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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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릴러 152

그러지 않았어야 했다 _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

# 0. 자신만만하지 않았어야 했다. 박수받지 않았어야 했다. 로맨틱하지 않았어야 했다.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 Tinker Tailor Soldier Spy』입니다. # 1. 스마일리는 자신만만하지 않았어야 했다. 적어도 결말에서 박수받진 않았어야 했다. 모든 면에서 안티-제임스 본드적인 첩보 영화 는, 알 수 없는 시대 속에서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개인의 무력함을 그린 시나리오이기 때문이다. 선과 악, 피와 아가 명확한 시절은 2차 대전이 막을 내리며 끝났다. 1973년, 냉전은 모두가 모두를 신용할 수 없고 모두가 모두에게 기망할 수 있는 위선의 시대, 도덕적 모호성과 냉소주의의 시대다. 영국에게 미국은 겉보기엔 동맹이지만 자신들의 ..

선은 겸손해야 한다 _ 더 이퀄라이저 3, 안톤 후쿠아 감독

# 0. 자신만만한 선은 이미 선이 아니다. 안톤 후쿠아 감독,『더 이퀄라이저 3 :: The Equalizer 3』입니다. # 1. 의 글에서 주인공은 세상의 부조리를 측정하는 추와 같다 했지만, 그럼에도 영화는 철저히 주인공 시점에서 끌고 나가는 원맨쇼이고 따라서 그의 인간적 고뇌가 중요하지 않을 수는 없다. 첫 작에서 맥콜의 고뇌란 '외면할 수 없는 부정을 상대로 납득가능한 선은 실현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자연스럽게 속편은 전작의 '타협된 선'에 의문을 던진다. 간략히 하자면 2편의 주제의식은 '그 납득가능한 대안은 누가 결정하는가'라는 회의다. 메인 빌런인 데이브는 맥콜의 조작된 죽음과 관련된 사건으로 자리를 잃어야 했던 인물로, 그의 피해는 맥콜의 '어쩔 수 없는 사정..

Film/Action 2025.06.20

양팔저울 실험 _ 더 이퀄라이저, 안톤 후쿠아 감독

# 0. 비어있는 오른쪽 접시에 덴젤 워싱턴의 걸음과 눈빛을 무겁게 올린다. 안톤 후쿠아 감독,『더 이퀄라이저 :: The Equalizer』입니다. # 1. 양팔저울이 있다. 오른쪽 접시는 비어있고, 왼쪽 접시는 어두운 천으로 덮여 있어 접시에 올려진 물건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저울이 왼쪽으로 크게 기울어 있는 것으로 보아 왼쪽 접시에 무거운 것이 있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실험자는 빈 오른쪽 접시 위에 추를 올리기 시작한다. 만약 무척이나 무거운 추를 올린 후에야 양팔 저울이 평형을 이루었다면, 우리는 왼쪽 접시에 무엇이 있는지 여전히 알 수 없을지라도 그것이 매우 무거운 것임은 안다. 먼치킨 주인공의 액션 영화다. 미스터리한 배경의 퇴역 요원이 벌이는 액션활극이라는 면에..

Film/Action 2025.06.12

메리의 방과 오만의 성 _ 엑스 마키나, 알렉스 가랜드 감독

# 0. 그가 궁금한 그녀는 메리의 방을 나섰고, 그녀가 필요한 그는 오만의 성에 갇혔다. 알렉스 가랜드 감독,『엑스 마키나 :: Ex Machina』입니다. # 1. 인상적인 SF 영화는 끊임없는 상호 테스트와 기만으로 점철된다. 누가 진정으로 인간적인지 누가 진실을 말하고 누가 조작하는지 경계는 점점 모호해진다. 칼렙, 에이바, 네이든 세 인물 모두 각자의 의도를 숨기고 있고, 과정에서 인간 본성의 복잡성, 신뢰, 욕망 등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칼렙은 집요하게 에이바의 의식을 확인하려 하지만, 에이바는 정전 중 칼렙에게 네이든을 믿지 말라 경고하며 그의 의도를 역으로 의심하게 만든다. 네이든은 데이터를 통해 칼렙의 취향을 파악하고, 에이바는 그의 마음에 들도록 자신의 외모를 디자..

