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Latest Post

프레젠스 (2024, dir. 스티븐 소더버그): 카메라

# 0. 대답은 제목에 있다. # 1. 그래서 유령이 누군데? 대부분의 관객은 이 질문을 붙들며 영화를 즐겼을 거예요. 집 안에는 이상한 시선이 돌아다니고, 갑자기 물건이 떨어지고, 누군가는 수상한 낌새를 느끼며, 마지막 특정한 결론을 반전으로 제시하고 있으니까요.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이 글에선 조금 다른 것에 집중해 보려 해요. 누가 이 드라마를 결정하는가라는 질문과 그 답이죠. 영화 속에는 세 가지 해석이 공존해요. 첫 번째는 현실적인 설명이에요. 겉으로 드러나는 물리적인 사건에만 집중하는 거죠. 책이 정리된 건 클로이가 착각한 걸 수 있어요. 벽장이 무너진 건 낡았기 때문일 수 있고, 컵이 쏟아진 것도 우연일 수 있어요. 방이 통째로 흔들리는 건 많이 수상하지만, 집의 구조적 문제이지 ..

Horror 2026.06.06 3

더 하더 데이 폴 (2021, dir. 제임스 새무얼): 오독

# 0. 좋은 서부극은 죽음과 동행한다. # 1. 고전 서부극의 낭만은 풍요로운 시대의 낭만과 달라요. 현대 로맨스나 어드벤처의 낭만은 여유에서 나오지만, 서부극의 낭만은 결핍에서 비롯되요. 내일 살아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세상에서 총 한 자루와 말 한 필이 전부인 사람들은 자신을 신화로 포장해야 해요. The Searchers, Rio Bravo, Once Upon a Time in the West, 심지어 Unforgiven 같은 후기 서부극까지 죄다 허세를 부리고 있는 이유예요. 모두가 모두를 공격할 수 있는 야만과 무법의 시대이기에, 허세마저도 생존 무기로 끌어 써야 했달까요. 그래서 많은 서부극의 인물들은 실제 능력보다 평판으로 살아가요. 상대가 저 사람은 위험하다 믿으면 총을 뽑..

Action 2026.06.04 1

Mystery & Thriller

more

소나티네 (1993, dir. 기타노 다케시): 자기 소거의 비애

# 0. 아직 오지 않은 소멸을 향한 노스탤지어 # 1. 소나티네에는 목적이 없어요. 지극히 목적지향적인 폭력은, 그 목적의 부재를 드러내기 위한 반동일 뿐이에요. 모두는 목적이 상실한 인간들이 반복하는 놀이처럼 보여요. 생존 투쟁이 전부인 것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야쿠자들조차 그 움직임에 생의 긴장감이 없어요. 야쿠자 영화는 흔히 조직 간 권력투쟁과 남성적 의리를 중심으로 구축되잖아요. 소나티네는 그 장르 문법을 일거에 비워버려요. 움직이지만 방향감은 없어요. 조직의 명령도, 복수도, 관계도 심지어 생존도 진지한 동기가 되지 못해요. 조직은 존재하지만 중요하지 않고, 의리는 무의미한 형식일 뿐이에요. 야쿠자는 거대한 사회악도, 비극적 영웅도 아니에요. 단지 부랑자에 불과해요. 무언가를 원해서 ..

Mystery & Thriller 2026.05.16 0

하우스메이드 (2025, dir. 폴 페이그): 내 친구 시드니

# 0. 내 친구 시드니랑 또 속편 찍어야 된단 말이에요. # 1. 오늘도 폴 페이그는 사랑이 고파요. 평생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에게 추파를 던져온 폴 페이그는 신작에서도 여성들을 향한 아첨에 여념이 없어요. 베스트셀러 원작 소설의 팬이시라구요? 미안해요. 미스터리 스릴러는 구색일 뿐이니까 기대하지 마세요. 시작부터 잔뜩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는 니나 보다 내내 기괴할 정도로 다정한 엔드루가 흑막일 거라는 건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구요? 그렇게 눈치가 빠르면 애초에 이 영화를 보지 말지 그랬어요. 영화 내내 클리셰를 누더기처럼 가져다 이리저리 기워둔 건, 당신네처럼 징그러운 관객들에겐 관심이 없다는 뜻이었어요. 시드니 스위니의 끝내주는 몸매 카메라로 핥아 대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니까 걸리적거리며 방해..

Mystery & Thriller 2026.05.12 0

추락의 해부 (2024, dir. 쥐스틴 트리에): 그림자놀이

# 0. 이미지와 사운드가 추락한 설원에 드리운 진실의 그림자 # 1. '해부되는 추락'은 둘이에요. 사무엘의 육체와, 가족이라는 관계죠. 전자의 해명을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 진짜 해부되는 건 후자예요. 아무리 법정 논쟁이 진행된다 하더라도 남편의 죽음이 달라지진 않고, 남편의 죽음을 둘러싼 해석의 총합으로서 가족의 추락에 대해 해부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쥐스틴 트리에의 스릴러는 사건과 해석, 사실과 진실에 대한 영화인 거예요. 직관적인 시각적 인상은 새하얀 설원 아닐까요.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 백색의 공간은 모든 흔적을 보존할 것만 같아요. 파고의 설원이 그러했던 것처럼요. 그렇지만 허상이에요. 그런 숨김없는 설원에서의 사망 사건조차 진실은 알 수 없어요. 설원은 모든 것..

Mystery & Thriller 2026.05.02 0

블루 루인 (2013, dir. 제레미 소니에): 복수의 색조

# 0. 처연하고 서늘하지만 그 끝에 묘한 안도감이 든다 # 1. 우선 ruin부터 생각해 보죠. '폐허'라는 명사적 의미와 '파멸시키다'라는 동사적 의미가 같이 있는데요. 감독은 두 의미를 거의 구분하지 않아요. 남의 집에서 씻고 나온 드와이트는 시작부터 사회적으로 정서적으로 ruined 된 상태에서 출발하고 있고, 복수하면서 타인과 자신을 계속해서 ruin 시키고 있죠. 그 앞에 blue가 붙어요. 우울, 침잠, 냉각 같은 감정의 톤이죠. 실제 영화의 폭력은 전혀 뜨겁지 않아요. 아버지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폭발한다기보다는 이미 식어버린 감정이 관성처럼 흘러가는 느낌에 가깝죠. 대사는 극도로 절제되어 있고, 건조한 정적은 감정이 조금이라도 발화하려 할 때마다 꺼버려요. 드와이트가 돌아다..

Mystery & Thriller 2026.04.30 1

스래시 상어의 습격 (2026, dir. 톰뮈 비르콜라): 질 보다 양

# 0. 질 보다 양 # 1. 뒷심이 약하다는 건 넷플릭스 오리지널의 고질병이죠. 제법 호기로운 아이디어가 막강한 자본력에 힘입어 밀고 나가다가 후반부에 지지부진해지며 대충 마무리하는 식인데요. 그러고 보면 일단 앞부분에 힘을 줘서 클릭을 유도하는 게 중요한 건 기사든 음악이든 쇼츠든 공통이긴 한가 봐요. 아, 물론 넷플 오리지널이 다 그렇냐 하면 그렇진 않을 거예요. 나태한 인상 비평이죠. 사실이건 아니건 저 같은 인상을 가진 사람이 생기는 건 바람직하진 않을 거예요. 불만도 비용이거든요. 넷플릭스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을 거예요. 물론 정석적으로 뒷심을 키우면 좋죠. 모든 영화를 끝까지 재미있게 만들면 모두가 행복할 거예요. 무지 어려워서 그렇지. 질로 승부를 볼 수 없다면 그냥 양으로 밀..

Mystery & Thriller 2026.04.28 0

부고니아 (2025, dir. 요르고스 란티모스): 란티모스의 악마

# 0. 회의를 회의하는 자의 거대한 변곡점. # 1. 데카르트적 회의는 란티모스 일생의 테마예요. 그것이 인간을 자유롭게 할 유일한 방법이라는 듯, 그 외엔 지독할 정도로 관심이 없어서 계몽적인 것을 넘어 약간 교조적인 느낌마저 들 정도죠. 감독의 영화에는 기괴한 에너지로 가득하지만 정작 인물들에게는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는 데요. 그냥 논증 덩어리라 그래요. 심리적 실체가 아니라 규칙, 계약, 처벌, 욕망 같은 추상 항을 대리하는 장치에 불과하죠. 회의를 신봉하는 란티모스에게 악마는 누구일까요. 손쉽게 음모론자를 떠올릴 수 있지 않겠어요? 란티모스는 테디와 도니를 그냥 괴짜가 아니라 음모론자로 바꿔 놓았어요. 개기 일식을 카운트하는 컷의 평평 지구는 썩 노골적이죠. 덕분에 부고니아는 20년이 ..

Mystery & Thriller 2026.04.24 0

택시 드라이버 (1976, dir. 마틴 스콜세지): 독백과 거울

# 0. 구원 서사를 빌려오는데, 그 내부는 텅 비어있다는 것. # 1. 스콜세지 최애작은 택시 드라이버입니다. 다른 영화들은 몇 번 보면 이만하면 됐다 싶은 순간이 오는데요. 택시 드라이버는 봐도 봐도 재미있어요. 벌써 네댓 번은 더 본 것 같군요. 굉장히 현실적인 영화인데요. 굉장히 착란적인 영화이기도 합니다. 트래비스의 내면이 밖으로 투사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구요, 세상과 개인의 긴장 관계를 다룬 것처럼 읽히기도 하죠. 심지어 이 인물이 그 자체로 도시를 의인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 데, 어느 것 하나 명확하진 않습니다. 신기한 기분이죠. 트래비스는 완전히 부정할 수도, 그렇다고 정당화할 수도 없어요. 인식은 왜곡되어 있는데 막상 그가 보고 있는 뉴욕 역시 부정할 수 있는 세계는 아..

