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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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s in the Attic 868

종의 기원 _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 0. Some of them want to use you,Some of them want to get used by you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 :: Kinds of Kindness』입니다. # 1. 물론 친절 혹은 다정함의 종류라 직역하는 것이 무난하다. 다만 Kind는 때때로 종이라는 의미로도 쓰이기에, 제목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는 친절이라는 종(種, Species)으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호모 코미스(Homo Comis, 친절한 인간)쯤 될까. 현생 인류란 다정함을 정체성으로 하는 유인원이고, 그것이 호모 에렉투스나 호모 사피엔스와 같은 생물학적 분류에 가까운 것이라면, 우리 종의 특성은 유전자 결정적이라 주장한다는 면에서 요르고스..

Film/Comedy 2026.02.10

장르는 은혼 _ 은혼, 후쿠다 유이치 감독

# 0. 조잡한 만화라서 조잡한데... 어찌 조잡하다 생각했느냐 하시면... 후쿠다 유이치 감독,『은혼 :: Gintama』입니다. # 1. 이를테면 진중한 캐릭터 옆에서 심드렁한 캐릭터가 반쯤 감긴 눈으로 코를 후빈다면, 그건 코를 후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루하다'는 기의를 표현하기 위한 기표일 뿐이다. 해당 컷을 실사 영화화 한답시고 다 큰 성년 배우가 코를 후벼 파고 있다면, 관객은 일차원적인 기의뿐 아니라 '무안하다', '지저분하다', '민망하다', '무례하다'를 포함한 복합적 의미로 읽어내게 된다. 동시에 관객도 바보가 아니기에 그 장면에서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기의란 단순히 '지루하다' 하나뿐이란 것도 알고 있다. 일련의 사고 프로세스가 순식간에 주르륵 흐르면 결과..

Film/Comedy 2026.02.08

정우가 또 _ 윗집사람들, 하정우 감독

# 0. 하정우가 또 ㅈ같은 새끼를 데려왔네. 하정우 감독,『윗집 사람들 :: The People Upstaris』입니다. # 1. 관람 직후의 감상이다. 좁은 골목길, 서로 어깨가 부딪히지 않으려 한발짝 비켜나는 사회에서 내가 습관처럼 물러서자 기다렸다는 듯 '아이구~ 고맙습니다~' 스트레칭 하는 꼬라지를 바라보는 당혹감. 억울하고 분하지만 지적 하자니 너무 짜쳐서 티를 낼 수도 없는 나를 음흉하게 입꼬리 들썩이며 관찰하는 느낌적인 느낌. 보통은 절대 하지 않을 법한 에티켓과 위선의 경계에 뻔뻔하게 발가락을 담근 다음,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감각. 이를테면 커여운 김향기를 김냄새라 부른 뒤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들을 군내날 것 같은 콧수염 쓰다듬으며 지켜보는..

Film/Comedy 2026.02.06

발언력의 역학 _ 더 리틀 아워즈, 제프 바에나 감독

# 0. Don't fucking talk to us! 제프 바에나 감독,『더 리틀 아워즈 :: The Little Hours』입니다. # 1. 무작정 야한 영화를 기대했다면 유감이다. 물론 데카메론을 끌고 온 탓에 순결한 수녀들의 억눌린 욕정을 유감없이 드러내긴 하지만, 그럼에도 생각만큼 야하진 않다. 기껏해야 몇몇의 느슨한 은유일 뿐이고, 헐벗은 장면조차 데이브 프랭코의 탄탄한 빵댕이를 제외하면 오밤중 마녀 의식 장면 따위의 호러 연출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전부다. 원하는 바(?)를 얻고자 한다면 차라리 익스플로이테이션 필름, 특히 넌스플로이테이션 매대를 뒤져보는 편이 낫다. 뇌가 녹아내릴 것만 같은 개막장성은 그쪽이 전문이니 말이다. 포스터에서부터 잔뜩 화가 난 수녀가 입 벌리고..