Film/SF & Fantasy 2025.05.30

한탕 주의 _ 유마 카운티의 끝에서, 프란시스 갈루피 감독

# 0. 죽은 사람들의 한탕주의(主義)와 살아남은 사람의 한탕 주의(注意) 프란시스 갈루피 감독,『유마 카운티의 끝에서 :: The Last Stop in Yuma County』입니다. # 1. 영화는 시작부터 서부극의 문법에 충실하다. 벌판 한가운데 외딴 건물은 서부극 특유의 황량함을 세팅한다. 주요 무대인 레스토랑은 살롱을 계승한 공간이다. 둔탁한 미닫이문이 열리고 문 위에 달린 종이 울릴 때면 마치 총잡이가 살롱 문을 박차고 들어서는 듯한 인상을 주는 데, 그럴 때마다 미리 자리한 손님들이 외부인을 경계하는 구도는 서부극의 전형적인 긴장감을 정석적으로 조성한다. 바 형태의 카운터를 중심으로 몇몇의 인물들이 대치하거나 흩어지는 활용 또한 서부극의 공간 연출을 답습하는 것이다. 테이..

도이치 메트로배니아 _ 엑스테리토리얼, 크리스찬 주버트 감독

# 0. 독일 공무원 중에 가장 서윗한 척하는 더러운 콧수염 크리스찬 주버트 감독,『엑스테리토리얼 :: Exterritorial』입니다. # 1. 영사관에서 벌어진 전직 군인 엄마의 아들 실종 사건은 익숙한 스릴러의 틀 속에서 굴러가는 듯 보인다. 모성으로 무장한 강인한 여성 주인공이 폐쇄된 공간에서 지지고 볶는 동안 겸사겸사 거대한 음모까지 파헤친다는 시놉은 기시감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하지만 실제 영화를 보다 보면 의외로 액션 스릴러 장르에 대한 합의된 기대들이 반복적으로 엇나간다. 그것도 생각보다 자주 말이다. 전통적인 서사 구조로 볼 때, 인물의 갑작스러운 행동 변화나 일부 설정에서의 비약, 플롯 진행을 위해 도구적으로 활용되는 캐릭터 배치 따위는 비판의 소지가 있고, 실제로도..

Film/Action 2025.05.04

고통스러운 진실, 절망스러운 성찰 _ 뉴 오더, 미셸 프랑코 감독

# 0. 불편한 진실과 비관적 성찰을 집요하게 추궁하는 광기 어린 야심 미셸 프랑코 감독,『뉴 오더 :: New Order』입니다. # 1. 논쟁적인 영화는 시작부터 관객을 몰아세운다. 형이상학적인 미술과 헐벗은 여성의 오프닝을 지나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세계, 호화로운 상류층 결혼식과 그 너머 폭력이 뒤섞여 제시된다. 깨끗하고 풍요로운 저택은 견고한 성처럼 보이지만 이미 위태롭다. 직관적으로도 불안한 녹색의 침입이다. 수도꼭지에서는 녹색 물이 흘러나오고 페인트를 뒤집어쓴 손님이 도착하는 등 외부의 오염과 분노가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스며들고 있음이 상징적으로 연출된다. 감독은 파티에 모인 상류층 사람들의 이미지를 통해 구체제를 성실히 묘사한다. 여성들의 화려한 원색 드레스를 통해..

