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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기본 예제 _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그냥_ 2025. 11. 1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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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이젠 스스로 회의해 보세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 The Favourite』입니다.

 

 

 

 

 

# 1.

 

기본적인 개념 정리는 끝났다. 송곳니, 알프스, 더 랍스터, 킬링 디어의 부조리에 비춰 당연하다 여겼던 인간 조건을 해부하는 방법론과 그 의미를 경험하는 것 말이다. 고약한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성실히 따라온 관객들은, 사회적 규범이나 인간 본성에 대한 냉소적인 회의를 통해 결함이 폭로되는 광경을 편히 즐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관객의 차례다. 자신의 관객들이 스스로 회의하길 바라는 란티모스는 기본 예제로서 이전까지의 논리적으로 통제된 세계와 정반대 되는 18세기 초 영국 궁정의 시대극을 가져온다. 여기 세 여자의 암투에 얹어 '욕망'이라는 관념을 넓게 풀어뒀으니, 이걸 스스로 회의해 보라고 말이다.

 

따라서 더 페이버릿을 생생한 역사적 재현을 관람하는 전통적 시대극이라 읽어내는 것은 심심한 일이다. 앤 여왕(Queen Anne), 사라 처칠(Sarah Churchill), 애비게일 힐(Abigail Masham)의 또렷한 눈빛에 집중하는 편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각각의 욕망은 기원과 목표가 상이하나 궁극적으로는 여왕이라는 절대 권력에 기생하며 상호 충돌하는 구조를 이루고 있고, 우리는 그를 통해 누구나 가지고 있어 당연하다 여겨왔던 '욕망'이란 무엇인가를 치열하게 탐색할 따름이다.

 

 

 

 

 

 

# 2.

 

앤 여왕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취약으로 묘사되지만, 이면에는 강력한 '신경질적 지배 욕구'[각주:1]와 '게걸스런 소유 본능'[각주:2]이 숨어있다. 그녀의 동기는 케이지 속 토끼로 구체화된 먼저 죽은 17명의 아이들로부터 비롯된 트라우마다. 앤은 채워지지 않는 상실감을 달래기 위해 끊임없이 결핍을 해소해 줄 대상을 찾으며, 이는 사라와 애비게일 간의 경쟁을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

 

내내 두 여자에게 프레임의 중앙을 내어주던 여왕은, 후반부에 이르러 전면에 나서 차곡차곡 암시된 권력욕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마침내 그녀는 신중한 조언과 통제 대신 달콤한 아양과 위안을 선택한다. 심지어 사라의 여당 대신 할리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그녀의 지배욕이 사적인 영역뿐 아니라 정치적 영역까지 포함됨을 확인한다. 모두가 얕잡아 본 그녀의 취약함이란 것조차 결국 주도권을 쥐기 위한 전략적 수단이었던 것이고, 그 실효성은 추방된 사라와 굴종적인 애비게일, 여왕의 손바닥 위에서 맹렬하게 논쟁하는 의회가 몸소 증명하고 있다.

 

한편, 사라 처칠에게 여왕은 단순한 군주가 아닌 사랑이자 분신처럼 묘사된다. 즉, 사라의 욕망은 '규율적인 애정적 소유'와 '관계적인 통제 욕구'가 혼합된 것이다. 그녀는 앤의 건강을 걱정하고 국정을 대신 책임지는 '엄마' 같은 역할[각주:3]을 자처했으나, 이 엄격한 통제 방식은 역설적으로 앤이 튕겨나가게 만드는 패착이 된다. 사라가 고집했던 프랑스와의 전쟁 지속 역시 그녀가 가진 욕망의 성격을 암시한다. 그녀는 필요하다면 힘을 써서라도 제압해 통제하는 것이 최선이라 믿는 인물이고, 그를 위해서라면 자신을 포함한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는 면에서 뒤틀릴지언정 고결한 것이다.

 

애비게일은 몰락한 귀족 신분에서 창녀로 전락한 과거를 지닌다. 시궁창까지 떨어졌던 그녀의 욕망은 오직 '생존과 신분 상승이라는 원초적 이기심'에 의해 순수하게 추동된다. 약초를 캐오고, 다리를 주무르며 유혹하고, 토끼를 귀여워하는 등의 행동은 겉으로는 상냥하지만 실상 치밀하게 계획된 전술의 결과다. 비단 사라나 여왕뿐 아니라 귀족 신분을 쥐어주고 궁정에서의 입지를 떠받쳐줄 남자들 역시 수단이긴 마찬가지다.

 

 

 

 

 

 

# 3.

 

통상적인 와이드 렌즈는 몰입감 높은 주관적 시점을 제공하지만, 더 페이버릿에서는 흥미롭게도 정반대의 효과, 소외되고 단절된 감옥을 표현하기 위해 활용된다. 광각은 주변 환경의 볼륨을 과도하게 강조하여 반복적으로 인물들을 방대한 공간 속에서 미약하고 동떨어진 부자연스러운 존재로 보이게 만든다. 길고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 과장되게 높은 천장 등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궁정은 스스로 욕망을 상징하기에[각주:4], 필연적으로 권력은 본질적인 만족을 가져다줄 수도 없고, 그곳에서 벗어날 수도 없음을 시각적 왜곡을 통해 암시하는 것이다. 또한 시점의 역설은 광기 어린 권력 투쟁을 불편할 정도로 가깝게 마주하게 함으로써, 특유의 부조리에 윤리적으로 참여하는 듯한 기분을 강요하고 있기도 하다.