Film/Comedy 2026.02.04

신화창조 _ 고스트 독, 짐 자무쉬 감독

# 0. 신화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렷! 짐 자무쉬 감독,『고스트 독 :: Ghost Dog: The Way of the Samurai』입니다. # 1. 사무라이들의 지침서, 야마모토 쓰네토모의 '하가쿠레(葉隠)'를 삶의 근간으로 삼은 흑인 킬러 이야기. 규율이 멸종해 가는 세기말을 노려보는 짐 자무쉬다. 일본 사무라이 문화, 이탈리아계 마피아, 아프리카계 미국인,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아이스크림 장수까지. 이질적인 이들을 한데 모아 장르 관습을 해체한 건 파편화된 도시의 도덕 지형을 새로이 탐색하기 위함일 것이다. 특유의 포스트모던적 미학으로 갱스터 장르와 사무라이 영화를 결합한 자무쉬는, 황폐화된 시대에 텍스트가 어떻게 인간 실존과 결합하고 또 구원할 수 있는가 짓궂게 ..

Film/Action 2026.02.02

말은 쉽지 _ 굿 보이, 벤 리온버그 감독

# 0. 인간보다 먼저 귀신을 보는 개. 하우스 호러의 클리셰를 뒤집어 극 전체를 반려견 시점에서 전개하면 뭐가 나와도 나오지 않을까? 벤 리온버그 감독,『굿 보이 :: Good Boy』입니다. # 1. 말은 쉽지. 그래서 그걸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게 문제다. 적당히 꼬리 흔들고 뛰어다니다 짖고 싸우는 정도면 모를까. 무려 호러 장르의 주인공으로 쓰겠다니. 영화가 장난이야?라는 세간의 의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벤 리온버그다. 솔직히 이야기도 호러도 특별할 것은 없지만 관람은 기대보다 즐겁다. 반려견 계의 티모시 샬라메, 인디의 활약 덕분이다. 감독 본인의 반려견이기도 한 인디의 절륜한 연기력과, 저 그림을 어떻게 영상으로 뽑아냈을까 역산하는 것이야 말로 굿 보이의 진정한 재미다. 때문..

Film/Horror 2026.01.24

반환점에 서서 _ 붉은 돼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 0. 고향으로 돌아온 그를 본 아이들은 돼지, 붉은 돼지 아저씨라 불렀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붉은 돼지 :: 紅の豚』입니다. # 1. 잿빛 하늘 아래 전우들은 전부 죽었고, 운이 좋아 살아남은 그는 코를 잃었다.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사라진 흉측한 얼굴. 가실 기미 없는 핏빛 단면을 하고서 고향으로 돌아온 그를 본 동네 아이들은 돼지, 붉은 돼지 아저씨라 불렀다. # 2. 어느덧 1992년. 1941년 제국주의 끝물에 태어난 그림쟁이, 영원히 하늘을 날 것만 같았던 소년의 나이도 오십을 넘었다. 시간은 벌써 그렇게나 흘러버린 것이다. 전쟁의 위험과 전체주의의 광기를 경고하고(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이별의 두려움과 대화하는 법을 조언하고(이웃집 토토로), 어른이 된다는 것의 ..

Film/Animation 2026.01.22

다각적인 대조 _ 워페어, 알렉스 가랜드 / 레이 멘도자 감독

# 0. 고통스러운 권태. 인식이 부재한 규율. 데이터화된 인간. 그들이 없는 우리. 알렉스 가랜드 / 레이 멘도자 감독,『워페어 :: Warfare』입니다. # 1. 영화는 두 번의 대조로 소개된다. 화면 속 에어로빅 하는 여성들과 옹기종기 모여 열광하는 군인들, 소란스러운 베이스캠프와 어두운 밤 고요한 군사 작전이다. 연이은 대조는 이 작품이 각기 다른 무언가에 대한 영화가 아닌, 대조된 모습의 괴리감 그 자체에 천착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따라서 유난히 미니멀한 알렉스 가랜드의 전쟁 영화란 대조에 관한 것이며, 워페어를 본다는 것은 곧 무엇과 무엇이 대조되어 있는가, 그 대조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가 탐구하는 것이다. 초반 30여분은 전투 장면 하나 없이 건조하게 흘러간..

