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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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82

무소유 _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 소아전 감독

# 0. 소유와 교환 사이에서 필요를 깨닫는다        소아전 감독,『타이페이 카페 스토리 :: Taipei Exchanges』입니다.     # 1. 우리는 소유하며 살아간다. 자산을 가지고 능력을 가지고 경력을 가진다. 공간과 시간, 생각, 기억, 기회를 가지고, 이 모든 것들의 총체로서 이야기를 가진다. 삶은 소유의 범위를 최대한 넓혀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여긴다. 역행하는 것은 불안하다, 심지어 불행하다 평가하길 꺼리지 않는다. 교환이라는 행위가 재미있는 건 언제고 굳건해 보이는 소유하는 마음이 해체되는 몇 안 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버리는 것과는 다르다. 버린다는 것은 가치가 없음을 전제하지만 교환은 여전히 가치 있다 여김에도 필요치 않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가진 무언가를 교환하기로..

Film/Drama 2025.04.10

그것도 두 번씩이나 _ 더 캐니언, 스콧 데릭슨 감독

# 0. 굳이 노력해서 더 재미없는 곳을 향해 추락한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스콧 데릭슨 감독,『더 캐니언 :: The Gorge』입니다.     # 1. 영화는 크게 세 파트로 나뉜다. 협곡 위, 협곡 아래, 다시 협곡 위다. 첫 번째 파트의 주인공은 인물이다. 두 번째 파트에서는 협곡의 실체와 관련된 설정이고, 세 번째 파트에서는 폭탄이다. 내러티브를 인간에서 설정으로, 다시 폭탄으로 추락시키면서 관객의 몰입이 다운그레이드되지 않길 바랐다면 솔직히 미련한 것이고, 애석하게도 감독은 최선을 다해 미련한 길을 내달린다. 전반부는 두 주인공을 관객에게 소개한 후 공간에 안착시키는 과정으로 점철된다. 리바이는 아무런 관계도 추억도 없어 인생의 기반이 없는 사람이다. 반복되는 ptsd는 군사 작..

Film/Action 2025.03.06

뉴저지의 자신감 _ 패밀리 맨, 브렛 라트너 감독

# 0. 자신감 넘치던 그 시절 중산층을 위한 프로파간다        브렛 라트너 감독,『패밀리 맨 :: The Family Man』입니다.     # 1. 나무로 지어진 2층 집에는 적당한 크기의 정원이 딸려있다. 유머러스한 아빠는 익숙한 듯 잔디를 깎고, 아름다운 엄마는 주방에서 펜케이크를 굽는다. 어린 아들은 아빠 옆에서 자전거 타거나 물놀이 하자며 잔망을 떤다. 사춘기 딸은 하이틴 스타의 포스터로 뒤덮인 다락방 침대에서 미래를 꿈꾼다. 할머니는 거실 흔들의자에 누워 스웨터를 뜨고, 멋들어진 페도라를 쓴 할아버지는 낡은 벤치에 앉아 시가를 태운다. 틈틈이 집 앞을 지나가는 친구 가족과 반갑게 인사하는 걸 제외하면 주말마다 맥주를 곁들인 바비큐 파티가 소소한 이벤트의 전부인 나날들. 미국의 시스템이 ..

Film/Comedy 2024.12.24

규범을 회의하는 두 개의 눈 _ 가여운 것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 0. 바라보는 눈과, 바라보는 눈을 바라보는 눈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가여운 것들 :: Poor Things』입니다.     # 1. 요르고스 란티모스다. 여지없이 과격하고 기괴한 스타일이지만, 진정 궁금한 것은 이번엔 또 어떤 관념에 도전하고 있을까라는 것이다. (2009)를 통해 언어와 사고 체계의 상관관계를 재고하고, (2015)를 통해 자아와 관계의 함의를 탐구했던 감독은, 야심 찬 엠마 스톤과 함께 규범과 사상을 회의한다. 단순히 규범을 어기는 일탈이 아니다. 규범을 어기는 것은 기존의 규범에 반하는 형태로 종속된 새로운 규범을 실천함이고, 이는 그가 어떤 명분과 대안을 제시하는 지와 무관하게 여전히 규범적이다. 란티모스는 규범이라는 것 그 자체에 대해 가치중립적으로 주목하고..

