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홍수에 밀려온 물방울 수보다 의아한 부분이 더 많다.

김병우 감독,
『대홍수 :: The Great Flood』입니다.
# 1.
아침부터 아이는 물놀이하자는 둥 심각성을 모르는 데, 아파트 3층에 물이 들이치는 걸 보고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다기엔 애가 너무 큰 것 아닐까. 홍수가 났고 거실에 물이 들이쳐 발이 잠기고 있는 상황. 김다미는 대체 무슨 이유로 멍하게 서있는 연기를 디렉팅 받은 걸까. 발가락에 마비가 온 것이 아니고서야 보통 물이 발끝에 닿는 순간 '뭐야, 씨발' 화들짝 놀라게 되지 않나. 곧이어 집에서 탈출하는 데 험준한 산을 오르는 것도 아니고 아파트 복도에서 왜 애를 둘러업고 다니는 걸까. 주사기 보여준 걸로 봐선 아픈 애라 그런가? 라기엔 멀쩡히 물놀이한다 했던 것 같은데... 아파트 계단실에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고 갑자기 누가 기도를 외니까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기도한다. 아무래도 영화가 설정한 평행우주의 한국은 종교국가라는 듯. 비상한 김다미는 비상계단으로 발길을 옮기는 데 사람이 하나도 없다. 저 많은 인파 가운데 비상계단으로 가보자 생각한 사람이 주인공 단 한 명뿐이라니 드럽게 운이 좋다. 여기까지가 영화 시작 10분.
계단 위 정갈하게 테트리스된 잡동사니들. 대충 눈앞에 보이는 거 몇 개 치우고 지나가려나 했는데 김다미는 꾸역꾸역 위로 넘는다. 설마 난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 쇼트 하나 끼워 넣으려는 얄팍한 수작은 아닐 테고, 참 의아한 전개다. 직후 위층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런 식의 몽타주면 엄마가 그러한 것처럼 아이도 파쿠르 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런 날다람쥐 같은 친구를 종일 업고 다닌다는 게 더욱 기이한 대목이다. 위층에 도착한 후 애를 잃어버려서 찾으려는 데 냅다 쓰나미가 몰려온다. 대충 봐도 수십 미터짜리 쓰나미에 건장한 사람들 죄다 즉사하지만 김다미'만' 멀쩡히 살아 있다. 어쩌면 재난 영화가 아니라 슈퍼히어로물인 걸지도. 애를 간신히 찾았지만 졸도했고 그 순간 박해수가 나타나 구했다는 전개. 아파트에서 물바다로 수차례 떨어지지만 대충 수영하면 언제든지 건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설정. 쉽다, 쉬워. 이 시점부터 엑스트라들이 싹 사라진다. 아무래도 직전의 쓰나미는 물청소용이었던 듯. 깨끗해진 아파트를 둘러보며 박해수가 홍수의 전말을 전한다. 소행성이 빙하에 꼬라박아 막 물이 왕창 늘어나서 다 죽을 팔자다. 그래서 당신이 마지막 남은 인류의 희망 뭐 그런 거다라는 설정이다. 대체 언제부터 빙하에 지표면을 전부 덮을 정도의 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그러려니 해야 하는 거겠지. 여기까지가 20분.

