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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Romance

도메크의 망원경 _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그냥_ 2024. 3. 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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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마그다의 정신을 들여다보는 도메크의 망원경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 A Short Film About Love』입니다.

 

 

 

 

 

# 1.

 

어지간한 변태가 아니고서야 이름 외우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생소하신 분들도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나, <세 가지 색 블루, 화이트, 레드> 시리즈는 한 번쯤 들어보셨을 텐데요. 그 작품들 만든 동유럽 영화계를 대표하는 거장이죠.

 

30여 년 전, 성경의 십계를 주제로 각색 제작된 데칼로그(Dekalog)라는 폴란드 Tv시리즈가 있었는데요. 그중 6번째, 간음을 주제로 한 에피소드에 분량을 추가 개봉한 작품입니다. 관음은 작품의 핵심적인 설정입니다. 멀리는 히치콕의 이창, 가까이는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에 이르기까지 엿보기는 에로스를 다룬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상황 설정이죠. 물론 이 작품은 단순히 '다루었다'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명작 중 하나이지만요.

 

제목은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고, 이는 의역이 아닙니다. 감독은 자신의 작품을 구체적 인물이 아닌 사랑이라는 감정 혹은 개념에 관한 것이라 단호하고 명명하고, 그 의지처럼 영화는 내밀하게 흐르는 육중한 감정선과 별개로 대단히 탐구적이고 실험적인 모습을 취합니다. 거칠게 도식화하자면 세 명의 등장인물이 마그다의 방을 들여다보는 단계적 변화로 요약됩니다. 도메크는 마그다 혼자 있는 마그다의 방을 들여다 보고, 대모는 도메크와 마그다가 함께 있는 마그다의 방을 들여다 보고, 마지막으로 마그다는 아무도 없는 마그다 자신의 방을 들여다봅니다. 인물이 변화함에도 방향으로서의 마그다의 방과 수단으로써의 도메크의 망원경은 공유됩니다. 감독이 탐구하고자 하는 사랑이란 결국, 도메크의 망원경으로 들여다본 마그다의 방에 대한 연구라는 것이죠.

 

 

 

 

 

 

# 2.

 

도메크는 정신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 어쩌면 정신적 사랑이라는 개념의 의인화에 가까운 인물입니다. 그에게서 가족 관계, 대인 관계, 사생활, 심지어 최소한의 윤리관까지 모조리 제거한다거나, 사랑을 느끼는 대상을 미스 폴란드와 같은 젊은 미모의 인물이 아닌 중년 여성으로 설정한 것은 감독이 탐구하고자 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혼탁하게 할 법한 변인을 통제하기 위함으로 이해할 수 있겠죠.

 

도메크의 사랑은 대상과의 정신적 교감만을 원할 뿐 그 외의 것은 원하지는 않습니다. 처음 훔쳐보았을 땐 자위하기도 했지만 언제부턴가 하지 않는다 말하는 대목이라거나, 잠자리나 키스, 데이트를 원하냐는 마그다의 추궁에 원하는 것 없다 답하는 장면은 그러합니다. 도메크는 수많은 언어를 공부하고 있다 말하기도 하는데요. 언어를 공부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순수한 동경과 호기심이고, 이는 마그다에게 느끼는 감정과 부분을 공유합니다. 미스 폴란드가 방송되는 텔레비전에는 관심이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쇼 위에 올려진 육체적인 매력은 같은 정신을 공유할 수 없다는 면에서 컬러의 세상 속 흑백의 허무함일 뿐이니까요.

 

도메크의 사랑은 상대의 정신이 온전하도록 개입하지 않은 채 그저 교감하고 동기화하는 것이고, 이는 일방향적인 정보의 흐름으로 도식화됩니다. 망원경은 시각적 정보를 일방적으로 전달받기만 하는 도구이고, 전화 역시 목소리를 듣기만 할 뿐 말하지는 않죠. 반복된 전화에 지친 마그다가 "변태자식!"이라 화를 내자 도메크는 다시 전화를 걸어 사과하는데요. 비윤리적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행동이 마그다의 정신에 개입했기 때문입니다. 정해진 시간마다 울리는 알람 시계나 치즈 바른 빵을 같은 순간 먹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의 동기화 과정이라 할 수 있겠죠.