Mystery & Thriller 2026.04.22 0

Horror

more

프레젠스 (2024, dir. 스티븐 소더버그): 카메라

# 0. 대답은 제목에 있다. # 1. 그래서 유령이 누군데? 대부분의 관객은 이 질문을 붙들며 영화를 즐겼을 거예요. 집 안에는 이상한 시선이 돌아다니고, 갑자기 물건이 떨어지고, 누군가는 수상한 낌새를 느끼며, 마지막 특정한 결론을 반전으로 제시하고 있으니까요.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이 글에선 조금 다른 것에 집중해 보려 해요. 누가 이 드라마를 결정하는가라는 질문과 그 답이죠. 영화 속에는 세 가지 해석이 공존해요. 첫 번째는 현실적인 설명이에요. 겉으로 드러나는 물리적인 사건에만 집중하는 거죠. 책이 정리된 건 클로이가 착각한 걸 수 있어요. 벽장이 무너진 건 낡았기 때문일 수 있고, 컵이 쏟아진 것도 우연일 수 있어요. 방이 통째로 흔들리는 건 많이 수상하지만, 집의 구조적 문제이지 ..

Horror 2026.06.06 3

레디 오어 낫2 (2026, dir. 맷 베티넬리-올핀 & 타일러 질레트): 염소를 끌어야 한다

# 0. 부자들만 탐욕적이어야 한다는 법이 있나? 탐욕에 자격이 있을 리가 없잖아. # 1. 전작은 엘리트 가문의 물욕을 조롱하는 영화였어요. 가난한 그레이스는 부유한 엘리트들의 부조리를 들춰내는 트리거이자, 평범한 관객의 시선을 대신하는 역할이었기에, 사마라 위빙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도구적일 수밖에 없었어요. 슬래셔 호러 코미디의 재미는 분명했지만, 균형은 망가져 있었던 거예요. 차기작은 그 기울어진 균형을 회복하는 방향에서 모멘텀을 찾을 가능성이 크고, 실제 그러하고 있어요. 레디 오어 낫 2는 전작의 엔딩에서부터 시작해요. 간신히 살아남은 그레이스는 혼절하는데요. 앰뷸런스에 누은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아마도... 후회였지 않을까요? 적어도 아깝다는 생각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요? 궁핍..

Horror 2026.05.08 0

캐빈 인 더 우즈 (2011, dir. 드류 고다드): 취향 저격

# 0. 끝내 주는 슬래셔 무비의 아릿한 취향 저격 # 1. 물론 호러 무비 마니아들의 취향을 노린다는 뜻이에요. 어쨌든 이블 데드 계열의 오마주와 패러디를 왕창 끌어다 가지고 노는 영화니까요. 재미있는 건 은연중에 슬래셔 무비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음흉한 취향을 놀리는 듯한 느낌도 있다는 거예요. '당신을 위해' 저격하는 것뿐 아니라 '당신을' 저격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뜻이죠. 연구자들은 태만하게 클리셰를 따라가는 제작자를 빗대는 듯하면서도, 슬래셔 무비에게 완성도 보다 더 센 표현만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놀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쉽게 말해 이 구조에서 제작자와 관객은 공범인 거예요. 비단 호러가 아니더라도 장르 클리셰를 해체하며 노는 영화들은 더러 있는데요. 클리셰를 욕망하는 주체까지 겨..

Horror 2026.04.26 0

식칼에 비친 얼굴 _ 차임,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 0. 식칼은 날카롭고 차갑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차임 :: Chime』입니다. # 1. 그렇게까지 제목에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 소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만, 그럼에도 주인공은 마츠오카다. 외지에서 요리교실을 운영 중인 그는 조바심을 느끼는 듯 보인다. 위기를 벗어나려 하지만 녹록지 않고, 그럴 때면 못난 마음이 삐져나온다. 레스토랑 면접에서도, 수강생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가족과 식사하는 장면에서도 그렇다. 때론 충동적이거나 조급해하지만, 때론 놀라울 정도로 건조하거나 무신경한데, 사실 둘은 같은 상태에 근거다. 유독 그런 성격인 탓은 아니다. 아마도 섬세하게 요리하는 모습이 그의 본모습일 것이다. 그의 조바심은 '기질'이 아니라 '상태'에 가깝다. 마츠오카는 조바심..

Horror 2026.04.12 0

뺑소니 전까지만 _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시라이시 코지 감독

# 0. 어디까지나 뺑소니 전까지의 이야기 시라이시 코지 감독,『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 近畿地方のある場所について』입니다. # 1.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파편화된 아카이브로써의 소개다. 노로이(2005), 사유리(2024) 등으로 알려진 시라이시 코지의 신작은 이를테면 아카이브의 배신으로 요약된다. 언제고 진실을 규명케 해 주리라 믿었던 아카이브가 공포를 확산시키는 매개로 돌변해 버린 세계. 결말이 현실의 치히로가 아니라, '아카이브 된 치히로'인 것은 더없이 좋은 증거다. 어쨌든 파운드 푸티지의 핵심은 정보의 결핍일 수밖에 없다. 무작위로 흩뿌려진 정보들을 어떻게든 하나의 완결된 형태로 묶으려는 인간의 뇌를 역이용한 장르기 때문. 작중 잡지기사 A와 커뮤니티..

Horror 2026.03.10 0

기억과 헌사 그리고 고민들 _ 씨너스: 죄인들, 라이언 쿠글러 감독

# 0. 불꽃을 닮은 음표로 핏물에 젖은 좌표를 짚는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씨너스: 죄인들 :: Sinners』입니다. # 1.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으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932년 미시시피 클락스데일. 흑인들의 삶과 고통에서 피어난 예술적 저항을 다룬 서던 고딕. 블루스 기타를 든 소년의 인생을 결정하게 된 그날 밤 황혼에서 새벽까지. 라이언 쿠글러의 위대한 도약, 씨너스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노예제는 폐지되었지만 차별은 여전하다. 백인과 흑인을 가르던 짐 크로우 법은 기만적이고, KKK는 명목상으로만 사라졌을 뿐이며, 공유지 소작제와 농장 화폐는 달아날 자유를 예속했다. 나무에 매달린 흑인 시신을 이상한 열매라 자조하듯, 돈을 가졌다는 이유로..

Horror 2026.02.18 0

말은 쉽지 _ 굿 보이, 벤 리온버그 감독

# 0. 인간보다 먼저 귀신을 보는 개. 하우스 호러의 클리셰를 뒤집어 극 전체를 반려견 시점에서 전개하면 뭐가 나와도 나오지 않을까? 벤 리온버그 감독,『굿 보이 :: Good Boy』입니다. # 1. 말은 쉽지. 그래서 그걸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게 문제다. 적당히 꼬리 흔들고 뛰어다니다 짖고 싸우는 정도면 모를까. 무려 호러 장르의 주인공으로 쓰겠다니. 영화가 장난이야?라는 세간의 의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벤 리온버그다. 솔직히 이야기도 호러도 특별할 것은 없지만 관람은 기대보다 즐겁다. 반려견 계의 티모시 샬라메, 인디의 활약 덕분이다. 감독 본인의 반려견이기도 한 인디의 절륜한 연기력과, 저 그림을 어떻게 영상으로 뽑아냈을까 역산하는 것이야 말로 굿 보이의 진정한 재미다. 때문..

Horror 2026.01.24 0

Comedy

more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 (2025, dir. 짐 자무쉬): 침묵에 관한 짧은 필름

# 0. 마치 누군가와 긴 대화를 나눈 건 아닌데 오래 앉아 있다 헤어진 것처럼. # 1. 대화 직전의 침묵에 관한 영화예요. 인물들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고, 서로를 보지만 정확히 닿진 못하는 순간들이 반복돼요. 단순히 어색한 건 아니에요. 오래 관계를 지속한 사람들만이 공유하는 피로감 같은 거예요. 감독은 고립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사회학적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물리적이고 감각적이에요. 같은 공간 안에서도 각자의 리듬이 존재하고 그 충돌이 특유의 지적인 코미디로 환원되어 있어요. 말의 템포가 다르고, 시선이 살짝 비껴 나고, 그럴 때마다 머쓱한 침묵이 길어지는 상태예요. 그 어긋남을 극적인 갈등으로 폭발시키는 대신 하염없이 응시할 뿐이에요. 익숙한 자무쉬죠. 왠지 버건디 색일 ..

Comedy 2026.05.18 1

굿 보스 (2021, dir. 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 0. 캠페인 따위로 해결될 거였다면 난제라 부르지도 않았다. # 1. 말쑥한 정장. 단정한 헤어. 높은 단상에 오른 기업가가 연설하며 시작하는 영화는 보통 자본가를 놀리는 영화예요. 실제 대다수의 관객과 비평가 역시 주인공 블랑코의 위선을 조롱하는 블랙 코미디라 이해하고 있고, 그건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블랑코는 스페인의 한 지방도시에서 산업용 저울을 만드는 공장의 주인이에요. 그는 자신의 회사가 우수기업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에 한껏 고무되어 있어요. 공장을 실사하러 올 심사위원들을 맞이할 '쇼'를 치밀하게 준비한다는 게 이 영화의 스토리 전부죠. 카리스마와 감언이설을 겸비한 블랑코는, 심사위원단이 공장에 방문할 때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정확히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도록 직원들..

Comedy 2026.05.04 0

슈퍼 리치의 유쾌한 모험 _ 굿 포츈, 아지즈 안사리 감독

# 0. 언제나 주인공은 가브리엘 아지즈 안사리 감독,『굿 포츈 :: Good Fortune』입니다. # 1. 당장 눈에 띄는 건 키아누 리브스의 배우개그. 오만 영화를 다 찍은 키아누 리브스가 천사 역을 맡는 것쯤이야 있을 수 있는 일이다만, 굳이 어깨에 걸어 끼는 인형 날개를, 그것도 겁나 옹졸한 날개를 달아놓은 건 노골적이다. 담배 태우는 장면은 콘스탄틴에서, 개 좋아하는 장면은 존 윅에서 끌고 온 걸 테니, 이쯤 되면 본인도 즐기고 있는 게 틀림없다. 시놉시스를 읽고서 브루스 올마이티가 떠오르지 않았다면 거짓말. 둘 다 한심한 주인공에게 초월자의 권능을 빌린 다음, 적당히 신나게 살다가 어찌어찌 현실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차이가 있다면 모건 프리먼이 짐 캐리에게 빌려준 권능은 ..