Film/Action 2026.01.18

비루한 당신의 노고에 건배 _ 흑백요리사 2

# 0. 늦은 밤. 오늘도 비루한 당신의 노고에 건배. 넷플릭스 버라이어티 시리즈,『흑백요리사 2 :: Culinary Class Wars Season 2』입니다. # 1. 흑백과 계급 운운한다는 것은 자칫 '위너'와 '루저'를 낙인찍는 것으로 비칠 수 있고, 이는 예능 프로그램에게 큰 부담일 수밖에 없기에 초기 제작진은 '유명'과 '무명'으로 대신하려 했다. 일례로 잔뜩 욕을 먹었던 시즌1의 장사 미션도 흑과 백을 잘 팔리는 유명가게와 안 팔리는 무명가게로 규정했기 때문이고, 인플루언서를 부른 것 역시 유명과 무명이라는 테마에서 파생된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이다. 하지만 20대 80의 비율로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흑수저들과 그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백수저들의 구도는 관객을 위너와 루저..

Series/Drama 2026.01.16

세 쌍둥이의 일그러진 초상 _ 시스터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

# 0. 폭로와 은폐, 시선과 권력, 관음과 진실의 선혈 낭자한 스플릿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시스터스 :: Sisters』입니다. # 1. 결국 시스터스의 야심은 쌍둥이 다니엘과 도미니크, 그들을 관찰하는 기자 그레이스에 비춰 당대 모순을 투사하는 것이다. 감독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평생 따라다닌 히치콕스러운) 카메라 워크를 통해 분화된 심리적 갈등을 통합함으로써, 객관적 사실의 관찰을 통해 살인 사건을 해결하려는 시도가 어떻게 비합리적이고 기괴한 모습으로 추락하는가 집요하게 추궁한다. 흥미진진한 분할 화면(Split-screen)은 인식론의 본질을 묻는다. 결합되어 있었으나 폭력적으로 분리된 샴쌍둥이로 구체화된 '분열된 본성'을 시각화하는 동시에, 은폐하려는 자와 폭로하려는 자 ..

어둠의 되먹임 _ 스티브, 팀 밀란츠 감독

# 0. 어둠을 우악스럽게 격리하며 악을 되먹임 하는 팀 밀란츠 감독,『스티브 :: Steve』입니다. # 1. 1996년 문제아 학교 스탠튼 우드의 아이들과 교장 스티브다. 아이들은 흔들리는 앵글이 보증하는 것처럼 충동적이고 폭력적이다. 오만하면서 자기혐오적이고, 돌발적이면서 게으른 터라 교직원들은 내내 피로감에 시달린다. 다만 마지막 스티브가 담담히 말하듯 그런 아이들조차 손쉽게 격리될 만큼 단순한 존재가 아니고, 돌멩이를 창문에 던진 샤이와 성실히 동행한 관객은 마침내 그것을 안다. 소년들의 개성은 상이하지만 행위의 목적만큼은 공통된다. 부정하거나 회피하거나 분리하거나 표출함으로써 끊임없이 자신의 어둠을 처리하려는 것이고, 그렇기에 그들의 충동은 사실 생존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과..

