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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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영화 59

초상(Portrait) _ 소피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나인 안티코 감독

# 0. 제대로 배우지 않아 엉망이지만 그래서 개성적인 우리들 나인 안티코 감독,『소피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 Playlist』입니다. # 1. 프랑스의 만화가 나인 안티코의 감독 데뷔작은 파편화된 청춘의 일상을 만화가 특유의 독특한 리듬으로 그린다. 원제 'Playlist'가 그러하듯, 영화는 주인공 소피가 마주하는 삶의 여러 문제들—불안정한 직업과 미래, 복잡 다난한 대인 관계, 갑작스러운 건강 이슈, 열악한 주거 환경 등—을 예측 불가능하게 뒤섞인 트랙처럼 불규칙하게 배치한다. 감독의 만화가적 기질이 반영된 듯 일련의 분절적 구성은 단순히 시간순의 줄거리 나열이 아닌, 소피가 체감하는 현실의 무질서함과 미래의 불확실함, 그로 인한 내면의 혼란을 복합적으로 암시한다. ..

Film/Comedy 2025.05.06

고통스러운 진실, 절망스러운 성찰 _ 뉴 오더, 미셸 프랑코 감독

# 0. 불편한 진실과 비관적 성찰을 집요하게 추궁하는 광기 어린 야심 미셸 프랑코 감독,『뉴 오더 :: New Order』입니다. # 1. 논쟁적인 영화는 시작부터 관객을 몰아세운다. 형이상학적인 미술과 헐벗은 여성의 오프닝을 지나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세계, 호화로운 상류층 결혼식과 그 너머 폭력이 뒤섞여 제시된다. 깨끗하고 풍요로운 저택은 견고한 성처럼 보이지만 이미 위태롭다. 직관적으로도 불안한 녹색의 침입이다. 수도꼭지에서는 녹색 물이 흘러나오고 페인트를 뒤집어쓴 손님이 도착하는 등 외부의 오염과 분노가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스며들고 있음이 상징적으로 연출된다. 감독은 파티에 모인 상류층 사람들의 이미지를 통해 구체제를 성실히 묘사한다. 여성들의 화려한 원색 드레스를 통해..

간절히 평범하려는 자의 쓸쓸함 _ 시스터스 브라더스, 자크 오디아르 감독

# 0. 청산되지 않는 폭력과 부정되지 않는 희망 사이에서 자크 오디아르 감독,『시스터스 브라더스 :: The Sisters Brothers』입니다. # 1. 오랜 시간 서부극은 자신의 신화를 반복해 왔다. 광활하고 황량한 대지와 피도 눈물도 없는 무법의 시대, 이를 개척하거나 지배하려는 마초 영웅의 신화다. 시스터스 브라더스 역시 표면적으로는 익숙한 서부극의 신화를 계승하는 듯 보인다. 1850년대 오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청부 살인업자 형제의 폭력과 파멸을 정직하게 따라간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는 덴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균열의 징후는 제목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Sisters'라는 형제의 성(姓)은 영화의 방향을 조용히 비튼 과정에서 생긴 흉터다. ..

Film/Drama 2025.04.30

그녀 _ 행복, 아녜스 바르다 감독

# 0. 모든 면에서 그녀, 아녜스 바르다. 아녜스 바르다 감독,『행복 :: Le bonheur』입니다. # 1. 남자 프랑수아는 도덕적으로 파탄한 인물임에 분명하나 그것은 전혀 논쟁적이지 않은 것이기에 매몰되는 것은 시시하다. 오히려 외도보다 중요한 것은 외도하는 인간의 사고방식이다. 작품이 이질적인 것은 프랑수아의 외도에도 불구하고 아내에 대한 불만이나 권태, 불성실을 연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전히 아내와 가족을 사랑하고 그로부터 큰 행복을 얻고 있지만, 새로운 여자 에밀리로 인해 추가적인 행복을 얻을 수 있었고, 그것이 행복의 총량을 증진시켰을 뿐이라는 식이다. 따라서 프랑수아를 정의하자면 '지극히 행복지향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인생은 개체의 행복을 최대한 증진시..