Comedy 2026.04.04 0

봉제선의 미학 _ 특급 비밀, ZAZ 사단 감독

# 0. 장르를 기워붙인 인위적인 봉제선이 그렇게나 즐겁다. ZAZ 사단 감독,『특급 비밀 :: Top Secret!』입니다. # 1. 외교 문화 교류를 위해 동독에 초청된 미국인 록스타가 납치된 과학자를 구출하려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공작에 휘말린 김에 겸사겸사 연애한다는 이야기. 별생각 없이 들으면 냉전 시대 스파이 스릴러와, 2차 세계대전 저항군 드라마와, 1950년대 록앤롤 뮤지컬을 적당히 접붙인 평범한 멀티 장르 영화처럼 보이지만, 사실 시놉에서부터 코미디의 냄새가 솔솔 풍긴다. 아니, 동독에 레지스탕스가 왜 돌아다니세요? 짐짓 동독은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한 무난한 배경인 듯 보이지만 핑계.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흡사하게 묘사된 메타 풍자의 공간일 따름이다. 제복부터 하..

Comedy 2026.03.08 0

창작자의 시냅스 _ 어댑테이션, 스파이크 존즈 감독

# 0. 상상하는 나 스파이크 존즈,『어댑테이션 :: Adaptation』입니다. # 1. 스스로 말하다시피 '존 말코비치 되기'는 골치 아픈 영화다. 분류학적 자아의 매개변수 연구와, 그 독점성과 완결성에 대한 윤리학적 고찰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까. 차기작이 이 피곤한 영화의 촬영 현장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이전의 논의에서 이어지는 바가 있다는 뜻이다. 층고가 낮은 7과 1/2층에 숨겨진 터널에서 자아는 무수히 분리되지만, 사실 판타지적 조작을 통해 작위적으로 해체한 것일 뿐 현실에서 그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모두 인지하고 감각하며 평가하고 갈망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일 따름이다. 어떤 창의적인 사람들은 새로운 인격을 상상해 드라마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 데, 그 ..

Comedy 2026.03.04 0

의도치 않은 서술을 맛본다 _ 프렌치 디스패치, 웨스 앤더슨 감독

# 0. 그냥... 의도적으로 쓴 것처럼 써 봐. 웨스 앤더슨 감독,『프렌치 디스패치 :: The French Dispatch』입니다. # 1. 50개국, 50만 독자를 거느린, 50년간 이어져 온 잡지사. 유달리 도드라진 40에서 60 언저리 애매한 숫자는 십중팔구 감독의 나이와 들어맞는 데 이번의 쓰임 역시 틀리지 않다. 실제 빌 머레이가 연기한 편집장 아서 하우저 주니어는 웨스 앤더슨 본인과 강하게 연결되는 데, 흥미로운 것은 굳이 50 타령을 늘어놓지 않더라도 이 시니컬한 편집증적 인물이 감독의 페르소나라는 걸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오프닝에서부터 이런 작위적인 방식으로 이를 주지시키려 한 걸까. 영화가 끝난 후에 두 사람을 연결해선 곤란하기 ..

Comedy 2026.03.02 0

종의 기원 _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 0. Some of them want to use you,Some of them want to get used by you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 :: Kinds of Kindness』입니다. # 1. 물론 친절 혹은 다정함의 종류라 직역하는 것이 무난하다. 다만 Kind는 때때로 종이라는 의미로도 쓰이기에, 제목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는 친절이라는 종(種, Species)으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호모 코미스(Homo Comis, 친절한 인간)쯤 될까. 현생 인류란 다정함을 정체성으로 하는 유인원이고, 그것이 호모 에렉투스나 호모 사피엔스와 같은 생물학적 분류에 가까운 것이라면, 우리 종의 특성은 유전자 결정적이라 주장한다는 면에서 요르고스..

Comedy 2026.02.10 0

Action

more

더 하더 데이 폴 (2021, dir. 제임스 새무얼): 오독

# 0. 좋은 서부극은 죽음과 동행한다. # 1. 고전 서부극의 낭만은 풍요로운 시대의 낭만과 달라요. 현대 로맨스나 어드벤처의 낭만은 여유에서 나오지만, 서부극의 낭만은 결핍에서 비롯되요. 내일 살아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세상에서 총 한 자루와 말 한 필이 전부인 사람들은 자신을 신화로 포장해야 해요. The Searchers, Rio Bravo, Once Upon a Time in the West, 심지어 Unforgiven 같은 후기 서부극까지 죄다 허세를 부리고 있는 이유예요. 모두가 모두를 공격할 수 있는 야만과 무법의 시대이기에, 허세마저도 생존 무기로 끌어 써야 했달까요. 그래서 많은 서부극의 인물들은 실제 능력보다 평판으로 살아가요. 상대가 저 사람은 위험하다 믿으면 총을 뽑..

Action 2026.06.04 1

정점 (2026, dir. 발타사르 코르마우퀴르): 브랜드의 실루엣

# 0. 목적 없는 스턴트를 이어가는 브랜드의 실루엣 # 1. 무엇보다 남편 토미가 너무 불쌍해요. 이 사람의 죽음엔 아무 이유가 없어요. 사샤가 그냥 싱글이었더라도 내러티브는 전혀 달라질 게 없거든요. 남편과의 사별을 거대한 트라우마로 삼아 그 내적 투쟁을 외부로 투사한 이야기라고 보기엔, 영화는 죄책감이나 위험 충동을 너무 성의 없이 다뤄요. 정말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면 레저 스포츠나 하고 다닐 게 아니라, 남편의 죽음을 현재 행동양식 속에서 계속 재연했어야죠. 자기 파괴적인 충동이 반복된다거나, 빌런의 존재가 그 상처를 집요하게 비틀어 자극한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그런데 그런 게 거의 없어요. 죽은 남편은 결국 사샤에게 ‘비극적인 과거가 있는 사람’이라는 프로필 한 줄 추가해 주는 역..

Action 2026.05.22 0

성난 사람들 _ 아테나, 로맹 가브라스 감독

# 0. 성난 군중을 생물처럼 다룬다. 로맹 가브라스 감독,『아테나 :: Athena』입니다. # 1. 다분히 도식적인 영화. 막내를 잃은 세 형제는 프랑스 사회의 긴장 구조를 재현한 것으로 읽힌다. 카림은 분노한 하층 이민자 공동체, 압델은 국가 시스템에 편입된 동일 출신, 목타르는 범죄 경제에 합류한 주변부를 대변하는 식이다. 인질이 된 경찰 제롬이나 테러범 세바스티앙 역시 각자의 층위를 대변하므로, 이들의 관계를 계보처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사회학적 모델링을 그려나가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설명하거나 연설한다는 뜻은 아니다. 로맹 가브라스의 아테나는 충돌과 오해의 연쇄만을 건조하게 제시하는 영화다. 초반 카림의 롱테이크. 경찰서 습격 후 단지 귀환까지의 동선은 군중이 하나의 ..

Action 2026.03.30 0

뷰파인더 _ 시빌 워 분열의 시대, 알렉스 가랜드 감독

# 0.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도했는가가 아니라 왜 계속 찍고 있는가. 알렉스 가랜드 감독,『시빌 워 분열의 시대 :: Civil War』입니다. # 1. 불타는 숲의 장면은 영화의 원리가 가장 잘 드러난 순간이다. 장면에는 정치도, 설명도, 인과도 없다. 전쟁이 일상이 된 풍경만이 존재할 뿐이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그 모습이 굉장히 아름답게 표현된다는 점이다. 불티가 날리는 시각적 쾌감은 직관적으로 매혹적인데, 그 지점에서 작품의 메타 구조가 작동한다. 관객은 전쟁의 풍경을 위험으로 인식하는 동시에 미적으로 소비하고 있다는 진실. 전쟁을 타자의 스펙터클로 소비한다는 비판은 관객 자신의 지각(Perception)으로 증명되어 되돌아온다. '바다 건너 편리한 오락처럼 즐겼던 전쟁을 미..

Action 2026.03.24 0

개구쟁이의 호기심 _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 버 스티어스 감독

# 0. 물론 애먼 개미를 괴롭히는 건 나쁜 겁니다. 버 스티어스 감독,『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 :: Pride and Prejudice and Zombies』입니다. # 1. 초나라 사람 중에 방패와 창을 파는 자가 있었다. 그가 방패를 칭찬하며 말하였다. "내 방패는 견고하여 어떤 물건으로도 뚫을 수 없소." 또한 그 창을 칭찬하며 말하였다. "내 창은 날카로워 어떤 물건도 뚫지 못하는 것이 없소." 이를 들은 누군가가 말하였다. "그럼 당신의 창으로 당신의 방패를 찌르면 어찌 됩니까?" 상인은 답할 수 없었다. 무릇 뚫을 수 없는 방패와 뚫지 못하는 것이 없는 창은 같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낙후된 구도심에는 여전히 희끗희끗한 시멘트 포장도로가 남아 있고, 날씨가 좋..

Action 2026.02.20 0

신화창조 _ 고스트 독, 짐 자무쉬 감독

# 0. 신화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렷! 짐 자무쉬 감독,『고스트 독 :: Ghost Dog: The Way of the Samurai』입니다. # 1. 사무라이들의 지침서, 야마모토 쓰네토모의 '하가쿠레(葉隠)'를 삶의 근간으로 삼은 흑인 킬러 이야기. 규율이 멸종해 가는 세기말을 노려보는 짐 자무쉬다. 일본 사무라이 문화, 이탈리아계 마피아, 아프리카계 미국인,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아이스크림 장수까지. 이질적인 이들을 한데 모아 장르 관습을 해체한 건 파편화된 도시의 도덕 지형을 새로이 탐색하기 위함일 것이다. 특유의 포스트모던적 미학으로 갱스터 장르와 사무라이 영화를 결합한 자무쉬는, 황폐화된 시대에 텍스트가 어떻게 인간 실존과 결합하고 또 구원할 수 있는가 짓궂게 ..