Film/Drama 2024.10.08

나는 거절한다 _ 욕망의 모호한 대상, 루이스 브뉘엘 감독

# 0.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면 당신은 절 사랑하지 않게 될 거예요.        루이스 브뉘엘 감독『욕망의 모호한 대상 :: That Obscure Object of Desire』입니다.     # 1. 거장 루이스 브뉘엘(Luis Buñuel, 1900-1983)의 유작이다. 피에르 루이(Pierre Louys)의 (1898)를 원작으로 한다. 주인공은 중년의 부호 마티유(페르난도 레이 분), 매혹적인 여인 콘치타(카롤 부케/안젤라 몰리나 분)다. 주요 플롯은 집착적 사랑을 기망당한 마티유가 기차 안 사람들에게 고발하는 동안의 플래시백이다. 영화는 제목처럼 욕망의 본질을 탐구한다. 욕망의 주체와 타인의 대상화, 결핍 및 폭력과의 관계성 따위를 특유의 초현실주의적 문법과 유머러스한 표현으로 풀어낸 걸..

Film/Comedy 2024.09.12

진실함에 대하여 _ 리스본행 야간열차, 빌레 아우구스트 감독

# 0. 진실한 정신과 관계, 그 무한한 가능성을 향한 낭만의 열차        빌레 아우구스트 감독,『리스본행 야간여행 :: Night Train to Lisbon』입니다.     # 1. 2013년에 개봉한 미스터리 스릴러 는 파스칼 메르시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감독은 빌레 아우구스트이며, 제레미 아이언스가 주인공을 맡았다.  스위스의 고전문헌학 교수 그레고리우스가 우연히 빨간 코트의 여인을 구한 후, 그녀가 남긴 책 한 권을 계기로 리스본행 열차에 오르며 영화는 시작된다. 코트 호주머니에 들어있던 책 의 저자 아마데우 드 프라두에게 큰 호기심을 느낀 교수는 수업도 내팽개친 채 충동적으로 그의 삶을 추적한다. 저자의 집을 찾은 그레고리우스는 여전히 저택을 지키는 여동생을 시작으로 아마데우의..

이자나미 _ 인피니트 맨, 휴 설리번 감독

# 0. 금단의 환술을 벗어날 방법은 초콜릿과 꽃 한 송이        휴 설리번 감독,『인피니트 맨 :: The Infinite Man』입니다.     # 1. 시간과 자아의 복잡한 관계를 독특한 시각으로 탐구한 영화 은 제1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 프로그래머 추천작 중 하나다. 가난하지만 재기 발랄한 호주 감독은 황량한 들판에 놓인 폐모텔 한 채와, 독특하다는 말도 부족한 이상한 인물 셋을 동원해 난해한 시간 여행 패러독스 속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천재과학자 딘은 괴팍한 완벽주의자다. 연인 라나와의 황홀했던 기념일을 벽에 걸린 액자처럼 완벽하게 재현하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풍화된 세계는 딘의 집착을 허락하지 않는다. 완벽했어야 할 기념일이 최악의 하루로 치달아버린 것에 좌절한 딘은 ..

Film/SF & Fantasy 2024.07.30

이유와 방법 _ 난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 거야, 아리안 감독

# 0. 사랑보다 먼 우정보다는 가까운        아리안 루이-세즈 플루프 감독,『난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 거야』입니다.     # 1. 사람을 불쌍히 여겨 피를 빨지 못하는 뱀파이어 사샤와, 따돌림을 견디다 못해 죽고 싶은 인간 폴의 이야기다. 굶주린 그녀를 위해 대신 죽어주겠다는 폴이지만 마음 여린 사샤는 소년을 헤치지 못한다. 대신 소년에게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을 하자 말하는데, 그러면 조금이라도 마음 편히 피를 빨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년은 자신을 괴롭히던 또래들과 이를 방치하던 교사에게 소심한 복수를 하고, 마지막으로 메인 빌런인 앙리에게 복수하려 하지만 역으로 된통 당하고 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샤는 순간 이성을 잃고 앙리를 공격, 처음으로 사람을 ..

