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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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Romance 42

감독놀음 _ 은밀한 공범, 죠죠 히데오 감독

# 0. 평범한 소재로 비범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도 있지만,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내다 버리는 경우도 부지기수입니다. 죠죠 히데오 감독, 『은밀한 공범 :: 恋のいばら』입니다. # 1. 은 수입사가 지어 붙인 이름입니다. 원제는 恋のいばら. 그러니까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군요. 참고로 영어 제목은 Thorns of Beauty인데요. 이쪽이 그나마 더 직역에 가까운 번역이기는 합니다. 실제 영화의 핵심은 '가시'로 은유된 각자의 마음에 있다는 면에서, 관계 중심적인 뉘앙스가 강한 '공범'이라는 우리말 제목은 썩 정밀해 보이지는 않죠. 양가적 감정에 놓인 두 여자의 갈등을 그린 작품입니다. 원제에 긍부정이 배치되는 두 개념을 접붙여둔 이유죠. 모모는 켄타로에게 집착과 파괴를 함께 느낍니다. 수차례 복제하고 ..

Film/Romance 2024.03.30

도메크의 망원경 _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 0. 마그다의 정신을 들여다보는 도메크의 망원경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 A Short Film About Love』입니다. # 1. 어지간한 변태가 아니고서야 이름 외우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생소하신 분들도 이나, 시리즈는 한 번쯤 들어보셨을 텐데요. 그 작품들 만든 동유럽 영화계를 대표하는 거장이죠. 30여 년 전, 성경의 십계를 주제로 각색 제작된 데칼로그(Dekalog)라는 폴란드 Tv시리즈가 있었는데요. 그중 6번째, 간음을 주제로 한 에피소드에 분량을 추가 개봉한 작품입니다. 관음은 작품의 핵심적인 설정입니다. 멀리는 히치콕의 이창, 가까이는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에 이르기까지 엿보기는 에로스를 다룬..

Film/Romance 2024.03.04

결혼 바이럴 _ 조립, 신택수 감독

# 0. 여름밤, 부부는 완수해야 할 과제가 있다. (2019년 제23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신택수 감독, 『조립 :: assembly』입니다. # 1. 감독은 평범한 사람들의 결혼 생활이라는 것을 크게 세 가지 감정으로 규정합니다. 비좁다. 피로하다. 그럼에도 사랑한다. # 2. 창백한 도시는 피로감을 상징합니다. 멀찌감치 지나는 지하철을 내려다보는 구도로 담아 그들의 삶을 작고 소소한 것으로 연출합니다. 지하철에서 내려 트인 공간을 걷는 장면은 의식적으로 생략됩니다. 곧장 엘리베이터라는 좁은 공간에 인물을 집어넣고 그마저도 구석에 몰아 고립시킵니다. 인물을 거울에 반사시켜 안 그래도 좁은 공간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들어차 있는 듯한 착시를 일으킵니다. 지쳐 고개를 숙이는 순간 거울 너머 함께 고..

Film/Romance 2023.12.14

푸른 밤의 사색 _ 여섯 개의 밤, 최창환 감독

# 0. 모든 여행은 여행자가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목적지가 있다. 최창환 감독, 『여섯 개의 밤 :: The Layover』입니다. # 1. 오스트리아 철학자 마틴 부버의 글귀와 함께 시작됩니다. 해당 글귀를 인용함은,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여행자로 규정한다는 의미임과 동시에, 작품을 통해 탐구하고자 하는 바가 눈에 드러나는 목표가 아닌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목적지'라는 것에 있음을 의미하는 거겠죠. 알 수 없다는 것은 통제 불가능한 불확실성을 의미할 텐데요. 예측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개인의 나약함으로도, 계획 밖의 영역에 대한 가능성과 풍요로움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영화가 탐구하려는 목적지란 것이 문자 그대로의 장소라거나 성취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타인과 함께 하는 ..