Action 2026.02.02 0

다각적인 대조 _ 워페어, 알렉스 가랜드 / 레이 멘도자 감독

# 0. 고통스러운 권태. 인식이 부재한 규율. 데이터화된 인간. 그들이 없는 우리. 알렉스 가랜드 / 레이 멘도자 감독,『워페어 :: Warfare』입니다. # 1. 영화는 두 번의 대조로 소개된다. 화면 속 에어로빅 하는 여성들과 옹기종기 모여 열광하는 군인들, 소란스러운 베이스캠프와 어두운 밤 고요한 군사 작전이다. 연이은 대조는 이 작품이 각기 다른 무언가에 대한 영화가 아닌, 대조된 모습의 괴리감 그 자체에 천착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따라서 유난히 미니멀한 알렉스 가랜드의 전쟁 영화란 대조에 관한 것이며, 워페어를 본다는 것은 곧 무엇과 무엇이 대조되어 있는가, 그 대조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가 탐구하는 것이다. 초반 30여분은 전투 장면 하나 없이 건조하게 흘러간..

Action 2026.01.18 0

SF & Fantasy

more

프로젝트 헤일메리 (2026, dir. 필 로드, 크리스토퍼 밀러): 과학자의 감수성

# 0. 빛과 소리를 조화롭게 하는 과학자의 감수성 # 1. 괴짜들이나 볼 법한 조악하고 엉성한 펄프 픽션. 조르주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 이후 SF는 한동한 컬트적인 서브 장르였어요. 사실 초기 SF는 판타지의 하위 분과였기에 과학은 마법과 다를 바 없었거든요. 재미의 초점 역시 과학적 정합성이나 경이로움보다는, 몇몇의 시각 효과에 의존한 스펙터클에 맞춰져 있었죠. 위대한 큐브릭, 스필버그, 루카스가 등장하며 SF는 메이저 장르로 도약해요. 장르의 잠재력이 대중신화적 요소와 결합되어 날개를 달기 시작한 거예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SF도 고도로 지적인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한 작품이었죠. 스타워즈는 SF가 메인스트림의 주인공을 넘어 세계적인 문화현상이 될 수 있게 만들었구요, ..

SF & Fantasy 2026.04.18 0

도감작 _ 러브 앤 몬스터스, 마이클 매튜스 감독

# 0. 자 이제 시작이야. (내 꿈은~) 내 꿈을 위한 여행 (피카츄~) 마이클 매튜스 감독,『러브 앤 몬스터스 :: Love and Monsters』입니다. # 1. 태초 마을은 안전하지만 성장은 없다. 마을 NPC 조엘은 깨어있지만 잠든 척했던 것처럼, 이미 죽어버린 안드로이드처럼 7년 전에 멈춰있다. 친구들이 대신 지켜주는 지하 벙커는 물리적 보호소인 동시에 세계를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심리적 은둔처다. 조엘이 무리 뒤에 숨어야 했던 건 고질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프리징. 우악스러운 괴물을 맞닥뜨리는 순간 온몸이 얼어버리는 버릇이다. 물론 생물학적 공포 때문이겠으나, 기저에는 새로운 세계를 해석할 수 있는 언어의 부재를 은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7년 전 조엘에겐 그의 못..

SF & Fantasy 2026.03.28 0

혼란하다 혼란해 _ 대홍수, 김병우 감독

# 0. 홍수에 밀려온 물방울 수보다 의아한 부분이 더 많다. 김병우 감독,『대홍수 :: The Great Flood』입니다. # 1. 아침부터 아이는 물놀이하자는 둥 심각성을 모른다. 아파트 3층에 물이 들이치는 걸 보고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다기엔 애가 너무 큰 것 아닐까. 아파트 3층에 물이 차는 데 관리사무소는 어떻게 방송을 하고 있는 걸까. 홍수가 났고 거실에 물이 들이쳐 발이 잠기고 있는 상황. 김다미는 대체 무슨 이유로 멍하게 서있는 연기를 디렉팅 받은 걸까. 발가락에 마비가 온 것이 아니고서야 보통 물이 발끝에 닿는 순간 '뭐야, 씨발' 화들짝 놀라게 되지 않나. 곧이어 집에서 탈출하는 데, 험준한 산을 오르는 것도 아니고 아파트 복도에서 왜 애를 둘러업고 다니는 걸까..

SF & Fantasy 2025.12.24 0

마음먹기 나름 _ 2분마다 타임루프, 야마구치 준타 감독

# 0. 세상사 모든 건 마음먹기 나름 야마구치 준타 감독,『2분마다 타임루프 :: リバー、流れないでよ』입니다. # 1. 수많은 사람들이 타임루프를 상상하고 즐기는 건 무수한 시행착오의 비용을 무상으로 처리해 주는 편리함과 자유로움을 막연하게 갈망하기 때문이다. 1초, 1초 쫓기듯 사는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껏 폭식할 수도, 밀린 잠을 몰아 잘 수도, 거침없는 일탈을 저지를 수도, 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란 상상. 그런 의미에서 2분은 한숨이 절로 나올 정도로 짧다. 세상에 2분이라니. 루프가 시작되는 곳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시간이 쓰일 텐데 대체 뭘 하란 말이야. 어차피 이 소소한 군상극을 보러 온 관객들 중에 '타임루프'가 핵심이라 생각할 바보는 없다. ..

SF & Fantasy 2025.12.10 0

SF는 어디까지 지적일 수 있는가 _ 컨택트, 드니 빌뇌브 감독

# 0. 결국 이 모든 것은 극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드니 빌뇌브 감독,『컨택트 :: Arrival』입니다. # 1. 서사의 초점은 외부의 위협이 아니다. 다방면의 존재론적 질문들로 견인하는 부단히 지적인 SF다. 드니 빌뇌브의 야심이란 지독할 정도의 침착성과 인내심으로, 언어의 본질과 인간의 인지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사색을 향해 관객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대체로 퍼스트 컨택트 장르들은 외계종과의 통신 문제를 불편으로 치부하거나, 혹은 바벨 피쉬와 같은 마법적인 장치를 통해 언어학적 논의를 배제해 왔다. 한편 컨택트는 외계어 습득 자체를 영화의 핵심 줄거리로 삼아 언어학을 전면에 부각한다. 특히 사피어-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은 작품의 핵심 전제다. 언어..

SF & Fantasy 2025.12.08 0

아들의 그림자 _ 프랑켄슈타인,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 0. 여기 외로운 아들들의 동화가 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프랑켄슈타인 :: Frankenstein』입니다. # 1. 어머니와 다정한 경우는 더러 있지만, 아버지와 돈독하기란 쉽지 않다. 아버지가 성공한 사람일수록, 타고난 성정이 엄격할수록 더욱 그렇다. 일생 가족을 건사한 아버지는 자식이 헤쳐 나갈 세상이 녹록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지만, 아비는 그것을 표현하는 데 어리석고, 아들은 아비의 마음을 헤아리기엔 너무 어리다. 때문에 몇몇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동시에 나는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 섣부르게 다짐한다. 긴 시간이 흘러 아이를 가지고 나서야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겠지만, 그때는 아버지와 대화하기엔 이미 늦다. 떠나버린 아버지가 고픈..

SF & Fantasy 2025.11.24 0

초코파이 하나 _ 혈세, 김민하 감독

# 0. 영화티켓 대신 초코파이 하나로 퉁치는 헌혈소? 이거 쎄하거든요. 김민하 감독,『혈세 :: Tax』입니다. # 1. 뱀파이어 '종주'는 낡은 상가의 건물주다. 당장 흥미로운 것은 임대료 대신 피를, 그래서 문자 그대로 '혈세'를 입금받는 시스템이다. 그의 시스템은 뱀파이어의 원초적 포식 행위를 현대 사회의 계약 관계로 치환하는 것이자, 역으로 현대의 계약 관계를 원초적 포식 행위로 치환한다. 종주의 공간에서 피는 숭고한 생명이 아닌 매달 수거하는 재화로 전락하고, 종주가 식량을 보장받는 동안 세입자들은 돈 대신 피를 잃는 것에 다행스러워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아마도 종주는 스스로 욕망을 통제하는 데 성공한 합리적인 관리자라 인식할 것이다. 무분별한 사냥이 야기할 혼란과 비효율을..

SF & Fantasy 2025.09.26 0

Drama

more

파워 오브 도그 (2021, dir. 제인 캠피언): 조지에 대하여

# 0. 세 인간과 그 사이 개 한 마리 # 1. 개념을 몇 개 제안하고 시작하죠. Complex(콤플렉스)와 Vulnerability(취약성)에요. 이 에세이에서 콤플렉스는 '자기 균열을 관리하기 위한 내적 형식'을 말해요. 세 주인공은 모두 자기 내부의 균열을 관리하고 있어요. 필에겐 섬세한 감수성과 동성애 성향이 될 거예요. 로즈에겐 홀어머니로서의 책임감과 부담감이 될 거구요. 피터에겐 자살한 아버지가 말했다던 냉정함과 잔혹성이 되겠죠. 하지만 콤플렉스는 완전히 봉합되지 못해요. 벌너러빌리티는 콤플렉스가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어 버린 상태를 말해요. 필이 두려운 건 동성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타인에게 들키는 순간이에요. 로즈도 미숙함 자체보다 미숙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에 더 압박받구요, 피..

Drama 2026.05.26 1

아쿠아리움이 문을 닫으면 (2026, dir. 올리비아 뉴먼): 작은 기적들

# 0. 이별 이후에도 삶을 지속시키는 작은 기적들 # 1. 문어가 이목을 끌고 있지만 진짜 주인공은 '물'이에요. 영화 속 물은 슬픔, 그 가운데 이별의 슬픔을 의미해요. 도입에서 마셀레스가 아쿠아리움의 의미를 자유롭던 바깥 세계와의 이별로 규정한 이유구요, 토바의 아들이 죽은 장소가 물인 이유이기도 해요. 재미있는 건 이 물에 대립항이 없다는 거예요. 붉은빛이나, 노란 온기, 초록 수풀로 대조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감독은 그런 상징을 일절 쓰지 않아요. 그냥 푸른 물이 전부죠. 마셀레스는 아쿠아리움에 들어오기 전에도 물에 있었어요. 아쿠아리움 안에서도 물에 있고, 수조 밖에서도 물을 흘리고 다니고, 아쿠아리움을 나가서도 물에서 생을 마감하겠죠. 우리는 결국 물, 이별의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

Drama 2026.05.20 1

힌드의 목소리 (2025, dir. 카우테르 벤 하니아): 그런데, 그래서 서글픈 거예요.