Film/Comedy 2024.07.04

네 명의 이름은 _ 스턴트맨, 데이비드 레이치 감독

# 0. 스턴트만큼 영화도 사랑해 주었으면        데이비드 레이치 감독,『스턴트맨 :: The Fall Guy』입니다.     # 1. 괜찮을 수 없는 순간에조차 언제나 괜찮아야 했던 나의 오랜 파트너들에게. 사랑을 담아. # 2. 극장을 나서며 느낀 가장 강렬한 정서를 다음과 같이 메모에 옮겼다. 감동은 며칠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감독을 포함, 참여한 모든 이들의 진정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후 그 어떤 비판을 하더라도 말이다.  스턴트맨에 '대한' 영화가 아닌 스턴트맨을 '위한' 영화다. 배우 대신 몸을 던지는 스턴트맨들의 노고와 헌신과 기여, 그에 미치지 못하는 대우에 대한 불만이 알파이자 오메가다. 무수한 액션 영화들의 레퍼런스가 쏟아짐에도 불구하고 가장 밀접하게 연상되는 작품은 셋이..

Film/Action 2024.06.14

어느 초보운전자의 이야기 _ 드라이브, 니콜라스 빈딩 레픈 감독

# 0. 인생을 운영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피로감, 고독감        니콜라스 빈딩 레픈 감독,『드라이브 :: Drive』입니다.     # 1. 를 연출한 덴마크 영화감독 니콜라스 빈딩 레픈이 메가폰을 잡았다. 주연은 감독을 추천한 라이언 고슬링, 그리고 캐리 멀리건이다. 브라이언 크랜스턴, 알버트 브룩스, 오스카 아이삭, 론 펄만 등이 참여한다. 특유의 스타일리시한 연출과 리드미컬한 편집, 배우진의 열연이 인상적인 작품으로, 제64회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처음으로 자신의 운전대를 잡아본 사람의 이야기다. 비록 주인공은 능숙한 드라이버지만 말이다.  전반부를 통해 쌓아 올린 주인공의 정체성은 모두 대리만족이라는 공통점 아래에 있다. 비유하자면 운전석이 아닌 보조석에 탄 인물인 것으로..

Film/Action 2024.05.16

간택 _ 엘레나, 정민지 감독

# 0. 아니, 솔직히 억울합니다.        정민지 감독,『엘레나 :: Elena』입니다.     # 1. 익숙한 아파트 단지. 우이천 산책로. 맑은 하늘 아래 평화로이 흐르는 강물. 단아한 징검다리. 회색 옷의 주인공. 엘레나. 관객에게 인사하려는 찰나 어깨를 부딪히는 누군가. 사과하지 않고, 옆을 지나는 다른 사람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어깨에 묻은 작은 먼지를 덜어내는 깔끔함. 나 요새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 이름은 순자. 그녀에겐 짝이 없다는 소식을 알아냈어. 친절한 웃음의 순자는 중년의 여성. 다리 아래로 시퀀스가 옮겨간다. 반만 먹고 남겨진 옥수수. 엘레나와 비슷한 회색 옷을 입은 세 명의 친구. 알갱이를 나눠주며 대화한다. 산책하는 개? 사료 먹고 편하게 사는 애들 질투하는 거 아니야..