Film/Drama 2026.01.10

아이코닉 _ 스탑 메이킹 센스, 조나단 드미 감독

# 0. Hi. I've got a tape I want to play 조나단 드미 감독,『스탑 메이킹 센스 :: Stop Making Sense』입니다. # 1. 티나 웨이머스, 크리스 프란츠, 제리 해리슨 그리고 데이비드 번. 토킹 헤즈다. 전설적인 뉴웨이브, 포스트 펑크 밴드의 1983년 팬테이지스 극장 공연 실황은 독창적인 사운드뿐 아니라 프레젠테이션을 포함한 모든 면에서 탁월하다. 스스로 120만 달러를 조달한 독립 제작 공연은 스튜디오의 간섭 대신 순수한 역동성으로 가득하기에, 양들의 침묵, 필라델피아의 감독 조나단 드미가 밴드의 비전을 영화 언어로 번역함에 있어 타협하지 않을 수 있었다. 연출의 핵심은 자연주의적 몰입이다. 감독은 백스테이지 장면이나 인터뷰, 객석의 반응 ..

Documentary/Art 2026.01.06

시네마의 몸짓 _ 너는 나를 불태워, 마티아스 피녜이로 감독

# 0. 텍스트의 공백을 달콤쌉싸름하게 어루만지는 시네마의 몸짓 마티아스 피녜이로 감독,『너는 나를 불태워 :: Tú me abrasas』입니다. # 1. 체사레 파베제의 1947년 희곡 '레우코와의 대화' 중 '바다거품' 장을 각색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텍스트가 이미지로 변이 되는 과정에서 소멸한 언어가 현대적 육체를 얻어 재탄생되는 모습을 탐구하는, 말로만 들어도 골치 아픈 영화되시겠다. 시인 사포와 님프 브리토마르티스는 사랑과 죽음과 욕망에 대해 대화하는데, 피녜이로는 파베제의 정적인 텍스트를 시각적 음절로 분해한 후, 16mm 필름에 얹어 독서라는 행위 자체를 영화적 경험으로 번역하고 있다. 사포는 실연의 고통으로 바다에 몸 던진 시인, 브리토마르티스는 미노스의 추격을..

Film/Drama 2026.01.04

괜찮을 거예요 _ 떠나는 사람은 꽃을 산다, 남소현 감독

# 0. 그래도 괜찮을 거예요. 우리 여기 살면서 그리워하는 마음을 지겹게 연습했잖아요. 남소현 감독,『떠나는 사람은 꽃을 산다 :: Those who leave buy flowers』입니다. # 1. 은하는 떠나는 사람이다. 베를린이란 도시를 떠나고, 7년이란 시간을 떠난다. 이젠 단짝이 되어버린 룸메이트, 그 자식과의 연애와 이별, 돌이켜보면 민망한 시행착오, 하릴없이 누워있었던 다리 기둥과, 아무에게도 알려주고 싶지 않았던 비밀스러운 장소, 이 모든 것이 익숙해질 수 있게 해 준 긴 시간까지 모조리 나서게 된 그녀가 떠난 것은 결국 자신의 삶이다. 떠나왔던 이유도, 떠나기 전의 생활도, 떠나게 된 이유도, 떠나고 난 이후도 알 수 없으니 중요하지 않다. 갑작스레 어디에도 속하지 ..

Film/Drama 2026.01.02

혼란하다 혼란해 _ 대홍수, 김병우 감독

# 0. 홍수에 밀려온 물방울 수보다 의아한 부분이 더 많다. 김병우 감독,『대홍수 :: The Great Flood』입니다. # 1. 아침부터 아이는 물놀이하자는 둥 심각성을 모르는 데, 아파트 3층에 물이 들이치는 걸 보고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다기엔 애가 너무 큰 것 아닐까. 홍수가 났고 거실에 물이 들이쳐 발이 잠기고 있는 상황. 김다미는 대체 무슨 이유로 멍하게 서있는 연기를 디렉팅 받은 걸까. 발가락에 마비가 온 것이 아니고서야 보통 물이 발끝에 닿는 순간 '뭐야, 씨발' 화들짝 놀라게 되지 않나. 곧이어 집에서 탈출하는 데 험준한 산을 오르는 것도 아니고 아파트 복도에서 왜 애를 둘러업고 다니는 걸까. 주사기 보여준 걸로 봐선 아픈 애라 그런가? 라기엔 멀쩡히 물놀이한다 ..

