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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소년의 회상

그냥_ 2024. 3. 2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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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2024년 3월 1일. 조산명(鳥山 明) 선생이 향년 68세의 일기로 타계하셨습니다.

 

 

 

 

 

 

 

 

『20세기 소년의 회상』

 

 

 

 

 

# 1.

 

그날따라 유난히 낯설게 느껴지는 서재. 먼지 소복한 귀퉁이에서 묵혀지고 있던 드래곤볼을 담담히 읽어나갔죠. 인이 박힐 정도로 많이도 봤던 익숙한 그림체와 익숙한 캐릭터와 익숙한 대사들은 책을 읽는 건지 책 위를 미끄러지는 건지 모를 정도로 책장을 넘기게 만듭니다. 둔하게 읽으리라는 다짐이 무색하게도 한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야속한 42권의 마지막 장을 덮었는데요.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양반의 비보임에도 많은 분들이 소감 하시듯 참 헛헛하더군요. 문화의 본질이란 결국 연결인 걸까요.

 

그러고 보면 영화 개봉을 겸해 다시 읽은 슬램덩크도 얼마 전이었던 것 같은데요. 그것도 작년 1월이니 햇수로는 벌써 2년 전 일입니다. 심드렁한 남의 사건에 얹어 뒤돌아보는 시간은 언제나 잔인할 정도로 빠르죠.

 

예기치 못한 상실은 사람을 멍청하게 만들고, 핸들을 놓쳐버린 아니 놓아버린 생각은 바람이 부는 대로 흘러갑니다. 소심한 책장을 눈으로 훑다 문득. 어릴 적 대여점에서 빌려 보던 만화책방의 그것에 생각이 들립니다. 요즘은 만져보기도 쉽지 않은 100원짜리와 신줏단지 같던 500원짜리 몇 알을 고사리손 가득 담고 꼬마 걸음으로 5분은 뛰어가야 했던 만화방은 참 설레는 것이었죠. 주전부리 사 먹을 용돈을 비장한 각오로 모으고 모아 빌려낸 깜장 봉다리 가득 담은 추억의 만화들은 어느 못생긴 사내아이에게 세상을 다 가진 듯 늠름한 것이었습니다.

 

 

 

 

 

 

# 2.

 

토리야마 아키라의 <닥터 슬럼프>는 센베에 박사의 별명이지 양팔 벌려 달리는 여자 아이의 이름이 아닙니다. 주인공 소녀의 이름은 일본 화과자에서 따온 노리마키 아라레(のりまきあられ)죠. 타카하시 루미코 선생의 <란마 1/2> 속 최애는 샴푸였기에 수많은 아카네 파들과 매일 처절한 혈투를 벌여야 했는데요. <이누야샤>에서는 카고메나 키쿄우가 아닌 카구라의 절절한 내러티브를 좋아했던 걸 보면 특유의 홍대병은 타고난 모양입니다. 이와아키 히토시의 <기생수>는 인생 최초로 본 호러물이었는데요. 압도적인 고토의 압박감에 심신이 지치고 힘들 때면, 아즈마 키요히코의 4컷 만화 <아즈망가 대왕>을 긴급 투약해 진정을 찾곤 했습니다. 당시엔 또래였던 천재 소녀 치요의 귀여움을 이해하기까진 몇 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말이죠.

웹툰 세대에게 조석의 <마음의 소리>나 정철연의 <마린블루스>, 워니, 심윤수의 <골방환상곡> 같은 편안한 데일리 감성 코미디 생활툰이 있다면, 20세기 소년들에겐 후지코 F. 후지오의 <도라에몽>과 우스이 요시토의 <크레용 신짱>이 있었습니다. 짱구가 얄미운 줄 모르고, 진구가 짜증 나는 줄 모르던 그 시절에 보던 만화와 지금 보는 만화를 같은 만화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Great Teacher Onizuka. 학교라는 감옥에 갇혀 공부라는 벌을 받던 중2병 소년의 반항심을 대리하던 <G.T.O.>의 로망과 전작 <상남 2인조>도 나름 인기였구요. 일해라 토가시의 <유유백서>도 참 재미있었죠. 그때 잘못 엮인 죄로 하염없이 <헌터X헌터>를 기다리시는 분이 분명 한둘은 아닐 겁니다.

 

말랑말랑한 만화책에 대한 단상은 자연스럽게 각편의 애니메이션으로 확장되고, <그레이트 다간>이나 <지구용사 선가드>로 대표되던 용자 시리즈를 지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수많은 걸작 애니메이션을 건너 결국 그 이름,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도달합니다. 세상 좋아진 덕에 넷플릭스에서 에반게리온을 다시 볼 수 있었는데요. 그에 앞서 당시의 감성에 '싱크로율'을 맞춰줄 것이 필요했고, 1시간 22분짜리 <공각기동대>는 최고의 선택이라 할법하죠. 글을 끄적거리는 어제 헐벗은 모토코의 셀프 근육파괴술을 봤으니, 이 글을 걸어놓고 나면 오늘부터는 에반게리온을 달릴 생각입니다. 벌써부터 특유의 레트로 물감 애니메이션 컷 전환 위로 잔혹한 천사의 테제를 부른 타카하시 요코 특유의 뽕삘이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것만 같군요.

 

 

 

 

 

 

# 3.

 

민망해하는 낡은 의자를 홀로 둔 채, 그렇게 좋아하는 영화 볼 생각도 미뤄둔 채. 맨바닥에 퍼질러 누워 옛날 생각을 하노라면 반가움과 아련함과 허무함이 질서 없이 뒤엉켜 역류하고, 이 모든 감정의 출발점으로서 다시 고쿠의 아버지 토리야마 아키라로 회귀합니다. 특유의 펜선과 작화, 연출, 디자인, 이야기, 분위기. 이 모든 장점을 압도하는 만화의 의의라 할 수 있을 '온화함'은 다른 수많은 거장들조차 쉬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이었음에 분명하죠. 뭇사람들의 예상보다 훨씬 일찍 염라를 취재하러 떠나버린 그에게 전 세계에서 애도를 보내는 건, 그가 창조한 온화함이 미친 시간적 공간적 영역이 얼마나 거대한 것이었는지, 그 감동의 파동이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지를 증명하는 듯합니다.

 

누군가는 담백한 작별 인사로, 누군가는 가슴 절절한 목소리로, 누군가는 따라 그렸던 그림으로, 누군가는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으로, 누군가는 함께 불렀던 노래로, 누군가는 흉내 내던 과거의 자신으로 형형색색의 헌화를 보내고 있는데요.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애도를 보내는 모습을 보노라면 그런 모습 하나하나가 염원과 희망을 담은 드래곤볼처럼 보이기도, 슬픔이란 녀석을 무찌르기 위해 원기옥에 모이는 에너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드래곤볼 7개를 모아 소원을 빌면 용신이 나타나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있다는 설정에 초등학생이었던 소년은 설레었고, 대학생이 된 그에겐 다소 시시했었는데요. 아저씨가 된 지금은 용신의 세 가지 소원이 무턱대고 그리워지는군요. 덴데는 요즘 어떻게 지내려나요. 급하게 빌 소원이 하나 있는데 말이죠.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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