 2024.09.02

전갈과 개구리 _ 올드보이, 박찬욱 감독

# 0. 짐승으로 태어나 버린 외로운 존재들 박찬욱 감독,『올드보이 :: Old Boy』입니다. # 1. 박찬욱에게 인간은 이성과 본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외롭고 괴로운 존재다. 이때의 이성이란 논리나 도덕, 문화, 규칙, 격식, 교양 등 인간이 스스로 만든 온갖 규범을 통할한다. 본성은 사랑, 믿음, 증오, 폭력, 모멸, 질투 등 근원을 알 수 없는 마음의 변화를 모두 포괄한다. 인간은 이성을 활용해 본성을 통제함으로써 스스로 동물과 구분되는 특별한 존재라 주장하지만, 박찬욱에게 이는 스스로 고결하다 느끼기 위해 만든 허구적 신화에 불과하다. 팬들에게 흔히 복수 3부작이라 일컬어지는 (2002), (2003), (2005)는 물론 (2009)와 (2016), 최근의 (2018)과 (..

회장님 아들인가 _ 크로스, 이명훈 감독

# 0. 쓸데없이 친절한 시대착오적 코미디가 몸 둘 바 모를 정도로 황송하다. 이명훈 감독,『크로스 :: Mission: Cross』입니다. # 1. 야구에는 지명타자(Designated Hitter, DH)라는 제도가 있다. 특수포지션인 투수들을 부상 위험에서 보호할 겸, 낭비되는 타석도 없앨 겸 대신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를 말한다. 당연하게도 투수를 대신해 들어가는 DH는 수비부담이 없기에 보통 '타격은 상위타석에 들만큼 탁월하지만 수비에 어려움을 겪는 베테랑 타자'가 서게 된다. 팀 입장에선 에이징 커브가 온 스타 선수의 남은 타격 능력을 뽑아 먹을 수 있으니 이득이고, 선수 입장에선 타자로서 커리어를 이어나갈 수 있으니 역시 이득이다. 무엇보다 한여름 뙤약볕에 더그아웃 그늘에 ..

Film/Action 2024.08.12

상상하는 것 _ 번개가 떨어졌다, 김지홍 감독

# 0. 영화란 나의 불완전함을 치열하게 상상하는 것이다. 김지홍 감독,『번개가 떨어졌다 :: Lightning Fell』입니다. # 1. 번개에 맞아 식물인간으로 지내다 깨어난 남자가 역할 대행 서비스를 신청한다는 내용의 영화는, 불행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 이면에 영화에 대한 영화로 보인다. 실제 영화 속에 담긴 장면들은 남자가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여자와 함께 연기하는 순간들로 점철된다. 캐스팅과 디렉팅과 리허설과 본 촬영이 축약된 모습은 미니멀리즘적인 마이크로 시네마다. 영화 속에 실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배우 최기욱은 번개 맞은 남자를 연기할 뿐 남자가 아니다. 고등학생을 연기하는 남자는 고등학생이 아니다. 그가 기억하는 누나와의 기억이 정확한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후반부..

Film/Drama 2024.08.04

쉬운 길 찾기 _ 로봇이 아닙니다., 강예솔 감독

# 0. 쉬운 길을 어려운 일인 양 주행한다.        강예솔 감독,『로봇이 아닙니다. :: I’m not a Robot.』입니다.     # 1. 문장형의 제목은 썩 익숙하다. reCAPTCHA 테스트의 문구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리캡챠는 봇을 필터링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되지만, 오히려 인간이 로봇이 아님을 시험받는 구조로 짜인 테스트다. 역설적이게도 시행하는 인간의 인간스러운 선택과 인간스러운 움직임을 심사하는 주체는 온전히 프로그램이고 말이다. 목적이 목적이니만큼 리캡챠를 누르다 보면 애매한 시험들도 자주 만나게 된다. 계단을 누르라는 데 살짝 삐져나온 칸은 골라야 하는 걸까, 고르지 않아야 하는 걸까. 표지판을 골라야 하는 데 표지판의 봉은 골라야 하는 걸까, 고르지 않아야 하는 걸..

Film/SF & Fantasy 2024.07.06

죄 많은 그녀 _ 보속, 양재준 감독

# 0. 보속(補贖, Satisfactio)은 죄인이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성사 가운데 하나인 고해성사를 보고 나서 실천하는 속죄 행위⁽¹⁾를 말한다.        양재준 감독,『보속 :: Sinner』입니다.     # 1. 성당 복지시설에서 일하는 성아(강서희)는 우연히 지갑을 주웠고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알지만 돌려주지 않았다. 미워하는 사람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죄를 고해한 그녀는 신부로부터 이틀 간의 봉사를 보속으로 내려받는다. 좋은 일을 하려 하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배려 없는 화장실 청소는 신도들을 불편케 한다. 밥을 산다 해도 사람들은 께름칙하다. 술을 강권하는 것도 불편하다. 결제를 하려 하지만 잔고가 부족해 다른 사람이 대신 계산한다. 술에 취한 나연(박세재)을 ..