Film/SF & Fantasy 2024.04.08

감독놀음 _ 은밀한 공범, 죠죠 히데오 감독

# 0. 평범한 소재로 비범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도 있지만,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내다 버리는 경우도 부지기수입니다. 죠죠 히데오 감독, 『은밀한 공범 :: 恋のいばら』입니다. # 1. 은 수입사가 지어 붙인 이름입니다. 원제는 恋のいばら. 그러니까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군요. 참고로 영어 제목은 Thorns of Beauty인데요. 이쪽이 그나마 더 직역에 가까운 번역이기는 합니다. 실제 영화의 핵심은 '가시'로 은유된 각자의 마음에 있다는 면에서, 관계 중심적인 뉘앙스가 강한 '공범'이라는 우리말 제목은 썩 정밀해 보이지는 않죠. 양가적 감정에 놓인 두 여자의 갈등을 그린 작품입니다. 원제에 긍부정이 배치되는 두 개념을 접붙여둔 이유죠. 모모는 켄타로에게 집착과 파괴를 함께 느낍니다. 수차례 복제하고 ..

Film/Romance 2024.03.30

이슬 _ 은교, 정지우 감독

# 0. 시들어 메마른 꽃은 꿀을 탐하는 건 참을 수 있어도 이슬을 탐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정지우 감독, 『은교 :: Eungyo』입니다. # 1.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 얼마나 다른 사람일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10년 전에 비해 나는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된 걸까 하고 말이죠. 아무래도 타향살이 고학생이었던 당시보다 주머니 사정은 조금 나아졌습니다. 본업에서의 직무능력이나 위기가 있을 때 되새겨볼 경험치도 조금은 늘었죠. 상황에 맞춰 어른 연기를 하는 것에도 조금은 익숙해진 듯합니다만, 그 정도를 제외하면 잘 모르겠습니다. 졸업반 선배가 되어 스무 살 신입생 앞에서 억지 조언을 짜내던 순간의 기분과, 삼십 대 중반이 되어 사회초년생 후배들 앞에서 어른 흉내를 내는 지금의 기분은 크게..

Film/Drama 2024.02.18

루프는 폭발이다 _ 팜 스프링스, 맥스 바바코우 감독

# 0. 갈(喝)! 맥스 바바코우 감독, 『팜 스프링스 :: Palm Springs』입니다. # 1. 루프물에 로맨틱 코미디다 보니 언제나처럼 '그 이름'이 불려 나올 수밖에 없긴 합니다만, 의 현대적 재해석이라는 일부의 평은 썩 정밀하진 않아 보입니다. 모름지기 재해석이라 하려면 주제의식의 발전이 있어야 할 텐데요. 내적 성찰을 통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영혼의 성장을 그렸던 빌 머레이 & 해럴드 레이미스와 달리, 맥스 바바코우는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관계성의 가치와 불안정성을 직시하고 내일을 맞이하는 용기라는 전혀 다른 주제의식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죠. 다만 그럼에도 여타의 모든 루프물과 같이 사랑의 블랙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작품이라는 것은 분명하고, 감독 역시 그 점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

Film/SF & Fantasy 2024.02.10

결혼 바이럴 _ 조립, 신택수 감독

# 0. 여름밤, 부부는 완수해야 할 과제가 있다. (2019년 제23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신택수 감독, 『조립 :: assembly』입니다. # 1. 감독은 평범한 사람들의 결혼 생활이라는 것을 크게 세 가지 감정으로 규정합니다. 비좁다. 피로하다. 그럼에도 사랑한다. # 2. 창백한 도시는 피로감을 상징합니다. 멀찌감치 지나는 지하철을 내려다보는 구도로 담아 그들의 삶을 작고 소소한 것으로 연출합니다. 지하철에서 내려 트인 공간을 걷는 장면은 의식적으로 생략됩니다. 곧장 엘리베이터라는 좁은 공간에 인물을 집어넣고 그마저도 구석에 몰아 고립시킵니다. 인물을 거울에 반사시켜 안 그래도 좁은 공간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들어차 있는 듯한 착시를 일으킵니다. 지쳐 고개를 숙이는 순간 거울 너머 함께 고..

