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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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Horror 54

캐빈 인 더 우즈 (2011, dir. 드류 고다드): 취향 저격

# 0. 끝내 주는 슬래셔 무비의 아릿한 취향 저격 # 1. 물론 호러 무비 마니아들의 취향을 노린다는 뜻이에요. 어쨌든 이블 데드 계열의 오마주와 패러디를 왕창 끌어다 가지고 노는 영화니까요. 재미있는 건 은연중에 슬래셔 무비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음흉한 취향을 놀리는 듯한 느낌도 있다는 거예요. '당신을 위해' 저격하는 것뿐 아니라 '당신을' 저격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뜻이죠. 연구자들은 태만하게 클리셰를 따라가는 제작자를 빗대는 듯하면서도, 슬래셔 무비에게 완성도 보다 더 센 표현만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놀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쉽게 말해 이 구조에서 제작자와 관객은 공범인 거예요. 비단 호러가 아니더라도 장르 클리셰를 해체하며 노는 영화들은 더러 있는데요. 클리셰를 욕망하는 주체까지 겨..

Film/Horror 2026.04.26

식칼에 비친 얼굴 _ 차임,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 0. 식칼은 날카롭고 차갑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차임 :: Chime』입니다. # 1. 그렇게까지 제목에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 소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만, 그럼에도 주인공은 마츠오카다. 외지에서 요리교실을 운영 중인 그는 조바심을 느끼는 듯 보인다. 위기를 벗어나려 하지만 녹록지 않고, 그럴 때면 못난 마음이 삐져나온다. 레스토랑 면접에서도, 수강생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가족과 식사하는 장면에서도 그렇다. 때론 충동적이거나 조급해하지만, 때론 놀라울 정도로 건조하거나 무신경한데, 사실 둘은 같은 상태에 근거다. 유독 그런 성격인 탓은 아니다. 아마도 섬세하게 요리하는 모습이 그의 본모습일 것이다. 그의 조바심은 '기질'이 아니라 '상태'에 가깝다. 마츠오카는 조바심..

Film/Horror 2026.04.12

뺑소니 전까지만 _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시라이시 코지 감독

# 0. 어디까지나 뺑소니 전까지의 이야기 시라이시 코지 감독,『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 近畿地方のある場所について』입니다. # 1.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파편화된 아카이브로써의 소개다. 노로이(2005), 사유리(2024) 등으로 알려진 시라이시 코지의 신작은 이를테면 아카이브의 배신으로 요약된다. 언제고 진실을 규명케 해 주리라 믿었던 아카이브가 공포를 확산시키는 매개로 돌변해 버린 세계. 결말이 현실의 치히로가 아니라, '아카이브 된 치히로'인 것은 더없이 좋은 증거다. 어쨌든 파운드 푸티지의 핵심은 정보의 결핍일 수밖에 없다. 무작위로 흩뿌려진 정보들을 어떻게든 하나의 완결된 형태로 묶으려는 인간의 뇌를 역이용한 장르기 때문. 작중 잡지기사 A와 커뮤니티..

Film/Horror 2026.03.10

기억과 헌사 그리고 고민들 _ 씨너스: 죄인들, 라이언 쿠글러 감독

# 0. 불꽃을 닮은 음표로 핏물에 젖은 좌표를 짚는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씨너스: 죄인들 :: Sinners』입니다. # 1.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으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932년 미시시피 클락스데일. 흑인들의 삶과 고통에서 피어난 예술적 저항을 다룬 서던 고딕. 블루스 기타를 든 소년의 인생을 결정하게 된 그날 밤 황혼에서 새벽까지. 라이언 쿠글러의 위대한 도약, 씨너스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노예제는 폐지되었지만 차별은 여전하다. 백인과 흑인을 가르던 짐 크로우 법은 기만적이고, KKK는 명목상으로만 사라졌을 뿐이며, 공유지 소작제와 농장 화폐는 달아날 자유를 예속했다. 나무에 매달린 흑인 시신을 이상한 열매라 자조하듯, 돈을 가졌다는 이유로..