Film/Drama 2024.10.02

기다리는 사랑의 빛과 어둠 _ 롤라, 자크 드미 감독

# 0. 사랑은 내 시간을 기꺼이 건네주는 것이다. 작가 이기주        자크 드미 감독,『롤라 :: Lola』입니다.     # 1. 진부한 표현이지만.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것이다. 고약한 사랑은 제멋대로 나타나 제멋대로 싹트기에 어찌할 도리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처지인지, 사랑받는 사람이 어떤 처지인지에도 관심은 없다. 우연히 들린 출장지에서, 우연히 걷던 길가에서, 우연히 찾은 서점에서 만난 사람과 언제든 사랑에 빠질 수 있다. 당장 다음 출항지로 떠나야 하는 수병의 사정도, 급작스레 직장을 잃고 해외로 나가게 된 백수의 사정도, 7년씩이나 아내를 찾아올 수 없었던 남자의 사정도 아랑곳 않는다.  그때와 다른 시간에 만났더라면 우리의 사랑은 달랐을까. 그때와 다른 곳에서 시작했더라면 ..

Film/Romance 2024.09.16

나는 거절한다 _ 욕망의 모호한 대상, 루이스 브뉘엘 감독

# 0.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면 당신은 절 사랑하지 않게 될 거예요.        루이스 브뉘엘 감독『욕망의 모호한 대상 :: That Obscure Object of Desire』입니다.     # 1. 거장 루이스 브뉘엘(Luis Buñuel, 1900-1983)의 유작이다. 피에르 루이(Pierre Louys)의 (1898)를 원작으로 한다. 주인공은 중년의 부호 마티유(페르난도 레이 분), 매혹적인 여인 콘치타(카롤 부케/안젤라 몰리나 분)다. 주요 플롯은 집착적 사랑을 기망당한 마티유가 기차 안 사람들에게 고발하는 동안의 플래시백이다. 영화는 제목처럼 욕망의 본질을 탐구한다. 욕망의 주체와 타인의 대상화, 결핍 및 폭력과의 관계성 따위를 특유의 초현실주의적 문법과 유머러스한 표현으로 풀어낸 걸..

Film/Comedy 2024.09.12

괜찮을 거라는 격려, 마음을 담은 헌사 _ 소스 코드, 덩컨 존스 감독

# 0. Everything is gonna be okay.Thank you for your service.        덩컨 존스 감독,『소스 코드 :: Source Code』입니다.     # 1. 10년도 더 지난 영화의 플롯을 이제와 설명하는 건 지루하다. 러틀리지 박사의 설정놀음을 걷어내고 나면, 결국 통 속의 뇌에다 죽은 사람의 기억을 접붙이기한 후 파생되는 문제들은 평행우주로 돌파했을 뿐이다. 물론 창의적이고 도발적인 발상, 스피디한 편집과 미술적 성취, 제이크 질렌할의 불안과 소명, 미셸 모나한의 사랑스러움, 백투백 홈런을 날리는 듯한 반전 카타르시스는 인정받아 마땅한 것임에 분명하지만 말이다. 다만 의외인 것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키스신에서 영화를 끝냈으면 좋았을 것이라 이야기..

Film/SF & Fantasy 2024.08.30

하늘을 보는 사람 _ 노 맨스 랜드, 다니스 타노비치 감독

# 0.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이 없는 세계        다니스 타노비치 감독,『노 맨스 랜드 :: No Man's Land』입니다.     # 1. 보스니아 전쟁의 역학관계를 비무장지대에 고립된 인물들로 치환한 실험극으로, 전쟁의 참상과 부조리를 염세적 시선에서 내려다본 일종의 우화다. 보스니아 지원병 치키, 세르비아 군 신참 니노, 지뢰 위에 붙잡힌 체라의 이야기는 자조적인 블랙 코미디와 전쟁 드라마로서의 균형이 돋보인다.  세계 각지, 특히 1세계 밖의 전쟁 당사자가 느낄 감각을 일반론적으로 통찰한다는 면에서 의의가 있다. 한국의 외교적 입지 상 1세계적 관점에서 세계사를 교육받게 되는 데, 그것을 재고하게 만든다는 것은 이색적인 경험으로, 이는 접근이 쉬운 영미권 외의 영화를 애써 찾아볼 때 얻을..