# 0. 인간은 고통에 가까워질수록 감정에 잠식되고, 멀어질수록 책임에서 도망쳐요. # 1. 거리에 대한 영화예요. 당장 보이는 건 물리적 거리예요. 불과 8분 남짓 거리에 있는 소녀와, 그곳에 닿기까지 돌아가야 하는 구조적 거리의 대비죠. 그 사이에 적신월사가 끼여 있고, 감독은 그 끼인 존재들의 분노와 좌절을 진중하게 담아내고 있어요. 소녀에게 다가갈수록 감정은 격해지고 이성은 마비돼요. 소녀에게 멀어질수록 이성은 회복되지만 무력해지죠. 대부분의 플롯을 차지하고 있는 오마르와 마흐디의 갈등이에요. 비난할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에서 관객은 답을 찾을 수 없어요. 힌드와 적신월사 직원들의 과거 시점이 있고, 이후 그것을 재현하는 현재의 시점이 있어요. 그 사이에 끼여 있는 예술은 무력해요. 인물..

Drama 2026.05.14 0

러브 달바 (2022, dir. 엠마누엘 니코): 빛이 새어드는 문을 연다

# 0. 자유와 개입의 아슬아슬한 긴장 속에서 고통스럽게 성장해야 하는 우리들. # 1. 중요한 건 환경도 의상도 앵글도 조명도 연기도 아니에요. 이 모든 이야기가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서 끝나느냐'에요. 영화는 달바가 구조되는 모습에서 시작해, 법정에 앉는 모습으로 끝나는데요. 학대의 전사를 영화 밖으로 밀어낸다는 것, 구조 이후로도 한동안 혼란만 내비칠 뿐 학대의 내용을 최대한 숨겨둔다는 것 모두 가스라이팅의 형식에 집중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아버지 자크의 법정 서사, 이를테면 끔찍한 범죄를 두고 판사에게 질타당한다거나, 달바에게 통렬한 일침을 듣는다거나, 차가운 감옥에 걸어 들어가는 뒷모습 따위를 걷어낸 것 역시 윤리적 평가에 천착하지 않겠다는 뜻이죠. 감정적인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다면 손..

Drama 2026.05.10 0

그저 사고였을 뿐(2025, dir. 자파르 파나히) : 복수를 기다리며

# 0. 황폐한 사막에 기대앉아 오지 않을 복수를 기다리며 # 1.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는 건 가해자의 논리예요. 차가 앞으로 가는 동안, 딸아이의 노랫소리에 묻혀, 개 짖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는 거잖아요. 부역자를 태운 권력이 앞으로 가는 동안, 그들에게도 건사할 가족이 있었기에, 피해자들의 비명이 들리지 않았다는 말과 다를 바 없어요. 에크발의 딸아이가 개 인형을 가지고 고개 드는 장면은, 등치 되어선 안될 개와 인간, 생물과 인형을 직접 연결한다는 면에서 썩 노골적이에요. 가해자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은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내적 논리와 선을 긋고 싶어요. 조금의 공통분모를 허락하는 것조차 너무 고통스러우니까요. 따라서 영화는 주인공에게 나의 복수는 너의 폭력과 다르다는 걸 증명할..

Drama 2026.05.06 1

팁과 마이키 _ 대디오, 크리스티 홀 감독

# 0. 팁을 두둑이 누른다. 마이키란 이름을 꺼낸다. 크리스티 홀 감독,『대디오 :: Daddio』입니다. # 1. 뒷좌석에 앉은 사람은 앞 좌석을 내다볼 수 있지만 전신은 볼 수 없다. 앞에 앉은 사람은 돌아볼 수 있지만 운행 중에는 무리다. 투명 파티션은 물리적 접근과 개입을 원천적으로 막는다. 단절이라기보다는 제한된 연결. 두 사람의 소통은 전적으로 '언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중도에 내리지도 못한다. 손님은 집에 가야 하고 기사는 돈을 벌어야 하니까. 두 사람은 피차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더 많은 것을 말하거나, 더 정교하게 숨길 것이 요구된다. 늦은 밤, 손님을 태운 클락. 혼자 택시에 탄 여자(Girlie)를 지켜보던 그는 조심스레 아이스브레이킹을 시도한다. ..

Drama 2026.04.10 0

쌍둥이의 장난 _ 햄넷, 클로이 자오 감독

# 0. 모습은 다를지라도 기원을 공유하기에 같은 것이다. 클로이 자오 감독,『햄넷 :: Hamnet』입니다. # 1. 남자는 가능한 한 셰익스피어가 아니다. 어느 아내의 남편이자 세 아이의 아버지일 뿐이다. 반면 여자는 처음부터 이름을 가진다. 대신 마지막 군중 속에 파묻혀 이름을 잃는다. '익명의 남자'와 '명명된 여자'에서 비롯된 영화가, '이름을 얻은 남자'와 '익명으로 돌아간 여자'로 귀결된다는 아이러니. 햄넷은 뒤집힌 것들과 그 관계에 대한 영화다. 쌍둥이 모티브. 햄넷과 주디스가 옷을 바꿔 입는 장난은 사소해 보이지만 뜻밖에 중요한 은유다. 성별부터 다른 쌍둥이는 겉보기에 전혀 동일하지 않지만 서로 대체할 수 있다는 듯 행동한다. 예술가인 아버지는 장난을 지적하는 대신 포..

Drama 2026.03.18 0

Romance

more

크레이지, 스투피드, 러브 (2011, dir. 글렌 피카라, 존 레쿼): 무력한 로맨스

# 0. 인간은 그렇게 우스꽝스럽고 무력함에도 또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테니까요. # 1. 로맨틱 코미디가 매력적인 건 사랑과 웃음 이면에 감독이 바라보는 인간상이 드러나기 때문이에요. 가령 우디 엘런의 영화들이 유독 그렇죠. 전형적인 스티븐 카렐스러운 이 로코에서 나는 무력감을 느꼈어요. 보통의 로맨틱 코미디는 사랑의 승리로 귀결되기 마련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영화 역시 그렇게 읽고 있는 듯한데요. 나는 정반대로 읽어요. 사랑은 승리하는 대신 발생할 뿐이고, 인간은 그 발생을 통제하지 못하거든요. 인물들은 전부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듯 보여요. 칼은 변신하고, 제이콥은 기교를 부리고, 에밀리는 외도를 저질렀어요. 해나는 고백하고, 로비는 집착하고, 제시카는 사진을 찍죠. 모두는 욕망을 행위로..

Romance 2026.05.28 0

그러니 인생에 부딪쳐봐 _ 아멜리에, 장 피에르 주네 감독

# 0. 마침내 사랑스런 상상의 문을 열어 현실의 박동을 되찾는다 장 피에르 주네 감독,『아멜리에 :: Amelie from Montmartre』입니다. # 1. 티스푼을 든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프랜치 여인. 장 피에르 주네의 아멜리에다. 사랑스러운 오드레 토투와 함께하는 영화의 즐거움은 사실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다. 우연으로 가득한 현실을 개인의 미적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는 데에서 오는 평온함과 안도감이다. 관객은 시작부터 아멜리라는 대리인을 통해 세상을 재구성하는 연출가적 전능을 이양받는다. 크렘 브륄레의 단단한 표면을 숟가락으로 깨뜨리는 쾌감, 생 마르탱 운하의 수면 위로 물수제비 뜨는 순간의 정갈한 아름다움, 곡물 자루에 손을 푹 찔러 넣는 감각적 충만함. 영화는 세상에 흩뿌려..

Romance 2025.09.24 0

구원은 없어 _ 박쥐, 박찬욱 감독

# 0. 당신은 날 죽여도 후회할 거고 살려도 후회할 거야. 박찬욱 감독,『박쥐 :: Thirst』입니다. # 1. 최면술사 앞에 선 오대수는 고백한다. 우리는 규범으로 본성을 통제한 태양 같은 존재가 아닌, 본성이 이끄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짐승들이라고. 마침내 감독은 규범으로 본성을 통제할 수 없다 논증하는 것을 넘어 둘을 충돌시켜 존재를 붕괴시키기에 이른다. 박찬욱의 걸작, 박쥐다. 이전의 영화들이 외부의 시련, 감금(올드보이), 납치(복수는 나의 것), 살인(친절한 금자씨)으로 인한 비극이었던 것과 달리, 상현의 비극은 자기희생이란 내적 가치에서 발화한다는 점은 감독의 인간 탐구가 한층 깊어졌음을 의미한다. 오프닝에는 그 집요함이 가감 없이 묻어있다. 상현은 아프리카에서 ..

Romance 2025.09.20 0

모든 조롱의 신 _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우디 앨런 감독

# 0. 모든 자기기만을 조롱하다 끝내 자신마저 조롱해 버린 모든 조롱의 신 우디 앨런 감독,『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 Everyone Says I Love You』입니다. # 1. 그의 조롱에 성역은 없다. 뮤지컬의 형식을 빌려 내내 가녀린 척 사랑을 노래하지만 모조리 기망이다. 내내 뮤지컬은 감정적 동화 대신 분석적 태도를 요구하는 형식주의적 전략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장르의 허구성을 괴팍하게 폭로함으로써, 고전 할리우드로부터 오랫동안 세일즈 되어온 '낭만'이라는 신화의 구조적 결함을 까발리겠다는 비아냥이야말로 숨겨진 의의다. 그래서 뮤지컬 영화가 보장하는 핵심적인 쾌감, 숙련된 기교를 통한 감정 교양을 배반한다. 의 프레드 아스테어나 의 진 켈리 등으로 대표되는 고전 ..