Film/Romance 2023.11.12

헤어진 그녀와의 인터뷰 _ 선우와 익준, 양익준 감독

# 0. 찰나의 감정마저 이토록 두터운데 양익준 감독, 『선우와 익준 :: Sunwoo and Ikjune』입니다. # 1. 선우와 익준은 함께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자, 9년을 만난 연인입니다. 두 사람은 익숙함과 별개로 지나온 긴 시간만큼의 차이를 가지고 있고, 이는 오프닝에서부터 시선, 표정, 자세, 동선, 걸음의 속도, 배경 등 다양한 표현을 통해 부드럽게 은유됩니다. 오늘은 여자 수인이 남자 재석에게 이별을 고하는 신을 촬영하는 날. 두 사람은 완만한 오르막을 무겁게 걸으며 잠시 후 있을 촬영에 대해 논의합니다. 선우는 헤어지자 말하는 여자 수인을 두둔합니다. 익준은 그런 수인의 잔인함을 지적합니다. 촬영이 진행되고 감독 선우는 배우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요. 수인 역의 진서는 되려 수인이 비겁한 ..

Film/Romance 2023.10.10

그녀의 고백 _ 흐르는 대로, 치쿠마 야스토모 감독

# 0. 숨겨뒀던 책갈피를 꺼내다. 치쿠마 야스토모 감독, 『흐르는 대로 :: の方へ、流れる』입니다. # 1. 오프닝입니다. 흔들리는 버스 손잡이에 간신히 매달린 손은 연약함과 위태로움 따위를 은유합니다. 창밖으로 지나치는 풍경은 거대한 흐름을 의미합니다. 무엇이 지나간 건지 모를 정도의 빠른 속도와, 흘러가는 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던 수동성이죠. 이내 여자의 뒷모습이 카메라에 길게 담깁니다. 뒷모습은 숨겨뒀던 솔직한 마음일 수도 혹은 뒤돌아 서있게 만드는 부끄러운 치부일 수도 있을 겁니다. 여자 옆에 한 남자가 섭니다. 여자는 어깨너머로 책을 훔쳐봅니다. 두터운 책의 두께는 사연의 깊이, 몰래 훔쳐보는 것에서는 느슨한 호기심이 발견됩니다. 책갈피입니다. 흘러가던 흐름을 잘라 멈춰 세우는 도구. 삶의 ..

Film/Romance 2023.09.22

아키라정전 _ 사랑의 이발소, 모리타 요시미츠 감독

# 0. 로망 포르노(ロマンポルノ)를 아시나요? 모리타 요시미츠 감독, 『사랑의 이발소 :: ピンクカット・太く愛して深く愛して』입니다. # 1. 1980년대 일본. 닛카쓰(日活)라는 이름의 영화사가 제작한 영화들이 있습니다.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제법 잘 나가던 역사와 전통의 닛카쓰는 70년대 들어 도산 위기에 처하는데요. 그래서 찾은 회심의 활로가 바로!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저예산 고효율 말랑말랑 소프트코어 포르노를 양산하자는 것이었죠. 결과는 대성공. 천편이 훌쩍 넘는 작품을 찍어내다 못해 전용 극장까지 만들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더랬습니다. 이후 80년대 들어 VHS 보급과 노골적인 하드코어 AV의 출현, 검열의 압박 등에 밀려 사라지긴 했지만 말이죠. 목적이 분명한 만큼 제작 법칙은 단순하고 절..

Film/Romance 2022.11.18

여름바다라는 풍경화 _ 여름바다에 뜨는 가벼운 것들, 조혜린 감독

# 0. 겨울바다 사진이 여름바다 그림 속으로 풍덩 조혜린 감독, 『여름바다에 뜨는 가벼운 것들』 입니다. # 1. 퀴어 코드의 로맨스 영화입니다. 대체로 정체성을 자각하지 못한 주인공이 정체성을 탐색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정체성을 인지하고 있으나 모종의 이유로 그것을 인정하거나 표현하기 주저하는 사람들이 용기를 얻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인데요. 도입에 등장하는 전 애인 수영의 청첩장과 같은 코드를 생각한다면 후자에 조금 더 가까운 작품이라 할 수 있겠죠. 다만 보다 보면 뭐랄까요. 퀴어는 그냥 소재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하게 됩니다. 영화에서의 퀴어란 두려움에 못 이겨 마음속 깊이 끌어안고 침전해 있는 무언가로 대체되어도 별 지장이 없거든요. 심지어 사랑이라는 정서조차 그렇게까지 본질..

