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돌려 막기의 끝은 어지간하면 파산이거든요.

시몬 스톤 감독,
『우먼 인 캐빈 10 :: The Woman in Cabin 10』입니다.
# 1.
폭설로 고립된 산장, 망망대해 외딴섬, 멈추지 않고 달리는 기차. 클로즈드 서클이다. 외부와 단절된 채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진 의문의 살인 사건을 다룬 미스터리는 이미 충분히 검증된 장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필두로, 오리엔트 특급 살인, 아서 코난 도일의 바스커빌 가문의 개나 사라진 특별열차는 물론, 히치콕이 영화화하기도 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열차 안의 낯선 자들도 넓은 의미에서는 클로즈드 서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으로 잘 알려진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면산장 살인사건 같은 작품들도 마찬가지. 물론 소설을 진득하게 읽는 걸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겐 코난이나 김전일이 먼저 떠오를 수도 있겠다.
루스 웨어의 동명 소설 The Woman in Cabin 10 (2016)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명망 있는 탐사보도 전문 기자 로라 블랙록이 호화 파티에 초청되며 시작된다. 휴가와 취재를 겸해 이너서클의 유람선에 승선한 첫날밤, 로라는 옆 객실인 10호실의 여성이 칠흑 같은 바다로 던져지는 것을 목격한다. 놀란 그녀의 신고에도 불구하고 선내 모든 승객과 승무원의 신원이 확인되며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고. 심지어 10호실은 내내 비어있었다는 주장까지 나오자 오히려 그녀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가 커져만 간다. 로라는 과거 트라우마로 인한 정신 상태마저 의심받는 상황에서 홀로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라는 시놉시스고, 날이 쌀쌀해지기 시작한 11월 즈음 이런 미스터리 추리물은 보통 최고의 선택이다. 아니, 최고의 선택일 줄 알았다.

# 2.
설명했듯 기본적인 시나리오는 미스터리 추리물이다. 주인공의 옆방 즉, 10호실의 여인은 누구일까. 현실일까 아니면 주인공의 트라우마로 인한 환각일까, 실제 살인이 있었다면 그를 죽게 만든 사람은 누구이고 몇 명일까. 미스터리의 여인을 죽게 만든 동기는 무엇일까. 별개로 주인공을 공격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10호실의 살인사건 용의자와 같은 사람이긴 할까. 라는 다층적 미스터리가 뒤엉켜 있고, 그것을 관계적, 직업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고립된 사람의 옥죄어진 심리 묘사를 곁들여 추적하는 후더닛 플롯이다. 특히 주인공 로라의 트라우마와 그녀의 목격담 사이의 모호한 경계는 작품만의 경쟁력임에 분명하다. 보통의 추리물은 신용할 수 있는 화자와 함께 움직이는 것에 반해, 우먼 인 캐빈 10의 관객은 로라의 시점에 동화되면서도 끊임없이 그녀를 의심할 수밖에 없고, 그 불안이 드러날 때마다 여타 추리물에서는 제공받기 힘든 심리적 서스펜스를 함께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감독은 시나리오의 잠재력을 무력하게 포기한다. 너무 쉽게 로라의 목격이 트라우마와 무관한 진실임을 확인시키는 것은 물론, 사건의 내막과 미스터리 여인의 정체, 살인 동기까지 스스로 자백해 버린다. 추리의 밀도로 해결했어야 할 미스터리의 과제는 태만한 액션 스릴러로 면피한다. 후반부 쫓고 쫓기는 추격과 뜬금없는 복도 몸싸움, 고난도 겨울 수영 따위가 연이어 연출되는 건 미스터리로부터 달아나려는 속셈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물며 액션 스릴러의 완성도라도 괜찮냐 하면 그렇지도 못하다. 액션 스릴러가 감당했어야 할 갈등 해소의 쾌감은 적당히 총 든 비서에게 떠넘긴 후, 이야기의 마무리는 다시 드라마에 전가한다. 주인공 대신 죽은 전 남자친구는 영화의 불합리를 죄책감의 형태로 소각하는 배역일 뿐이고, 그의 억지스러운 퇴장은 몇몇의 저렴한 플래시백 감성으로 퉁친다. 사람 죽게 만들고 공문서 위조를 획책한 공범의 도덕성은 가난한 싱글맘이란 정체성으로 정당화한 후 행복한 문자 메시지로 무마한다. 특히 황당한 것은 로라를 향한 후배 기자의 찬사다. 이 영화가 대체 언제부터 저널리즘을 연설하는 영화였나.
장르 믹스는 다양한 장르를 무조건적으로 가져와 나열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다양한 장르를 가지고 논다 한들 각각의 장르마다 최소한의 완결성은 있어야 하지만 영화는 그 원칙을 망각하고 있다. 미스터리는 스릴러로 짬처리하고, 스릴러는 드라마로 짬처리하는 회피적인 영화. 각 장르의 과제를 다른 장르로 해결하는 건 일종의 돌려 막기와 다르지 않고, 대책 없는 돌려 막기의 끝이 파산이라는 건 누구나 안다.

# 3.
캐릭터 놀음일 수밖에 없는 플롯에서 캐릭터의 매력이 죽는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주인공을 비롯한 몇몇을 제외하면 변별조차 어려울 정도로 평면적이라 당황스럽다. 주인공이 궁지에 몰리는 과정 묘사, 다른 승객들과의 관계 형성 묘사 양 측면 모두 크게 부족하다. 주변 인물들은 죄다 기계적으로 로라를 불신하는 듯 보이고,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손쉽게 계층을 동원하고 있다는 인상마저 든다. 사실 계급 코드는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깊게 파고들 수도 있었을 주제다. 공간의 폐쇄성 자체를 상류층의 위선과 비밀을 지키기 위해 외부인을 고립시키고 가스라이팅하는 압력으로 묘사할 수 있었다면, 단순히 저들은 부자라서 우리말 안 들어준다 떼쓰는 것이 아니라, 연기된 우아함과 폭압적인 시스템의 대비를 활용한 깊이 있는 스릴러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클로즈드 서클은 인물들에게 개성을 부여하고 북돋는 데 최적화된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죄다 오만하고 위선적인 캐릭터성을 공유하는 npc처럼 받아들여진다는 건 시나리오에 대한 감독의 기초적인 이해능력을 의심하게 한다. 결국 좋은 미스터리가 될 용기가 없는 영화다. 흥미로운 질문을 던져놓았음에도 그 질문이 너무 어려워지기 전에 스스로 정답을 외쳐버리고서 관객의 손을 잡고 안전한 액션 활극의 세계로 도주하는 영화, 그 끝에 구색 좋은 난잡한 교훈들로 봉합하기 급급한 그렇고 그런 넷플릭스 영화랄까.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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