Romance 2025.08.08 0

그 여자의 사정 _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 레이철 램버트 감독

# 0.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어떤 사람들은 돌이 되고 싶다 답하기도 한다. 레이철 램버트 감독,『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 :: Sometimes I Think About Dying』입니다. # 1. 흐릿한 오리건의 해안 마을. 작은 사무실에는 여자 프랜이 일하고 있다. 정직하게 묘사되는 그녀의 삶은 평범보다 무료하고 권태보다 단조롭다. 사무실 컴퓨터 앞을 오가는 것이 전부인 그녀의 생활은 중성적인 색조와, 제한적인 광원, 폐쇄적인 시야, 단절적인 프레임, 넓은 헤드룸으로 두텁게 그려진다. 프랜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혼자라 느끼고, 다정한 동료들조차 그녀의 존재를 거의 인지하지 못한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그녀는 그렇게 불행해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

Romance 2025.06.02 0

기다리는 사랑의 빛과 어둠 _ 롤라, 자크 드미 감독

# 0. 사랑은 내 시간을 기꺼이 건네주는 것이다. - 작가 이기주 자크 드미 감독,『롤라 :: Lola』입니다. # 1. 진부한 표현이지만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것이다. 고약한 사랑은 제멋대로 나타나 제멋대로 싹트기에 어찌할 도리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처지인지, 사랑받는 사람이 어떤 처지인지에도 관심은 없다. 우연히 들린 출장지에서, 우연히 걷던 길가에서, 우연히 찾은 서점에서 만난 사람과 언제든 사랑에 빠질 수 있다. 당장 다음 출항지로 떠나야 하는 수병의 사정도, 급작스레 직장을 잃고 해외로 나가게 된 백수의 사정도, 7년씩이나 아내를 찾아올 수 없었던 남자의 사정도 아랑곳 않는다. 그때와 다른 시간에 만났더라면 우리의 사랑은 달랐을까. 그때와 다른 곳에서 시작했더라면..

Romance 2024.09.16 0

감독놀음 _ 은밀한 공범, 죠죠 히데오 감독

# 0. 평범한 소재로 비범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도 있지만,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내다 버리는 경우도 부지기수입니다. 죠죠 히데오 감독,『은밀한 공범 :: 恋のいばら』입니다. # 1. 은 수입사가 지어 붙인 이름입니다. 원제는 恋のいばら. 그러니까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군요. 참고로 영어 제목은 Thorns of Beauty인데요. 이쪽이 그나마 더 직역에 가까운 번역이기는 합니다. 실제 영화의 핵심은 '가시'로 은유된 각자의 마음에 있다는 면에서, 관계 중심적인 뉘앙스가 강한 '공범'이라는 우리말 제목은 썩 정밀해 보이지는 않죠. 양가적 감정에 놓인 두 여자의 갈등을 그린 작품입니다. 원제에 긍부정이 배치되는 두 개념을 접붙여둔 이유죠. 모모는 켄타로에게 집착과 파괴를 함께 느낍니다..

Romance 2024.03.30 0

Animation

more

이노센스 (2004, dir. 오시이 마모루): 고스트의 실종

# 0. 구원이라기보다는 잔존에 가깝고, 대안이라기보다는 위안에 가까운 것이지만요. # 1. 마침내 쿠사나기는 인형사와 결합하면서 네트워크적인 존재가 됐어요. 그녀(그)는 분명 존재하지만, 위치할 수도 추적할 수도 없죠. 그래서 쿠사나기의 실종 3년 후를 그린 이노센스의 테마는 거대한 '부재'일 수밖에 없어요. 공각기동대는 고스트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구축된 영화였어요. 인간과 기계, 자아와 타자를 논하던 세기말 SF는 그래서 '고스트는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정직하게 수렴했죠. 클라이맥스 인형사와의 만남은 그 질문에 대한 급진적 재정의를 요구했지만, 어쨌든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의미는 생산되고 있었고, 사유는 진전되고 있었던 거예요. 이노센스는 고스트라는 중심이 이미 부재한 상태, 적어도 무의미할 ..

Animation 2026.04.20 0

덜 샌드박스 무비 _ 배트맨 닌자 대 야쿠자 리그, 미즈사키 준페이 감독

# 0. 덜 기상천외한 미즈사키 이야기 미즈사키 준페이 감독,『배트맨 닌자 대 야쿠자 리그 :: ニンジャバットマン対ヤクザリーグ』입니다. # 1. 지랄 났던 배트맨 닌자의 속편. 전작의 리뷰에서도 짚었듯 여전히 시리즈의 정체성은 샌드박스의 기상천외함 그 자체다. 유아적 포르노라 부르든 트래쉬 정크푸드라 부르든 알 바 없다. 되려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그런 볼멘소리에 괘념키나 할는지 의문. 탄탄한 구조를 갖춘 걸작 '따위'보다 제한 없는 상상력이 낳은 유쾌한 난장을 지향하는 영화에게 황당함은 훈장일 뿐이다. 기성 히어로물의 엄숙주의에 알몸으로 꼬라박는 패기. DC의 IP가 일본 서브컬처의 광기와 만날 때 얻을 수 있는 시너지를 극단까지 밀어붙였다는 것은 여전히 평가받을만하다. 논리적 일..

Animation 2026.04.06 0

더욱 완벽한 우울 _ 퍼펙트 블루, 곤 사토시 감독

# 0. 힌트는 드라마 제목 곤 사토시 감독,『퍼펙트 블루 :: パーフェクトブルー』입니다. # 1. 양립불가능한 메시지를 동시에 받아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처벌이나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는 상태, 이중 구속, 더블 바인드. 원래의 자아를 지키고 싶은 욕구와, 원하는 자아에 다가가려는 욕망 사이에서 분열하는 모두. 도달할 수 없는 완벽함에 대한 강박과 그로 인한 완벽한 우울. 곤 사토시, 퍼펙트 블루다. 주인공 미마는 순수성을 지키고자 하는 '이상적 자아'와 변화를 수용해야 하는 '현실적 자아' 사이에서 갈등한다. 촬영 중 실제 고통을 겪고 있다 믿는다거나, 기억에 없는 살인을 저질렀다 의심하는 등 심각한 이인증에 시달릴 정도다. 농락하며 달아나는 환영은 억압하려 했던 페르소나가 투사..

Animation 2026.02.16 0

반환점에 서서 _ 붉은 돼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 0. 고향으로 돌아온 그를 본 아이들은 돼지, 붉은 돼지 아저씨라 불렀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붉은 돼지 :: 紅の豚』입니다. # 1. 잿빛 하늘 아래 전우들은 전부 죽었고, 운이 좋아 살아남은 그는 코를 잃었다.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사라진 흉측한 얼굴. 가실 기미 없는 핏빛 단면을 하고서 고향으로 돌아온 그를 본 동네 아이들은 돼지, 붉은 돼지 아저씨라 불렀다. # 2. 어느덧 1992년. 1941년 제국주의 끝물에 태어난 그림쟁이, 영원히 하늘을 날 것만 같았던 소년의 나이도 오십을 넘었다. 시간은 벌써 그렇게나 흘러버린 것이다. 전쟁의 위험과 전체주의의 광기를 경고하고(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이별의 두려움과 대화하는 법을 조언하고(이웃집 토토로), 어른이 된다는 것의 ..

Animation 2026.01.22 0

샌드박스 무비 _ 배트맨 닌자, 미즈사키 준페이 감독

# 0. 기상천외한 미즈사키 이야기 미즈사키 준페이 감독,『배트맨 닌자 :: ニンジャバットマン』입니다. # 1. 일본 망가의 캐릭터가 인격이라면, 북미 코믹스의 캐릭터는 플랫폼에 가깝다. 매 에피소드마다 매 작가마다 캐릭터가 따로 놀기에 정극과 시트콤의 차이라 이해해도 나쁠 건 없다.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일본 망가와 그로부터 영향받은 한국 만화에 익숙한 독자들이 유독 코믹스를 입문하는 데 버거워하는 이유다. 그래서 코믹스의 캐릭터명은 살아있는 인간의 이름이라기보다 어린 아이 모래상자와 닮앗다. 아주 큰 틀에서의 캐릭터 정체성, 이를테면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던 스파이더맨의 주제의식이나, 다크 히어로 배트맨의 내적 모순, 슈퍼맨의 무한한 선량함과 불살주의 정도가 가이드..

Animation 2025.12.06 0

로맨티시스트 _ 요수도시, 가와지리 요시아키 감독

# 0. 내일 걱정 없는 오늘 저녁의 노래 가와지리 요시아키 감독,『요수도시 :: 妖獣都市』입니다. # 1. 내일 걱정 없는 오늘 저녁의 노래. 이름 모를 누군가가 80년대 일본 시티팝을 듣고서 남겼다는 한 마디다. Stay with me. 일본의 부동산 버블 시기, 겪어보지 않은 사람조차 노스탤지어를 느낄 법한 그 희망적이면서 서정적이었던 시대의 정서를 대신하는 말로 이보다 더 근사한 표현이 있을까. 꿈꾸는 욕망은 모두 이룰 수 있고 바라는 쾌락은 모두 얻을 수 있는 꺼지지 않는 네온사인의 도시.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의 이들은 그 걱정 없는 내일에 마음껏 몸을 던졌을 것이다. 드라마틱하게 쌓아 올려졌던 버블이 증명하듯 말이다. 하지만 세상엔 유난히 걱정 많은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

Animation 2025.11.10 0

내가 좋은걸요 _ 천년여우, 곤 사토시 감독

# 0. 그를 만나지 못해도 괜찮아요. 왜냐면 나는 그를 쫓아가는 내가 좋은걸요. 곤 사토시 감독,『천년여우 :: 千年女優』입니다. # 1. 감정엔 시제가 없다. 슬프다와 슬펐다를 기호로써 구별할 뿐 슬프다의 감정과 슬펐다의 감정은 구분할 수 없고, 단지 슬픔이란 원형만이 존재할 뿐이다. 감정엔 주어도 없다. 모든 감정은 독점적이기에 나의 슬픔 외에 너의 슬픔은 공존할 수 없고, 너의 슬픔을 전해 듣는 순간 나의 슬픔을 끄집어내어 너의 슬픔이라 이름 붙였을 뿐이다. 그래서 이야기엔 주인이 없다. 이야기는 그 자체로 온전하지 않고 각자에 의해 고유하게 재구성되기에 각각은 침범할 수도 도용될 수도 없는 것이다. 결국 사실과 허구를 구분할 수 없다. 내가 겪은 감정과 겪었던 감정과 들었던 ..

