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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Comedy

발언력의 역학 _ 더 리틀 아워즈, 제프 바에나 감독

그냥_ 2026. 2. 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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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Don't fucking talk to us!

 

 

 

 

 

 

 

 

제프 바에나 감독,

『더 리틀 아워즈 :: The Little Hours』입니다.

 

 

 

 

 

# 1.

 

무작정 야한 영화를 기대했다면 유감이다. 물론 데카메론을 끌고 온 탓에 순결한 수녀들의 억눌린 욕정을 유감없이 드러내긴 하지만, 그럼에도 생각만큼 야하진 않다. 기껏해야 몇몇의 느슨한 은유일 뿐이고, 헐벗은 장면조차 데이브 프랭코의 탄탄한 빵댕이를 제외하면 오밤중 마녀 의식 장면 따위의 호러 연출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전부다. 원하는 바(?)를 얻고자 한다면 차라리 익스플로이테이션 필름, 특히 넌스플로이테이션 매대를 뒤져보는 편이 낫다. 뇌가 녹아내릴 것만 같은 개막장성은 그쪽이 전문이니 말이다.

 

포스터에서부터 잔뜩 화가 난 수녀가 입 벌리고 있는 영화는 '말에 대한 영화'라 정의해도 무방하다. 감독은 일관되게 대화의 주도권을 쟁탈하는 것에 관계적 역학 관계를 적극 투사한다. 칼을 들이미는 등 몇몇의 폭력은 구색일 뿐 대부분은 말로 상대를 압도하고 있으며, 이는 수도원뿐 아니라 처음 마세토가 지내던 성에서까지 일관된다. 식사자리에서 영주는 발언력으로 부인을 압도하고 있되, 잠자리에서는 다시 부인이 발언력으로 하인을 압도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 2.

 

고요하게 나귀를 끌던 성스러운 수녀들은 정원사의 인사에 아찔한 욕설을 토해낸다. 종교는 말을 들어주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착각, 중세 종교란 발언을 독점함으로써 그 언령으로 사람들을 침묵시켜 온 것이라는 게 영화의 통찰이다. 이후 수도원에 신세 지게 된 마세토가 하필 농아 행세를 하게 된다는 설정 역시 발언이 역학관계를 대신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부분. 따라서 핵심은 젊은 남자를 탐하는 수녀들의 적극성이 아니라, 그런 수녀들과 접촉하다 마세토가 입을 여는 순간들에 녹아 있을 수밖에 없다. 하나는 알레산드라가 친절하게 다가와 사랑을 표현할 때, 다른 하나는 페르난다의 납치와 폭력이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다. 결국 사랑으로도 폭력으로도 침묵하던 이가 입을 열게 된다는 것은, 침묵시키는 방식은 언제고 결정론적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심지어 묵언의 통제는 생각보다 허술하기에 그것은 스스로 벽을 뚫고 나갔다는 당나귀나, 초를 등에 올린 거북이와 같은 우화적 은유를 통해 코믹하게 표현되어 있고, 마지막 수녀들의 결단과 토마소 신부의 다정함으로 다시 한번 보강된다.

 

유머러스한 톤 앤 매너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시대 고증이 정교한 영화이기에, 도드라진 21세기 구어체 사용은 더욱 의식적이다. 시작부터 냅다 "Don't fucking talk to us!"와 같은 현대적인 대화를 쏟아내는 것은 아나크로니즘적 형식주의 전략이라는 의미다. 일련의 대사들은 인물들을 무표정한 중세 미술 속 성인처럼 미화하려는 시도를 거절해, 현대인과 다를 바 없는 욕망과 좌절을 가진 인간으로 환원한다. 데카메론이 당대 피렌체 속어를 사용해 기존의 엄숙했던 라틴 문학 전통에 반기를 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원전의 인본주의를 제대로 계승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 3.

 

시종일관 짓궂은 세 수녀들은 종교의 한계와 반동을 대신한다. 낡은 가치 체계와 개별적 욕망 분출의 경계에서, 수녀들의 행동—비속어 사용, 음주, 성적 탐닉, 마녀 의식 등—은 교회의 공통된 신념에서 벗어나 각자의 사적 정념을 회복하는 과정일 따름이다. 이를테면 페르난다가 벨라돈나를 만들고 마녀 집회에 참여하는 것은 종교 범죄적 행각이라기보다 기성 교회의 죽어버린 의식 대신 생명력이 샘솟는 다른 종류의 의식을 추동하는 것에 가깝다. 알레산드라가 지루한 수도원 생활을 상징하던 십자수로 마세토를 유혹하는 장면 또한 억압의 수단을 욕망의 수단으로 재전유하는 것이고, 규율의 감시자였던 제네브라가 억눌린 동성애적 욕망과 쾌락을 긍정하는 대목은 니체적 의미의 탈바꿈과 다르지 않다.

 

유독 대견한 것은 갇혀있던 존재가 탈출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다른 이를 구원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점이다. 토마소 목사의 마음은 진심이었겠으나, 그의 진심은 그들을 구원하긴커녕 자기 자신조차 구원하지 못했던 것에 반해, 수녀들은 대단히 실존적인 위기, 지옥에 빠진 마세토를 구원했으니 되려 종교적이다. 일련의 결말은 수녀들의 무질서하고 열정적인 행동들이 오히려 교회의 메마른 기도보다 더 종교적일 수 있음을 실증한다. 작품은 짐짓 어리고 욕정적인 수녀들에 의해 수도원이 난장판이 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수녀원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발산하는 에너지야말로 생명에 대한 강렬한 긍정이며, 이는 교조적 억압 따위보다야 훨씬 신성한 가치라 말한다.

 

 

 

 

 

 

# 4.

 

감독은 다각적인 부조화를 통해 작품에 긴장을 적층하고 있다. 기도하는 손이나 고해소의 시각적 구도를 통해 종교 미학을 강조하다 곧바로 인물들의 세속적 폭력을 겹쳐 성스러움을 조소하는 식이다. 외부 세계와 단절된 성스런 공간처럼 보였던 수녀원은 인물들을 억압하는 물리적, 심리적 감옥으로 재정의된다. 수녀원의 풍경과 인물들을 마치 고전 회화인양 정적으로 담아내지만, 정작 인물들은 다시 21세기식의 분절된 리듬으로 행동하고 말한다. 인물들이 사건 사이사이를 배회하는 듯한 느긋한 연출은 서사적 목적성에 매몰되지 않고 인물들의 '상태' 그 자체에 집중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특히 토마소 신부와 마세토의 고해성사 장면은 백미다. 잉마르 베리만 못지않은 엄숙한 클로즈업을 사용하면서도, 대화의 내용은 '씨앗을 뿌리는' 행위에 대한 저속한 논의로 가득 채워져 형식과 내용의 극단적 괴리를 이룬다.

 

서두에 익스플로이테이션, 그중에서도 넌스플로이테이션을 이야기한 것은 영화가 해당 장르의 외피를 적극 빌려오고 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구분되는 건 저급한 자극에 매몰되는 대신 인간의 숭고한 열망을 탐구하는 우회로로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나크로니즘적 대화를 통해 관객과의 정서적 장벽을 허문 후, 고전적 미장센과 현대적 냉소주의를 결합해 독특한 코미디 스타일을 구축한 영화. 정결과 신성이라는 미명 아래 은폐되었던 인간의 활기를 긍정함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느껴라 강요받는가'가 아닌 '우리가 실제 어떻게 느끼는가'에 대한 답을 찾으려 노력하는 모습은 1000년의 시간을 넘어 통시적인 감동이 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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