Film/Drama 2024.05.24

낮은, 낮에, 낮이 _ 서울의 낮은, 정수진 감독

# 0. 어린 시절의 가정 폭력으로 매일 악몽에 시달리던 여자는 결국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시도는 실패하고, 도리어 견적을 알아보기 위해 전화를 한 특수청소 회사에 들어가 청소부가 된다.        정수진 감독,『서울의 낮은 :: The Noon of Seoul』입니다.     # 1. 말 맛이 좋다. 제목 말이다. 고독사를 소재로 한 영화는 그 제목처럼 '낮은' 곳의 이야기다. 각자의 사연으로 고립된 끝에 외롭게 명을 달리 한 사람들, 그래서 구조의 목소리가 사회적 경제적 의미의 수직적 깊이 때문에라도 위에 닿지 않는 사람들은 영화가 정의하는 고독사다. 시간으로서의 낮이기도 하다. 의외로 주택가는 '낮에' 더 한산하다. 다들 학교나 직장에 가고 나면 때론 한산하다 못해 서늘하기까지 하..

Film/Drama 2024.05.18

인생의 대관람차 _ 내가 그리웠니, 이경원 감독

# 0. 그립다 그리워 그립다 그리워        이경원 감독,『내가 그리웠니 :: AKA 5JO』입니다.     # 1. 독립 영화에 출연한 신인 배우가 갑자기 뜰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소년 가장이 가족을 건사하듯 라이징 스타의 명성에 이끌려 초기 작품들이 건져 올려지곤 한다. 2019년에 개봉한 단편 는 SNL의 주기자로 사랑받은 배우 주현영의 스크린 데뷔작이다. 이경원 감독, 조정민, 주현영 주연의 영화는 옴니버스 장편 의 수록작 중 하나다. 은퇴한 랩 스타 오조와 그의 오랜 팬 현영이 우연히 대관람차 같은 칸에 탄다. 처음엔 머쓱하니 불편해하던 오조는 현영의 호의에 서서히 마음을 열며, 음악을 관둘 수밖에 없었던 아픈 과거를 털어놓는다. 불행한 유년기로부터 도피하듯 선택한 랩 스타라는 정체성에..

Film/Drama 2024.05.08

간택 _ 엘레나, 정민지 감독

# 0. 아니, 솔직히 억울합니다.        정민지 감독,『엘레나 :: Elena』입니다.     # 1. 익숙한 아파트 단지. 우이천 산책로. 맑은 하늘 아래 평화로이 흐르는 강물. 단아한 징검다리. 회색 옷의 주인공. 엘레나. 관객에게 인사하려는 찰나 어깨를 부딪히는 누군가. 사과하지 않고, 옆을 지나는 다른 사람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어깨에 묻은 작은 먼지를 덜어내는 깔끔함. 나 요새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 이름은 순자. 그녀에겐 짝이 없다는 소식을 알아냈어. 친절한 웃음의 순자는 중년의 여성. 다리 아래로 시퀀스가 옮겨간다. 반만 먹고 남겨진 옥수수. 엘레나와 비슷한 회색 옷을 입은 세 명의 친구. 알갱이를 나눠주며 대화한다. 산책하는 개? 사료 먹고 편하게 사는 애들 질투하는 거 아니야..

Film/SF & Fantasy 2024.04.08

이슬 _ 은교, 정지우 감독

# 0. 시들어 메마른 꽃은 꿀을 탐하는 건 참을 수 있어도 이슬을 탐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정지우 감독, 『은교 :: Eungyo』입니다. # 1.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 얼마나 다른 사람일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10년 전에 비해 나는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된 걸까 하고 말이죠. 아무래도 타향살이 고학생이었던 당시보다 주머니 사정은 조금 나아졌습니다. 본업에서의 직무능력이나 위기가 있을 때 되새겨볼 경험치도 조금은 늘었죠. 상황에 맞춰 어른 연기를 하는 것에도 조금은 익숙해진 듯합니다만, 그 정도를 제외하면 잘 모르겠습니다. 졸업반 선배가 되어 스무 살 신입생 앞에서 억지 조언을 짜내던 순간의 기분과, 삼십 대 중반이 되어 사회초년생 후배들 앞에서 어른 흉내를 내는 지금의 기분은 크게..