Film/Comedy 2024.08.24

추락하는 조각상 _ 맨 오브 마스크, 알베르 뒤퐁텔 감독

# 0. 국가는 죽은 용사의 조각상을 가질 자격이 있는가        알베르 뒤퐁텔 감독,『맨 오브 마스크 :: Au revoir la-haut』입니다.     # 1. 콧수염이 유독 잘 어울리는 알베르 뒤퐁텔이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는, 피에르 르메트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알베르와 에두아르의 이야기로, 전쟁의 무자비함과 그보다 더 참혹한 이후를 탐구하며, 심미적 아름다움과 감동적인 스토리텔링, 유려한 블랙 코미디를 두루 선사한다. 매드 아티스트의 예술적 요소와 채플린을 연상시키는 듯한 블랙 코미디의 절묘한 조화는 작품의 매력이다. 감독은 전후 프랑스 사회의 위선과 부조리, 생존자들의 투쟁과 몰락을 예술적으로 풍자적으로 그려낸다. 연출은 놀라운 상상력과 감각으로 전쟁..

Film/Drama 2024.08.08

예술가의 끝인사 _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알랭 레네 감독

# 0. 예술가는 끝인사마저 이렇게 눈부신가.        알랭 레네 감독,『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 You Haven't Seen Anything Yet』입니다.     # 1.작가 앙투앙의 비보에 13명의 배우가 초대된다. 다정하게 손님을 맞은 집사는 유언이라며 영상을 하나 보여준다. 화면을 향해 걸어 나오는 이는 거짓말처럼 해맑은 앙투앙이다. 이미 죽은 앙투앙은 친구들에게 경의를 표한 후 부탁을 하나 청한다. 자신이 쓴 연극 를 젊은 예술가들이 다시 연기하려 하는데, 리허설 영상을 보여줄 테니 가부(可否)를 대신 결정해 달라는 것이다. 장례에 참석한 배우 모두는 과거에 에 참여한 연기자들이었다. 배우들은 리허설 영상을 보다 말고 자신의 에우리디케를 선보인다. 객석은 삽시간에 무대가 된..

Film/Drama 2024.05.26

오만의 반성문 _ 판타스틱 플래닛, 르네 랄루 감독

# 0. 역사의 단편으로 작성한 오만한 인류의 반성문        르네 랄루 감독,『판타스틱 플래닛 :: La Planete sauvage』입니다.     # 1. '1973년 프랑스에서 제작된 애니메이션'이라는 소개만으로도 흥미를 부르기 충분하다. 은 멸망한 인류의 후손 옴(Om)이 거대한 파란색 외계인 드라그(Dragg)에게 억압당하는 이야기를 환상적인 미감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프랑스 SF 소설가 스테판 울이 1957년 발표한 소설 을 원작으로 한다. 체코의 이지 트릉카(Jiří Trnka) 스튜디오와, 프랑스 애니메이터 르네 랄루, 롤렌드 토포르의 협업은 그해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다. 옴은 인간의 프랑스어 Homme에서 음가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옴의 과거를 기록한 슬라이드는 ..

Film/Animation 2024.05.14

사라짐, 그 응답의 부재 _ 일 부코,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 감독

# 0. "그 사라짐, 그 응답의 부재가 저에게 매우 강한 감정을 줬습니다."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 감독,『일 부코 :: il buco』입니다.     # 1. 이탈리아 감독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의 연출작이다. 제78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작으로, 심사위원장 봉준호와 노매드랜드의 클로이 자오가 극찬한 작품으로 소소한 이목을 끌었다. 전작 을 촬영하며 겪은 일화는 10년 후 신작의 계기가 되었다 한다. 칼라브리아 지역의 시장에게 남부 이탈리아 산악 지역과 동굴을 소개받은 예술가는 처음엔 회의적이었으나 구멍 속으로 돌을 던지자마자 강한 영감을 받았다 회고한다. "바닥이 너무 깊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사라짐, 그 응답의 부재가 저에게 ..

