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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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Horror 31

트리뷰트 _ 황혼에서 새벽까지, 로버트 로드리게스 감독

# 0. 그 모든 의미에서 흘러넘치는 유쾌하고 자유로운 펄프 픽션의 피비린내 로버트 로드리게스 감독, 『황혼에서 새벽까지 :: From Dusk till Dawn』입니다. # 1. 처음은 케이블 티브이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폭력과 섹스와 유흥이 조합된 말초적 쾌락이 이렇게까지 과격하게 펼쳐질 수 있구나라는 감상은, 한 떨기 가녀린 소년에게 충분히 충격적인 것이었죠. 그렇게 한동안 잊고 지냈었는데요. 적당히 이런저런 경험이 쌓일 만큼 나이를 먹은 후 다시 볼 기회가 있었고. 지금은, 좋은 영화라는 평이 현학적인 작품들만 독점적으로 향유하는 것이라 여기던 고정관념을 깨부숴 준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괴상한 영화가 이렇게나 재미있다면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라는 고민이 며칠은 머릿속에서 ..

Film/Horror 2023.11.16

꽃과 손 _ 부화, 한나 버그홀름 감독

# 0. 그 손에 담긴 마음을 들어 보자꾸나. 한나 버그홀름 감독, 『부화 :: Pahanhautoja』입니다. # 1. 호러라기에는 조금 애매합니다. 몇몇의 제한적인 점프스케어가 사실상 전부라 공포 영화를 힘들어하시는 분들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죠. 오컬트의 분위기에 살짝 발을 담그는 듯도 하지만 이 역시 크리처의 디자인에만 선택적으로 적용될 뿐입니다. 영화는 과보호 환경에서 성장한 사춘기 소녀의 불안을 드라마틱하게 과장한 우화라 보는 것이 차라리 정확합니다. 알레고리는 제법 단편적이고 또 노골적이라 따라가는 것은 편안합니다. 실제 관객이 즐기게 되는 대부분은 미려하고 문학적인 서사 따위가 아닌, 주인공 티니아의 불안과 배우 시이리 솔랄리나의 열연이 차지하고 있죠. 영화는 가족을 '둥지'로 정의합니다...

Film/Horror 2023.09.28

빛 좋은 개살구 _ 밤이 되었습니다, 이형구 감독

# 0. 일주일 내내 영화를 한 편도 안 본 건 진짜 몇 년 만인 것 같은데요. 성역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존과 악마 사냥꾼 하던 가닥을 이어받아 회칼 도적을 키웠는데요. 증오의 딸 릴리트를 무찌른 후 레벨 70 언저리까지만 하더라도 참 꿀잼이었죠. 이후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폐사 구간에 접어들던 차에, 몹팩 축소 패치에 정타를 처맞고 현타가 오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혐리자드께서 전 세계 블빠들의 성토를 죄다 씹고 계시니 별 수 있나요. 다시 영화로 돌아와야죠. 그래도 불 끈 방에서 어두침침한 화면만 보던 게 익숙해진 겸 호러를 찾았습니다. 시작은 가볍게 단편으로 골라도 나쁘지 않겠죠. 이형구 감독, 『밤이 되었습니다 :: Black out _ Mafia game』입니다. # 1. 어떤 영..

Film/Horror 2023.06.18

하얀색, 검은색, 붉은색 ⅱ _ 아메리칸 사이코, 메리 해론 감독

하얀색, 검은색, 붉은색 ⅰ _ 아메리칸 사이코, 메리 해론 감독 # 0. 하얀색 검은색 그 사이 3초 그 짧은 시간 메리 해론 감독, 『아메리칸 사이코 :: American Psycho』입니다. # 1. 사이코에 대한 이야기로만 흘러갈 뿐, 미국인과 타국인이 대결하는 식의 내셔널리즘 morgosound.tistory.com # 6. "나는 인간의 모든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살, 혈액, 피부, 머리카락. 그런데 확실한 감정이 하나도 없다. 탐욕과 혐오감을 빼고는." 살인보다 흥미로운 것은 살인의 방식인 거겠죠. 앞서 말씀드린 대로 사이코의 폭력성을 아메리칸스러움이 과격하게 투사되는 순간이라 이해한다면, 살인이 이루어지는 순간은 여피의 특성이 가장 진하게 묻어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쾌락적이고 과시적이고 ..