Film/Drama 2024.02.18

낡은 선풍기의 표정 _ 패닝, 전예진 감독

# 0. 무더운 여름날, 시각장애인 해담은 고장 난 선풍기를 고치기 위해 수리기사를 부른다. 전예진 감독, 『패닝 :: Fanning』입니다. # 1. 해담은 시각장애인입니다. 낡은 선풍기가 고장 났다는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파생된 몇몇의 사건들과, 그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주인공의 감정을 진지하면서도 담백하게 그려낸 작품이죠. 서사를 들여다보기 앞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배치와 구도'입니다. 선풍기를 단순히 소재로 소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간 전체로 확장시키려는 듯 보이거든요. 수리기사, 윗집여자, 집주인. 세 명의 침입자들은 공통적으로 거실 중앙을 차지합니다. 해담은 수리기사의 시퀀스 동안에는 3시 방향의 침실에, 윗집여자의 시퀀스 동안에는 7시 방향의 거실 구석에, 집주인의 ..

Film/Drama 2024.01.30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_ 믿을 수 있는 사람, 곽은미 감독

# 0. 박한영은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곽은미 감독, 『믿을 수 있는 사람 :: A Tour Guide』입니다. # 1. 정착을 꿈꾸는 20대 이방인 한영의 서울 생존기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믿음'이라는 개념에 대한 고찰이기도 합니다. 믿음은 통상 신뢰, 신앙, 신념, 신용 등 다양한 의미를 가지는데요. 작품에서는 신뢰와 신용을 선택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신뢰는 개인 간 주고받는 다정함에 대한 기대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겁니다. 신용은 사회인으로서 합의된 사항을 충실히 이행하는 도리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죠. 영화는 북한을 신용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로, 탈북민은 신용을 경험해 보지 못해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한국을 외국인 손님들에게 소개하는 일이 영광스럽..

Film/Drama 2024.01.26

소외된 자 기댈 곳 믿음뿐일지니 _ 신세계로부터, 최정민 감독

# 0.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최정민 감독, 『신세계로부터 :: From the New World』입니다. # 1. 화신교 교주 신택과 신도 명선은 탈북자입니다. 화신교란 화신님을 믿음으로 모시면 죽은 사람을 부활시킬 수 있다는 교리를 가진 작은 종교죠. 신택은 신도를 모으기 위해, 명선은 죽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경남 고성의 한 마을에 정착하는 데요. 그 과정에서 벌어진 마을 사람들과의 갈등을 서늘하게 그린 미스터리 오컬트 드라마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겁니다. 주인공 명선은 배우 정하담이 맡았습니다. 독립영화 쪽에서는 착실히 인지도를 쌓고 있는 배우인데요. 대중에겐 에서 질곡동 살인사건의 용의자 홍산호의 연인으로 익숙하지 않으실까 싶군요. 작품의 전개는 비틀린 부조리로 점철됩니다. 탈북자가 자유..

Film/Drama 2024.01.22

민규는 민규 _ 당신도 주성치를 좋아하시나요?, 강동완 감독

# 0. 우디 앨런을 좋아하시나요? 강동완 감독, 『당신은 주성치를 좋아하시나요? :: Do you like Chow Shing Chi?』입니다. # 1. 여친한테 차이고 찐따처럼 혼자 영화 보던 민규는 불쑥 홍콩 여행을 떠납니다. 숙소에 막 도착한 민규는 침대에 기대 잠시 쉬려 하는데요. 최강희병 말기 환자 같은 여자 하나가 냅다 들이닥치더니 자기 방이라 우기기 시작합니다. 알고 봤더니 예약이 꼬여 같은 방을 둘 다 잡았던 것이었죠. 졸지에 이스라엘 당한 팔레스타인 꼴이 된 민규는 서윗하게 방을 빼기로 하는데요. 그냥 물러서기엔 본전 생각이 났던 건지 시은에게 따라다녀도 되냐 제안하고, 여자는 승낙합니다. 시은의 전직은 가이드였던 걸까요. 어지간한 패키지 투어보다 코스가 깔끔합니다. 세기말 홍콩 영화들..

Film/Drama 2024.01.16

이연복의 피카츄 돈까스 _ 외계+인 2부, 최동훈 감독

# 0. 별 수 있나요. 보긴 봐야죠. 최동훈 감독, 『외계+인 2부 :: Alienoid part.2』입니다. # 1. 한 번에 촬영된 시리즈이니만큼 애정을 주기 힘든 유치한 스타일이라는 전편의 약점은 어쩔 수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편 대비 훨씬 정돈된 티가 나기도 하고, 밀린 숙제를 열심히 해치우고 있고, 코미디의 분량도 크게 늘어 설득력이 압도적으로 개선된 후편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코멘트하자면 1부는 짝퉁 전대물, 2부는 짝퉁 어벤저스라 평해도 크게 할 말은 없는 거겠죠. 그러니 많이들 하고 계신 지루한 동어반복은 생략하도록 하구요, 대신 프로젝트 전체에 대한 소감을 짧게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화에도 저마다 주인이 있습니다. 모든 영화들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같은 아이돌 립서비스..