Film/SF & Fantasy 2025.12.24

두 번째 맥거핀 _ 나이브스 아웃 웨이크 업 데드 맨, 라이언 존슨 감독

# 0. 탐정을 맥거핀으로 써먹는 추리물이 있다?! 라이언 존슨 감독,『나이브스 아웃 웨이크 업 데드 맨 :: Wake Up Dead Man』입니다. # 1. (당연하게도) 추리극은 과학적이고 논리적이기에, 대척점으로 애먼 종교의 머리채를 잡는 경우가 더러 있다. 비이성적이고 광신적인 교단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탐정의 대결. 이라는 식인데, 라이언 존슨의 신작은 추리극의 플랫폼 위로 종교의 역할을 탐구한다는 면에서 의외성이 있다. 핵심 사건은 네 개의 종교적 죽음으로 요약되고, 두 명은 죄악의 죽음, 다른 두 명은 회개의 죽음으로 다시 구분된다. 몬시뇰 윅스와 의사 냇은 유황이 끓는 지옥에서 최후를 맞이한 반면, 신도 마사와 정원사 샘슨은 각각 사제와 연인의 품에서 영면에 들었으니, ..

한예리다 _ 봄밤, 강미자 감독

# 0. 한예리다. 강미자 감독,『봄밤 :: Spring Night』입니다. # 1. 국어교사였던 영경과 철공소를 운영하던 수환. 각자의 첫 결혼을 실패한 뒤, 알코올과 병으로 모든 것을 잃고 죽음과 마주한 시간을 지낸다. 친구의 결혼식에서 우연히 만난 둘은 어느새 서로의 상처를 응시하며 그저 함께할 뿐이다. 마침내 슬픔이 우리를 건질 것이니 눈물이여 흐르라. 상처의 끝에서 외는 두 사람의 사랑이 밤과 함께 흘러간다. 김수영의 동명 시 봄밤을 모티브로 함에도 시인의 생애나 4.19와의 연관성은 옅다. 희망적인 봄과 절망적인 밤이 접붙여진 아이러니에 취해, 시구 하나하나의 처절한 감상을 정직하게 곱씹어 외워나갈 따름이다. '애타는 마음'과 '무거운 몸'이 교차하는 허무한 공간, '피곤한..

Film/Drama 2025.12.16

코러스, 레니, 린다 _ 마이티 아프로디테, 우디 앨런 감독

# 0. 황금빛 미소의 아프로디테 우디 앨런 감독,『마이티 아프로디테 :: Mighty Aphrodite』입니다. # 1. 고대 그리스의 원형 극장. 한 무리의 코러스가 등장하며 영화는 시작된다. 아이스토파네스나 에우리피데스 같은 고전 극작가의 스토리텔링을 오마주해, 뉴욕에 사는 스포츠 기자 레니 와인립의 소동극에 더할 비장미를 빌려오기 위함이다. 물론 그것을 고스란히 차용할 우디 앨런은 아니다. 엄숙한 등장에도 불구하고 코러스가 논평하는 대상은 아킬레스나 오이디푸스 같은 신화 속 영웅이 아닌, 신경증적 뉴요커의 양육 문제나, 아내의 불륜, 매춘부 개조 시도 따위의 한심한 것이다. 현대인의 사소한 고민조차 고대 비극이 다루던 운명, 윤리, 어리석음 같은 원형(Archetypes)의 연..

Film/Comedy 2025.12.14

선악과를 탐한 자의 추방과 교훈

# 0. 간교한 뱀의 혓바닥을 단호히 뿌리쳐야 한다. 『선악과를 탐한 자의 추방과 교훈』 # 1. 태초에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의 모든 풍요를 허락했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큼은 엄격히 금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게 되리라는 경고였다. 허나 간교한 뱀이 나타나 그것을 먹으면 죽는 것이 아니라 눈이 밝아져 신과 같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 유혹했다. 그 말이 탐스러웠던 하와와 아담은 결국 금기를 어겼고, 곧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을 깨달아 수치심에 몸을 숨겼다. 신의 추궁에 아담은 여자가 주어 먹었다 핑계를 댔고, 하와는 뱀이 꾀어 먹었다 변명했다. 이에 신은 뱀에게 배로 기어 다니며 흙을 먹는 저주를, 하와에게는 출산의 고통을, 아담에게는 평생..