Film/Horror 2026.02.18

말은 쉽지 _ 굿 보이, 벤 리온버그 감독

# 0. 인간보다 먼저 귀신을 보는 개. 하우스 호러의 클리셰를 뒤집어 극 전체를 반려견 시점에서 전개하면 뭐가 나와도 나오지 않을까? 벤 리온버그 감독,『굿 보이 :: Good Boy』입니다. # 1. 말은 쉽지. 그래서 그걸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게 문제다. 적당히 꼬리 흔들고 뛰어다니다 짖고 싸우는 정도면 모를까. 무려 호러 장르의 주인공으로 쓰겠다니. 영화가 장난이야?라는 세간의 의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벤 리온버그다. 솔직히 이야기도 호러도 특별할 것은 없지만 관람은 기대보다 즐겁다. 반려견 계의 티모시 샬라메, 인디의 활약 덕분이다. 감독 본인의 반려견이기도 한 인디의 절륜한 연기력과, 저 그림을 어떻게 영상으로 뽑아냈을까 역산하는 것이야 말로 굿 보이의 진정한 재미다. 때문..

Film/Horror 2026.01.24

즉시 되돌아갈 것 _ 8번 출구, 카와무라 겐키 감독

# 0. 1. 단 하나의 이상 현상도 놓치지 말 것.2. 이상 현상을 발견하면 즉시 되돌아갈 것.3. 이상 현상이 없다면 앞으로 나아갈 것.4. 8번 출구를 통해서 밖으로 나갈 것. 카와무라 겐키 감독,『8번 출구 :: 8番出口』입니다. # 1. 흔히 호러 게임이라 알려져 있지만 실은 틀린 그림 찾기식 퍼즐 게임에 가깝다. 플레이 타임은 게임의 규칙을 얼마나 빨리 눈치채냐가 상당 부분 차지하기에 규칙만 알아차리면 그리 오래 걸릴 것도 없다. 아무리 처음으로 돌아간다 한들 어차피 여덟 번만 제대로 맞추면 되는 데다 대부분의 기믹들에 제한시간도 없기 때문이고, 덕분에 어지간히 둔한 사람도 1시간 남짓이면 대충 엔딩을 볼 수 있으니 이례적인 인기와 별개로 작은 게임임에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Film/Horror 2025.11.06

러브크래프트라는 색채 _ 컬러 아웃 오브 스페이스, 리차드 스탠리 감독

# 0. 묘사할 수 없는 것은 묘사할 수 없다. 리차드 스탠리 감독,『컬러 아웃 오브 스페이스 :: Color Out of Space』입니다. # 1. 코즈믹 호러의 정수는 악의 없는 무관심에 있다. 거대한 존재는 자신의 본질에 따라 주변을 재구성할 뿐이고, 인간과 지구의 생태계는 부수적으로 파괴되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무력감. 미국의 소설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다. 실체 없는 공포를 어떻게 스크린 위에 구현할 것인가. 리처드 스탠리는 러브크래프트의 정수를 보존하는 대신, 자신만의 강력한 스타일을 통해 돌파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영화 내내 원작의 고상하고 지적인 공포가 아닌, 추상적인 공포의 구체화에 집중하는 데, 원작에서의 '색'은 인간의 감각으로는 인지할 수 없는 ..

Film/Horror 2025.10.14

문학적인 호러 _ 페브러리, 오즈 퍼킨스 감독

# 0. 문학적인 호러 영화를 차분히 읽어나가는 즐거움 오즈 퍼킨스 감독,『페브러리 :: February』입니다. # 1. 건조한 호러의 원제는 The Blackcoat's Daughter. 주인공 캐서린(캣)을 블랙코트의 딸이라 한다면 이때의 블랙코트는 누구를 이르는 걸까. 무난하게는 악마를 생각할 수 있다. 부모의 부재로 인한 극심한 허무와 고독 속에서 소녀는 유일하게 말 걸어오는 미지의 존재를 받아들인다. 서늘한 새벽, 정체 모를 실루엣을 아버지라 부르는 도입이다. 이후 캣은 악마의 목소리에 이끌려 살인하고 제물을 바치는 데, 몇몇의 순간 섬뜩하게 웃는 표정은 마치 다정한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딸처럼 보인다. 9년 후, 조앤이 되어 다시 학교로 돌아온 결말이란 떠나버린 어둠의 아..