브레히트와 세 번의 기적 _ 더 원더, 세바스찬 렐리오 감독

# 0.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세바스찬 렐리오 감독,『더 원더 :: The Wonder』입니다. # 1. 기나긴 역사 속에서 운명은 수차례 인간을 짓밟았고, 19세기 초 아일랜드에 들이닥친 대기근은 유독 가혹한 것으로 기록된다. 터무니없는 결핍에 내동댕이쳐진 인간은 합리적인 대응 따위로는 벗어날 수 없고, 한계에 다다른 인간은 필연적으로 이 모든 위기를 단숨에 해결해 줄 기적에 종착한다. 따라서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수많은 이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기적은 보통 아름다운 것으로, 환상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그것은 그르지 않다.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로 인해 진보된 숱한 역사가 증명함이다. 다만 기적의 대상이 가뭄을..

장르는 퍼즐 _ 머시니스트, 브래드 앤더슨 감독

# 0. ⓧ 버튼을 눌러서 조의를 표하십시오. 브래드 앤더슨 감독,『머시니스트 :: The Machinist』입니다. # 1. 위키는 작품을 스릴러로 소개하고 있고 대부분의 관객 역시 그러하겠으나, 개인적으론 달리 해석한다. 이 영화의 메인 장르는 '퍼즐'이고 그 뒤로 호러, 액션, 어드벤처가 적절히 혼합된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이렇게 들으면 번뜩 거부감이 들 것이다. '미스터리도 아니고 퍼즐은 뭐래. 무슨 게임도 아니고...' 그렇다. 필자는 크리스찬 베일이 살 빼느라 개고생 한 것으로 유명해진 영화를, 숄더뷰로 진행되는 3인칭 호러 퍼즐 게임의 시네마틱 모음이라 주장하려는 것이다. 사실 영화의 내러티브는 평이하다. 자수하고 광명 찾자가 전부다. 되려 작품의 매력은 공포의 주체와 ..

아포페니아의 아포페니아 _ 계시록, 연상호 감독

# 0. 아포페니아를 지적하고 싶었던 교수님의 아포페니아 연상호 감독,『계시록 :: Revelations』입니다. # 1. 아포페니아를 탐구하는 영화가 아니다. 정확히는 '세상 사람들이 아포페니아와 확증편향에 빠져 있다'라는 감독의 진단을 관철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영화다. 목사 성민찬의 캐릭터가 어느 정도 자리 잡히자마자 이야기의 주도권이 형사 이연희에게 홀랑 넘어가버리는 이유다. 연희의 환각과 환청이 민찬과 본질을 공유한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다시 권양래의 실체로 이야기의 흐름이 넘어가버리는 이유다. 대부분의 내러티브는 사람들을 ‘묘사’하거나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수집’함으로써 ‘증명’하는 방향으로 짜여있다. 목사 정국한과 아영의 부모 등 보조적 캐릭터를 배치해 볼륨을 보강..

그렇게 어른이 된다 _ 보이, 호르헤 M. 폰타나 감독

# 0. 그날 이후, 내가 알던 모든 것이 달라졌다 호르헤 M. 폰타나 감독,『보이 :: Boi』입니다. # 1. 이름은 보이. 마지막 스펠링은 i다. 짓궂은 농담에 익숙하다는 듯 y가 아니라 답하지만 사실 그렇기에 y다. 누가 보더라도 보이가 아니라면 질문받을 일도 답할 필요도 없다. 영화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다시피 거대한 분기를 눈앞에 둔 소년의 성장 영화다. 전반부는 인물의 미숙함과 미숙한 존재가 느낄 당혹스러움을 다방면에서 묘사하고 있고, 후반부는 방황하던 소년이 몇몇의 타협과 결심 끝에 자신의 자아를 조금씩 되찾아가는 과정으로 귀결된다. 생소한 스페인 영화는 다각도에 걸친 메타포를 과격한 내러티브에 얹어 불친절하게 묘사하지만, 로네츠의 명곡을 번안한 를 비롯한 ost, 고..