 

희화화된 남성 캐릭터의 거세도 흥미가 있다. 욕망은 본디 남성의 전유물일 뿐 여성의 욕망이란 남편이나 자식에게 권력을 대물림하려는 가부장제의 대리 수행이라던 기성 서사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통상의 권력 쟁투에서 밀려나 있던 여성을 의식적으로 부각함으로써, 권력 게임의 패러다임을 계층이나 성별이나 성욕에 종속되지 않는 순수한 이기심으로 정제하려는 결벽증적 의도가 투사된 결과다. 언어 역시 비슷한 맥락의 장치다. 각본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면서도 의도적으로 시대에 맞지 않는 비속어나 현대어를 뒤섞는다. 이를테면 사라와 애비게일이 주고받는 대화는 18세기 귀족 여성의 우아한 화법보다, 현대 오피스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날카롭고 직설적인 신경전에 가깝게 연출된다. 감독은 시대극이란 장르의 안정감을 의도적으로 파괴함으로써 관객이 이들의 암투를 박제된 과거사가 아닌 생생한 권력게임으로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 4.

 

결국 애비게일은 사라를 몰아내고 '레이디'로서 복권된다. 자신감과 잔혹성은 여왕의 토끼를 짓누르는 장면에서 폭발하는 데, 그녀의 욕망이 파괴의 형식으로 발현된 것임을 확인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녀의 승리는 곧장 새로운 형태의 굴종으로 이어진다. 여왕은 애비게일에게 자신의 아픈 다리를 주무르라 명령한 후 머리채를 거칠게 휘어잡아 우위를 되찾는다.

 

마지막 앤의 다리에 매달린 모습은 사실상 성행위와 다르지 않고, 애비게일이 창녀로 전락했던 과거와 강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 다시는 수치스러운 상황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내면의 모든 것을 포기했지만, 권력의 정점에 도달한 순간 노예 신세였던 과거로 회귀할 것을 명령받은 셈이다. 애비게일은 여왕의 명령을 '영혼 없는 표정으로' 수행하며 여왕이 살아있는 한 영원히 그녀의 변덕에 복종해야 하는 운명에 갇혔음을 깨닫는다. 그녀의 승리(욕망 성취)란 고작 새로운 형태의 굴종으로 대체된 것이다. 물론 앤 여왕 역시 행복할 수 없다. 그녀는 자신에게 진정한 애정을 주었던 사라를 내쫓고 아첨꾼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육체적 고통과 상실의 트라우마는 여전하고, 애비게일과의 관계에서도 진정한 기쁨은 느끼지 못할 것이다. 어두운 토끼 떼 위로 페이드 아웃되는 시각적 결론이란 두 여성 모두 승리라는 명목 하에 더 깊은 상실과 고통 속으로 빨려 들어갔음을 확인한다.

 

 

 

 

 

 

# 5.

 

반면 사라는 그 둘과 동떨어진 최후를 맞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추방당함으로써 해방된 그녀는 짐짓 승자처럼 보이기도 하다. 명확히 실패한 애비게일에게 '너와 나는 게임의 목적이 달랐다' 담담히 말하는 장면도 그러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조차 피로스의 승리에 불과하다. 기고하겠다 협박한 앤의 연애편지를 불태워 버리는 모습은, 그녀의 계몽주의적 통제로는 사랑도 욕망도 달성할 수 없음을 시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게임에선 이탈했지만 상처는 지울 수 없는 흉터가 되어 평생 그녀를 따라다닐 것이다. 끊임없이 갈구할 뿐인 욕망의 게임에 승자는 없고 단지 이탈할 뿐이라는 회의주의적 결론이다.

 

결국 란티모스에게 욕망이란 '신경질적 지배 욕구'와 '게걸스런 소유 본능'과 '규율적인 애정적 소유'와 '관계적인 통제 욕구'와 '생존이란 원초적 이기심'이 혼란스럽게 뒤엉킨 것이다. 욕망하는 인간의 투쟁은 비극적인 자기 반복으로, '내던져 짓이겨진 과일의 지저분한 잔해 위에서 벌이는 격렬한 춤사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종속적이기에 영원히 충족될 수 없어 구원될 수 없으며 오히려 여타 순수한 감정까지 집어삼켜 변질시킨다.

 

그리고 마침내. 관객은 작품을 통해 시대와 계급과 성별에 독립된 '욕망'을 성실하게 회의함으로써 각자 무언가를 탐하는 순간마다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란티모스가 생각하는 역사극의 진정한 의의다. 나와 동떨어진 사건을 관음하여 평가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 그들의 영광과 파멸 안에서 본질을 직시하고 회의할 계기를 찾아 나오는 것이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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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페이지 보이들에게 고압적으로 소리치는 장면, 오밤중에 하녀들과 근위병을 깨워 지시하는 장면 등 [본문으로]
  2. 구토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폭식하는 장면, 몇몇의 요구적인 키스와 섹스 장면 등 [본문으로]
  3. 그렇기에 앤과 사라가 키스하는 몇몇의 장면들은 본질적으로 어미가 아이에게 젖먹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본문으로]
  4. 귀족들이 과일을 던지며 유희하는 장면, 화려한 궁정의 장식과 헐벗은 여인의 미술 등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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