Film/Romance 2022.10.30

뉘앙스 ⅱ _ 캐롤, 토드 헤인즈 감독

뉘앙스 ⅰ _ 캐롤, 토드 헤인즈 감독 # 0. 대상(Her)이 주체(She)가 되는 순간에 찾아오는 어른의 사랑 - 영화평론가 이동진, 그녀(Her) 한줄평 - 토드 헤인즈 감독, 『캐롤 :: Carol』입니다. # 1. 창살과 함께 영화는 시작됩니다. 감독은 자 morgosound.tistory.com # 6. 테레즈의 '안심이 되냐'는 물음에 캐롤은 놀라운 사람이라 답하며 회피합니다. 두려운 게 있다면, 도와줄 것이 있다면 청하라는 말에는 단호하게 두려운 것이 없다 말하죠. 여행 캐리어는 캐롤의 깊고 은밀한 내면을 의미합니다. 그 속에 숨겨둔 총을 보여준 다음 두려움에 대한 대화를 풀어내게끔 편집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캐롤은 내면에 두려움을 숨기고 있으며 그 두려움이 [총]이라는 아이템으로 연결되..

Film/Romance 2022.10.22

뉘앙스 ⅰ _ 캐롤, 토드 헤인즈 감독

# 0. 대상(Her)이 주체(She)가 되는 순간에 찾아오는 어른의 사랑 - 영화평론가 이동진, 그녀(Her) 한줄평 - 토드 헤인즈 감독, 『캐롤 :: Carol』입니다. # 1. 창살과 함께 영화는 시작됩니다. 감독은 자신이 펼쳐놓으려는 이야기의 환경을 똑같은 모양의 틀이 군집된 창살로 정의합니다. 거칠고 건조한 철제 질감과 오밀조밀한 구성은 단절감이나 통제력 따위의 이미지를 복합적으로 암시합니다. 정체성을 제약하는 압박감과 획일성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기본적으론 짙은 정서의 멜로 영화입니다만 못지않은 드라마적 깊이를 겸비한 작품인 것이죠. 다양한 형태의 [프레임]을 징검다리 삼아 풀어낸 작품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대표적으로 창문을 꼽을 수 있을 테죠.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상황에 따..

Film/Romance 2022.10.20

헤어졌어 _ 연기, 김경래 감독

# 0. 헤어졌어. 갑자기? 왜 헤어져요? 김경래 감독, 『연기 :: While you play』입니다. # 1. 무수히 많은 연습으로 이뤄진 이별, 무수히 많은 이별로 도달한 사랑입니다. 이별을 연기하는 동안 시간도, 환경도, 성격도, 상황도, 해석도, 심지어 입장까지도 계속해서 뒤바뀝니다. 테이크를 굳이 숨기지 않는 등 오롯이 타인을 연기하는 가상의 행위임을 명확히 합니다. 하지만 그런 표피적인 것들과 무관하게 정서는 단일한 방향으로 깊어만 갑니다. 사랑이죠. 절정부 포차를 나선 후, 헤어지자 말하는 순간의 상대와 키스하는 순간의 상대는 다른 사람이지만 같은 사람이고, 그 말을 하는 남자 역시 다른 사람이지만 같은 사람입니다. 입맞춤에 화들짝 놀라는 여자 역시 이별을 원하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사랑을..