Film/Drama 2024.04.30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 _ 리틀 걸, 세바스티앙 리프쉬츠 감독

# 0. "사샤는 오랫동안 여자라고 느껴... 아뇨, 느낀 게 아니라 사샤는 여자예요. 남자로 태어난 여자요." 세바스티앙 리프쉬츠 감독, 『리틀 걸 :: Petite Fille』입니다. # 1. 의 소재는 제법 독특한데요.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10글자 넘어가는 괴랄한 소수자성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주인공 '사샤'는 생물학적 성별과 정신적 성별의 괴리로 힘들어하는 평범한 트랜스젠더일 뿐입니다. 다만 문제는 그녀가 나중에 커서 여자가 되고 싶다 말하는,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간 아주 어린 친구라는 것이죠. 퀴어 다큐멘터리도 소주제에 따라 풀어가는 방식은 천차만별이지만, 대체로 그 끝은 두 가지 목표로 귀결되기 마련입니다. 주인공의 소수자성에 대한 내적 탐구, 그 과정에서 차별에 맞서 싸우는 사회적..

에펠탑의 뒤편 _ 오 머시!, 아르노 데플레솅 감독

# 0. 어두운 밤 보다 더 어두운 에펠탑의 뒤편 아르노 데플레솅 감독, 『오 머시! :: Oh Mercy!』입니다. # 1. 통상 영화 속 사건과 인물은 창작된 것이라며 도망갈 길을 열어두기 마련인데요. 되려 등장하는 모든 사건은 소소한 것이든 큰 비극이든 실화라 강조하며 시작됩니다. 실존하는 문제를 강하게 지적하는 고발성 작품이라는 것이죠. 배경인 프랑스 루베(Roubaix)는 감독 데플리솅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덕분에 강한 비판 아래로 자전적이고 온화한 시선이 함께 느껴지는 독특한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밥 딜런의 앨범(Oh Mercy(1989))으로부터 끌고 들어온 듯한 영화의 제목은, 도시의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숙연한 기도로서 감독의 지향을 엿보게 하죠. 오프닝의 선언처럼 전반..

Film/Drama 2024.03.10

유치가 찬란하심 _ 택시, 제라르 삐레 감독

# 0. 겁나 유치(幼稚)하긴 한데요. 그걸 이렇게 찬란(燦爛)하게 만들면 역으로 먹히기도 합니다. 제라르 삐레 감독, 『택시 :: Taxi』입니다. # 1. 혹하는 최신 영화가 잘 없다 보니 연이어 옛날 영화들을 다시 보게 되는군요.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글에서, 해당 영화와 관련된 내용을 찾아보고 싶었지만 검색되는 거라곤 죄다 프랑스의 택시라 아쉽다 말씀하신 분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데요. 시간이 흘러 이 영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게 되었네요. 다소 익숙지 않은 프랑스 영화임에도 의외로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신 작품이긴 합니다만, 글쎄요. 아마 극장에서 보신 분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겁니다. 대부분 OCN이나 Super Action(현 OCN movies2)과 같은 캐이블 채널을 통해 보시지 않았을까요...