Film/Horror 2022.09.10

하얀색, 검은색, 붉은색 ⅰ _ 아메리칸 사이코, 메리 해론 감독

# 0. 하얀색 검은색 그 사이 3초 그 짧은 시간 메리 해론 감독, 『아메리칸 사이코 :: American Psycho』입니다. # 1. 사이코에 대한 이야기로만 흘러갈 뿐, 미국인과 타국인이 대결하는 식의 내셔널리즘과 관련된 설정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감독은 '패트릭 베이트먼'이라는 괴물에게 아메리칸 사이코라 이름 붙였죠. '아메리칸'이라는 출신이 '사이코'라는 정체성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이고, 폭력의 뿌리에 구체적 개인의 기질 외에 출신과 깊은 연관관계가 있음을 추론케 합니다. 실제 영화는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무리들에게 1990년대 여피(Yuppie)의 스테레오 타입을 강박적으로 부여하는 것을 넘어, 아예 여피를 의인화시킨 우화처럼 그리고 있죠. 사이코는 아메리칸스러움의 극단적인 형태로 ..

Film/Horror 2022.09.08

미녀는 괴로워 _ 드래그 미 투 헬, 샘 레이미 감독

# 0. 어쩌면 샘 레이미는 그냥 알리슨 로만을 괴롭히고 싶었던 걸지도?! 샘 레이미 감독, 『드래그 미 투 헬 :: Drag Me to Hell』입니다. # 1. 어떤 사람들은 연기의 목적을 '재연'이라 생각합니다. 특정한 상황에 노출된 인간의 반응을 보다 완벽하게 재연하는 것을 뛰어난 연기라 평가하는 식이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체계적 훈련과 논리적 연구에 기반한 기술적 연기법 보다,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지우고 배역에 동화되는 메서드 연기법에 더 큰 권위를 부여하는 데에는 연기의 본질이 재연에 있다는 생각과 무관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메서드는 연기자가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연기법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메릴 스트립이나 케이트 블란챗과 같은 배우들이 선보이는 테크니컬 한 연기들은 훌륭한 반례라 ..

Film/Horror 2022.06.26

스포일러 _ 비바리움, 로르칸 피네간 감독

# 0. 흥미로운 아이디어. 재치 있는 스토리. 감각적인 연출. 자해적 플롯. 로르칸 피네간 감독, 『비바리움 :: Vivarium』입니다. # 1. 흥미로운 아이디어입니다. 뻐꾸기의 탁란(托卵, 어떤 새가 다른 종류의 새의 집에 알을 낳아 대신 품어 기르도록 하는 일)에 착안하는 것이죠. 인간을 기생종을 키우게 된 숙주의 상황으로 몰아넣어 보자는 상상은 썩 유쾌합니다. 본능 앞에 스스로 자연의 법칙 밖의 존재라 자만하던 인간의 무기력함을 냉소적으로 조망한다는 아이디어는, 존재론적 회의를 유도한다는 측면에서 호러물로서 충분히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죠. 재치 있는 스토리입니다. 보금자리를 찾던 두 주인공을 그 자체로 거대한 생태적 운명을 은유하는 마을 '욘더'에 묶어두는 방식은 기대보다 더 충실합..

Film/Horror 2022.06.20

처녀보살의 살풀이 _ 라스트 나잇 인 소호, 에드가 라이트 감독

# 0. 새벽의 황당한 저주를 '장르로 장난치려고 만든 영화'라 한다면, 베이비 드라이버를 '음악 가지고 놀려고 만든 영화'라 한다면, 이 영화는 '촬영 연출하려고 만든 영화'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겁니다. 에드가 라이트 감독, 『라스트 나잇 인 소호 :: Last Night in Soho』입니다. # 1. 타란티노 감독이 제목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유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우디 앨런의 가 함께 떠오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제목뿐 아니라 재미의 측면에서도 두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는데요. 매력적이지만 허구적이기도 한 과거 황금기의 도시를 재현하는 것에서부터 이야기의 동력을 얻는다는 점에서 유사한 방법론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죠. 우디 앨런이 그린 1920년대 파리도 아름답습니다만,..