Film/Romance 2023.12.14

혁신은 없었다 _ 팟 제너레이션, 소피 바르트 감독

# 0. 파스텔 빛 미래에 대한 사소하지 않은 고민들이 잎사귀처럼 차곡차곡 쌓인다. 소피 바르트 감독, 『팟 제너레이션 :: The Pod Generation』입니다. # 1. 아이를 가졌다. 아이를 낳았다. # 2. ...가 영화 속 상황의 전부입니다. 그저 엄마의 자궁 대신 '팟'이라는 이름의 인공자궁에서 아이가 키워질 뿐이죠. 기술적인 문제 혹은 우려는 의도적으로 배제됩니다. 안전상의 걱정 없이 자궁을 온전히 대체할 수 있는 가상의 시스템이 존재한다 가정한 상황에서의 윤리적 문제에 천착한 작품이라는 것이죠. 자연스럽게 중요한 것은 기술이 어디까지 인간을 대체할 수 있을까라는 화두일 텐데요. 영화 속 인공지능 기술은 인간과의 거리를 기준으로 크게 네 단계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가장 낮은 층은 '집에서..

Film/SF & Fantasy 2023.12.10

푸른 밤의 사색 _ 여섯 개의 밤, 최창환 감독

# 0. 모든 여행은 여행자가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목적지가 있다. 최창환 감독, 『여섯 개의 밤 :: The Layover』입니다. # 1. 오스트리아 철학자 마틴 부버의 글귀와 함께 시작됩니다. 해당 글귀를 인용함은,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여행자로 규정한다는 의미임과 동시에, 작품을 통해 탐구하고자 하는 바가 눈에 드러나는 목표가 아닌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목적지'라는 것에 있음을 의미하는 거겠죠. 알 수 없다는 것은 통제 불가능한 불확실성을 의미할 텐데요. 예측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개인의 나약함으로도, 계획 밖의 영역에 대한 가능성과 풍요로움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영화가 탐구하려는 목적지란 것이 문자 그대로의 장소라거나 성취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타인과 함께 하는 ..

Film/Romance 2023.11.12

미녀와 천사 _ 나의 엔젤, 해리 클레벤 감독

# 0. 역시 피부 좋고 향기 좋으면 반은 먹고 들어갑니다. 해리 클레벤 감독, 『나의 엔젤 :: Mon Ange』입니다. # 1. 판타지 로맨스 영화입니다. 주인공은 내내 홀딱 벗고 다니는 투명인간인데요. 유일하게 입는 옷이라곤 엄마의 빨간 드레스 하나뿐인 노출증 변태죠. 홀로 자식 키우는 엄마가 '나의 엔젤'이라 불렀다고 자기 이름 삼아버린 나르시시스트이기도 한데요. 한국에서 태어나 우리 똥강아지라 불렸으면 졸지에 영화 제목도 우리 똥강아지가 될 뻔했습니다. 후반부 접어들어 오만데 드나들 수 있는 능력을 살려 여자 알몸을 훔쳐보기까지 하는데요. 언제 잡혀 들어가도 할 말 없을 문제적 인물임에 틀림이 없죠. 그런데 이런 놈도 연애를 합니다. 결혼하고 애도 낳습니다. 미모의 여자친구랑 같이 데이트도 하고..

Film/SF & Fantasy 2023.10.24

헤어진 그녀와의 인터뷰 _ 선우와 익준, 양익준 감독

# 0. 찰나의 감정마저 이토록 두터운데 양익준 감독, 『선우와 익준 :: Sunwoo and Ikjune』입니다. # 1. 선우와 익준은 함께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자, 9년을 만난 연인입니다. 두 사람은 익숙함과 별개로 지나온 긴 시간만큼의 차이를 가지고 있고, 이는 오프닝에서부터 시선, 표정, 자세, 동선, 걸음의 속도, 배경 등 다양한 표현을 통해 부드럽게 은유됩니다. 오늘은 여자 수인이 남자 재석에게 이별을 고하는 신을 촬영하는 날. 두 사람은 완만한 오르막을 무겁게 걸으며 잠시 후 있을 촬영에 대해 논의합니다. 선우는 헤어지자 말하는 여자 수인을 두둔합니다. 익준은 그런 수인의 잔인함을 지적합니다. 촬영이 진행되고 감독 선우는 배우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요. 수인 역의 진서는 되려 수인이 비겁한 ..