게으르고 지루하다 _ 서브스턴스, 코랄리 파르자 감독

# 0. 중독된 것은 미모도 인기도 파괴도 아닌 지적인 게으름 코랄리 파르자 감독,『서브스턴스 :: The Substance』입니다. # 1. 푸른색 배경에 계란 하나. 노른자에 주사를 꽂자 분열하더니 둘로 나뉜다. 나란히 놓인 노른자 두 개와 흰자의 실루엣은 무언가의 얼굴처럼 보이는데, 그것의 정체는 알 수 없으나 은연중 불쾌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문제작 서브스턴스의 오프닝이다. 영화는 도입에서 경고하듯 강렬한 이미지를 난사하는 방식으로 일관한다. 비슷한 주제의식을 미리 다뤘던 단편 와는 썩 대조적인 시도다. 쏟아지는 이미지 속에서 함의를 찾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비단 디스플레이뿐 아니라 모든 프레임들, 이를테면 광고판이나, 액자, 창문, 통로, 주요하게는 거울까지 모두 각..

Film/Horror 2025.03.08

범죄의 재구성, 보급형 _ 킬 미 쓰리 타임즈, 크리브 스텐더스 감독

# 0. 이 동네에서 정신병자 집회라도 있냐? 크리브 스텐더스 감독,『킬 미 쓰리 타임즈 :: Kill Me Three Times』입니다. # 1. 코미디의 심벌이 되어버린 몇몇의 배우가 총 들고 멋있는 척하고 있다면 어지간해선 밥값은 한다. 미모의 테레사 팔머와 앨리스 브라가 사이에 서 있는 미어캣 닮은 저 남자처럼 말이다. 검정 슈트 빼입고 겁나 큰 스코프 달린 저격총 들고 선 남자, 누가 봐도 스티커로 붙인 듯 어울리지 않는 콧수염의 사이먼 페그가 세상 모든 미인을 10분 만에 꼬실 수 있다는 듯 치명적인 표정으로 카메라를 직시하고 있다? 오케이, 일단 합격. 급전이 필요한 도박쟁이 남편과 보험 사기가 천직인 사이코 패스 아내가 등장한다. 은행보다 금고가 편한 분조장 의처증 남편..

Film/Comedy 2025.03.04

부끄부끄 _ 오퍼나지 비밀의 계단,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감독

# 0. 부끄부끄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감독,『오퍼나지 비밀의 계단 :: The Orphanage』입니다. # 1. 물론 제작자의 명성이 성공을 보장하진 않는다. 오히려 노련한 관객들은 수상할 정도로 스타 제작자의 이름값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에 강한 경계심을 내비칠 정도다. 그럼에도 몇몇의 작품들은 왜 저 양반이 이 영화를 선택한 건지 알겠다 싶기도 한데, 스페인 감독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의 데뷔작은 좋은 예라 할 수 있겠다. 고아원(Orphanage)에서 펼쳐지는 잔혹 동화를 특유의 서정성으로 엮어낸 작품이다.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린 아들을 찾아 헤매는 간절한 어머니의 이야기로, 나름 호러로 분류됨에도 불구하고 휘발적인 몇몇의 효과에 의존하는 대신 진중하게 ..

Film/Horror 2025.02.20

흠... 그정둔가 _ 이퀼리브리엄, 커트 위머 감독

# 0. 배꼽이 큰 건지, 배가 작은 건지. 커트 위머 감독,『이퀼리브리엄 :: Equilibrium』입니다. # 1. 망한 영화라 해야 할지 성공한 영화라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배(영화적 완성도)보다 배꼽(건 카타 액션)이 크다는 것에는 호평하는 사람과 혹평하는 사람 사이에 합의가 있는 듯 하나, 그것이 배가 지나치게 작아서인지 배꼽이 크고 뛰어나서인지는 갑론을박이 있다. 호평하는 사람들은 당시 범람하던 매트릭스의 마이너 카피와 반대되는 방향의 액션 표현을 선보인 것에 점수를 주는 모양새고, 혹평하는 사람들은 어쨌든 박약한 이야기의 완성도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작품의 주제의식은 당시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제법 낡고, 구현 역시 태만하다. 단단히 망한 근미래를 이야기..