Film/Action 2024.02.20

맑은 하늘의 자화상 _ 어느 멋진 아침, 미아 한센 로브 감독

# 0. 불안한 선택의 미로 끝에 뒤돌아 깨닫는 맑은 하늘의 자화상 미아 한셀 로브 감독, 『어느 멋진 아침 :: One Fine Morning』입니다. # 1. 파리라는 배경, 불안이라는 코드, 걷는다는 이미지는 아녜스 바르다의 같은 작품을 생각나게 합니다. 마침 프랑스 영화이기도 하고, 각각 코린 마르샹과 레아 세두의 존재감으로 견인하는 작품이기도 하니까요. 혹은 삶의 무게에 떠밀린 주인공의 분투를 현실적으로 그린다는 면에서 노아 바움백의 같은 작품이 연상되기도 하는군요. 겉보기에는 주인공 산드라의 고단한 삶을 진중하게 조명하고 독려하는 드라마처럼 보이는데요. 생각하기 따라서 그보다 조금 더 깊은 주제의식을 가진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벤슨 증후군에 걸린 산드라의 아버지 게오르그의 메모에 담긴 ..

Film/Drama 2024.01.12

안전막 없는 트램펄린 _ 풀타임, 에리크 그라벨 감독

# 0. 그 어린 엄마는 잘 지내고 있을까 에리크 그라벨 감독, 『풀타임 :: À plein temps』입니다. # 1. 싱글맘의 고단하고 치열한 일상을 스릴러의 긴박감으로 그려낸 드라마입니다. 이야기에 특별함은 없고 이야기를 즐기는 영화도 아닙니다. 캐릭터성이 강한 주인공을 탐구하는 류의 이야기도 아니구요, 연출에서 강한 개성이 발견되는 작품도 아닙니다. 영화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싱글맘을 상정한 후 그녀의 평범한 일상에 치밀하게 집요하게 접근합니다. 두 아이를 혼자 키워내는 싱글맘이 느낄 법한 감정들, 이를테면 압박감이나, 고독감, 피로감, 조바심 따위를 해체해 각기 다른 현실적 레이어로 흩뿌려 투영하는 것에 집중합니다. 감독은 싱글맘의 스트레스를 주인공의 감정 묘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

패러디와 떡밥 회수 _ 슈퍼 후?, 필립 라쇼 감독

# 0. 패러디와 떡밥 회수. 그게 전부입니다. 진짜루요. 필립 라쇼 감독,『슈퍼 후? :: Super-héros malgré lui』입니다. # 1. 우리의 주인공은 스몰 사이즈 팬티 모델 출신 무명 배우입니다. 미쿡 엉아들이 마블 유니버스로 장사하는 게 배 아팠던 돈 많은 프랑스 할머니가 BADMAN이라는 제목의 짝퉁 히어로 영화를 기획합니다. 여차저차 캐스팅되는 데 성공한 주인공은 촬영 중 집으로 돌아가다 사고가 나는데요. 거 참 공교롭게도 몸뚱이는 멀쩡하지만 기억상실에 걸리고 말았죠. 정신 차리고 보니 슈퍼 히어로 옷을 입고 있길래, 어라? 와타시 어쩌면 배드맨이었던 걸지도? 지가 자경단 노릇하던 슈퍼 히어로라 믿은 무명 배우는 돌아다니는 족족 사고를 치지만, 그래도 이쁜 누..

Film/Comedy 2023.09.14

이런 얼굴이었을까 _ 파라노이드 파크, 구스 반 산트 감독

# 0. 그때 내 뒷모습은 이런 얼굴이었을까 구스 반 산트 감독, 『파라노이드 파크 :: Paranoid Park』입니다. # 1. 제법 난해하고 제법 독특합니다. 누가 구스 반 산트 아니랄까 봐 지독할 정도로 긴 롱 테이크가 영화의 호흡을 붙잡고 깊은 어딘가를 향해 침전시킵니다. 느리고 몽환적인 사운드와 대비되는 과격한 파열음은 침전된 관객의 마음에 의도된 파형을 반복적으로 유도합니다. 주인공 알렉스의 목소리를 빌린 독백 전개와, 혼자 기대앉는 낡은 의자, 일기나 편지 따위의 코드는 내적 고독감을 점층적으로 쌓아나갑니다. 1.33:1의 화면비와 레트로 캠코드의 질감까지 곁들여지면 작품은 현장적이고 회고적이며 감각적이고 동시에 사유적인 무언가로 두텁게 승화됩니다. 인물을 집어삼키고 고립시키는 프레임은 그..