Film/Romance 2023.10.10

그녀의 고백 _ 흐르는 대로, 치쿠마 야스토모 감독

# 0. 숨겨뒀던 책갈피를 꺼내다.        치쿠마 야스토모 감독,『흐르는 대로 :: の方へ、流れる』입니다.     # 1. 오프닝입니다. 흔들리는 버스 손잡이에 간신히 매달린 손은 연약함과 위태로움 따위를 은유합니다. 창밖으로 지나치는 풍경은 거대한 흐름을 의미합니다. 무엇이 지나간 건지 모를 정도의 빠른 속도와, 흘러가는 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던 수동성입니다. 이내 여자의 뒷모습이 카메라에 담깁니다. 뒷모습은 숨겨뒀던 솔직한 마음일 수도, 혹은 뒤돌아 서있게 만드는 부끄러운 치부일 수도 있을 겁니다. 여자 옆에 한 남자가 섭니다. 여자는 어깨너머로 책을 훔쳐봅니다. 두터운 책의 두께는 사연의 깊이, 몰래 훔쳐보는 것에서는 느슨한 호기심이 발견됩니다. 책갈피입니다. 흘러가던 흐름을 잘라 멈춰 세우..

Film/Romance 2023.09.22

대가를 활약으로 대신한 대가 _ 패신저스, 모튼 틸덤 감독

# 0. 생존이 공격받는 상황 앞에 윤리는 얼마나 허약한가. 당위는 얼마나 허무한가. 모튼 틸덤 감독, 『패신저스 :: Passengers』입니다. # 1.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영화, 패신저스입니다. 어떤 영화가 윤리적 문제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경우 단순히 못 만든 영화들에 비해 특히 격앙된 비난을 듣곤 하는데요. 이 작품이 들어야 했던 비난들은 좋은 예라 할 수 있겠죠. 사실 영화를 보고 나면 사람들이 경악하는 게 이해가 가는 소위 '욕 들어먹을 만한' 작품이긴 합니다. 다만 그냥 비난만 할 뿐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를 이야기하는 경우는 잘 보이지 않더라구요. 에서도 말씀드린 바 있듯 영화감독 역시 수많은 직업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들도 평범한 윤리 의식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임에 틀림없죠...

Film/SF & Fantasy 2023.07.26

가장 날 것의 주성치 _ 당백호점추향, 이력지 감독

# 0. 다시 보니 선녀 같다! 이력지 감독, 『당백호점추향 :: 唐伯虎點秋香』입니다. # 1. 희극지왕 주성치입니다. 성룡과 함께 본인 그 자체로 장르라 인정받는 단 두 명의 배우 중 하나죠. 통상 그를 상회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유덕화나 주윤발, 양조위조차 자기 작품에서 그 정도의 지배력은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분명 의심의 여지없는 대배우이긴 합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인생을 사는 건가 싶을 정도로 논란이 많은 인물이라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말이죠. 주성치의 이름을 들은 보통의 관객들은 아무래도 소림축구나 쿵푸 허슬을 떠올릴 겁니다. 그 소리를 들은 골수팬들은 두 작품도 충분히 좋지만 아무리 그래도 주성치는 월광보합과 선리기연으로 이어지는 서유기 시리즈라며 팔짝 뛰는 게 십수 년간 반복된 패턴..

Film/Comedy 2023.07.22

눈 가리고 아웅 _ 인어공주, 롭 마셜 감독

# 0. 답이 뻔한데 왜들 이러실까.        롭 마셜 감독,『인어공주 :: The Little Mermaid』입니다.     # 1. 인어공주는 결국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하나를 포기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바다와 육지를 오가는 눈부신 붉은 머리와 경쾌한 안다다씨가 귓가에 울려 퍼지는 것과 별개로 서너 가지의 딜레마와 그 안에서의 가혹한 선택이라 요약한다 해도 무리는 없는 작품인 것이죠.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었던 첫 번째 딜레마는 다들 아시는 대로 아름다운 [미모]와 인어라는 [운명]입니다. 에릭 왕자와 사랑에 빠진 주인공은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마녀 우르슬라를 찾아가 [다리]를 얻는 데 성공하지만, 대가로 미모만큼이나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불하게 되죠. 이후 원작에서는 왕자와의 [..