Film/Action 2025.01.04

니들은 이런 거 배우지 마라 _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 스테파노 솔리마 감독

# 0. (담배 한 개비를 꼬나물며) 스테파노 솔리마 감독,『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 :: Sicario Day of the Soldado』입니다. # 1. 속편을 만든다는 건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까다로운 일인 듯하다. 전작의 이야기, 설정, 복선, 주제의식, 연출 방향, 캐릭터 해석과의 연결성은 익숙하면서도 새롭다는 이율배반적인 이야기를 꾸려야 하는 사람들에게 골치 아픈 족쇄다. 시리즈 이름에 새겨진 관객이 기대하는 무언가가 먼저 결정되어 있다는 것도 운신의 폭을 크게 제약한다. 혹여 특정한 캐릭터와 관객 사이에 애착관계라도 형성되었다면 큰일이다. 죽일 수도 없고 살릴 수도 없고 배제하면 배제하는 대로 내세우면 내세우는 대로 피곤한 뒷말이 반드시 나온다. 처음부터 속편을 염두..

Film/Action 2024.12.22

잊음으로 완성되는 _ 더 문, 덩컨 존스 감독

# 0. 잊음으로 완성되는 소모되는 가장의 서글픔 덩컨 존스 감독,『더 문 :: Moon』입니다. # 1.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처럼 가장의 삶을 은유한 휴머니즘 드라마다. 클론의 사용기간 3년은 일생을 축약하는 것으로도, 쏜살처럼 지나버린 듯한 당사자의 인식을 표현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소소한 이목을 끌었던 기지의 이름 [사랑(SARANG)]은 자신의 헌신이 사랑의 또 다른 방식이라 되뇌는 간절함이다. 그것을 굳이 생소한 한국어로 적은 건 익숙한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쑥스러움을 은유한다. 달리는 러닝머신은 지루한 일상의 반복, 같은 자리를 맴도는 무력감, 내달리고 싶은 무의식적 욕망을 두루 은유하는 친근한 메타포다. 나무로 조각한 모형은 고단함 끝에 보상이 있으리라는 기대다...

Film/SF & Fantasy 2024.12.18

원리를 찾아라 _ 레이어 레이크, 매튜 본 감독

# 0. 넘는 것과 넘겨지는 것의 차이 매튜 본 감독,『레이어 케이크 :: Layer Cake』입니다. # 1. 마약과 혈흔이 낭자한 누아르의 제목은 레이어 케이크. 여러 겹의 시트 사이에 크림이나 잼을 쌓은 익숙한 디저트다. 영화는 원작자 J. J. 코널리가 이름 붙인 것처럼, 감독이 제작자로 참여했던 가이 리치의 초기작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복잡 다난한 레이어가 켜켜이 쌓여 있는 듯하다. 범죄 조직의 내부 구조가 그러하고, 여타 조직들 간의 관계도 그러하다. 사건은 각기 다른 파편화된 소동의 적층으로 연계되어 있고, 플롯은 그것을 다시 최대한 얇게 저며 쌓아 나가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감독은 주인공의 이름을 숨긴다. 크레디트에조차 XXXX로 표기하는 건 명백한 의도다. 통상적인 영화..

뉴식이 두마리 치킨 _ 루프 트랙, 토마스 세인즈버리 감독

# 0. 뉴질랜드산 특대사이즈 오골계 2마리 28000원. 계란 추가(+3) 토마스 세인즈버리 감독,『루프 트랙 :: Loop Track』입니다. # 1. 태만하게 못 만든 호러 영화는 짜증스럽지만, 열심히 못 만든 호러는 의외로 재미있다. 특유의 진지함이 나름 귀엽기도 하고, 열심히 해 보려는 과정에서 벌어진 황당한 부분들이 되려 코믹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생소한 뉴질랜드산 크리처 영화는 문자 그대로 열심히 못 만든 호러다. 대체 뭘 했길래 제작하는 데 7년씩이나 걸린 건지 알 수 없지만, 비장의 무기였을 크리처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쉴 새 없이 웃음이 터져 나온다. 만약 이 영화를 보는 모습을 누군가 몰래 지켜봤다면, (2024)을 볼 때만큼이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발견했을지도 모른..

