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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Horror

롱 리브 더 뉴 플래시 _ 비디오드롬,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

그냥_ 2025. 5. 2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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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40년 전 바디 호러가 시시하게 느껴진다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

『비디오드롬 :: Videodrome』입니다.

 

 

 

 

 

# 1.

 

그 영화 속에서 죽은 사람은 명백히 나의 엄마가 아니다. 심지어 죽은 그 사람은 배우가 연기하는 것일 뿐 실제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영화를 본 나는 오롯이 슬프다. 충분히 감정적으로 고조된 몇몇의 순간엔 주체할 수 없다는 듯 오열하기도 한다. 적어도 영화를 몰입해 보는 동안 현실과 창작은 구분할 수 없다는 뜻이고, 이는 다른 관객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이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공감능력을 적극적으로 개발한 진화의 산물이라 주장한다. 한편 어떤 이는 미디어의 등장과 발전 속도에 맞춰 인지체계가 충분히 진화하지 못한 탓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상반되는 양측의 주장은 썩 흥미롭지만 사실 본질적이지는 않다. 영화를 즐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쨌든 우리가 미디어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이성과 의지로 통제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적 감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1983년작 비디오드롬이다. 새로이 부상하던 대중매체 비디오(Video)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 장소를 의미하는 접미사 드롬(-drome)을 붙인 신조어다. 단순하게 일방적이고 휘발적이며 2차원적이라 생각되던 비디오를, 시대를 앞질러 3차원 공간으로 재해석한 감독은, 미디어가 주조하는 새로운 현실과, 과정에서 누적되는 정신적 혼돈, 마침내 불가역적으로 변형되는 인간 의식과 신체를 총체적으로 결합한 끝에 아이코닉한 바디 호러를 선보인다.

 

다소 난해한 영화는 범람하는 폭력과 섹스에도 불구하고 결국 지극히 맹목적인 감염과 그것을 몰아붙이는 에너지다. 감독의 통찰 속에서, 미디어는 단순한 오락에서 생물학적 바이러스를 지나 하나의 현실로서 대체된다. 미국과 일본의 거리만큼이나 명확히 구분되던 현실과 환각의 경계는 점점 모호해지다 붕괴되며, 인간의 정체성은 자율적 주체에서 미디어에 잠식되다 결국 뉴 플래시(New Flesh)로 재탄생한다. 당장의 돈벌이 수단처럼만 보이는 미디어는 권력화 된 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까지 뻗어나갈 것이고, 새로운 세상의 인간은 스스로를 파괴한 끝에 미디어에 지배되는 것을 넘어 그 경계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융합될 것이라는 절망적인 경고다.

 



 

 

 

# 2.

 

새로운 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해 보급될 때면 언제나 그것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반동으로 발생하기 마련이다. 과거 산업혁명기 러다이트 운동이 그러했고, 작금의 자율주행이나 유전자 조작, 생성형 AI 발전에 적잖은 사람들이 디스토피아적 불안을 토로하는 것처럼 말이다. 마찬가지로 1980년대 초는 컬러텔레비전과 VCR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되며 개인적 미디어 소비가 급증하던 시기로, 플랫폼의 보급에 따라 그 플랫폼을 타고 유통될 보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던 시기다. 경쟁적인 미디어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평생 거의 겪어보지 못할 극단적인 상황들을 시청각적 자극에 얹어 과노출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했고, 그로 인해 인간 의식이 받을 영향이란 다분히 실존적인 것이기에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전형으로 평가되는 영화가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관조적으로 비판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스스로 실천적인 메타영화라는 것이다. 미디어를 비판하는 비디오드롬은 그럼에도 스스로 미디어이고, 그 안에서 현실과 환각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맥스뿐만 아니라 크로넨버그의 영화를 본 관객 모두다. 해체된 서사 속 파편화된 이미지들은 모두 본질적으로 실체 없는 거짓일 수밖에 없지만, 관객은 맥스의 배에 손이 쑥 하고 들어가는 등 몇몇의 장면에서 마치 무언가가 자신의 배를 휘젓는 듯한 불쾌감을 느꼈을 것이고, 그 순간 관객 또한 미디어와 결합된다는 면에서 뉴 플래시의 편린을 감각한 것과 다르지 않다.

 

영화는 스너프필름의 선정성과 폭력성을 적극적으로 다루지만 피츠버그의 스너프필름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가정하고 재연한 비디오드롬만이 원본 없는 이미지로서 존재한다는 면에서 장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일종의 시뮬라크르다. 엔딩에서 미디어 속의 맥스가 “Long Live The New Flesh!”를 외치며 자살하자, 그것이 현실의 맥스가 자살하는 결과로 귀결된다는 면에서 시뮬라시옹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언한다. 마침내 이 영화로 말미암아 그 어떤 이미지나 이데올로기가 관객의 현실에 투사된다면 그 역시 시뮬라시옹을 표현한 시뮬라크르의 시뮬라시옹일 것이다.

 

 

 

 

 

 

# 3.

 

심지어 이 모든 생각들이란 것들조차 결국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사상적 토양 위에서 벌어진다는 면에서, 비디오드롬은 그 자체로 비디오드롬이 된다. 비디오드롬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관객이 손에 쥔 크로넨버그의 테이프가 곧 맥스가 받아 든 것과 다를 바 없는 비디오드롬이라는 암시다. 스크린 속에서 제시된 비디오드롬이라는 시뮬라크르는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이란 현실의 사물이 되고, 그것의 함의를 추적하는 관객의 현실은 시뮬라시옹을 실천하며 뉴 플래시에 나아간다.

 

2020년대에 이르러 다시 보노라면 영화의 바디호러는 일견 시시해 보인다. 감독이 제창하는 인사이트와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에 매료되긴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몰입이 깊어지기보다는 영화가 제안하는 공포라는 것이 호들갑스러워 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다만 달리생각해 보면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완성된 경험처럼 느껴진다. 영화의 묘사가 시간의 흐름에 비례해 시시하다는 것은 그보다 더 크고 현실적인 자극에 이미 충분히 노출되었다는 뜻이자, 시뮬라크르의 시뮬라시옹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익숙해졌다는 뜻으로, 1980년대의 관객과 2020년대의 관객 사이에 어떤 변화, 그것도 매우 신체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을 증명하는 것과 같다.

 

결과적으로 40년 전의 관객들에 비해 지금의 관객들은 더디지만 성실하게 뉴 플래시에 다가가고 있다 생각하면 서늘하다. 문득 한 때나마 시대를 풍미했던 조어 바보상자를 떠올린다. 미디어에 과노출 되는 것을 걱정하는 경고조차 고리타분한 것이 되어 사라져 버린 끝에, 장난스러운 어린아이들 앞에 놓인 스마트폰이 지혜로 인정받는 시대. 그 변화는 충분히 사상적인 것을 넘어 신체적인 것임에 분명하다. end.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Netflix, Tving, WatchaPlay, CoupangPlay, Appletv,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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