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고향으로 돌아온 그를 본 아이들은 돼지, 붉은 돼지 아저씨라 불렀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붉은 돼지 :: 紅の豚』입니다.
# 1.
잿빛 하늘 아래 전우들은 전부 죽었고, 운이 좋아 살아남은 그는 코를 잃었다.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사라진 흉측한 얼굴. 가실 기미 없는 핏빛 단면을 하고서 고향으로 돌아온 그를 본 동네 아이들은 돼지, 붉은 돼지 아저씨라 불렀다.
# 2.
어느덧 1992년. 1941년 제국주의 끝물에 태어난 그림쟁이, 영원히 하늘을 날 것만 같았던 소년의 나이도 오십을 넘었다. 시간은 벌써 그렇게나 흘러버린 것이다. 전쟁의 위험과 전체주의의 광기를 경고하고(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이별의 두려움과 대화하는 법을 조언하고(이웃집 토토로), 어른이 된다는 것의 고단함을 고백한(마녀 배달부 키키) 그는 점차 자신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느낀다. 가령 전쟁은 여전히 무서운 것임에도 새로운 세대는 그것을 모른다. 납치된 상황에서조차 천진난만한 아이들처럼 말이다. 그 모습이 물가에 내놓은 듯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으나, 이 아이들이 특별히 어리석어서는 아니다. 단지 시대가 변했을 따름이다. 새로운 세대에게 전쟁과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는 노인은 하나의 오락처럼 받아들여진다. 사람과 돈이 판돈으로 걸린 잔인무도한 대회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가 축제인양 즐기는 것처럼, 엄중한 교훈을 이야기하는 자신의 영화를 보고서 재미있다 멋지다 환호하는 관객들처럼 말이다.
쉰 살이 된 미야자키 하야오는 궁핍하고 엄혹했던 과거와 풍요롭고 자유로운 현재, 그 50년의 괴리 가운데에서 갈등한다. 잘린 코를 보고 전쟁보다 돼지를 먼저 떠올리는 시대에 나는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 포르코의 비행정이 고장난다는 것, 특히 그 엔진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오래도록 구현해 온 경험과 교훈이 동력을 다했음을 고백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붉은 돼지를 기점으로 전체주의와 제국주의 테마는 크게 대체된다. 차기작 모노노케 히메는 초기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현대적으로 다시 쓴 것이고, 이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부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모두 전후 세대가 아닌 다음 세대를 위한 이야기들로 대신된다.

# 3.
그래서 넝마가 되어버린 비행정을 과거의 어른 대신 당찬 소녀가 설계한 것이다. 새로운 비행정의 보조석에 기관총 대신 엉덩이가 큰 피오가 타야 했던 이유다. 이전까지의 영화들이 1940년생 미야자키 하야오의 것이었다면, 이후로는 1990년 이후를 살아갈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일 것이기 때문이다. 포르코는 살상의 도구가 아닌 기술적 순수성으로 복원된 엔진을 몰아 혼자 움추러들었던 아지트로 돌아오지만 금세 매복하고 있던 공적에게 붙잡힌다. 과거의 관성과 미련이란 쉬이 뿌리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행히 밀라노에서 자신의 고장을 고쳐 낼 실마리를 찾아 나온 포르코다. 피오의 용기와 설득 덕에 비행정이 파괴되는 것을 면하는 대목의 함의다. 늦은 밤. 총알을 한 알 한 알 고르며 죽은 전우들과의 추억을 되새긴 포르코는 말한다. '좋은 놈들은 다 죽는 거다. 게다가 거긴 지옥일지도 몰라.' 전쟁에 대한 짙은 냉소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그의 무기력을 부정한 피오의 작은 입맞춤, 구원이다.
지나는 포르코가 저주에 걸려 사람에서 돼지가 되었다 말한다. 해당장면에서 포르코는 지나의 호텔에서 저 사진(죽은 전우들과의 사진) 하나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말하고 있으니, 영화의 저주란 죄책감을 동화적으로 은유한 것이라 이해해도 좋다. 좋은 놈들이 다 죽어버린 동안 혼자 살아남은 탐욕적인 나이고, 그 죄스러운 삶이란 술 외엔 딱히 입에 대는 것이 없음에도 배에 살이 뒤룩 뒤룩 찐 돼지 같은 것이다. 결말에서 포르코의 저주는 피오의 입맞춤으로 잠시 벗겨진다. 포르코는 피오로 인해 포기했던 저주를 치유 '받은' 것이다. 도입에서 납치된 어린아이들을 '구원'하던 포르코가 내내 피오에게 위로받고 치유받는다는 것은, 다음 세대에게 자신의 교훈을 전달하는 것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하야오 본인 역시 회복하고 있었음을 담담히 고백한다.

# 4.
물론 일련의 과정이 1940년생 미야자키 하야오를 버린다는 뜻은 아니다. 그의 새로운 비행정은 명백히 과거(밀라노)에서 고쳐온 것이고, 그가 현재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 또한 과거 친구들의 도움과 충고, 배웅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피오의 입맞춤에 잠시 죄책감을 덜 수는 있었지만, 하야오는 며칠이 지나면 어차피 돼지로 돌아온다 회고함으로써 자기 세대의 명약관화한 과거와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어린 피오보다 같은 상처를 가진 지나가 훨씬 잘 어울린다. 상처 투성이 과거에도 분명 의미가 있었으나 포르코는, 하야오는 그것을 반전주의라는 명목하에 일체 외면해 온 인물이고, 아름답고 쓸쓸한 지나는 그가 외면해 온 과거 삶의 가치를 의인화한 존재다. 자신을 사랑하며 기다리던 과거와, 그것을 외면하던 사람이 화해하는 이야기임으로 다분히 자기 성찰적인 영화다. 이전의 그 어떤 명작들보다 자신을 성찰하기에 하야오 본인의 취향이 듬뿍 묻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국주의는 흘러갔을지라도 패권주의는 여전하기에 그것은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인 조종사 커티스는 미국과의 국제 관계를 은유한다. 포르코는 밀라노(과거)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기습을 당하는데 그때의 싸움은 살해를 목적으로 한 전쟁으로 묘사된다. 격추 직후 커티스가 전리품을 챙기는 장면이라거나 풀숲에 몸을 숨긴 포르코는 대단히 현실적이다. 반면 아드리아노(현재)로 돌아온 일본과 미국은 전쟁 대신 경쟁하고 쟁탈 대신 거래한다. 직접 전쟁하진 않는 것 같아 보이지만 돈을 주고 여자를 훔쳐가려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심과, 대통령을 꿈꾸는 할리우드 꼬마 레이거노믹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end.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Netflix, Tving, WatchaPlay, CoupangPlay, Appletv,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 본 블로그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글에서 다루는 작품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댓글, 포스트를 자신의 블로그로 유인하는 데 이용하려는 댓글, 무분별한 맞팔로우 신청 댓글 등은 삭제 후 IP 차단될 수 있습니다.
좋아요, 댓글, 구독
은 블로거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