Film/Horror 2022.06.16

손가락 _ 자이고트, 닐 블롬캠프 감독

# 0. 오츠 스튜디오(Oats Studios)를 아시나요. 닐 블롬캠프 감독, 『자이고트 :: Zygote』입니다. # 1. 의 닐 블롬캠프 감독이 설립한 실험 영화 제작사입니다. 감독 특유의 성향이 물씬 묻어나는 단편들을 적당히 뿌려 간을 보다가 각이 나온다 싶으면 장편으로 태세 전환하려는 응큼한 속셈의 프로젝트죠. 이렇게 말하면 뭔가 온갖 감독들의 사적 프로젝트들을 줄줄이 꿰고 있는 듯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까짓 게 그런 걸 어떻게 알겠어요. 넷플릭스 긁어보다 얻어걸린 거 맞습니다. # 2. 좋은 세상입니다. 적당한 광고 시청을 지불하면 어지간한 단편 영화나 고전 영화들은 공짜로 볼 수 있는 세상이죠. 앞서 넷플릭스에서 보았다 말씀드렸습니다만 오츠 스튜디오의 작품들은 유튜브와 스팀에서도 공개되..

Film/Horror 2022.05.22

어둠 속의 등불 _ 더 위치, 로버트 에거스 감독

# 0. 곽도원 대신 안야 테일러 조이가 나오는 곡성이 있다?! 로버트 에거스 감독, 『더 위치 :: THE VVITCH』입니다. # 1. 미국으로 이민 간 영국인 가족이 마을에 정착하지 못하고 추방됩니다. 없이 사는 와중에 금슬이 좋았던 부부는 애를 다섯이나 낳지만 줄초상 납니다. 막둥이는 까꿍 하다 행방불명 되구요, 쌍둥이 동생은 염소 밥 되고 엄마 찌찌는 까마귀 밥 되고 아빠는 흑염소한테 몸통 박치기 당하지만 큰 아들은 겁나 이쁜 누나랑 뽀뽀하고 죽어 여한이 없는지 하나님께 땡큐 합니다. 가족 잃고 실의에 빠진 미모의 큰 언니는 홀딱 벗고 댄스 동호회에 가입한 후 하하호호 웃으며 승천한다는 내용의 훈훈한 영화죠. # 2. 믿음에 대한 영화들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만, 그중에서도 허황된 믿음으로 ..

Film/Horror 2022.04.20

중독과 선택 _ 어딕션, 아벨 페라라 감독

# 0. 문과를 가까이하는 게 이렇게나 위험합니다. 대학원생은 더더욱 위험합니다. '아벨 페라라' 감독, 『어딕션 :: The Addiction』입니다. # 1. 강의실에 전쟁 범죄와 관련된 슬라이드가 펼쳐집니다. 국가의 악행에 가담한 개인의 책임을 두고 두 대학원생이 논쟁을 벌입니다. 벌써부터 피곤하죠. 뱀파이어 영화인 줄 알았는데요. 공포 영화라 그러셨잖아요.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인생의 값진 교훈 하나를 안겨줍니다. 이 영화는 수면 부족으로 다크서클이 가득한 굳은 표정의 대학원생이 다가오면 단호하게 꺼져라 말해야 한다는 내용의 작품입니다. 명심하세요. 자칫 방심하다간 교수들이 득실득실한 파티장에 납치당해 피를 쪽 빨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 2. 칸트에 헤겔에 샤르트르까지. 오냐오냐 하니까 끝이..