Film/Horror 2025.09.02

인과의 감옥, 회귀의 지옥 _ 이도공간, 나지량 감독

# 0. 편집증적 인과의 감옥, 폐쇄적인 회귀의 지옥 나지량 감독,『이도공간 :: 異度空間』입니다. # 1. 종종 관객들은 영화 외적인 것들에 집착하곤 한다. 일례로 시대적, 역사적 배경에 과도하게 천착하는 경우다. 아일랜드 영화를 볼 때면 끊임없이 대기근에서 연원을 찾아버릇한다거나, 스페인 영화를 볼 때면 내전이나 독감과의 연결성을 하릴없이 점검하는 식이다. 개인사와 연결 짓는 경우도 허다하다. 감독이 이혼 소송 중이었다거나 배우의 절친이 사고를 당했다거나 하는 식의 에피소드는 영화를 보는 데 있어 그와 관련된 흔적을 반복적으로 찾게 만든다. 90년대 전후 홍콩 영화들은 대표적인 것으로, 관객들은 관성적으로 반환과 엮어 생각하게 되는 데, 설령 그 영향이 투사된 작품들이 워낙 많아 ..

Film/Horror 2025.08.06

멜랑콜릭 호러 _ 언데드 다루는 법, 테아 비스텐달 감독

# 0. 두려운 상실 앞에 미련하지 않을 수 있을까 테아 비스텐달 감독,『언데드 다루는 법 :: Handling the Undead』입니다. # 1. 스스로 멜랑콜릭 호러(Melancholic Horror)를 생각했다 고백하는 것처럼 젊은 노르웨이 감독의 영화는 우울하고 서정적인 드라마다. 되살아나 움직이는 시체들은 부두신앙적 좀비라기보다는 문자 그대로 반(反)-죽음적인 존재들이다. 그들은 바이러스나 재앙의 증상으로 나타난 위협적 존재가 아닌 애도의 과정을 시각화한 것에 가깝기에 대부분의 시간 동안 폭력적이라기보다는 비참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영화의 제목 Handling the Undead는 문자 그대로 '죽음에 반하는 것'을 다루는 방법이라는 의미고, 실제 영화에서 진정 다루어지는 ..

Film/Horror 2025.07.10

롱 리브 더 뉴 플래시 _ 비디오드롬,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

# 0. 40년 전 바디 호러가 시시하게 느껴진다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비디오드롬 :: Videodrome』입니다. # 1. 그 영화 속에서 죽은 사람은 명백히 나의 엄마가 아니다. 심지어 죽은 그 사람은 배우가 연기하는 것일 뿐 실제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영화를 본 나는 오롯이 슬프다. 충분히 감정적으로 고조된 몇몇의 순간엔 주체할 수 없다는 듯 오열하기도 한다. 적어도 영화를 몰입해 보는 동안 현실과 창작은 구분할 수 없다는 뜻이고, 이는 다른 관객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이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공감능력을 적극적으로 개발한 진화의 산물이라 주장한다. 한편 어떤 이는 미디어의 등장과 발전 속도에 맞춰 인지체계가 충분히 진화하지 못한 탓이라 설명하기도 한..