# 2.
아무튼 김다미가 신인류 만들기 프로젝트의 마지막 퍼즐이라는 듯. 그런데... 어차피 인류가 절멸하게 된 마당에 신인류가 무슨 소용인진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차라리 신인류인지 뭔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현생 인류의 살 길도 같이 생긴다면 모를까. 그리고 그 중요한 마지막 희망을 왜 박해수 혼자 구하러 온 건지도 적잖이 의아한 부분이고 말이다. 이후로도 일정 시간 동안 서사없이 설정만이 이어진다. 박해수는 김다미와 반복적으로 충돌하는 액션더미용 사이코패스, 애는 말 드럽게 안 들어 처먹는 빌런 역할. 엘리베이터에 갇힌 소녀라는 진부한 트랩보다 더 의아한 건, 아파트 10층 너머까지 물이 차고 있는 데 빈집 털고 있는 빡대가리들이다. 그래서 그거 훔쳐다가 뭐 어따 팔 건데. 차라리 부산행의 김의성처럼 사람들 밀치고 올라가려 한다는 설정이 말이 되지 않을까. 와중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남편 사망 트라우마가 계속 인서트 되어 맥을 끊는다. 이후 밝혀진 내막에 따르면 애는 휴머노이드라는 거 같은데, 그럼 남편은 휴머노이드 아들 살리자고 대신 죽은 거고, 애는 지 아빠가 지 구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는 데 익사로 남편 잃은 엄마 옆에서 잠수놀이 타령했다는 것이다. 이런 호로새끼가 다 있나. 여기까지가 30분.
이쯤에서 이모션 엔진이라는 SF 설정이 추가되는데 그걸 태블릿 화면보호기로 퉁치겠다는 창의성은 참으로 호방하다. 그래, 황금색 그래픽 파도가 참방참방거리면 이쁘긴 하지. 해 떴다. 간단히 생각해 봐도 빙하의 규모가 버젓이 정해져 있으니 녹아서 올라가는 해수면도 정량적으로 시뮬레이션된 예측치일 것이고, 그 결과가 인류 절멸이라는 게 영화의 설정이라면 잠시 해 뜬다고 재난이 그칠 리가 없다. 즉, 비 그치니까 '어? 그쳤네?'를 적어도 사건의 전말을 아는 김다미와 박해수는 해선 안된다는 뜻이다. 심지어 영화 시작 40분도 안된 마당에 조만간 다시 비 오면 '어? 또 오네?' 할 거잖아. 잠시 숨 돌릴 틈이 생기자 박해수는 혼자 감성에 취해 별로 궁금하지 않은 과거사를 늘어놓으며 개인의 역사와 직업적 사명을 뒤섞는다. 직업윤리도 엄마 따라 도망간 걸까. 다시 비 온다. 거봐라 이럴 줄 알았지. 여기까지가 40분.

# 3.
쓰나미가 미처 청소하지 못한 임산부가 하나 보인다. 애기아빠는 어떻게 해야 되냐 묻는데, 그냥 받아야지 뭘 어떡해. 대신 낳아줄 것도 아니고 어쩌라는 건진 잘 모르겠다. 어쨌든 쌩까고 올라간 김다미는 갑자기 짜증에 북받쳐 박해수에게 따져 묻는다. '애를 왜 놓고 가야 하는데요!!!' 애 버린다는 얘기를 애 듣는 옆에서 하고 있는 미친년이다. '내가 어떻게 혼자가요!!!'라 말하는 엄마 옆에서 뻘쭘하게 못 들은 척하고 있는 아역은 무슨 죄인가 싶다. 옥상 도착. 앞서 박해수가 밀려드는 인파 운운하며 폼을 잡던 것이 무안하게도 개미새끼 하나 없지만, 하긴. 박해수도 쓰나미 물청소는 몰랐겠지. 갑자기 애 머리카락 미는 건 노골적으로 감정을 주입하기 위한 연출일 뿐이니, 대충 <정이>에서 김현주 발가 벗겨 창녀로 써먹는 연출과 비슷하다 이해하면 무난할 것이다. 김다미가 쏟아지는 비 맞으며 무릎 꿇고 비는 장면은 7번 방의 선물에서도 본 듯한 충무로식 신파성 질감이고 말이다. 여하튼 박해수 리타이어 하며 홍수 재난은 끝난다. 여기까지가 50분.