Film/Drama 2023.08.08

정체와 요행의 미스터리 _ 9명의 번역가, 레지 루앙사르 감독

# 0. 왜 문학이어야 했을까. 왜 번역이어야 했을까.        레지 루앙사르 감독, 『9명의 번역가 :: Les Traducteurs』입니다.     # 1. 장르와 소재의 연동성이 크게 떨어집니다. 대부분의 설정은 걸맞은 권위를 부여받지 못합니다. 문학과 번역이라는 코드는 작품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을 텐데요. 왜 문학이어야 했는지, 왜 번역이어야 했는지에 대한 설득이 크게 부족합니다. 어떤 수학 난제가 있고 그걸 풀어낸 누군가가 있어 이를 검토하기 위해 전문가를 모아뒀다 가정해 봅시다. 사실 진짜 난제를 풀어낸 건 무명의 젊은 친구였고, 그가 스승의 복수를 위해 검토팀에 잠입했다 하더라도 이야기가 굴러가는 데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을 겁니다. 혹은 회사 병합을 하는 데 관련된 기밀이 있어 관계자들..

레아 세두 화보집 _ 어느 하녀의 일기, 브느와 자코 감독

# 0. 집사랑 눈 맞은 하녀가 주인집 털고 런하는 이야기입니다. 농담하지 말라구요? 감동 실화입니다만? 브느와 자코 감독, 『어느 하녀의 일기 :: Journal d'une femme de chambre』입니다. # 1. 좋게 말하면 당당하고 나쁘게 말하면 꼬장꼬장한 '셀레스틴'이라는 이름의 하녀가 시골 마을에 취업해 적당히 착취적이고 적당히 고생스러운 직업 생활을 보내다 15년 간 충직한 집사 행세를 했던 '조세프'라는 남자와 눈 맞아 불꽃 섹스를 즐긴 후 고가의 은식기 세트 낭낭하게 털어 부둣가 술집 마담으로 전직하는 이야기입니다. 중간중간 셀레스틴의 과거 회상과 이웃들과의 담소, 처참한 살인 사건 따위가 자극적으로 묘사되긴 하지만 주요 서사만큼은 말씀드린 것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죠. 이야기..

Film/Drama 2022.04.16

실패한 성장의 대가 _ 늑대소년 테디, 뤼도비크 부케르마 외 1 감독

# 0. 성장 영화라고 하면 미성숙한 개인이 내적 갈등을 겪으며 정신적으로 성숙해 보다 행복하고 풍요로운 인생의 발판을 마련하는 과정을 다룬 영화,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텐데요. 정의에서부터 미루어 알 수 있다시피 기본적으론 해피 엔딩이기 마련입니다. 결과가 성장과 행복으로 귀결되지 않으면 그 자체로 성장 서사라 부를 수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성장이라는 것이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누구나 행복한 낙원은 어린아이 동화 속 이야기죠. '뤼도비크 부케르마', '조랑 부케르마' 감독, 『늑대소년 테디 :: Teddy』입니다. # 1. 영화 는 기본적으로 성장 영화의 틀을 따라갑니다.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의 신체적, 정서정, 정신적 변화를 늑대 인간이라는 과격한 형태로 과장하는 우화죠...

Film/SF & Fantasy 2022.04.08

닫힌 방, 열린 서사 _ 더 룸, 크리스티앙 볼크망 감독

# 0.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 '크리스티앙 볼크망' 감독, 『더 룸 :: The Room』입니다. # 1. 전능한 신과 도전하는 인간의 판타지 통제하는 부모와 일탈하는 아이의 드라마 스토커 살인마와 사냥감의 스릴러 # 2. 하나의 공간에 중첩된 세 층위의 이야기입니다. 일방향적 서사 속에서 세 캐릭터 모두 각자의 주제에서는 주연으로, 서로의 주제에서는 조연으로 기능합니다. 신과 인간의 서사 구조에서 관객은 셰인의 입장이 됩니다. 가족주의 서사에서는 케이트에 교감합니다. 스릴러의 기준에서는 멧과 정서적으로 밀착되는 식이죠. 나 혼자만 레벨업식 유치찬란 양판소 설정에서 출발한 영화는 방에서 태어난 아이 셰인과 정신병원에 수감된 존 도의 등장에 힘입어 ..