Film/Horror 2025.05.22

노스페라투의 신부 _ 노스페라투, 로버트 에거스 감독

# 0. 외로운 우리는 죽음을 결심하지 못하기에 두렵고, 그래서 슬프다. 로버트 에거스 감독,『노스페라투 :: Nosferatu』입니다. # 1. 혹시 그런 적 있을까. 어둡고 고요한 밤 익숙한 잠자리에 누워 잠에 들려던 찰나. 스스로 내는 한 모금 한 모금의 숨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며 죽어가고 있음을 선명히 자각하는 경험 말이다. 사랑하는 부모와 친구와 가족 모두 필연적이고 불가역적인 이별에서 벗어날 수 없고, 마침내 나 역시 죽음을 눈앞에 둔 10초 전, 9초 전, 8초 전에 반드시 도달해 그 순간을 선명히 느끼게 될 것이라는 공포. 그럴 때면 두려움에 번쩍 몸을 일으켜 방을 배회하며 스스로에게 간절히 요구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 벗어날 수..

Film/Horror 2025.04.26

게으르고 지루하다 _ 서브스턴스, 코랄리 파르자 감독

# 0. 중독된 것은 미모도 인기도 파괴도 아닌 지적인 게으름 코랄리 파르자 감독,『서브스턴스 :: The Substance』입니다. # 1. 푸른색 배경에 계란 하나. 노른자에 주사를 꽂자 분열하더니 둘로 나뉜다. 나란히 놓인 노른자 두 개와 흰자의 실루엣은 무언가의 얼굴처럼 보이는데, 그것의 정체는 알 수 없으나 은연중 불쾌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문제작 서브스턴스의 오프닝이다. 영화는 도입에서 경고하듯 강렬한 이미지를 난사하는 방식으로 일관한다. 비슷한 주제의식을 미리 다뤘던 단편 와는 썩 대조적인 시도다. 쏟아지는 이미지 속에서 함의를 찾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비단 디스플레이뿐 아니라 모든 프레임들, 이를테면 광고판이나, 액자, 창문, 통로, 주요하게는 거울까지 모두 각..

Film/Horror 2025.03.08

부끄부끄 _ 오퍼나지 비밀의 계단,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감독

# 0. 부끄부끄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감독,『오퍼나지 비밀의 계단 :: The Orphanage』입니다. # 1. 물론 제작자의 명성이 성공을 보장하진 않는다. 오히려 노련한 관객들은 수상할 정도로 스타 제작자의 이름값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에 강한 경계심을 내비칠 정도다. 그럼에도 몇몇의 작품들은 왜 저 양반이 이 영화를 선택한 건지 알겠다 싶기도 한데, 스페인 감독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의 데뷔작은 좋은 예라 할 수 있겠다. 고아원(Orphanage)에서 펼쳐지는 잔혹 동화를 특유의 서정성으로 엮어낸 작품이다.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린 아들을 찾아 헤매는 간절한 어머니의 이야기로, 나름 호러로 분류됨에도 불구하고 휘발적인 몇몇의 효과에 의존하는 대신 진중하게 ..

Film/Horror 2025.02.20

보호자용 _ 사탄의 베이비시터 킬러 퀸, 맥지 감독

# 0. 사춘기사용설명서 [보호자용] 맥지 감독,『사탄의 베이비시터 킬러 퀸 :: The Babysitter Killer Queen』입니다. # 1. 겁 많은 어린이가 사춘기를 내딛는다는 내용의 따뜻한 성장 영화다. 대체 무슨 의도로 사탄이란 무시무시한 말을 가져다 붙인 건지 모를 고약한 배급사의 모함에 속기 쉽지만 원제는 담백한 베이비시터로, 우리 시대의 로멘티스트, 아리 에스터의 이나 처럼 온 가족 오손도손 함께 보기 좋은 가족 드라마되시겠다. 속편의 부제가 킬러 퀸이라는 게 조금 찝찝하지만 이 역시 오해다. 뮤직비디오 연출자 출신의 감독이 퀸의 팬이었을 뿐이다. 실제 절정부에 다다르면 프레디 머큐리가 부르는 킬러 퀸이 웅장하게 흘러나와 아들과 아버지의 가슴 뭉클한 화해를 서정적으..