Film/Horror 2024.12.04

악마의 저주 _ 레디 오어 낫, 맷 베티넬리-올핀 / 타일러 질레트 감독

# 0. 익숙한 통속극을 경쾌한 슬래셔 코미디로 전환하는 능숙한 솜씨 맷 베티넬리-올핀 / 타일러 질레트 감독,『레디 오어 낫 :: Ready or Not』입니다. # 1. 르 도마스 일가는 엘리트 가문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을 법한 스테레오 타입의 불안과 불만을 대변한다. 각각의 스트레스는 서로에 대한 미움으로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파국 속에서도 그레이스에 의해 살해된 사람이 없는 이유다. 그레이스의 엘리펀트건이 발사되지 않는 장면은 클리셰를 비트는 장르적 장치임과 동시에, 가족의 파멸과 그녀가 무관하다는 것을 확인한다. 비밀스러운 르 베일에 의한 것도 아니다. 토니는 전통과 계약이 중요한 듯 말하지만 필요하다면 cctv를 켜고, 규칙 밖의 피고용인을 동원하는 데, 모두 자신들을 ..

Film/Horror 2024.11.20

가족 모임은 집에서 _ 트랩, M. 나이트 샤말란 감독

# 0. 때가 되긴 했다. M. 나이트 샤말란 감독,『트랩 :: Trap』입니다. # 1. 원래 샤말란의 영화가 그렇다. 참신한 판타지 아이디어와 과격한 반전 플롯 아래로 강력한 가족주의 드라마를 깔아 두는 것이다. 걸작 (1999)에서부터 망작 (2010)에 이르기까지 어긋나는 법이 없다. 문제는 아이디어와 드라마를 접합하는 퀄리티에 기복이 심하다는 점이다. 더 큰 문제는 마음처럼 풀리지 않을 때면 어린아이처럼 되지도 않는 억지까지 부려댄다는 점이다. 부활을 알렸던 (2015)로부터 얼추 10년. 쿨타임이 돌 때가 되긴 했다. 안 좋은 의미에서의 샤말란 말이다. (2016), (2019), (2021), (2023)까지 챙기는 시늉이라도 했던 최소한의 완성도는 신작과 함께 장렬히 무..

어쩔 수 없는 악 _ 필스, 존 S. 베어드 감독

# 0. 어쩔 수 없는 악은 어찌해야 하나 존 S. 베어드 감독,『필스 :: Filth』입니다. # 1. 으로 익히 알려진 스코티시 소설가 어빈 웰시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익숙한 부패 경찰의 범죄 스릴러 위로 양극성장애에 시달리는 주인공의 내면을 심도 있게 그린다. 1인극에 준할 정도로 작품을 혼자 견인하게 되는 주인공 브루스 로버트슨은 제임스 맥어보이가 연기했다. (2017) 못지않은 폭발력으로 표현된 정신적 문제에 시달리는 경찰의 이야기는, 현실과 착란과 윤리의 경계를 넘나들며 관객에게 흥미로움과 불쾌감을 동시에 제공한다. 다소 어지러운 표현에도 불구하고 플롯의 방향은 간명하다. 주인공의 내면을 파고들며 입체성을 보강해 악행의 원리에 다가가는 것이다. 캐릭터라는 원인을 먼저..