Film/SF & Fantasy 2024.01.14

극한신파 _ 3일의 휴가, 육상효 감독

# 0. 지금까지 이런 엄마는 없었다. 이것은 모성인가 학대인가. 예에~ 3일의 휴가입니다~ 육상효 감독, 『3일의 휴가 Our Season』입니다. # 1. " 한평생 딸을 위해 희생하다 혼자 쓸쓸하게 죽은 엄마가 딸이 정신병 걸린 걸 알고 죽어서까지 힐 넣어주고 사라진다. " 영화는 위의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그나마의 전개도 마지막 10여 분에 바짝 몰려 있는 터라, 예정된 결말에 도달하기까지의 지난한 시간들은 감정적 이완과 수축의 반복이라는 단조로운 구성으로 점철되어 있죠. 이때의 수축이라 함은, 엄마는 희생하고 딸은 대못 박는 회상장면들을 통해 관객을 심정적으로 옥죄는 것을 말하구요, 이완은 밥 먹는 장면과 조연들에게 기계적으로 배분된 몇몇의 코미디를 통해 느슨하게 풀어주는 과정을 뜻합니다. ..

Film/Drama 2024.01.08

세 번의 문답 _ 듣보인간의 생존신고, 권하정 / 김아현 감독

# 0. 우리는 이 가수를 불쑥 찾아갔었다. 그리고 뮤직비디오를 함께 찍었다. 권하정 / 김아현 감독, 『듣보인간의 생존신고 :: Notes from the Unknown』입니다. # 1. 관객이 당장 만나게 되는 영화는 한 편이지만 전체 프로젝트를 생각하면 총 세 개의 영상이 존재합니다. 의 뮤직비디오, 의 뮤직비디오, 그리고 지금 이야기하려는 다큐멘터리 가 바로 그것이죠. 각각은 그것이 음악이 되었든, 철학이 되었든, 태도가 되었든, 입장이 되었든 싱어송라이터 이승윤의 창작물에 대한 피드백으로서의 성격을 가집니다. 아티스트는 자신의 의도 여하와 무관하게 팬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면에서 일종의 질문을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텐데요. 그런 의미에서 각각의 영상은 그 자체로 온전한 작품임과 동시에 권하정..

차라리 채린이었다면 _ 지옥만세, 임오정 감독

# 0. 차라리 채린이 주인공이었다면 어땠을까.        임오정 감독,『지옥만세 :: Hail to Hell』입니다.     # 1. 영화는 스스로를 모순된 이미지의 충돌로 소개합니다. 오프닝의 생일 축하한다는 말에 담긴 차가운 폭력은 전시적이죠. '지옥'이라는 부정적 어휘와 '만세'라는 긍정적 어휘를 붙여둔 제목은 작품의 방법론을 데뷔작다운 패기로 선언합니다. 모순된 이미지가 충돌하는 동안 다양한 위계의 딜레마들이 성실하게 적층 됩니다. 삶과 죽음, 낙원과 지옥, 복수와 용서, 고립과 연대, 가해와 피해, 맹신과 불신 등의 딜레마들과 그 딜레마적인 상황에 놓인 인간에 대한 호기심으로 견인해 나가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죠. 두 주인공에게 죽음은 절망이라기보다는 동경에 가까워 보입니다. 두 사람의 모습..

배우 양조아 _ K박사의 연구, 박지혜 감독

# 0. 짜릿해! 늘 새로워. 공짜인 게 최고야! 박지혜 감독, 『K박사의 연구』입니다. # 1. 2023년 12월 16일. 예술의 전당에서 라는 이름의 공연영상플랫폼을 오픈합니다. 월 2,500원의 저렴한 가격으로 클래식, 발레, 연극, 오페라, 무용, 국악 등 고품격 콘텐츠를 제공하는 일종의 문화 예술 전용 ott서비스라는 건데요. 심지어 내년 12월까지 1년간의 시범 운영 기간 동안은 무료로 공개된다는군요. 개꿀. 공개된 지 며칠 되지 않아 아직 작품이 많이 걸려있지는 않습니다만, 문외한도 솔깃할 법한 양질의 작품들은 충분해 보입니다. 연극 , , , 라거나, 발레 , , , 국악 등도 흥미롭구요. 클래식 기반의 음악듀오 노래서점의 영상들이라거나, 노부스콰르텟의 다양한 연주들, 혹은 양손프로젝트 단..

Film/SF & Fantasy 2023.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