Film/Horror 2025.02.14

아동용 _ 사탄의 베이비시터, 맥지 감독

# 0. 사춘기사용설명서 [아동용] 맥지 감독,『사탄의 베이비시터 :: The Babysitter』입니다. # 1. 호러 코미디의 탈을 쓴 성장 드라마다. 원제목은 로 영미권의 관객들은 엉큼한 10대 소년과 관능적인 베이비시터의 몽정기 정도를 기대했을 테니, 하이틴 로맨스의 탈을 쓴 호러 코미디의 탈을 쓴 성장드라마라는 이중트릭이라 하는 게 맞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유약한 12살짜리 주인공이 어찌어찌 악당을 물리친 후 더 이상 베이비시터가 필요하지 않다 말하며 끝나는 영화에서 성장이란 코드를 끌어내는 건 어렵지 않다. 폭력은 감독의 이력처럼 충분히 경쾌하고 스타일리시함에도, 겁 많은 소년이 마주하게 될 다양한 성장의 분기를 도식화한 것에 불과하다. 또래들과 달리 마지막까지 베이비시터..

Film/Horror 2025.02.10

해석과 권력 _ 피사체, 하태민 감독

# 0. 해석할 수 있는 권력에 반기를 들다 하태민 감독,『피사체 :: Subject』입니다. # 1.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해서 매번 눈에 불을 켜고 사진을 찍는 건 아니다. 단지 카메라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짐을 느끼는 게 즐겁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주변의 사물들을 조금 더 몰입해서 보게 되는 데, 그것이 마치 세상의 해상도를 높이는 듯한 착각을 준달까. 처음엔 건물, 꽃, 간판, 장식, 음식 따위만 찍어도 즐겁다. 점점 구도나 화각, 렌즈, 보정도 달리해보고, 같은 사물이 빛의 드라마틱한 효과에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에 매료되는 것도 즐겁지만, 결국엔 예정된 갈증에 도달한다. 역동성이 없는 사진들을 돌려 보는 동안의 공허함. 살아있는 사람의 ..

Film/Horror 2025.01.26

뉴식이 두마리 치킨 _ 루프 트랙, 토마스 세인즈버리 감독

# 0. 뉴질랜드산 특대사이즈 오골계 2마리 28000원. 계란 추가(+3) 토마스 세인즈버리 감독,『루프 트랙 :: Loop Track』입니다. # 1. 태만하게 못 만든 호러 영화는 짜증스럽지만, 열심히 못 만든 호러는 의외로 재미있다. 특유의 진지함이 나름 귀엽기도 하고, 열심히 해 보려는 과정에서 벌어진 황당한 부분들이 되려 코믹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생소한 뉴질랜드산 크리처 영화는 문자 그대로 열심히 못 만든 호러다. 대체 뭘 했길래 제작하는 데 7년씩이나 걸린 건지 알 수 없지만, 비장의 무기였을 크리처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쉴 새 없이 웃음이 터져 나온다. 만약 이 영화를 보는 모습을 누군가 몰래 지켜봤다면, (2024)을 볼 때만큼이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발견했을지도 모른..

Film/Horror 2024.12.04

악마의 저주 _ 레디 오어 낫, 맷 베티넬리-올핀 / 타일러 질레트 감독

# 0. 익숙한 통속극을 경쾌한 슬래셔 코미디로 전환하는 능숙한 솜씨 맷 베티넬리-올핀 / 타일러 질레트 감독,『레디 오어 낫 :: Ready or Not』입니다. # 1. 르 도마스 일가는 엘리트 가문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을 법한 스테레오 타입의 불안과 불만을 대변한다. 각각의 스트레스는 서로에 대한 미움으로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파국 속에서도 그레이스에 의해 살해된 사람이 없는 이유다. 그레이스의 엘리펀트건이 발사되지 않는 장면은 클리셰를 비트는 장르적 장치임과 동시에, 가족의 파멸과 그녀가 무관하다는 것을 확인한다. 비밀스러운 르 베일에 의한 것도 아니다. 토니는 전통과 계약이 중요한 듯 말하지만 필요하다면 cctv를 켜고, 규칙 밖의 피고용인을 동원하는 데, 모두 자신들을 ..