Film/Romance 2022.09.02

미결로 완성될 영원의 바다 _ 헤어질 결심, 박찬욱 감독

# 0.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보며 제목 잘 지었다 싶은 작품은 드물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JSA는 JSA구요. 올드보이는 원작 제목이었죠. 박쥐나 스토커, 아가씨 모두 완성도와 별개로 특색 있는 제목은 아니었습니다. 기껏해야 복수는 나의 것이나 친절한 금자씨 정도가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창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래 봐야 거기까지죠. 하지만 이번엔 다릅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창작을 하나 꼽으라 한다면 저는 제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박찬욱 감독, 『헤어질 결심 :: Decision to Leave』입니다. # 1. 헤어지면 됩니다. 그냥 헤어지면 됩니다. 헤어지는 데에는 결정決定이면 충분하죠. 하지만 영화의 제목은 헤어질 결심決心. 마음을 먹는 것입니다. 왜 결심..

Film/Romance 2022.07.12

수박 겉 핥기 _ 이퀄스, 드레이크 도레무스 감독

# 0. 수박 겉을 핥습니다. 심지어 천~천히 핥습니다. 드레이크 도레무스 감독, 『이퀄스 :: Equals』입니다. # 1. 빌어먹을 세상이 또 멸망했습니다. 만세. 어찌어찌 멸망했다 하는 데 자세히 모르셔도 무방합니다. 어쨌든 망했다는 것만 알아도 충분하죠. 기성의 국제 사회는 깡그리 망하고 '선진국'과 '반도국'으로 이분화된 세상입니다. 선진국은 불필요한 소모를 유발하는 것으로 취급된 감정을 제거함으로써 근로 효율을 극대화하는 데 성공한 인간들의 사회입니다.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평준화를 의미하는 '이퀄'이라 불리죠. 반도국은 현생 인류와 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의 사회입니다. 선진국의 이퀄들은 그들을 (지극히 이퀄의 관점에 따라) '결함인'이라 부릅니다. 감독은 감정의 제거라는 폭력적 방법론을..

Film/Romance 2022.07.08

타는 목마름으로 _ 빌로우 허, 에이프릴 멀린 감독

# 0. 파격적인 묘사는 잠재력 이상의 흥미를 유도하기도 하지만 역으로 저평가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야기가 매력적이진 못했지만 그래도 미술과 연기, 고증, 촬영 등에서 나름의 성취가 있었던 작품임에도 폭력성과 선정성에 가려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했던 민규동 감독의 같은 경우죠. 특히 우리나라는 그런 경향이 조금 더 심한데요. 국내보다 해외에서 훨씬 크게 평가를 얻고 있는 박찬욱 감독의 는 좋은 예라 할 수 있겠네요. 에이프릴 멀린 감독, 『빌로우 허 :: Below Her Mouth』입니다. # 1. 빌로우 허 역시 기본적으론 수위가 굉장히 높은 작품입니다. 수위뿐 아니라 비중도 높아 영화 내내 헐벗은 주인공들이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다 끝나는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죠. 심지어 동성애를 다루다..

Film/Romance 2022.05.20

Skip _ 투 마더스, 안느 퐁텐 감독

# 0. 두 절친 아줌마가 서로의 아들을 바꿔 연애하는 영화, 즉 불륜물입니다. 관객에 따라선 작품을 보기도 전부터 소재의 파격만으로 혀를 찰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박훈정' 감독의 『V.I.P.』 리뷰에서도 말씀드렸듯 영화의 소재가 그 자체로 문제시되는 건 합리적이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궁금해하고 즐겨야 할 건 소재의 파격성이 아니라 소재로부터 감독이 무엇을 발견하고 있는가여야 하는 거겠죠. '안느 퐁텐' 감독, 『투 마더스 :: ADORE』입니다. # 1. 전반부는 이들의 관계를 최대한 긍정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소위 판을 까는 작업이죠. 아들들은 키 크고 잘생긴 몸짱 출신 서핑 중독자들입니다. 엄마들은 해녀보다 더 자주 물질을 하는 수영의, 보다 정확히는 '수영복'의 화신들이죠. ..