상하 좌우 반전 _ 하이 라이프, 클레어 드니 감독

# 0. 우주 SF입니다. 디테일한 미술과 세심한 설정과 쫀쫀한 서사로 빚어낸 환상의 공간을 여행하는 아이 씐나! 어드벤처 물이거나, 철학적이거나 제의적이거나 관념적인 코드들로 이리저리 엮어낸 교수님스러운 스릴러 드라마인 경우가 일반적이죠. 물론 세부적으로 나누자면야 더 많은 분류가 가능할뿐더러 위의 두 분류 역시 칼같이 나눠지지 않고 겹쳐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만, 알잘딱 넘어가도록 합시다. '클레어 드니' 감독, 『하이 라이프 :: High Life』입니다. # 1. 후자의 교수님스러운 영화 그중에서도 매운맛입니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이미지와 분위기에 주력하고 있을 뿐 디테일은 과감히 생략하고 있기도 하구요, 펜로즈 과정 따위를 잠시 찍먹 하긴 하지만 그마저도 몰입을 위한 과학적 디테일이라기..

Film/SF & Fantasy 2022.03.14

환생 했나? _ 스탈린이 죽었다!, 아만도 이아누치 감독

# 0. 죽은 줄 알았는데 말이죠. '아만도 이아누치' 감독, 『스탈린이 죽었다! :: The Death of Stalin』입니다. # 1. 역사적-정치적 사건의 내막과 암투를 다루는 작품들의 리뷰란 결국 장학 퀴즈 식으로 귀결되기 마련입니다. 저지른 악행들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비참한 죽음, 스스로 만든 권위가 골든 타임을 놓치게 만드는 아이러니, 고상 떠는 취미와 대조되는 지저분한 실금, 독살을 의심해 의사들을 모조리 숙청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진료의 기회조차 받지 못하는 어리석음, 모함하고 비위 맞추는 데에만 능한 간신들과, 능력에 어울리지 않는 휘향 찬란한 직함과, 웃옷을 가득 채운 무수한 훈장의 요청 등이 실제로도 그러했답니다~ 라는 식이죠. 거기다 진중한 정치사극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골려먹기..

Film/Comedy 2022.02.28

불꽃놀이 _ 티탄, 쥘리아 뒤쿠르노 감독

# 0. 검은 하늘. 폭력으로 쏘아 올린 화약. 형형색색의 폭발. 불의 에너지, 빛의 파괴. 찰나 같은 속도감. 사그라들고 난 후의 허무함. '쥘리아 뒤쿠르노' 감독, 『티탄 :: Titane』입니다. # 1. '내가 지금 뭘 본건가'라는 관람평은 썩 훌륭합니다. '네가 지금 뭘 본거 같냐' 묻는 영화이기 때문이죠. 알렉시아는 알렉시아가 아닙니다. 아드리앵은 아드리앵이 아닙니다. 여자이지만 여자라 할 수 없고 남자이지만 남자인 것도 아닙니다. 제3의 성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 어떻게도 정의할 수가 없죠. 여자를 사랑하지만 동성애자는 아닙니다. 남자를 사랑하지만 이성애자도 아니죠. 메카노필리아지만 온전히 메카노필리아인 것은 아닙니다. 범성애자도 아니구요. 아들도 아니고 딸도 아닙니다. 평범하던 사람은 이상..