Film/Horror 2024.11.20

너 홀로 집에 _ 맨 인 더 다크, 페드 알바레즈 감독

# 0. 더 이상 삶이 편리하지 않은 너 홀로 집에        페드 알바레즈 감독,『맨 인 더 다크 :: Don't Breathe』입니다.     # 1. 집주인과 침입자의 대치는 생각보다 흔한 플롯이나, 그중에서도 특히 (1990)의 영향을 크게 받은 듯하다. 고전 명작 를 리메이크한 바 있는 페드 알바레즈 감독의 영화는, 전반적으로 나 홀로 집에로부터 큰 틀을 가져오되 세부 설정을 모조리 뒤집어 놓은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의 핵심 재미가 인물의 관계보다 제한된 조건을 활용한 기믹인 것은 더없이 좋은 증거다. 기믹에 걸려 넘어지는 타인을 보면 코미디고, 기믹에 걸려 넘어지는 게 내가 되면 호러일 뿐이다. 어린아이 혼자 있는 집에 어른이 침입했던 것은 노인의 집에 미성숙한 소년이 침입하는 것으로 뒤바..

Film/Horror 2024.10.22

시점의 전환 _ 밤낚시, 문병곤 감독

# 0. 사물과 생물을 구분 짓던 과거를 지나 마침내 펼쳐진 새로운 미래 문병곤 감독,『밤낚시 :: NIGHT FISHING』입니다. # 1. 전기 털어먹고 다니는 미상의 비행체와, 정체불명의 낚시꾼이 벌이는 하룻밤 사투다. 고작 13분짜리에 손석구를 태운 영화는, 숏폼 트렌드에 발맞춰 멀티플렉스에 정식 상영된 단편으로 이목을 끌었다. cj뿐 아니라 현대자동차와 협업한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염치도 없이 아이오닉 5가 크레디트에 올라가는 게 뻔뻔하긴 하지만,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작위적이지 않게 녹아 있어 광고 영화 특유의 불쾌감은 덜 하다는 것이다. 〈세이프〉(2013) 이후 오랜만에 돌아온 문병곤 감독의 야심은 '시점의 전환을 통한 인식의 확장'이다. 영화는 일관되게 생물과 사물을 ..

Film/Horror 2024.10.06

Papa, just killed a man _ 라이트하우스, 로버트 에거스 감독

# 0. 아빠. 방금 사람을 죽였어요.        로버트 에거스 감독,『라이트하우스 :: The Lighthouse』입니다.     # 1. 데뷔작 (2015) 보다 더 난감한 상징과 피학적 연출로 돌아온 호러다. 특유의 절망적인 각본과 음습한 묘사는 여전하다. 습기 가득한 공간, 바늘로 찌르는 듯한 캐릭터, 인물을 포획하는 화면, 신화적 모티브를 재구성한 스타일, 타협 없이 투철한 형식미는 지독하다. 두 주인공을 극단적 공간에 붙들어 매는 중력과 그 반동으로 자신의 에너지를 원 없이 뿜어내는 배우의 열연, 최대치의 비장미를 더하는 흑백의 미술은 다소의 호불호와 별개로 이견이 없을 강점이다. 호러로 소개하긴 했지만 관객을 직접 자극하는 류는 아니다. 두 주인공, 특히 젊은 등대지기 에프라임 윈슬로(로버..

Film/Horror 2024.09.20

최면은 세 번이었습니다만 _ 악마와의 토크쇼, 케인즈 형제 감독

# 0. 도대체 언제부터... 내가 최면을 걸지 않았다고 착각한 거지? 캐머런 케언스, 콜린 케언스 감독『악마와의 토크쇼 :: Late Night with the Devil』입니다. # 1. 내레이터의 보이스오버가 주인공 잭 델로이의 배경을 설명하며 영화는 시작된다. 그는 인기 심야 토크쇼의 진행자로 능력과 야망을 겸비한 인물이지만, 전설적인 진행자 자니 카슨(Johnny Carson, 1925-2005)의 뒤에 가려진 만년 이인자다. 급작스런 아내의 죽음으로 극심한 슬럼프를 겪은 그는, 재기를 위해 오컬트 에피소드를 기획하며 승부수를 던진다. 사이비 종교의 생존자 릴리, 심령술사 크리스투, 초심리학자 준 로스-미첼, 트릭 파괴자 카마이클의 라인업은 영원히 역사에 남을 에피소드를 예고..