 

실연에 울음을 터트리는 마그다를 보며 대모에게 '왜 사람은 우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묻습니다. 그에게 사랑이란 상대의 독립된 감정의 이유와 본질을 탐구하고 그것에 이입해 교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허위 신고로 가스 점검원을 보내는 장면도 썩 흥미롭습니다. 성적 자극을 탐닉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되려 흥분감을 느껴야 했을 텐데요.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망원경을 돌리거나 허위 신고로 섹스를 방해하는 것은 자신의 정신적 사랑이 육체적 관계로 인해 공격받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허위 신고라는 행동으로 말미암아 마그다의 정신은 개입되어 훼손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웃으며 신고원을 지켜보다 불쑥 치민 화를 못 이겨 옷장에 주먹을 날린 이유죠.

 

도메크는 사랑이 커질수록 점점 마그다를 향해 끌어당기는 인력을 느낍니다. 멀리서 망원경을 들여다보다, 우체국 데스크의 유리막 너머로 만나고, 우유배달을 이유로 직접 집 앞에서 눈을 마주치고, 끝내 데이트 후 집 안으로까지 초대받게 되죠. 거리의 변화에 따른 감정의 폭발은 뜨거운 열감으로 은유되는 데요. 이는 결국 클라이맥스의 과격한 파멸에 도달합니다.

 

 

 

 

 

 

# 3.

 

중년의 마그다는 도메크의 정신적 사랑을 불신하면서도 갈증 하는 이율배반적인 보편의 인간입니다. 도메크와 마그다가 만나는 시퀀스는 크게 둘입니다. 하나는 우유배달, 둘은 우체국 송금표죠. 새하얀 우유는 도메크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그는 순수한 사랑이 가득 든 병을 매일 아침 마그다에게 전달합니다. 굳게 닫힌 문 앞에 내놓은 빈 병은 순수한 사랑을 불신하는 마그다의 인식을 은유합니다. 도메크는 빈 병의 존재를 부정하며 노크로 마그다를 불러 질문합니다. '다시 병을 보여 주세요. 당신에게 아직 하얀색 우유(정신적 사랑)가 남아 있나요?' 마그다는 다시 빈 병을 내밀며 냉소를 재확인하죠.

 

가짜 송금표 역시 비슷한 비유로 이해됩니다.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가짜 송금표는 거래 혹은 교환하지 않는 도메크의 사랑입니다. 반면 마그다에게 사랑은 교환입니다. 사랑을 주면 대가를 받아야 하지만 돌려받지 못한 배신감에 좌절하는 사람인 것이죠. 우체국의 점장은 그녀에게 사기꾼이라 힐난하는데요. 이는 사랑이라는 기준에서 창녀라 비난하는 것과 겹쳐 보이기도 합니다. 도메크는 자신으로 말미암에 마그다가 사랑(송금표)으로 기망하는 사람이라는 모함받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행동과 사랑을 고백합니다.

 

하얀색이 도메크의 정신적이고 순수한 플라토닉을 상징한다면, 붉은색은 마그다의 육체적이고 가학적인 에로스를 상징합니다. 마그다의 방이 온통 붉은색으로 가득한 이유이자 붉은 방에서 붉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 이유죠. 다만 매일 같이 새하얀 우유를 배달시키는, 순수한 사랑에 대한 갈증을 가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새빨간 이불을 들춰내고 나면 그 아래 새하얀 이불보가 숨겨져 있는 인물이기도 하죠. 오래전 연인과의 이별을 울고 있는 뒷모습 분 아니라 쏟아진 새하얀 우유로 비유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역으로 새하얀 도메크의 충동과 좌절은 심장을 삐져나온 붉은색 피를 통해 대비됩니다. 스스로의 욕망을 통제하려다 손가락에서 피를 흘리는 장면을 지나, 자신을 몰아붙이는 마그다의 "사랑은 이게 다야"라는 말 한마디에 붉은 피가 흥건한 자살을 기도한 이유라 할 수 있겠죠.