Animation 2025.10.16 0

Documentary

more

귀여운 게 최고야 _ 공룡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 0. 원래 그렇게 시작하는 거지 뭐.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공룡들 :: The Dinosaurs』입니다. # 1. 솔직히 문외한으로선 고증이 얼마나 올바른지 알 수 없다. 오래전 보고 배운 것과 달리 깃털 달린 공룡들이 곧잘 등장한다거나, 스피노사우르스의 수중 적응, 몇몇 생물종의 사회적 행동 여부 등을 보는 건 썩 즐거운데, 그 역시 정설에 기반한 것인지는 확인할 길 없다. 결과적으로 오류가 적지 않다는 말도 있는 것 같다만, 지적하는 사람들이 맞는 건지조차 구분할 수 없으니, 역시 자연사 다큐의 고증 문제는 닥치고 있는 게 도와주는 거다. 다만 조예가 없는 사람조차 이 다큐가 엄정한 학술 연구가 아닌 말랑한 대중 교양이라는 것은 안다. 환경 결정론적 기반 위로 부상(Ris..

Ecology & Exploratory 2026.03.14 0

아이코닉 _ 스탑 메이킹 센스, 조나단 드미 감독

# 0. Hi. I've got a tape I want to play 조나단 드미 감독,『스탑 메이킹 센스 :: Stop Making Sense』입니다. # 1. 티나 웨이머스, 크리스 프란츠, 제리 해리슨 그리고 데이비드 번. 토킹 헤즈다. 전설적인 뉴웨이브, 포스트 펑크 밴드의 1983년 팬테이지스 극장 공연 실황은 독창적인 사운드뿐 아니라 프레젠테이션을 포함한 모든 면에서 탁월하다. 스스로 120만 달러를 조달한 독립 제작 공연은 스튜디오의 간섭 대신 순수한 역동성으로 가득하기에, 양들의 침묵, 필라델피아의 감독 조나단 드미가 밴드의 비전을 영화 언어로 번역함에 있어 타협하지 않을 수 있었다. 연출의 핵심은 자연주의적 몰입이다. 감독은 백스테이지 장면이나 인터뷰, 객석의 반응 ..

Art 2026.01.06 0

지킬 앤 하이드 _ 완벽한 이웃, 지타 갠브히르 감독

# 0. 당신의 사회는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가. 지타 갠브히르 감독,『완벽한 이웃 :: The Perfect Neighbor』입니다. # 1. 살다 보면 이해가 가지 않아 의아한 규칙들을 더러 맞닥뜨리곤 한다. 그럴 때면 잠시 영악한 악마에 빙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 규칙을 악용해 이익을 볼 방법이 없을까 추론해 보는 것인데, 겉으로 보기엔 다소 번잡해 보였던 '그 규칙'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유를 생각보다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도 참 머리가 아프겠군...이라는 류의 휘발적인 반성과 함께 말이다. 지타 갠브히르의 작품은 논쟁적인 스탠드 유어 그라운드법(Stand-your-ground Law)에 대한 비판적 스텐스의 사회고발 다큐멘터리이다. 영..

Social 2025.10.22 0

해변의 여인 _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 아녜스 바르다 감독

# 0. 영화를 너무 많이 하다 보면 그 사람이 영화가 된다. 아녜스 바르다 감독,『아녜스 바르다의 해변 :: The Beaches of Agnes』입니다. # 1. 80세 감독이 자신의 삶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 할 때, 관객은 으레 기대하는 그림이 있기 마련이다. 고즈넉한 흔들의자에 기대앉아 오래된 사진첩을 넘기듯 차분히 과거를 돌아보거나, 적당한 영상 자료들과 지인들의 인터뷰를 모아 연대순으로 정리하는 모습 따위다. 문제는 그 80세 감독이 하필 아녜스 바르다라는 것이다. 빛나는 눈빛과 소녀의 표정을 지닌 그녀는 평생 그러했듯 관객의 지루한 예상을 그대로 허락할리 없다. 바람 부는 해변과 거울이다. 바르다는 자신을 찾아온 관객들에게, 과거를 직접 보여주는 대신 그 기억을 비춰볼 '..

Art 2025.10.10 0

어머니,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_ 보이지 오브 타임, 테렌스 맬릭 감독

# 0. 적막 속에서 이미 스스로 알고 있을 가장 근원적인 목소리에 귀 기울일 뿐이다. 테렌스 맬릭 감독,『보이지 오브 타임 :: Voyage of Time』입니다. # 1. 어떤 이는 카메라로 시를 쓴다. 트리 오브 라이프의 테렌스 맬릭이다. 2016년 베니스에서 처음 공개된 장편 다큐멘터리 보이지 오브 타임은 과연 명성에 걸맞다. 작품의 첫인상은 단연 이미지다. 우주의 탄생과 생명의 진화를 재현한 모습은 예측가능한 스펙터클을 벗어난다. 압도적인 영상은 경이와 공포가 뒤엉킨 숭고의 감정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킨다. 성운의 폭발, 유기물의 형성, 공룡의 눈빛을 담아내는 장대한 시퀀스 앞에서 누구나 언어 이전의 순수한 시각적 경험에 잠길 것이다. 관객은 금세 저마다의 개성과 치열함을 잠시 ..

Scientific 2025.08.14 0

여왕의 노래 _ 어메이징 그레이스, 시드니 폴락 / 알란 엘리엇 감독

# 0. 없던 신앙심도 생기게 만드는 여왕의 음성 시드니 폴락 / 알란 엘리엇 감독, 『어메이징 그레이스 :: Amazing Grace』입니다. # 1. 1972년, 서른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이미 절정의 커리어를 달리고 있던 소울의 여왕은, 자신의 영혼의 고향, 가스펠로 회귀한다. 아레사 프랭클린.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하다는 누군가의 경탄처럼 그녀의 음성은 평범한 음악을 마치 종교적 설교로 변화시킨다. 다큐멘터리의 제목이기도 한 찬송가 'Amazing Grace'를 부르는 순간. 익숙한 엄숙미와 대조되는 자유롭게 유영하는 플로우 끝에 청중을 압도하는 감정의 폭발은, 그녀가 가지고 있었던 음악적 담대함을 여실히 드러낸다. 실황 라이브를 고스란히 담은 다큐멘터리의 형식은 몰입을 크..

Art 2025.07.04 0

참극을 기록한다는 것 _ 밤과 안개, 알렝 레네 감독

# 0. 우리는 기록의 의미를 충분히 고민하고 있는 걸까 알렝 레네 감독,『밤과 안개 :: Night And Fog』입니다. # 1. 익숙한 것임에도 막상 정의를 내려보라 하면 쉽지 않은 말들이 있는데 '다큐멘터리' 역시 그러하다. 무언가를 진지하게 대하는 순간을 '다큐 찍는다' 말할 정도로 보편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훈련된 지식인이 아니라면 생각보다 정의를 내리기 쉽지 않다. 실재 세계를 기록하고 해석하는 영상 매체로서 사실성에 대한 지향과 윤리적 책임을 기반한다는 낮은 차원의 합의를 제외하면, 이후의 기록과 해석, 사실과 표현, 윤리와 미학 사이의 긴장 관계에 대해서는 각각 자의적으로 받아들이는 듯한 모양새다. 다큐픽션을 창시한 것으로 평가되는 로버트 J. 플래허티는 현실세..

Historical 2025.06.18 0

Series

more

비루한 당신의 노고에 건배 _ 흑백요리사 2

# 0. 늦은 밤. 오늘도 비루한 당신의 노고에 건배. 넷플릭스 버라이어티 시리즈,『흑백요리사 2 :: Culinary Class Wars Season 2』입니다. # 1. 흑백과 계급 운운한다는 것은 자칫 '위너'와 '루저'를 낙인찍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이는 예능 프로그램에게 큰 부담일 수밖에 없기에 초기 제작진은 '유명'과 '무명'으로 대신하려 했다. 일례로 잔뜩 욕을 먹었던 시즌1의 장사 미션도 흑과 백을 잘 팔리는 유명가게와 안 팔리는 무명가게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인플루언서를 부른 것 역시 유명과 무명이라는 테마에서 파생된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이다. 하지만 20대 80의 비율로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흑수저들과 그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백수저들의 구도는 관객을 위너와 루저..

Drama 2026.01.16 0

여자 버리기 경쟁 _ 피지컬 아시아

# 0. 어느 팀이 가장 효율적으로 여자를 버릴 것인가 넷플릭스 버라이어티 시리즈,『피지컬 아시아 :: Physical Asia』입니다. # 1. 출연도 좋다. 다소 동남아시아권에 편중된 감은 있지만, 그래도 각기 다른 8개국 참가자 모두 매력적이다. 아모띠를 비롯해 전작에서 훌륭한 활약을 선보인 이들을 다시 섭외해 세계관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도, 씨름선수 김민재나 크로스핏 최승연 같은 뉴페이스가 더해줄 신선함도 놓치지 않았다. 파퀴아오나 휘태커 같은 글로벌 스포츠 스타는 물론, 몽골 전통 씨름의 어르헝바야르, 터키 오일 레슬링의 레젭 카라 등 전통 스포츠 강자를 섭외, 단순히 범세계적 운동인 크루를 넘어 문화 교류의 정체성을 더한 것도 썩 영리하다. 곡예사 라그바오치르와 파쿠르 선수..

Action 2025.11.18 2

퐁당퐁당 _ 러브, 데스 + 로봇 시즌 4

# 0. 돌을 던지자. 애니메이션 앤솔로지『러브, 데스 + 로봇 시즌 4 :: Love, Death + Robots Vol. 4』입니다. # 1. 이쯤 되면 징크스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첫 번째 시즌의 성공, 두 번째 시즌의 혹평, 세 번째 시즌은 첫 시즌의 성공을 계승하며 반전을 거두었던 것에 반해, 네 번째 시즌은 두 번째 시즌의 단점을 답습하며 주저앉는 듯하다. 아이디어의 부재를 연성화된 표현들로 무마하려던 두 번째 시즌에서처럼 이번에는 귀여운 코미디, 만만한 판타지로 만회하려 한다는 인상이 지나치게 강하다. 물론 어떤 작품이 귀여움과 코미디로 승부를 보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문제는 이 엔솔로지가 이라는 것. 금기를 허용하지 않는 실험적인 세계관과 공격적인 플롯, 강렬한..