Film/Horror 2024.05.22

트리뷰트 _ 황혼에서 새벽까지, 로버트 로드리게스 감독

# 0. 그 모든 의미에서 흘러넘치는 유쾌하고 자유로운 펄프 픽션의 피비린내 로버트 로드리게스 감독, 『황혼에서 새벽까지 :: From Dusk till Dawn』입니다. # 1. 처음은 케이블 티브이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폭력과 섹스와 유흥이 조합된 말초적 쾌락이 이렇게까지 과격하게 펼쳐질 수 있구나라는 감상은, 한 떨기 가녀린 소년에게 충분히 충격적인 것이었죠. 그렇게 한동안 잊고 지냈었는데요. 적당히 이런저런 경험이 쌓일 만큼 나이를 먹은 후 다시 볼 기회가 있었고. 지금은, 좋은 영화라는 평이 현학적인 작품들만 독점적으로 향유하는 것이라 여기던 고정관념을 깨부숴 준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괴상한 영화가 이렇게나 재미있다면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라는 고민이 며칠은 머릿속에서 ..

Film/Horror 2023.11.16

꽃과 손 _ 부화, 한나 버그홀름 감독

# 0. 그 손에 담긴 마음을 들어 보자꾸나. 한나 버그홀름 감독, 『부화 :: Pahanhautoja』입니다. # 1. 호러라기에는 조금 애매합니다. 몇몇의 제한적인 점프스케어가 사실상 전부라 공포 영화를 힘들어하시는 분들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죠. 오컬트의 분위기에 살짝 발을 담그는 듯도 하지만 이 역시 크리처의 디자인에만 선택적으로 적용될 뿐입니다. 영화는 과보호 환경에서 성장한 사춘기 소녀의 불안을 드라마틱하게 과장한 우화라 보는 것이 차라리 정확합니다. 알레고리는 제법 단편적이고 또 노골적이라 따라가는 것은 편안합니다. 실제 관객이 즐기게 되는 대부분은 미려하고 문학적인 서사 따위가 아닌, 주인공 티니아의 불안과 배우 시이리 솔랄리나의 열연이 차지하고 있죠. 영화는 가족을 '둥지'로 정의합니다...

Film/Horror 2023.09.28

빛 좋은 개살구 _ 밤이 되었습니다, 이형구 감독

# 0. 일주일 내내 영화를 한 편도 안 본 건 진짜 몇 년 만인 것 같은데요. 성역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존과 악마 사냥꾼 하던 가닥을 이어받아 회칼 도적을 키웠는데요. 증오의 딸 릴리트를 무찌른 후 레벨 70 언저리까지만 하더라도 참 꿀잼이었죠. 이후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폐사 구간에 접어들던 차에, 몹팩 축소 패치에 정타를 처맞고 현타가 오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혐리자드께서 전 세계 블빠들의 성토를 죄다 씹고 계시니 별 수 있나요. 다시 영화로 돌아와야죠. 그래도 불 끈 방에서 어두침침한 화면만 보던 게 익숙해진 겸 호러를 찾았습니다. 시작은 가볍게 단편으로 골라도 나쁘지 않겠죠. 이형구 감독, 『밤이 되었습니다 :: Black out _ Mafia game』입니다. # 1. 어떤 영..