Film/Horror 2021.12.12

그림자의 성녀 _ 세인트 모드, 로즈 글래스 감독

# 0. 한 톨도 새지 않게 꼭꼭 눌러 담아 응축된 광기의 에너지 '로즈 글래스' 감독, 『세인트 모드 :: Saint Maud』입니다. # 1. 피를 뒤집어쓴 얼굴, 내면의 무언가가 망가진 사람의 눈을 한 여인이 고개를 들어보지만 머리 위엔 막힌 천장의 모서리와 혐오스러운 벌레 한 마리뿐입니다. '모드'는 작은 골방에 살고 있습니다. 소란스러운 바깥의 소리는 옆으로 길게 찢어진 모양의 창이 닫히며 조용해 집니다. 사회와 단절된 공간은 마치 감옥의 독방처럼 보입니다. 무언가 '죄'를 짓고서 홀로 감옥에 갇힌, 보다 정확히는 스스로를 감옥에 가둔 인격입니다. 그녀는 호스피스입니다. 새롭게 일하게 된 곳으로 가기 위해 짐을 싸 방 밖을 나섭니다. 빛이 스며드는 좁은 골목이 마치 어둠을 비집는 '틈'과 같은 ..

Film/Horror 2021.08.24

극본과 연출 사이 _ 킹덤 아신전, 김성훈 감독

# 0. Netflix 오리지널 드라마 의 첫 번째 외전입니다. 두 개의 정규 시즌을 끝낸 후 신규 캐릭터에 대한 외전이 전개될 계획이었던 듯합니다만 팬더믹으로 인해 외전 시리즈가 몇 편 더 이어지는 요량인가 본데요.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습니다만 시리즈를 애정 하는 입장에서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되는군요. '김은희' 작가, '김성훈' 감독, 『킹덤 _ 아신전 :: Kingdom _ Asin of the North』입니다. # 1. 특정 캐릭터에 집중하는 '인물전'은 보통 두 가지의 접근법을 가집니다. 하나는 본편에서 충분히 활약한 인물의 남겨진 떡밥을 회수하는 경우구요, 또 다른 하나는 새롭게 등장할 인물이 곧바로 본편에 안착할 수 있도록 필요한 과거 설정들을 미리 전달하는 경우죠. 전자는 시리즈나 시리즈 ..

Film/Horror 2021.07.31

오히려 좋아 _ 더 템플, 마이클 바렛 감독

# 0. 의외로 평점 1점은 보기 힘듭니다. 어지간히 욕먹는 영화들도 대부분 4점대, 정말 열심히 노력해도(?) 3점대가 최선이죠. 네임드 망작들도 있습니다만 되려 이런 류들은 컬트적인 유명세 덕에 평점이 높기 마련입니다. 다음영화 기준 클레멘타인 무려 9.1 이구요, 무서운집 8.2, 라스트 갓파더 6.9, 자전차왕 엄복동 4.6, 주글래 살래 4.0,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3.9, 리얼 3.7이죠. 그 와중에 긴급조치 19호는 2.0 이네요. 역시 갓동님 존경합니다. 이 영화는 다음 영화와 왓챠피디아 모두에서 평점 1.2를 찍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 정도면 얼마나 못 만들었을지 너무 궁금하지 않나요? 나만 궁금해? 나만 쓰레기야? '마이클 바렛' 감독, 『더 템플 :: Temple』입니다. # 1. ..

Film/Horror 2021.07.21

랩탑 무비 _ 블레어 위치, 다니엘 미릭 / 에두아르도 산체스 감독

# 0. 시리즈를 연이어 보다 보니 문득 요런 류의 영화가 땡기더라구요. '다니엘 미릭', '에두아르도 산체스' 감독, 『블레어 위치 :: The Blair Witch Project』입니다. # 1. 코시국이라 곤란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어지간하면 영화는 극장에서 보는 편이 좋습니다. 호러든 코미디든 드라마든 멜로든 스릴러든. 압도적인 스크린 크기가 주는 박력과 디테일한 화질, 전문가들이 세심하게 설계한 음향 등 감독의 의도에 최적화되어 있는 환경이 주는 경험의 퀄리티는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죠. 오가는 데 필요한 유무형의 비용이 만만치 않고 집 안 소파에 비해 좌석도 불편하며 다른 무엇보다 에티켓을 담보할 수 없는 불특정 다수와 함께 볼 수밖에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좋아하시는..