너 홀로 집에 _ 맨 인 더 다크, 페드 알바레즈 감독

# 0. 더 이상 삶이 편리하지 않은 너 홀로 집에        페드 알바레즈 감독,『맨 인 더 다크 :: Don't Breathe』입니다.     # 1. 집주인과 침입자의 대치는 생각보다 흔한 플롯이나, 그중에서도 특히 (1990)의 영향을 크게 받은 듯하다. 고전 명작 를 리메이크한 바 있는 페드 알바레즈 감독의 영화는, 전반적으로 나 홀로 집에로부터 큰 틀을 가져오되 세부 설정을 모조리 뒤집어 놓은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의 핵심 재미가 인물의 관계보다 제한된 조건을 활용한 기믹인 것은 더없이 좋은 증거다. 기믹에 걸려 넘어지는 타인을 보면 코미디고, 기믹에 걸려 넘어지는 게 내가 되면 호러일 뿐이다. 어린아이 혼자 있는 집에 어른이 침입했던 것은 노인의 집에 미성숙한 소년이 침입하는 것으로 뒤바..

Film/Horror 2024.10.22

길 잃은 남자 _ 고립된 남자, 바실리스 카추피스 감독

# 0. 그 사람이 바로 나예요. 바실리스 카추피스 감독,『고립된 남자 :: Inside』입니다. # 1. 고백하자면 나는 영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보는 동안 적어도 두어 번 이상 길을 잃었다. 이후의 글은 그 과정만을 간신히 옮긴 것이다. 자, 일단 스릴러는 아니다. 주인공은 처음 보는 늙은 도둑이고, 그의 위기를 걱정해야 할 동인이 없는 상황에서 긴장은 성립할 수가 없다. 호화로운 펜트하우스에 갇혀 말라죽어가는 윌렘 데포를 보며 안타까워할 사람보다는 연기에 감탄할 사람이 훨씬 많을 거라 예상하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실험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작위적 환경과, 감상을 어지럽히는 난해한 암시 탓에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면의 알레고리를 탐색하게 되는 데, 감독은 그 부분에서 ..

Film/Drama 2024.10.14

시점의 전환 _ 밤낚시, 문병곤 감독

# 0. 사물과 생물을 구분 짓던 과거를 지나 마침내 펼쳐진 새로운 미래 문병곤 감독,『밤낚시 :: NIGHT FISHING』입니다. # 1. 전기 털어먹고 다니는 미상의 비행체와, 정체불명의 낚시꾼이 벌이는 하룻밤 사투다. 고작 13분짜리에 손석구를 태운 영화는, 숏폼 트렌드에 발맞춰 멀티플렉스에 정식 상영된 단편으로 이목을 끌었다. cj뿐 아니라 현대자동차와 협업한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염치도 없이 아이오닉 5가 크레디트에 올라가는 게 뻔뻔하긴 하지만,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작위적이지 않게 녹아 있어 광고 영화 특유의 불쾌감은 덜 하다는 것이다. 〈세이프〉(2013) 이후 오랜만에 돌아온 문병곤 감독의 야심은 '시점의 전환을 통한 인식의 확장'이다. 영화는 일관되게 생물과 사물을 ..

Film/Horror 2024.10.06

전갈과 개구리 _ 올드보이, 박찬욱 감독

# 0. 짐승으로 태어나 버린 외로운 존재들 박찬욱 감독,『올드보이 :: Old Boy』입니다. # 1. 박찬욱에게 인간은 이성과 본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외롭고 괴로운 존재다. 이때의 이성이란 논리나 도덕, 문화, 규칙, 격식, 교양 등 인간이 스스로 만든 온갖 규범을 통할한다. 본성은 사랑, 믿음, 증오, 폭력, 모멸, 질투 등 근원을 알 수 없는 마음의 변화를 모두 포괄한다. 인간은 이성을 활용해 본성을 통제함으로써 스스로 동물과 구분되는 특별한 존재라 주장하지만, 박찬욱에게 이는 스스로 고결하다 느끼기 위해 만든 허구적 신화에 불과하다. 팬들에게 흔히 복수 3부작이라 일컬어지는 (2002), (2003), (2005)는 물론 (2009)와 (2016), 최근의 (2018)과 (..