Film/Horror 2023.06.18

하얀색, 검은색, 붉은색 ⅱ _ 아메리칸 사이코, 메리 해론 감독

하얀색, 검은색, 붉은색 ⅰ _ 아메리칸 사이코, 메리 해론 감독 # 0. 하얀색 검은색 그 사이 3초 그 짧은 시간 메리 해론 감독, 『아메리칸 사이코 :: American Psycho』입니다. # 1. 사이코에 대한 이야기로만 흘러갈 뿐, 미국인과 타국인이 대결하는 식의 내셔널리즘 morgosound.tistory.com # 6. "나는 인간의 모든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살, 혈액, 피부, 머리카락. 그런데 확실한 감정이 하나도 없다. 탐욕과 혐오감을 빼고는." 살인보다 흥미로운 것은 살인의 방식인 거겠죠. 앞서 말씀드린 대로 사이코의 폭력성을 아메리칸스러움이 과격하게 투사되는 순간이라 이해한다면, 살인이 이루어지는 순간은 여피의 특성이 가장 진하게 묻어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쾌락적이고 과시적이고 ..

Film/Horror 2022.09.10

하얀색, 검은색, 붉은색 ⅰ _ 아메리칸 사이코, 메리 해론 감독

# 0. 하얀색 검은색 그 사이 3초 그 짧은 시간 메리 해론 감독, 『아메리칸 사이코 :: American Psycho』입니다. # 1. 사이코에 대한 이야기로만 흘러갈 뿐, 미국인과 타국인이 대결하는 식의 내셔널리즘과 관련된 설정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감독은 '패트릭 베이트먼'이라는 괴물에게 아메리칸 사이코라 이름 붙였죠. '아메리칸'이라는 출신이 '사이코'라는 정체성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이고, 폭력의 뿌리에 구체적 개인의 기질 외에 출신과 깊은 연관관계가 있음을 추론케 합니다. 실제 영화는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무리들에게 1990년대 여피(Yuppie)의 스테레오 타입을 강박적으로 부여하는 것을 넘어, 아예 여피를 의인화시킨 우화처럼 그리고 있죠. 사이코는 아메리칸스러움의 극단적인 형태로 ..

Film/Horror 2022.09.08

미녀는 괴로워 _ 드래그 미 투 헬, 샘 레이미 감독

# 0. 어쩌면 샘 레이미는 그냥 알리슨 로만을 괴롭히고 싶었던 걸지도?! 샘 레이미 감독, 『드래그 미 투 헬 :: Drag Me to Hell』입니다. # 1. 어떤 사람들은 연기의 목적을 '재연'이라 생각합니다. 특정한 상황에 노출된 인간의 반응을 보다 완벽하게 재연하는 것을 뛰어난 연기라 평가하는 식이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체계적 훈련과 논리적 연구에 기반한 기술적 연기법 보다,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지우고 배역에 동화되는 메서드 연기법에 더 큰 권위를 부여하는 데에는 연기의 본질이 재연에 있다는 생각과 무관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메서드는 연기자가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연기법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메릴 스트립이나 케이트 블란챗과 같은 배우들이 선보이는 테크니컬 한 연기들은 훌륭한 반례라 ..

Film/Horror 2022.06.26

스포일러 _ 비바리움, 로르칸 피네간 감독

# 0. 흥미로운 아이디어. 재치 있는 스토리. 감각적인 연출. 자해적 플롯. 로르칸 피네간 감독, 『비바리움 :: Vivarium』입니다. # 1. 흥미로운 아이디어입니다. 뻐꾸기의 탁란(托卵, 어떤 새가 다른 종류의 새의 집에 알을 낳아 대신 품어 기르도록 하는 일)에 착안하는 것이죠. 인간을 기생종을 키우게 된 숙주의 상황으로 몰아넣어 보자는 상상은 썩 유쾌합니다. 본능 앞에 스스로 자연의 법칙 밖의 존재라 자만하던 인간의 무기력함을 냉소적으로 조망한다는 아이디어는, 존재론적 회의를 유도한다는 측면에서 호러물로서 충분히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죠. 재치 있는 스토리입니다. 보금자리를 찾던 두 주인공을 그 자체로 거대한 생태적 운명을 은유하는 마을 '욘더'에 묶어두는 방식은 기대보다 더 충실합..

Film/Horror 2022.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