Film/Horror 2021.07.19

앙코르 _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스핀오프, 나카이즈미 유야 감독

# 0. 보통 맛있는 음식은 두 번 먹어도 맛있습니다. 처음 먹을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말이죠. '나카이즈미 유야' 감독,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스핀오프 할리우드 대작전! カメラ を止めるな! スピンオフハリウッド大作戦!』입니다. # 1. 최대 강점은 '컨셉을 잘 잡았다.'라는 점일 겁니다. 속편이 아니라 '스핀오프'를 기획했다는 점 말이죠. 속편은 전작과 동등한 위계에서 온전한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증명해야 합니다. 충분한 볼륨은 물론이거니와 시리즈물로서의 일관성은 유지하면서 동시에 고유의 차별점 혹은 개선책을 준비해야 하죠. 특히 전작이 많은 사랑을 받은 명작이라면 난이도는 급상승합니다. 고생해서 잘 만들어 놓으면 겨우 '당연한 거 아냐?'라는 소리밖에 못 듣는 반면, 못 만들기라도 했다간 욕만 바가지..

Film/Horror 2021.07.13

번뇌와 번민에 빠진 건 누구? _ 제8일의 밤, 김태형 감독

# 0. 애매하게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하기보단 각 잡고 하나를 제대로 하는 편이 낫습니다. 특히나 데뷔작이라면 더더욱 말이죠. 영화는 크게 불교, 오컬트, 범죄 스릴러라는 세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요. 안타깝게도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하게 작동하지 못하는데 그 원인은 각각의 코드가 서로의 발목을 붙잡기 때문인 듯 보입니다. '김태형' 감독, 『제8일의 밤 :: The 8th Night』입니다. # 1. 시작과 동시에 부처님은 눈깔 뽑기 장인이 됩니다. 흔히 불교 하면 떠올릴법한 자비나 참선 등의 이미지와 배치된 다소 폭력적인 설정이지만, 뭐 그럴 수 있죠. 감독은 이 부분의 문제를 후반부 관념화를 통해 극복합니다. 빨간 눈깔은 번뇌하는 눈, 검은 눈깔은 번민하는 눈이라는 건데요. 확실히 이 토대에서라면..

Film/Horror 2021.07.07

버퍼링 주의_ 우로보로스, 계영호 감독

# 0. 제목이 강스포군요. '계영호' 감독, 『우로보로스 :: Ouroboros』입니다. # 1. '우로보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자기 꼬리 물고 있는 형상의 무한동력 마조히스트 뱀을 뜻합니다. 통상 캐릭터보다는 순환이나 윤회, 완전성 따위를 상징하는 심벌로서 더 많이 소비되는 친구인데요. 고딕풍의 호러나 오컬트물 등에서 보통 원형 문고리를 얘 조각으로 만들어두는 경우가 많죠. 감독의 셀프 스포일러대로 인과가 서로의 꼬리를 무는 초현실적 상황 속에서 공포를 발견하는 작품입니다. 시나리오 상 특기할 만한 점은 여타 작품들은 두 개의 분리된 세계를 다루는 데 반해 과 그리고 이라는 '세 층위'가 교차한다는 점 정도를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나 편집입니다. 현실과 꿈을 그림..

Film/Horror 2021.06.13

뉴비 판독기 _ 더 로드, 장 밥티스트 안드레아 / 패브리스 카네파 감독

# 0. 우연한 기회로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게 되었네요. 어디 볼만한 영화가 없을까 하던 차에 적당한 런타임의 공포영화를 하나 골랐습니다. 미리 준비한 편의점 팝콘과 맥주 한 캔씩을 손에 들고 영화를 보기 시작합니다. 82분간 펼쳐지는 죽음의 드라이브가 끝나고. '노력은 인정하지만 좀 심심하다' 생각하던 차에, 응? 옆에 앉은 친구가 극찬을 쏟아냅니다. "와~ 진짜 재밌다!!" '장 밥티스트 안드레아', '패브리스 카네파' 감독, 『더 로드 :: Dead End』입니다. # 1. 저는 얼추 일주일에 여덟에서 열 편 정도의 영화를 소비합니다. 그리 많이 보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디 가서 영화 보는 게 취미입니다 말할 수 있을 정도는 되는 셈이죠. 반면 친구는 영화를 딱히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