Animation 2025.05.20 2

죽거나 혹은 미치거나 _ 어메이징 디지털 서커스, 구스웍스 감독

# 0. 글리치 프로덕션(Glitch Productions)을 아시나요? 구스웍스 감독,『어메이징 디지털 서커스 :: The Amazing Digital Circus』입니다. # 1. 닐 블룸캠프의 오츠 스튜디오 이후 오랜만에 스튜디오 소개글이다. 물론 하꼬 블로거 따위가 '소개'하기엔 지나치게 월클이지만 말이다. 글리치 프로덕션(Glitch Productions)은 다채롭고 개성적인 디자인, 매콤한 블랙 코미디, 재기 발랄한 스토리로 미래지향적인 가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호주 국적의 인디 애니메이션 제작사다. 초기작 (2019)와 (2021) 이후, 미국의 애니메이터 리암 빅커스(Liam Vickers)가 총괄로 합류한 (2021)으로 도약한 글리치는, 작년 또 다른 애니메이터 쿠퍼..

Animation 2024.06.28 0

하우프루빗 _ 포커페이스, 라이언 존슨 / 나타샤 리온 감독

# 0. 누가 범인인가 (who done it?)의 미스터리를 대신하는어떻게 범인을 밝힐 것인가 (how prove it?)의 서스펜스 라이언 존슨 / 나타샤 리온 감독,『포커페이스 :: Poker Face』입니다. # 1. Orange is The New Black을 본 사람치고 니키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오뉴블을 제법 재미있게 본 저 역시 나타샤 리온은 썩 좋아하는 배우입니다. 여유롭고 정겹고 온화하면서 동시에 세상에서 서너 발짝 떨어진 듯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특유의 톤이 매력적인 배우죠. 등장하는 모든 장면을 장르물로 만들어버리는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헤어스타일과 허스키한 목소리도 멋지구요. 다만 그녀의 캐스팅만을 근거로 작품을 고르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닙니다. ..

Mystery & Thriller 2023.08.04 0

사이다의 성분 _ 피지컬 100, 사이렌 불의 섬

# 0. 왜 재미있는 거지? 넷플릭스 버라이어티 시리즈,『피지컬 100, 사이렌 불의 섬』입니다. # 1. 그놈의 K-타령을 썩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호들갑이 이해가 갈 정도로 영상 콘텐츠들의 글로벌 시장 확대가 두드러진 근년이긴 했습니다. 이젠 이야기하는 것조차 지치는 기생충을 비롯한 수많은 영화들 뿐 아니라 킹덤에서 시작해 오징어 게임의 메가히트로까지 이어진 웰메이드 드라마 시리즈,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권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가벼운 로맨스 드라마들도 꾸준히 나오고 있는데요. 최근엔 예능까지 주목받는 듯한 양상이죠. 최근 BTS의 뷔를 섭외해 해외 시장에 도전 의지를 비친 바 있는 나영석 PD의 서진이네는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다 해야 할 겁니다. 그중에는 개인적으로도 흥미로..

Action 2023.06.06 0

엄숙주의의 울타리 너머 _ 컹크의 색다른 지구 이야기

# 0. 엄숙주의의 울타리를 호쾌하게 넘는 코미디의 힘 넷플릭스 모큐멘터리 『컹크의 색다른 지구 이야기 :: Cunk on Earth』입니다. # 1. 인류의 문명사를 2시간 30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앙상하게 핥아내는 모큐멘터리입니다. 문명 발생에서 시작해 종교, 문화, 근대화를 지나 세계 대전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을 유럽인의, 보다 정확히는 영국인의 관점에서 편협하게 전개됩니다만 뭐 어쩔 수 없는 거겠죠. 지들이 만든 거니까요. 처음엔 필로미나 컹크(Philomena Cunk)가 뭔가 싶었는데요. 코미디언 '다이앤 모건'의 부캐였더라구요. 얼핏 보고선 아이티 크라우드의 캐서린 파킨슨인 줄 알고 살짝 반가웠습니다만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고선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찾아봤더니 컹크라는 부케로 ..

Comedy 2023.02.08 0

Bla-bla

more

선악과를 탐한 자의 추방과 교훈

# 0. 간교한 뱀의 혓바닥을 단호히 뿌리쳐야 한다. 『선악과를 탐한 자의 추방과 교훈』 # 1. 태초에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의 모든 풍요를 허락했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큼은 엄격히 금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게 되리라는 경고였다. 허나 간교한 뱀이 나타나 그것을 먹으면 죽는 것이 아니라 눈이 밝아져 신과 같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 유혹했다. 그 말이 탐스러웠던 하와와 아담은 결국 금기를 어겼고, 곧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을 깨달아 수치심에 몸을 숨겼다. 신의 추궁에 아담은 여자가 주어 먹었다 핑계를 댔고, 하와는 뱀이 꾀어 먹었다 변명했다. 이에 신은 뱀에게 배로 기어 다니며 흙을 먹는 저주를, 하와에게는 출산의 고통을, 아담에게는 평생..

Bla-bla-bla 2025.12.12 0

글쎄, 당신들은 엘리트가 아니라니까

# 0. 개나 소나 학사, 취업 안되면 석사 하는 시대 『글쎄, 당신들은 엘리트가 아니라니까』 # 1. 물론 영화가 엘리트이던 시절도 있었다. 무릇 예술은 사치스러운 것이고, 안 그래도 돈 많이 잡아먹는 영화를 누린다는 건 선택받은 누군가들만의 특권이었음에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도 옛말이다. 1990년대 초까지 겨우 30%대에 지나지 않았던 대학진학률은 이후 급속히 늘어 00년에는 70%, 08년이면 80%를 육박한다. 말인즉 2000년대 언저리까지만 하더라도 20대조차 절반 남짓, 30대는 30~40% 정도가 간신히 고등 교육을 받았던 반면, 2020년대에 이르러 20대와 30대 전반에 걸쳐 75% 이상이 대학 교육을 받았다는 의미다. 물론 학력과 교양이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

Bla-bla-bla 2025.10.26 0

캐릭터 위기에 봉착한 스타 사업가의 오너리스크

# 0. 알려주고 도와주는 캐릭터에서 지적하고 평가하는 캐릭터로 『캐릭터 위기에 봉착한 스타 사업가의 오너리스크』 # 1. 연일 부정적 기사가 이어진다.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언론의 상투적 비방이라기엔 커뮤니티의 반응도 유튜브 댓글의 반응도 심상치 않다. 사업가 겸 방송인 백종원 씨다. 영화를 즐기다 보니 인간사 내러티브의 측면에서 보는 못된 관성이 있는 데 이번엔 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백종원의 인지도는 과 함께 시작되었다 해도 틀리지 않다. 초기의 백종원은 철저하게 '알려주고 도와주는 캐릭터'로 기억한다. 가난한 연인들에게 깻잎으로 모히또를 만드는 법을 알려주는 사람이었고, 자취생에게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 만드는 법을 알려주는 사람이었으며, 한 푼..

Bla-bla-bla 2025.02.06 2

갈등을 배우지 못해서

# 0. 한국인에게 당할 줄 몰랐다. 『갈등을 배우지 못해서』 # 1. 가 연일 화제다. 이후 오랜만에 만나게 된 요리 예능은 필자 역시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20명의 스타셰프와 80명의 은둔고수가 뒤엉켜 자웅을 겨룬다는 콘셉트의 버라이어티 쇼는 걸출한 캐스팅, 컬트적 캐릭터, 각각의 드라마에 힘입어 폭발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다만 1차 공개분(1회~4회)까지만 하더라도 호평 일색이었던 것과 달리 점점 비판도 늘어가는 듯한 모양새다. 2차 공개분(5회~7회)의 팀전에서 드러난 다소의 혼란을 지나, 3차 공개분(8회~10회)의 장사 미션룰은 인간성을 기망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크게 받고 있는 데, 불쾌감을 표하는 사람들의 지적은 개인적으로도 무리 없이 동의하게 된다...

Bla-bla-bla 2024.10.04 0

천사의 속삭임

# 0.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울어라, 영화관 혼자 울 것이다. 『천사의 속삭임』 # 1. 배우 최민식은 손석희와의 인터뷰에서 특유의 소탈한 말투로 나라도 티켓값이 부담스럽겠다 말한다. 녹록지 않은 관객의 주머니 사정을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그럼에도 만드는 이들이 작가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지적하는 모습은 많은 이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평론가 이동진은 을 비평해 달라는 팬들의 짓궂은 농담에 살려달라는 유머러스한 답변을 남겼다. 충성도 높은 수많은 어린이 관객들과 컬트적 현상에 호기심을 느낀 몇몇의 일반 관객층에 힘입어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도전하는 하츄핑에 대한 영화팬들의 반응은 유쾌하면서 일견 자조적이다. 얼핏 무관해 보이는 두 사건은 결국 영화계의 위기를 접..

Bla-bla-bla 2024.08.22 0

20세기 소년의 회상

# 0. 2024년 3월 1일. 조산명(鳥山 明) 선생이 향년 68세의 일기로 타계하셨습니다. 『20세기 소년의 회상』 # 1. 그날따라 유난히 낯설게 느껴지는 서재. 먼지 소복한 귀퉁이에서 묵혀지고 있던 드래곤볼을 담담히 읽어나갔죠. 인이 박힐 정도로 많이도 봤던 익숙한 그림체와 익숙한 캐릭터와 익숙한 대사들은 책을 읽는 건지 책 위를 미끄러지는 건지 모를 정도로 책장을 넘기게 만듭니다. 둔하게 읽으리라는 다짐이 무색하게도 한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야속한 42권의 마지막 장을 덮었는데요.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양반의 비보임에도 많은 분들이 소감 하시듯 참 헛헛하더군요. 문화의 본질이란 결국 연결인 걸까요. 그러고 보면 영화 개봉을 겸해 다시 읽은 슬램덩크도 얼마 전이었던 것 같은데..

Bla-bla-bla 2024.03.26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