Film/Romance 2021.12.10

올해의 단편 _ 맛있는 엔딩, 정소영 감독

# 0. 이번 옴니버스 너무 좋은데요? 단편 옴니버스 두 번째 에피소드입니다. '정소영' 감독, 『맛있는 엔딩 :: Tasty Ending』입니다. # 1. 무수히 많은 신발과 오브젝트는 누적된 무언가를 의미합니다. 특유의 물 빠진 색감과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깊은 한숨이 인물과 공간의 수분을 제거합니다. 제법 긴 시간 동안 대사는 단 한 마디도 없습니다. 물건을 챙기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는 손길에 과격하면서도 처연한 정서가 엿보입니다. 서랍장에서 상자를 꺼냅니다. 상자 속에서 다이어리를 꺼냅니다. 1000일. 3년 여가 넘는 긴 시간을 만났다는 것보다, 1000일 이후론 세지도 않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시콜콜한 잘잘못에 대한 작품이 아닙니다. 여자의 이별은 어떤 사연 어떤 핑계를 댄다 하더라도 결국..

Film/Romance 2021.11.08

당연하지 _ 런던 시계탑 밑에서 사랑을 찾을 확률, 벤 팔머 감독

# 0. 찐따의 로맨스도 달콤할까? '벤 팔머' 감독, 『런던 시계탑 밑에서 사랑을 찾을 확률 :: Man up』입니다. # 1. 한 번쯤 운동을 해보신 분들, 특히 다이어트를 위해 운동을 하려다 실패해보신 분들이라면 대부분 공감하실 겁니다. 가장 무거운 건 기구에 얹힌 50kg짜리 쇳덩이도 트레드밀을 달리는 100kg짜리 몸뚱이도 아닌 집안에 퍼질러 앉아 버티는 엉덩이라는 걸 말이죠. 물론 이런 식상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헬스 마니아들은 답답해 고개를 저을 겁니다. 아니? 운동이 얼마나 재미있는데 엉덩이가 무겁다는 거야? 파티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처럼 대부분은 적당히 만나고 적당히 사랑하고 적당히 살아갑니다. 일반에게 사랑은 설레고 긴장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도조차 못할만큼 두려운 일은 하니죠. ..

Film/Romance 2021.09.15

김종관의 영화세계 _ 최악의 하루, 김종관 감독

# 0. 감독 김종관의 영화입니다. 김종관 감독, 『최악의 하루 :: Worst Woman』입니다. # 1. 골목길입니다. 물리적인 '방향성'과 다양한 골목들의 '보편성'과 좁은 곳을 파고드는 '탐구성'의 이미지입니다. 폭이 있는 도로를 구태여 한 곳으로 몰아 잘라버릴 정도로 감독은 좁고 깊은 길을 집요하게 묘사합니다. 한 일본인이 골목길을 걷습니다. 길가에 앉은 할머니가 엄한 외국인을 보며 다른 사람을 찾는 것은 이 인물에게 겉으로 보이는 모습 외에 다른 함의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길을 걷다 말고 공사장의 구멍을 들여다보는 장면 역시 이 인물이 무언가 혹은 누군가의 속을 들여다보게 될 인물임을 암시합니다. 한예리입니다. 레슨을 진행하는 교수가 연기하는 동안 그녀는 거울을 등지고 앉아 있습니다. 거울은 ..

Film/Romance 2021.06.15

대종상스러운 _ 불륜, 김준성 감독

# 0. 제50회 대종상 단편영화제 대상 수상작입니다. '김준성' 감독, 『불륜 :: Unlawful Love』입니다. # 1. 드라마 단편선을 보는 것만 같은 익숙하고 안정적인 구성입니다. 노년의 삶이라는 인본주의적 아이템과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의 정서와 그 속에서 발견하게 될 보수적 가치들을 곧게 묘사합니다. 감독의 연출보다는 배우들의 연기가 작품을 이끌어 나갑니다. 특히, 배우 '신구' 선생과 '김지영' 선생의 연기는 언제나처럼 탁월합니다. '노년'하면 떠올릴 법한 , , , , , 등의 부정적 이미지들을 라디오 따위의 보편적이고 직관적인 아이템들로 연결지어 영화가 전개되는 공간 전체를 주제의식으로 감싸 안습니다. 주·조연 가릴 것 없이 모두 선명한 만화적 캐릭터로 묘사해 남녀노소 편안하게..