Film/Horror 2021.05.30

마피아 게임 _ 서클, 에런 핸 / 마리오 미시온 감독

# 0. '정치질'하는 영화입니다. '에런 핸', '마리오 미시온' 감독, 『서클 :: Circle』입니다. # 1. 무지막지하게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경찰도 있구요. 레즈비언도 있습니다. 임산부도 있구요. 전과자도 있죠. 어린아이도 있고, 애매하게 큰 청소년도 있구요. 장정도 있고, 노인도 있습니다. 암에 걸렸다 막 나은 사람도 있구요. 이라크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군인도 있죠. 흑인도 있고, 백인도 있고, 아시안도 있고, 라티노도 있습니다. 인종차별자와 인종차별의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이 동시에 등장하구요. 신을 받드는 목사와, 과격한 무신론자가 함께하죠. 대부분은 영어를 하지만,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 2. 검은 방입니다. 빨간 원 위에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서 있습..

Film/Horror 2021.05.18

미스터 삑사리 _ 새벽의 황당한 저주, 에드가 라이트 감독

# 0. 혹자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삑사리의 미학이라 분석하기도 하는데요. 삑사리가 중요한 순간 매력 포인트로 작동하는 방식을 넘어 아예 삑사리만으로 영화를 만들면 요런 컬트적인 작품이 나오기도 합니다. '에드가 라이트' 감독, 『새벽의 황당한 저주 :: Shaun of the Dead』입니다. # 1. 패러디 영화입니다. 제목부터 조지 A. 로메로 감독의 에서 따왔듯 말이죠. 고전적 좀비 영화의 소재들을 가져오되 풀어내는 방식에 있어선 클리셰를 역으로 비틂으로 인한 의외성을 즐기는 영화입니다. 그 수준은 패러디와 클리셰의 레퍼런스를 짚는 것보다 차라리 패러디가 아닌 장면을 찾는 편이 더 빠를 정도죠.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좀비 떼의 습격과 이를 멋들어지게 돌파해 나가는 영리한 주인공 파티는 윈체스터..

Film/Horror 2021.04.18

3단변신로봇 _ 인비저블맨, 리 워넬 감독

# 0. 하나의 영화처럼 보이지만 사실 서사를 부분적으로 공유하는 세 장르물이 접붙여져 있는 쪽에 조금 더 가까운 작품입니다. 인트로 아카펠라, 발라드, 기타 솔로, 오페라, 하드 락, 아우트로의 6개 부분으로 구성된 '퀸'의 처럼 이 영화는 전반부, 중반부, 종반부에 걸쳐 각기 다른 세 장르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습니다. '리 워넬' 감독, 『인비저블맨 :: The Invisible Man』입니다. # 1. 전반부 장르는 호러입니다. '세실리아'가, 잠든 '애드리안' 몰래 집을 벗어나는 6분. 결코 짧다 할 수 없는 긴 시간 동안 아무런 대사도, 음향도 없이 감독은 영화의 분위기를 최대한 침전시킵니다. 가장 내밀한 공간인 침대, 그중에서도 '애드리안'의 끌어안은 손아귀에서 출발한 주인공은 수많은 공간과 ..

Film/Horror 2021.01.09

회색지대의 남자 _ 그 남자의 집, 레미 위크스 감독

# 0. 바다 건너 영국 땅에 닿은 난민 부부 '볼'과 '리알'의 이야기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던 아프리카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삶의 과정 전체를 폭력적으로 압도하는 난민이라는 정체성. 상반된 두 정체성이 과격하게 충돌하는 동안의 심리적 불안을 오컬트 풍의 공포감으로 치환해 감각화한 작품입니다. '레미 위크스' 감독, 『그 남자의 집 :: His House』입니다. # 1. 어느 국가 어느 부족의 어떤 사람이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아왔는가, 어떤 과정을 거쳐 영국에 도착했는가, 새롭게 정착하게 된 곳에서의 생활을 앞두고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가 역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한 사람들입니다."라는 '볼'의 말은 영국 난민청 직원들에게 전혀 고려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진심은..