붉은 날 _ 슬라롬, 샤를렌느 파비에 감독

# 0. 새하얀 설원을 가르는 붉은 날. * 날² [명사] _ 연장의 가장 얇고 날카로운 부분. 베거나 찍거나 깎거나 파거나 뚫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표준국어대사전- '샤를렌느 파비에' 감독, 『슬라롬 :: Slalom』입니다. # 1. 서사는 날카롭고 직선적입니다. 숨겨진 비밀 따위의 과장된 변주 없이 날 것 그대로를 전개합니다. 시니컬해 보일 정도의 선명성이 드라마가 작동하기 위한 높은 몰입도를 정석적으로 설득합니다. 프랑스 영화는 이 강단이 참 매력적이죠. 미성년자 성폭행이란 소재는 충격적이지만 핵심은 아닙니다. 일정 규모 이상의 집단에서 특별히 문제적인 개인이 특별히 문제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건 종종 일어나는 일이며 그걸 원천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는 건 감독도 알고 있습니다. 영화가 주목하는..

Film/Drama 2021.12.02

누군가의 평범 _ 점보, 조이 위톡 감독

# 0. 사물을 사랑하는 오브젝토필리아 Objectophilia, 그중에서도 특히 기계를 사랑하는 메카노필리아 Mechanophilia에 대한 영화입니다. 사용성이나 수집욕 혹은 지적 욕구 등으로 기기를 즐기는 IT 덕후들이나 애인과의 성적 페티시를 충족하기 위한 기계 소품을 탐닉하는 사람들이 아닌 아예 기계 그 자체를 성적으로 사랑하는 도착증을 말합니다. '조이 위톡' 감독, 『점보 :: Jumbo』입니다. # 1. 기계를 사랑하는 여자 '잔'입니다. A.I. 탑재된 로봇형 기계 아니구요. 그냥 쌩기계(...), 놀이동산 어트랙션을 사랑하게 된 사람이죠. 히치콕 감독은 "드라마란 지루한 부분을 잘라낸 인생이다. Drama is life with the dull parts cut out." 라 말하는데요..

Film/Drama 2021.07.01

순간들 _ 시바티에서의 마지막 나날들, 앙드릭 뒤졸리에 감독

# 0. "이 지역은 곧 철거돼요. 알잖아요. 여길 싹 허물 거예요. 중국 빈곤층을 보여 주려고 다큐멘터리를 찍나 본데 당신들 생각하곤 달라요. 중국은 이제 빈곤하지 않아요. 그건 가짜 이미지라고요. 당신네 기자들은 뭐든 과장하기 일쑤죠. 촬영해서 이럴 거잖아요. '중국은 가난하다!' 해방 직후 동네도 좋아지고 통나무를 때고 살죠. 중국을 폄하하지 말아요. 내 말 들어요. 당신이 찍는 건 진짜가 아니에요." '앙드릭 뒤졸리에' 감독, 『시바티에서의 마지막 나날들 :: Derniers jours à Shibati』입니다. # 1. 시바티의 사람들 "있잖아. 자기 나라에선 낙오자일 거야. 직업이 없나 보지.", "말조심해. 알아들을 수도 있어.", "내 말 들어봐. 직업이 있는 사람 같으면 대체 여길 왜 왔..

Documentary/Social 2021.06.17

어린 공주 _ 버터플라이, 필립 뮬 감독

# 0. 《어린 왕자》(프랑스어: Le Petit Prince)는 프랑스의 비행사이자 작가인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가 1943년 발표한 소설이다.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한 조종사가 자기의 작은 별에서 여러 별들을 거쳐서 드디어 지상에 내려온 소년의 이야기를 듣고 결국 소년이 뱀에게 물려 자신의 별로 돌아갈 때까지의 이야기이다. ... 순결한 소년과 장미(여성)의 사랑 이야기나 갖가지 지상의 성인을 반영하는 다른 별에서 겪은 체험을 통하여 인생에 대한 일종의 초월적 비판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비판을 담은 시(童心)는 그것이 비판과 분리되지 않고 일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작자의 심정과 윤리가 혼연히 융합되고 표백(表白)되어 있어, 프랑스는 물론 미국·독일 등 각국에서도 비상한 호평으로 환영하였다. - 위키백..

Film/Drama 2021.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