Bla-bla/Bla-bla-bla 2025.12.12

마음먹기 나름 _ 2분마다 타임루프, 야마구치 준타 감독

# 0. 세상사 모든 건 마음먹기 나름 야마구치 준타 감독,『2분마다 타임루프 :: リバー、流れないでよ』입니다. # 1. 수많은 사람들이 타임루프를 상상하고 즐기는 건 무수한 시행착오의 비용을 무상으로 처리해 주는 편리함과 자유로움을 막연하게 갈망하기 때문이다. 1초, 1초 쫓기듯 사는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껏 폭식할 수도, 밀린 잠을 몰아 잘 수도, 거침없는 일탈을 저지를 수도, 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란 상상. 그런 의미에서 2분은 한숨이 절로 나올 정도로 짧다. 세상에 2분이라니. 루프가 시작되는 곳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시간이 쓰일 텐데 대체 뭘 하란 말이야. 어차피 이 소소한 군상극을 보러 온 관객들 중에 '타임루프'가 핵심이라 생각할 바보는 없다. ..

Film/SF & Fantasy 2025.12.10

SF는 어디까지 지적일 수 있는가 _ 컨택트, 드니 빌뇌브 감독

# 0. 결국 이 모든 것은 극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드니 빌뇌브 감독,『컨택트 :: Arrival』입니다. # 1. 서사의 초점은 외부의 위협이 아니다. 다방면의 존재론적 질문들로 견인하는 부단히 지적인 SF다. 그래서 드니 빌뇌브의 야심이란 지독할 정도의 침착성과 인내심으로, 언어의 본질과 인간의 인지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사색을 향해 관객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대체로 퍼스트 컨택트 장르들은 외계종과의 통신 문제를 불편으로 치부하거나, 혹은 바벨 피쉬와 같은 마법적인 장치를 통해 언어학적 논의를 배제해 왔다. 한편 컨택트는 외계어 습득 자체를 영화의 핵심 줄거리로 삼아 언어학을 전면에 부각한다. 특히 사피어-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은 작품의 핵심 전제다..

Film/SF & Fantasy 2025.12.08

샌드박스 무비 _ 배트맨 닌자, 미즈사키 준페이 감독

# 0. 기상천외한 미즈사키 이야기 미즈사키 준페이 감독,『배트맨 닌자 :: ニンジャバットマン』입니다. # 1. 일본 망가의 캐릭터가 인격이라면, 북미 코믹스의 캐릭터는 플랫폼이다. 혹은 일본 만화를 선형적 스토리 라인의 RPG라 한다면, 북미 코믹스는 거대한 세계관 안에서 무엇이든 건설하고 파괴할 수 있는 샌드박스 게임이라 표현해도 좋다. 매 에피소드마다, 매 작가마다 캐릭터가 따로 놀기에 역사극과 시트콤의 차이라 이해해도 나쁠 건 없다.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일본 망가와 그로부터 영향받은 한국 만화에 익숙한 독자들이 유독 코믹스를 입문하는 데 버거워하는 이유다. 코믹스의 캐릭터명은 살아있는 인간의 이름이라기보다, '문명'이나 '심시티', 'GTA' 같은 모래상자의 네이밍에 ..