Film/Horror 2020.11.04

언럭키 곡성 _ 데블, 존 에릭 도들 감독

# 0. 오컬트에 기반한 초현실적 세계관 속 인물들이 만드는 독특한 위화감으로 승부를 보는 소위 샤말란스러운 영화입니다. 사건의 해석 전체를 뒤흔드는 강렬한 반전 결말 대신, 결말에 도달하기까지의 적당히 경제적인 낚시성 호러 연출로 승부를 보고자 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네요. '존 에릭 도들' 감독, 『데블 :: Devil』입니다. # 1. 실망스럽습니다. 잘만 버무리면 충분히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을 법한 각기 다른 세 장르의 매력을 동시에 쫓았습니다만 결과적으로 그 어떤 장르의 매력도 효과적으로 살려내지 못합니다. 단일 사건이 발생하는 동안 세 공간을 의식적으로 구획한 후 각각 특정한 장르에 귀속시킵니다. 악마에 의해 지배당하게 된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섯 명의 승객과 함께 영화를 바라보는 동안은 철저..

Film/Horror 2020.11.02

겉멋 올인 -2- _ #살아있다, 조일형 감독

이전글 : 겉멋 올인 -1- [#살아있다, 조일형 감독] # 9. 아기자기한 트랩과 북유럽 감성 자연주의 텐트를 뚝딱 만들어 재끼는 작고 귀엽지만 생존력은 만렙인 똘똘한 여캐 는 인간적으로 너무 식상한 것 아닐까요. 대체 왜 자기 집 거실 한복판에서, 썩어 나는 조명에도 불구하고 촛불을 켜 놓은 채, 담요를 둘둘 감아 만든 아동용 임시 텐트 안에서, 불편하게 대기를 타는 건지 1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아무래도 감독님이 영화를 찍을 즈음해서 『슈퍼맨이 돌아왔다』 같은 육아 예능에 꽂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 한 방울이 아까워 날짜별로 마킹해 한 모금 한 모금 아껴 마셔야 하지만 화분에는 물을 아낌없이 나눠주는 갬성충 유빈의 모습은, 감독이 자신이 지금 뭘 만들고 있는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Film/Horror 2020.09.10

겉멋 올인 -1- _ #살아있다, 조일형 감독

# 0. 한없이 어색한 디스코드 대화가 등장하는 순간. 좀비가 된 아이가 단아하게 걸어와 "엄마 어딨어"를 내뱉는 순간. 눈 앞에서 딸이 엄마를 물어뜯는 아비규환을 목격했음에도 우리의 주인공이 걸쇠 하나 걸지 않고 문을 열어재끼는 순간. 갑툭튀한 옆집 남자와 전혀 이해되지 않는 억지스러운 대화를 주고 받고 그 남자가 밑도 끝도 없이 화장실을 쓰겠다 말하는데 그걸 냉큼 받아주는 순간. 때 마침 세상 편리하게도 TV 앵커는 정확히 필요한 이야기를 해주는 설명충을 자처하고. 배경 설명이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 옆집 남자가 각기춤을 선보이는 순간. '유아인'이 댄스 장인을 현관문을 향해 밀치자 마치 누가 손잡이를 돌려 잡기라도 한 듯 문이 쉽게 열리는 걸 목격하는 순간. 정확히 10분 만에 영화에 대한 기대감은 ..