화성 갈끄니까 사이사이 인서트를 조합하면, 대충 아들은 애마음 만들기 위한 실험체였고, 이제 엄마마음 만들기 해야 하는 데 그걸 김다미가 몸소 한다는 것 같다. 즉, 이후 분량의 김다미는 엄마 이모션 엔진용 딥러닝이라는 뜻이다.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 김다미의 반응이 다소 경직된 이유이자, 정직하게 늘어나는 티셔츠 숫자의 의미다. 일정 시점부터 아예 단면과 조감의 디지털 프레임을 노출하며 데이터 더미라 설명하기까지 하니 못 알아차리기도 힘들지만. 사실 이런 상황 반복은 정체를 플롯 속에 숨겨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뭐지? 왜 반복되지? 뭐가 진짜지?라는 의문이 불쾌하지 않은 선에서 유지되다 사건의 전말이 밝혀져야 한다는 뜻인데, 시작될 때부터 이미 김다미의 데이터라는 게 너무 뻔하다 보니 드릅게 재미가 없다. 김다미는 귀여운 마스크에도 불구하고 액션도 겁나 잘하는 배우구나 라는 감상 외에 향후 수십 분간 무표정했던 이유다.
일련의 후반부는 엄마용 이모션 엔진 만들기로 요약되는 데, 과정에서 김다미는 딥러닝 돌릴 소프트를 개발/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딥러닝의 소스가 될 기억체로 직접 들어간다. 말인즉, 마지막 반복 학습 과정만 남겨져 있을 뿐 엔진의 알고리즘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그 안에 돌릴 기억체가 굳이 김다미일 이유도, 아니 이 모든 과정에서 김다미가 필요한 이유 자체가 없어진다. 즉, 처음으로 돌아가서 '박해수의 김다미 구하기'라는 이야기 전체가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이 설정대로라면 오히려 박해수는 김다미 따위 죽든 말든 상관없고 애 샘플이나 회수했어야 한다. 어차피 알고리즘은 완성되어 있으니 지천에 널린 애엄마 하나 데려다 딥러닝만 돌리면 그만인 거니까.

# 4.
흘러가는 크래디트를 보며 생각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뭘 하고 싶었던 걸까. 당장 장르 영화라기엔 지나치게 태만하다. 재난 영화 파트는 물량 공세가 담보하는 최소한의 스펙터클 외엔 누더기나 다름 없기에 누누이 이야기한 대로 과정과 연출과 해결 다방면에서 상당히 조악하다. AI 딥러닝 과정을 시각화한 SF 파트로 넘어가는 연결도 크게 둔탁하거니와, 딥러닝 자체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기에 진부한 타임루프물의 형식미에서 조금도 구별이 없다. 홍수 재난 영화에서 출발해 SF의 탈을 쓴 루프물을 지나 총기 액션 무비로 메가진화하는 구성은 익숙한 양산형 넷플릭스 무비의 그것처럼 보인다. 철학 없이 과시적인 그래픽과 세트 미술을 문자 그대로 꼬라박는 앤딩은, 역설적으로 규모를 과시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영화라 자백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주제의 측면에서도 이모션 엔진이란 거창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인간 감정에 대한 통찰은 아예 발견되지 않는다. 그나마 김다미의 분투에 얹어 모성을 강하게 포커싱 하고 있지만 그 모성에 대한 탐구조차 별다른 내용이 없다. 작중 모성은 엄마의 전화나 산부의 감수성 같은 감정적으로 쥐어짜는 몇몇의 사례들을 수집하는 것과, 아들과 재회하기 위한 액션의 물리적인 난도로 대신될 따름이다. 이렇게 억겁의 루프를 건너 어렵게 아들을 만난 만큼, 이 '고단함'이 곧 모성의 '대단함'이라 주창하는 것뿐이라는 의미다.
소거 끝에 남은 건 결국 (노골적인 제목이 그러하듯) 노아의 방주에서 얻은 모티브 단 하나다. 앞서 짓궂게 놀리듯 말한 몇몇 장면들을 통해 재해석된 기독교적 상징뿐이라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영화는 스스로 완결성 있는 온전한 이야기여야지, 고전의 상징만 이리저리 끼워 맞추면 그만인 퍼즐놀이가 아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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