Film/SF & Fantasy 2023.05.26

마침내 도달한 중도의 평화 _ 3000년의 기다림, 조지 밀러 감독

# 0. 매혹적이고 환상적이며 치명적인 극단들을 소거한 끝에 마침내 도달한 중도의 평화 조지 밀러 감독, 『3000년의 기다림 :: Three Thousand Years of Longing』입니다. # 1. 짝퉁 골동품을 타고 나타나 알리세아를 만난 지니입니다. 소원에 앞서 들려주는 시바 여왕과 귈텐과 제피르의 이야기는, 집착으로서의 매혹이자 극단으로서의 환상이며 비극으로서의 치명입니다. 불신과 맹신. 구속과 자유. 집착과 고독. 욕망과 체념. 과학과 동화. 이야기와 현실. 다양한 위상의 대립항을 놓고 각각의 극단이 가지는 불완전성을 교훈 삼는 세 편의 단막극을 전개합니다. 기나긴 시간과 드넓은 바다에 은유된 원망과 후회와 분노와 집착을 견뎌낸 끝에, 마침내 치우침 없이 도달한 중도의 평화를 그려낸 작품..

Film/SF & Fantasy 2023.02.04

아키라정전 _ 사랑의 이발소, 모리타 요시미츠 감독

# 0.  로망 포르노(ロマンポルノ)를 아시나요?        모리타 요시미츠 감독,『사랑의 이발소 :: ピンクカット・太く愛して深く愛して』입니다.     # 1. 1980년대 일본. 닛카쓰(日活)라는 이름의 영화사가 제작한 영화들이 있습니다.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제법 잘 나가던 역사와 전통의 닛카쓰는 70년대 들어 도산 위기에 처하는데요. 그래서 찾은 회심의 활로가 바로!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저예산 고효율 말랑말랑 소프트코어 포르노를 양산하자는 것이었죠. 결과는 대성공. 천편이 훌쩍 넘는 작품을 찍어내다 못해 전용 극장까지 만들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더랬습니다. 이후 80년대 들어 VHS 보급과 노골적인 하드코어 AV의 출현, 검열의 압박 등에 밀려 사라지긴 했지만 말이죠. 목적이 분명한 만큼 제작..

Film/Romance 2022.11.18

여름바다라는 풍경화 _ 여름바다에 뜨는 가벼운 것들, 조혜린 감독

# 0. 겨울바다 사진이 여름바다 그림 속으로 풍덩 조혜린 감독, 『여름바다에 뜨는 가벼운 것들』 입니다. # 1. 퀴어 코드의 로맨스 영화입니다. 대체로 정체성을 자각하지 못한 주인공이 정체성을 탐색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정체성을 인지하고 있으나 모종의 이유로 그것을 인정하거나 표현하기 주저하는 사람들이 용기를 얻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인데요. 도입에 등장하는 전 애인 수영의 청첩장과 같은 코드를 생각한다면 후자에 조금 더 가까운 작품이라 할 수 있겠죠. 다만 보다 보면 뭐랄까요. 퀴어는 그냥 소재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하게 됩니다. 영화에서의 퀴어란 두려움에 못 이겨 마음속 깊이 끌어안고 침전해 있는 무언가로 대체되어도 별 지장이 없거든요. 심지어 사랑이라는 정서조차 그렇게까지 본질..