Film/Horror 2020.09.09

드디어 보았노라 _ 무서운집, 양병간 감독

# 0. 대작이 올라왔네요. 이런 기회를 놓칠 수야 없죠. 뭐가 되었든 한 분야에 최고의 자리에 오른 작품들은 한 번쯤 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양병간' 감독, 『무서운집 :: Scary House』입니다. # 1. 여타의 글들은 작품을 보고 느낀 감정이나 주제의식 혹은 철학에 대한 생각, 이야기의 구성이나 표현의 방식 따위에 대한 제 개인적인 썰들을 풀어놓곤 했습니다만 이 작품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원테이크로 담아낸 홀로 남은 가정주부의 무료한 일상의 하이퍼 리얼리즘 '공포', '계단' 따위로 재해석된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의 고립감 '귀신'과 여사님 간의 역할 경계가 붕괴되어 가는 과정에 대한 함의 수차례 등장하는 베사메무초와 춤사위에 담긴 제의적 이미지의 의미 따위에 대해 되지도 ..

Film/Horror 2020.08.04

뱀과 사다리 _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우에다 신이치로 감독

# 0. 자칫 간과하곤 합니다만 이해력에도 한계는 있습니다. 일정 범위, 규모, 시행을 넘어서는 정보에 대해선 취합해 정리하는 것은커녕 아예 이해를 포기하게 되죠. 백조 천조가 넘어가는 돈의 규모에 단위 감각 자체가 사라진다거나 수십만 수백만 광년을 넘나드는 우주적 스케일 앞에 현실 감각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우에다 신이치로' 감독,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 カメラ を止めるな!』입니다. # 1. '합의된 허구로부터 어떻게 리얼리티를 설득해 낼 것인가' 라는 질문은 창작자에게 있어 벗어날 수 없는 필연적 화두일 겁니다. 창작의 자유로움과 관객에 대한 존중을 위해 자신이 풀어놓는 이야기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충분히 합의하면서도 동시에 가상의 세계관으로..

Film/Horror 2020.07.22

용두사미 _ 높은 풀 속에서, 빈센조 나탈리 감독

# 0. 두 남녀가 차를 타고 인신매매를 위해 캘리포니아로 갑니다. 오빠는 햄버거를 혼자 맛있게 먹고 그 꼴이 뵈기 싫었던 임산부 동생은 토를 하죠. 동생의 헛구역질에 입맛이 떨어진 오빠는 차를 세우는데요. 때마침 찝찝하기 그지없는 풀떼기들 사이에서 웬 꼬마 아이의 "도움!" 소리가 들립니다. 오지랖이 발동한 임산부는 뱃속의 아이는 나 몰라라 하고 남의 아이를 구하겠다 말하는군요. 동생은 갓 구운 피자 옆에다 읽던 책을 살포시 내려놓고 오빠는 먹던 햄버거를 남깁니다. 꼬마의 미끼에 낚여 풀 숲에 갇히게 된 오누이는 결국 아이언드래곤에게 빨래질을 당한 박무석이 되죠. 네. 이 작품은 햄버거를 남기면 변사체가 된다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빈센조 나탈리' 감독, 『높은 풀 속에서 :: in the Tall G..

Film/Horror 2019.10.12

엔진 없는 자동차 _ 허쉬, 마이크 플래너건 감독

# 0. 덜떨어진 살인마가 힘케 여주에게 잘못 걸려 개털리는 영화입니다. '마이크 플래너건' 감독, 『허쉬 :: HUSH』입니다. # 1. 살인마의 패널티는 무엇인가 살인마와 사냥감의 대결입니다. 무시무시한 살인마가 주인공을 위협하는 동안의 공포와, 극적으로 탈출하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즐기는 장르물이죠. 당연히 살인마와 사냥감의 파워 밸런스는 무너져 있기 마련인데요. 시나리오의 완성도는 런타임을 벌기 위한 '살인마의 패널티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할 수 있습니다. 상황을 풀어내기 위해 한껏 위험한 인물로 만든 살인마에게 다시 족쇄를 채우는 거죠. 살인마는 한 명인데 주인공 파티는 너무 많아 똘똘 뭉쳐 있으면 나타나기 어렵다거나, 살인을 일삼음에도 사회적으로는 건실한 사람인 척하고 있기에 정..

Film/Horror 2019.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