Film/Romance 2021.05.22

슬랩스틱 로맨스 _ 페어리, 도미니크 아벨 감독

# 0. 이곳은 상상想像과 수사修辭가 현실이 된 요정의 나라. 도미니크 아벨, 피오나 고든 부부에게 사랑은 그런 곳입니다. '도미니크 아벨' 감독, 『페어리 :: La fée』입니다. # 1. 지루한 일상은 내달리는 자전거와 반복되는 티브이 시청으로 구체화됩니다. 손님에게 무관심한 돔의 태도는 가방 안에 숨겨둔 강아지 미미를 알아채지 못하는 모습으로 과장됩니다. 요정 같은 환상적인 사랑과의 첫 만남은 직접 자신을 요정이라 소개한 후 고장 난 엘리베이터를 고치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그녀를 처음 만난 순간의 심드렁한 마음은 연출된 퉁명스러움으로. 돌이켜보면 기적 같았던 우연은 실제 비현실적인 기적으로 표현됩니다. 나를 살려준 그녀의 손길은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부드러웠기에 실제 피오나는 돔의 위에서 춤을..

Film/Romance 2021.03.29

2학기에서 _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 이와이 슌지 감독

# 0. 쏘아 올린 불꽃을 옆에서 보면 둥글까요, 납작할까요. 불꽃놀이는 어디서 보아야 가장 아름다울까요. '이와이 슌지'는 왜 이 질문을 관객들에게 건넨 걸까요. '이와이 슌지' 감독,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 :: 打ち上げ花火、下から見るか?横から見るか?』입니다. # 1. 오래된 브라운관 테레비. 촌스럽고 과장된 선전. 잡동사니가 가득한 문방구와, 새빨간 낡은 운동화. 친구 집에서 가지고 놀았던 게임기. 슈퍼마리오. 매주 목이 빠져라 기다렸던 슬램덩크의 신간. 친구들과 하루 종일 뛰놀아도 지친 줄 모르던 깡마른 꼬꼬마 시절의 나, 그리고 우리. # 2. 무더운 여름. 온종일 귓가에 맴도는 매미소리. 8월이면 어김없이 열리던 마을 불꽃축제. 그때만 맛볼 수 있었던 달콤한 솜사탕과 짭..

Film/Romance 2021.01.10

달을 두고 맹세하지 말아요 _ 애수, 머빈 르로이 감독

# 0. 1940년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입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의 서사 구조를 가져와 세계 대전 전후의 영국을 배경으로 변주한 후 '비비안 리'의 미모와 '로버트 테일러'의 잘생김을 끼얹고 워털루 브릿지라는 공간으로 구체화된 쓸쓸한 서정성으로 마무리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네요. '머빈 르로이' 감독, 『애수 :: Waterloo Bridge』입니다. # 1. 첫눈에 사랑에 빠진 두 선남선녀가 등장합니다. 두 사람의 순수하고 고결한 사랑은, 앙숙인 몬테규-캐퓰렛 가문 간의 갈등이나, 영독 전쟁 따위의 저항하기 버거운 외부 요인에 의해 방해받게 됩니다. 달빛 창가에서의 세레나데나, 비 오는 날의 청혼과 같은, 짧지만 아름다운 데이트와 약속을 나눕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결투나..

Film/Romance 2020.10.08

캐스팅이 80% _ 시시콜콜한 이야기, 조용익 감독

# 0. 장르물의 성패는 대부분 감독의 역량에 의해 좌우되곤 합니다만, 단 하나. 로맨스물 만큼은 감독보다 배우의 개인기에 의해 성패가 결정되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그 좋은 예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네요. '조용익' 감독, 『시시콜콜한 이야기 :: Trivial Matters』입니다. # 1. 분명 이 영화는 어설픕니다. 평범한 젊은 남녀가 썸을 타는 동안의 말랑말랑한 감수성을 다루는 영화인데 정작 두 주인공의 일상성과 균형이 모두 무너져 있거든요. # 2. '엄태구'의 '도환'은 찐따입니다. 오래 전의 내가 겹쳐 보이는 것만 같은 자연스러움과 민망함이 전달되어야 할 보편적 캐릭터 표현 대신 나와 아무 상관없는 '도환'만의 찌찔함이 묘사됩니다. 인물을 둘러싼 곁가지 설정들 대부분 명확한 계획하에 배치되..