 

 

 

 

 

 

# 5.

 

대모는 작게는 아무도 아닌 사람이자, 크게는 모든 것을 관할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도메크와 마그다의 사고 실험 바깥에 존재하며 세상에 필요한 기능을 보조하는 인물이랄까요. 도메크의 질문을 받아내는 사람이자, 도메크와 마그다가 함께 하는 모습을 멀리서 조망하는 시선이라는 상황을 제공하는 사람이자, 도메크가 쓰러진 이후에도 순수한 사랑에 갈증을 느끼는 마그다에게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자, 마그다로 하여금 잠든 도메크가 아닌 망원경을 들여다볼 것을 통제하는 사람이니까요. 친모가 아닌 대모라는 설정은 영화에서 분리된 캐릭터의 의의를 그 자체로 대변합니다.

 

좌절하고 돌아서는 도메크의 모습을 통해 마그다는 자신을 육체적으로 탐닉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정신적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과, 자신 역시 그런 순수한 사랑을 무의식 중에 믿고 기다리고 있었음을 자백합니다. 이 같은 생각은 돌아오라는 전할 수 없는 글씨와, 커튼에 가려 볼 수 없는 시선과, 닿을 수 없는 발걸음과, 알 길 없는 소식과, 무기력하게 기다리는 시간을 지나며 성숙됩니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도메크를 찾아 그의 방으로 들어 선 마그다. 대모는 마그다가 도메크에게 다가가는 것을 막습니다. 다가간다는 것은 육체적인 것이고 그녀가 진정으로 그의 사랑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손을 대는 것이 아니라 망원경을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이죠. 마그다는 도메크의 망원경을 통해 슬픔에 좌절하는 자신과 그런 자신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는 도메크의 정신에 접속합니다. 이는 지극히 정신적인 것이기에 지그시 눈을 감더라도 온전히 이어집니다. 영화는 마그다의 좌절을 온전히 교감하는 도메크의 정신적인 사랑과, 그런 도메크의 위로를 온전히 교감하는 마그다의 눈 감을 얼굴을 사랑이라 정의합니다. 섬세한 교감의 과정 끝에 도달하는 온전한 정신의 합치. 이 모든 것의 총체로서의 사랑.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인 것이죠.

 

 

 

 

 

 

# 6.

 

논외로 영화를 윤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썩 무의미하다는 생각입니다. 감독 역시 도메크와 마그다를 이상적이라 생각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습니다. 그저 일련의 불완전하고 조작적인 상황 속에서 두 인물의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에센스를 포착하고자 할 뿐이죠.

 

굳이 히치콕의 표현을 빌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관음이라는 행위는 그 자체로 영화에 대한 은유로 쓰이기도 하는데요. 프레임 안에 담긴 피사체에 대한 정신적 교감을 사랑이라 정의한다는 면에서, 영화를 한다는 것은 감독에게 그 안에 담긴 모든 이를 사랑하는 박애적인 예술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영화의 제목이 <사랑에 관하여>가 아니라 굳이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라는 것은 분명 의미심장하죠.

 

글의 서두에서 성경의 십계를 주제로 각색한 작품이라 말씀드렸는데요. 도메크를 형이상학적인 사랑의 화신이자 손에서 피를 흘리는 인물이자 죽은 후에 살아 돌아온 인물이라는 면에서 예수, 그를 보호하는 대모는 성모를 끌고 들어온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자연스럽게 마그다는 도메크의 희생에 힘입어 그의 성스러운 시선과 사랑을 깨우치는 인간이라 할 수 있겠죠. 중간중간 분투하며 내달리는 도메크 옆으로 상하의 새하얀 옷을 입은 한 남자가 등장하는데요. 자신을 대신해 인간에게 하얀색 사랑을 전하기 위해 분투하는 예수를 온화하게 지켜보는 하얀색의 화신으로서의 야훼라 생각해 볼 수도 있겠군요.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었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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