Film/Animation 2025.12.06

픽시보이 _ 프리미엄 러쉬, 데이빗 코엡 감독

# 0. 잃어버린 프런티어 정신을 찾아 뉴욕으로 돌아온 카우보이 데이빗 코엡 감독,『프리미엄 러쉬 :: Premium Rush』입니다. # 1. '스케이트보딩을 다룬 영화들은 보드의 미학을 작품 안에 끌고 들어와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이 존재하는 듯하다.' 미드 90의 글을 시작했던 문장이다. 데이빗 코엡의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프리미엄 러쉬에서 픽시(Fixed-gear Bike, Fixie)의 미학은 다른 어떤 요소들보다 우선한다. 거추장스러운 브레이크가 제거된 싱글 기어 바이크의 속성은, 영화의 리듬, 캐릭터의 철학, 나아가 작품의 세계관 전체를 규정하고 지배한다. 일반적인 자전거와 달리 픽시는 뒷바퀴의 회전과 페달의 움직임이 직결된 자전거다. 말인즉 탑승자의 의도가 기..

Film/Action 2025.12.04

이번에는 뺏기지 않겠어 _ 키드, 찰리 채플린 감독

# 0. A picture with a smile—and perhaps, a tear 찰리 채플린 감독,『키드 :: The Kid』입니다. # 1. 예컨대 모던 타임스나 시티 라이트의 트램프는 홀로 세계와 대결하는 존재다. 그는 시스템의 톱니바퀴에 끼이거나 도시의 불빛 아래 서성일지언정, 언제나 관객이 감정 이입하는 유일한 창구로서 스크린을 장악했다. 반면 키드에서는 다르다. 화자는 모호하고 시선은 분산되며 정서는 독점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의 텍스트는 채플린이라는 거대한 자아가 파편으로 비산해 스크린에 투사된 듯 느껴진다. 거리의 부랑자, 버려진 아이, 그리고 어머니. 세 존재 모두 채플린의 내면에서 발원한 페르소나라는 뜻이다. 1919년 7월 7일. 기형으로 태어난 첫아들 노먼 ..

Film/Comedy 2025.12.02

아들의 그림자 _ 프랑켄슈타인,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 0. 여기 외로운 아들들의 동화가 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프랑켄슈타인 :: Frankenstein』입니다. # 1. 어머니와 다정한 경우는 더러 있지만, 아버지와 돈독하기란 쉽지 않다. 아버지가 성공한 사람일수록, 타고난 성정이 엄격할수록 더욱 그렇다. 일생 가족을 건사한 아버지는 자식이 헤쳐 나갈 세상이 녹록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지만, 아비는 그것을 표현하는 데 어리석고, 아들은 아비의 마음을 헤아리기엔 너무 어리다. 때문에 몇몇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동시에 나는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 섣부르게 다짐한다. 긴 시간이 흘러 아이를 가지고 나서야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겠지만, 그때는 아버지와 대화하기엔 이미 늦다. 떠나버린 아버지가 고픈..

Film/SF & Fantasy 2025.11.24

거울들 _ 피델리티, 니기나 사이풀라에바 감독

# 0. 금기를 어기는 욕망, 그 충실함을 시험하는 거울들 니기나 사이풀라에바 감독,『피델리티 :: Fidelity』입니다. # 1. 스스로 충실함(Fidelity)을 표방하고 있는 영화는 정작 불성실(Infidelity)로 가득하다. 그렇다면 기만인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제목과 서사의 모순은, 이 모든 것이 충실함의 대상을 타인에서 자아로 이동시키려는 전복적인 텍스트임을 암시한다. 쉽게 말해, '당신은 배우자에게 충실한가, 아니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가' 되묻는 것이다. 문득, 부르주아 여성의 억압된 성적 판타지를 통해 계급과 도덕의 이면을 파헤쳤던 고전 세브린느(Belle de Jour, 1967)가 연상되기도 하는데, 루이스 부뉴엘의 그것이 몽환적인 판타지였던 것과 달리, 피..