Film/Romance 2020.09.27

해체주의자의 하이퍼리얼리즘 _ 러브, 가스파 노에 감독

# 0. 인간의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싶었던 양철 나무꾼은 도로시를 죽이고 그녀의 가슴을 열어 선홍빛 심장을 손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힘들게 얻은 소녀의 심장은 그의 바람과 달리 차갑게 식고 말았답니다. '가스파 노에' 감독, 『러브 :: LOVE』입니다. # 1. 사랑입니다. 사랑을 구성하는 모든 감수성입니다. 모든 것들을 극단적인 스타일로 전시합니다. 열정과, 질투와, 설렘과, 일탈과, 욕망과, 욕구와, 환상과, 기대와, 환희와, 실증과, 후회와, 안정과, 인정과, 본능. 그리고 이들 모두를 압도하는 강력하고 파격적인 성애性愛입니다. 수집은 아닙니다. 해체에 가깝습니다. 사랑이라는 선망의 대상을 과격하게 포획한 후 해체해 그 안을 들여다보는 듯한 영화입니다. 감독은 해체된 감수성의 편린을 강박적으로 ..

Film/Romance 2020.08.20

장미빛 절망 _ 카이로의 붉은 장미, 우디 앨런 감독

# 0.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사탕을 슬쩍 보여준 후 영원히 그 사탕을 다시 맛볼 수 없다는 걸 증명합니다. 사탕이 달콤하면 달콤할수록, 1920년의 파리가 낭만적이면 낭만적일수록, 스크린을 탈출한 모험가와의 데이트가 황홀하면 황홀할수록 절망감은 그에 정비례해 커져갑니다. 완벽한 사랑을 꿈꾸는 소년과 소녀들에게 우디 앨런의 붉은 장미는 제이슨의 마체테만큼이나 가혹합니다. '우디 앨런' 감독, 『카이로의 붉은 장미 :: The Purple Rose Of Cairo』입니다. # 1. 2012년작 『미드나잇 인 파리』의 기시감을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영화입니다. 이를테면 『미드나잇 인 카이로』랄까요. 물론 연대를 생각하면 이 작품이 원조, 『미드나잇 인 파리』가 계승작이라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겠습니다만 지금..

Film/Romance 2020.08.10

그렇게 말랑하진 않았어 _ 무정, 정민지 / 조서정 / 최선민 / 최효정 감독

# 0. 저도 이별이란 걸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진짠데요. 아, 안 믿네. '정민지', '조서정', '최선민', '최효정' 감독, 『무정 :: Unfeeling 』입니다. # 1.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 남자가 헤어진 연인과의 추억이 깃든 물건들과 그 물건들에 겹쳐진 미련을 담아 버려 내는 순간을 그린 4분짜리 짧은 단편입니다. 만, 글쎄요. 영화를 본 후의 감상을 솔직히 말하자면 딱히 감흥은 없더군요. 아이템과 그림체만 존재할 뿐 감독이 포착한 세밀한 정서는 사실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별 직후의 감수성이라는 게 영화가 그리는 것처럼 그렇게 말랑말랑하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 2. 오랜 연애 후 이별을 하게 되면 "온 세상이 너였다"라는 말이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대단히 노골적인 직설이었..