Film/Romance 2022.10.30

7번방의 노마 _ 블론드, 앤드류 도미니크 감독

# 0. 논란의 작품입니다. 고인 모욕에 대한 이야기도 들리구요. 왜곡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더 크게 들리는 듯합니다. 수위가 세다는 마케팅에 속은 일부의 관객들이 화를 내는 듯한 모양새도 있군요. 혹자는 '마릴린 먼로를 창녀로 만드는 영화'라며 분개하기도 합니다만, 그건 원작 소설에 대한 비판에 조금 더 가깝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과연 그것만으로 영화에 대한 감상은 충분한 것인가에 다소 의문이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영화를 보고 있으니까요. 앤드류 도미니크 감독, 『블론드 :: Blonde』입니다. # 1. 전기 영화란 몇몇의 예외적 시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인물의 인생을 구체적으로 묘사해 소개하거나, 간과되기 쉬운 입체성을 재조명하기 마련일 텐데요. 문제의 는 왜곡을 차치하고서라도, 인물의 정체성을 ..

Film/Drama 2022.10.04

헤어졌어 _ 연기, 김경래 감독

# 0. 헤어졌어.갑자기? 왜 헤어져요?        김경래 감독,『연기 :: While you play』입니다.     # 1. 무수히 많은 연습으로 이뤄진 이별, 무수히 많은 이별로 도달한 사랑입니다. 이별을 연기하는 동안 시간도, 환경도, 성격도, 상황도, 해석도, 심지어 입장까지도 계속해서 뒤바뀝니다. 테이크를 굳이 숨기지 않는 등 오롯이 타인을 연기하는 가상의 행위임을 명확히 합니다. 하지만 그런 표피적인 것들과 무관하게 정서는 단일한 방향으로 깊어만 갑니다. 사랑이죠. 절정부 포차를 나선 후, 헤어지자 말하는 순간의 상대와 키스하는 순간의 상대는 다른 사람이지만 같은 사람이고, 그 말을 하는 남자 역시 다른 사람이지만 같은 사람입니다. 입맞춤에 화들짝 놀라는 여자 역시 이별을 원하는 사람이지만..

Film/Romance 2022.09.02

미결로 완성될 영원의 바다 _ 헤어질 결심, 박찬욱 감독

# 0.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보며 제목 잘 지었다 싶은 작품은 드물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JSA는 JSA구요. 올드보이는 원작 제목이었죠. 박쥐나 스토커, 아가씨 모두 완성도와 별개로 특색 있는 제목은 아니었습니다. 기껏해야 복수는 나의 것이나 친절한 금자씨 정도가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창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래 봐야 거기까지죠. 하지만 이번엔 다릅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창작을 하나 꼽으라 한다면 저는 제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박찬욱 감독, 『헤어질 결심 :: Decision to Leave』입니다. # 1. 헤어지면 됩니다. 그냥 헤어지면 됩니다. 헤어지는 데에는 결정決定이면 충분하죠. 하지만 영화의 제목은 헤어질 결심決心. 마음을 먹는 것입니다. 왜 결심..

Film/Romance 2022.07.12

수박 겉 핥기 _ 이퀄스, 드레이크 도레무스 감독

# 0. 수박 겉을 핥습니다. 심지어 천~천히 핥습니다. 드레이크 도레무스 감독, 『이퀄스 :: Equals』입니다. # 1. 빌어먹을 세상이 또 멸망했습니다. 만세. 어찌어찌 멸망했다 하는 데 자세히 모르셔도 무방합니다. 어쨌든 망했다는 것만 알아도 충분하죠. 기성의 국제 사회는 깡그리 망하고 '선진국'과 '반도국'으로 이분화된 세상입니다. 선진국은 불필요한 소모를 유발하는 것으로 취급된 감정을 제거함으로써 근로 효율을 극대화하는 데 성공한 인간들의 사회입니다.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평준화를 의미하는 '이퀄'이라 불리죠. 반도국은 현생 인류와 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의 사회입니다. 선진국의 이퀄들은 그들을 (지극히 이퀄의 관점에 따라) '결함인'이라 부릅니다. 감독은 감정의 제거라는 폭력적 방법론을..

Film/Romance 2022.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