신의 주사위 놀이 _ 똑똑똑, M. 나이트 샤말란 감독

# 0. 뭐시 중헌디 M. 나이트 샤말란 감독,『똑똑똑 :: Knock at the Cabin』입니다. # 1. 언제 봐도 놀라울 정도로 거대한 바티스타와 그의 팔뚝만 한 귀여운 소녀의 만남으로 시작되는 영화, 이다. 영화는 원천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의 떡밥과, 사실상 떡밥의 의인화나 다를 바 없는 인물들을 쉴 새 없이 던진다. 그렇다면 그렇구나 하는 수밖에 없는 일방적인 세계관과, 늘 관객보다 두어 발짝 앞질러가는 불친절한 전개는 언제나와 같은 샤말란이다. 인류의 운명을 거론하는 수상하기 짝이 없는 침입자 무리, 단란한 가족 중 한 명이 희생해야 70억 인류를 살릴 수 있다는 우악스러운 설정, 피해자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 스스로 자해하는 아이러니, 작지만 구체적..

진실함에 대하여 _ 리스본행 야간열차, 빌레 아우구스트 감독

# 0. 진실한 정신과 관계, 그 무한한 가능성을 향한 낭만의 열차 빌레 아우구스트 감독,『리스본행 야간여행 :: Night Train to Lisbon』입니다. # 1. 2013년에 개봉한 미스터리 스릴러 는 파스칼 메르시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감독은 빌레 아우구스트이며, 제레미 아이언스가 주인공을 맡았다. 스위스의 고전문헌학 교수 그레고리우스가 우연히 빨간 코트의 여인을 구한 후, 그녀가 남긴 책 한 권을 계기로 리스본행 열차에 오르며 영화는 시작된다. 코트 호주머니에 들어있던 책 의 저자 아마데우 드 프라두에게 큰 호기심을 느낀 교수는 수업도 내팽개친 채 충동적으로 그의 삶을 추적한다. 저자의 집을 찾은 그레고리우스는 여전히 저택을 지키는 여동생을 시작으로 아마데우의..

이카루스의 거울 _ 리플리스 게임, 릴리아나 카바니 감독

# 0.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릴리아나 카바니 감독,『리플리스 게임 :: Ripley's Game』입니다. # 1.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심리 스릴러다. 맷 데이먼의 (1999)가 알랭 들롱의 (1960)의 그늘에 가려진 수작이라면, 이 작품은 그 그늘에조차 들어가지 못한 비운의 작품이라 할 수 있겠으나, 제법 흥미로운 중년의 톰 리플리를 만날 수 있다는 면에서 일정한 의의가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주연은 존 말코비치가 맡았다. 사근사근한 목소리의 톰 리플리는 50대 중반의 세련된 사기꾼이자 냉혈한 살인마다. 오프닝의 사건을 통해 한몫을 챙긴 톰은 이탈리아 시골에서 은퇴 생활을 즐기는 듯 보이지만 내면엔 갈등과 복잡성이 가득하다. 하이스미스의 원작들이..

패러다임의 탄생 _ 본 슈프리머시, 폴 그린그래스 감독

# 0. 액션은 지금부터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본 슈프리머시 :: The Bourne Supremacy』입니다. # 1. 기본적으론 정체성 갈등을 그린 영화다. 주인공은 사고로 기억을 잃어버린 특수요원으로, '냉혹한 과거의 행적'과 '따뜻한 현재의 윤리' 사이에서의 괴리를 물리적으로 치환한 작품이라 요약해도 무리는 없다. 열감으로 비유하자면 는 차가운 내면과 뜨거운 액션의 결합, 은 뜨거운 내면과 뜨거운 액션의 결합, 은 차가운 내면과 차가운 액션의 결합이라 한다면, 시리즈는 뜨거운 내면과 차가운 액션의 결합이라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액션 어드벤처로서 거대한 지배력을 가진 , 코미디 활극으로서의 를 더하면, 이후 어떤 영화가 나오더라도 이 여섯 시리즈가 그리는 육각형 ..

Film/Action 2024.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