Film/Romance 2020.07.04

Miluju tebe _ 원스, 존 카니 감독

# 0. 무명 뮤지션의 버스킹은 생각만큼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동시에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낭만으로 가득하기도 하죠.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들이 삶을 통채로 걸어 음악을 하는 이유와, 외로운 사람들이 열렬히 사랑을 갈구하는 이유를 함께 느끼게 하는 영화입니다. 뻔뻔한 소매치기와 고장 난 청소기와 관절염에 자살해버린 아버지와 악기상에서 치는 피아노 위로 아일리시 모던 락에 담긴 사랑이 울려 퍼집니다. '존 카니' 감독, 『원스 :: ONCE』입니다. # 1. 영화는 비어 있습니다. 의도된 공간을 창조하기 위해 재구성한 풍경들, 이를테면 음악을 연주하는 순간마다 등장하는 연출이 마련해준 가상의 무대 따위는 없습니다. 진행을 위해 필요한 사람들과 필요한 조건들이 동원된다던지 하는 등의 계획된 인과 역..

Film/Romance 2020.06.06

비처럼 음악처럼 _ 쉘부르의 우산, 자끄 드미 감독

# 0. 대화를 포함한 극의 전반을 음악으로 구성하는 오페라의 매력과, 노래하는 동안의 캐릭터와 연기를 북돋우는 뮤지컬의 매력과, 연출과 편집이 적극적으로 극에 개입하는 영화의 매력을 환상적으로 배합해 낸 작품입니다.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샹송과 황홀하고 매혹적인 색감이 비가 되어 관객을 사랑으로 흠뻑 적십니다. '자끄 드미' 감독, 『쉘부르의 우산 :: Les Parapluies De Cherbourg』입니다. # 1.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항구도시 '쉘부르'에서 엄마와 함께 우산가게를 운영하는 '쥬느뷔에브'와 자동차 정비공 '기이'. 두 젊은 연인의 열렬한 사랑이 알제리 전쟁으로 인해 어긋나게 되는 과정과 그 후를 그린 비극적 멜로 영화입니다. 역사적 사건이라는 거대한 풍파에 떠밀린 개인의 비극이라는..

Film/Romance 2020.05.18

내 실수였어 _ 넌 실수였어, 타일러 스핀델 감독

# 0. 개인적으로 근래 본 모든 영화 중 가장 적절한 제목의 영화라는 생각입니다. 이 영화에는 아주 사소하고 귀여운 '실수'들이 몇몇 있기 때문이죠. '타일러 스핀델' 감독, 『넌 실수였어 :: The Wrong Missy』입니다. # 1. 첫 번째 실수. 로맨틱 코미디의 여주인공 캐릭터가 비호감입니다. 조금 독특한 성격 탓에 평소엔 그닥 주목받지 못하지만 자세히 보면 예쁘고 오래 보면 사랑스러운 그런 풀꽃 같은 여자... 가 아니라 '미시' 얜 그냥 비호감입니다. 아니, 비호감이라는 말도 순화된 표현이구요. 역겹다는 게 더 정확할 지경입니다. # 2. 두 번째 실수. 로맨틱 코미디의 남주인공 캐릭터가 비호감입니다. 주인공이 둘인데 둘 다 비호감이라는 거죠. 내일모레 환갑인 64년생 할아재를 데려다 섹..

Film/Romance 2020.05.17

무제 _ 아무르, 미카엘 하네케 감독

# 0. 굳게 잠긴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서는 저택. 깊은 방 침대 위 곱게 눈을 감은 노년의 여인. 누가 놓았는지는 몰라도 사랑이 가득 담긴 것만은 확실한 꽃잎들과, 무언가가 자유로이 날아간 것만 같은 열린 창. 사랑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AMORE. 영면에 든 노인과, 그녀와 마지막을 함께 했을 누군가에게 보내는 듯한 청중의 긴 박수소리. 일련의 오프닝 시퀀스는 사실 이 작품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후의 서사는 여인이 마지막으로 건넜을 켜켜이 겹쳐진 시간들과, 그녀를 마지막까지 사랑한 누군가들과, 이들의 여정에 존중의 박수를 보내는 이유에 대한 각주라 할 수 있죠. '미카엘 하네케' 감독, 『아무르 :: Amour』입니다. # 1. 깊고 좁은 복도를 걸어 들어가는 노부부. 잘 들리지도 않는 ..

Film/Romance 2020.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