Film/Drama 2025.11.22

여자 버리기 경쟁 _ 피지컬 아시아

# 0. 어느 팀이 가장 효율적으로 여자를 버릴 것인가 넷플릭스 버라이어티 시리즈,『피지컬 아시아 :: Physical Asia』입니다. # 1. 출연도 좋다. 다소 동남아시아권에 편중된 감은 있지만, 그래도 각기 다른 8개국 참가자 모두 매력적이다. 아모띠를 비롯해 전작에서 훌륭한 활약을 선보인 이들을 다시 섭외해 세계관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도, 씨름선수 김민재나 크로스핏 최승연 같은 뉴페이스가 더해줄 신선함도 놓치지 않았다. 파퀴아오나 휘태커 같은 글로벌 스포츠 스타는 물론, 몽골 전통 씨름의 어르헝바야르, 터키 오일 레슬링의 레젭 카라 등 전통 스포츠 강자를 섭외, 단순히 범세계적 운동인 크루를 넘어 문화 교류의 정체성을 더한 것도 썩 영리하다. 곡예사 라그바오치르와 파쿠르 선수..

Series/Action 2025.11.18

기본 예제 _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 0. 이젠 스스로 회의해 보세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 The Favourite』입니다. # 1. 기본적인 개념 정리는 끝났다. 송곳니, 알프스, 더 랍스터, 킬링 디어의 부조리에 비춰 당연하다 여겼던 인간 조건을 해부하는 방법론과 그 의미를 경험하는 것 말이다. 고약한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성실히 따라온 관객들은, 사회적 규범이나 인간 본성에 대한 냉소적인 회의를 통해 결함이 폭로되는 광경을 편히 즐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관객의 차례다. 자신의 관객들이 스스로 회의하길 바라는 란티모스는 기본 예제로서 이전까지의 논리적으로 통제된 세계와 정반대 되는 18세기 초 영국 궁정의 시대극을 가져온다. 여기 세 여자의 암투에 얹어 '욕망'이라는 관념을..

Film/Drama 2025.11.16

음각에 비추어 _ 엣 더 벤치, 오쿠야마 요시유키 감독

# 0. 헤어짐이 쓸쓸하다는 건, 그만큼 소중했다는 뜻이겠지 오쿠야마 요시유키 감독,『엣 더 벤치 :: アット・ザ・ベンチ』입니다. # 1. 후타코타마가와 강변의 벤치 하나. 다섯의 이야기. 오쿠야마 요시유키의 데뷔작 엣 더 벤치다. 미니멀한 무대 위 에피소드들은 현대인이 마주한 관계의 문제들로 정직하게 소집된다. 낡은 벤치는 점차 사라져 가는 듯한 진솔하고 순수한 유대감에 대한 갈망을 정직하게 대변한다. 애틋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오래된 친구, 권태와 이별을 고민하는 연인, 가출한 자매, 관공서 직원을 연기하는 외계인을 연기하는 배우까지. 이들의 만남과 헤어짐의 교차가 만드는 메시지란 결국 '헤어짐이 쓸쓸하다는 건, 그만큼 소중했다는 뜻이겠지'라는 한마디다. 일본식 힐링 드라마 특유..

Film/Drama 2025.11.14

귀족이라는 환상, 유령이라는 본성 _ 푼돈 도박꾼의 노래, 에드워드 버거 감독

# 0. 스타일은 이해하나 스토리가 아쉽다 에드워드 버거 감독,『푼돈 도박꾼의 노래 :: Ballad of a Small Player』입니다. # 1. 당장 어지러운 마카오가 이목을 끈다. 파편화된 과시적 요소들의 합성된 웅장함은 '거대하면서 공허한 공간'으로 구현되고, 감독은 그런 마카오를 도박 중독자의 왜곡된 심리가 투사된 비현실적 연옥이라 규정한다. 나약한 영혼을 가두어 스스로 파괴하는 순환적 행동, 중독의 본질을 시각화하는 것이다. 연옥으로서의 마카오는 내내 주인공이 짊어진 영적 결핍과 탐욕스러운 외양 사이의 모순을 증폭시킨다. 그 안에서 도일은 낯선 공간의 익명성에 일시적인 해방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내 억압적인 크기와 치장에 압도되어 고립되길 반복한다. 그래서 관객이 목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