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신화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렷!

짐 자무쉬 감독,
『고스트 독 :: Ghost Dog: The Way of the Samurai』입니다.
# 1.
사무라이들의 지침서, 야마모토 쓰네토모의 '하가쿠레(葉隠)'를 삶의 근간으로 삼은 흑인 킬러 이야기. 규율이 멸종해 가는 세기말을 노려보는 짐 자무쉬다. 일본 사무라이 문화, 이탈리아계 마피아, 아프리카계 미국인,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아이스크림 장수까지. 이질적인 이들을 한데 모아 장르 관습을 해체한 건 파편화된 도시의 도덕 지형을 새로이 탐색하기 위함일 것이다. 특유의 포스트모던적 미학으로 갱스터 장르와 사무라이 영화를 결합한 자무쉬는, 황폐화된 시대에 텍스트가 어떻게 인간 실존과 결합하고 또 구원할 수 있는가 짓궂게 질문한다.
작중 마피아 바고 패밀리는 카리스마를 완전히 상실한 상태다. 중식당 뒷방에 차린 아지트 임대료는 3개월이나 밀렸고, 조직원은 죄다 머리 희끗한 배 나온 노인들 뿐이다. 끊임없이 TV만화를 시청하는 모습은 이들의 정신적 퇴행을 통렬히 풍자한다. 베티 붑, 펠릭스 더 캣, 우디 우드페커, 이치와 스크래치에 이르기까지. 탐닉하는 만화 속 폭력은 현실 세계의 비극과 반복적으로 대조되거나 혹은 예고되는데, 마피아의 폭력이란 더 이상 명예로운 결투가 아닌 무의미한 소동에 불과함을 조소하는 몽타주다. 소니가 힙합 가사를 외우며 젊은 문화를 흉내 내는 장면은 그래서 비참하다. 정체성을 잃어버린 구시대 부족민의 필사적인 (그래서 더욱 우스꽝스러운) 적응인 것이다.
모두가 규율을 어기는 극단적 고립 속에서 자신만의 영적 정체성을 구축한 주인공, 고스트 독이다. 옥상 위에서 비둘기를 키우고, 하급 마피아 조직원의 가신이 된 그는 파편화된 질서 바깥에 있다. 흑인이지만 일본의 고대 규율을 따르고, 이탈리아 마피아를 위해 일하지만 그들의 문화에 동화되지 않으며, 도시 한복판에 살지만 자연과 동물의 질서에 보다 가까운 존재. 흑인 사무라이가 이탈리아 마피아를 제거하기 위해 일본의 암살 기법과 힙합의 리듬감을 결합하는 과정이란 가시적인 폭력뿐 아니라 규율의 충돌을 겸한다.

# 2.
고스트 독은 매 순간 하가쿠레의 가르침을 되뇌지만, 막상 그의 무기들은 하가쿠레의 시대와 동떨어진 현대적인 무기다. 그는 카타나를 수련함에도 실제 암살에는 소음기 달린 권총이나 레이저 조준경을 사용하며, 차를 훔칠 때는 거리낌 없이 전자 장비를 동원한다. 고대의 정신과 현대적 기술의 병치는 그가 단순한 복고주의자가 아니라는 의미다. 현대라는 황폐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대의 엄격한 규율을 생존 전략으로 '샘플링'한 포스트모던적 존재로, 전통이 사라진 시대에 개인이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개인적 법전을 만들어낸 것일 따름이다.
작중 하가쿠레는 챕터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서사의 뼈대로서도 기능한다. 감독은 화면 가득 하가쿠레의 구절을 인용한 후, 고스트 독에게 직접 낭독하게 해 관객에게 이야기에 올라타 흘러가는 것을 멈추고 명상적인 태도를 취할 것을 요구한다. 내러티브의 속도를 의도적으로 늦춘 것 또한 마찬가지. 액션 영화로서의 쾌감보다 인물의 내적 규율에 집중할 것을 요구하기 위함이다. 하가쿠레는 고스트 독의 삶이 현대적인 시간관(속도와 효율)이 아닌 고대의 시간관(순한과 명상)에 의해 움직이고 있음을 보증하고 있고, 구태여 마지막 구절을 소녀 펄린에게 읽게 함으로써 일련의 텍스트란 개인을 넘어 세대 간에도 전수될 수 있는 영적 유산으로 승화된다.
텍스트에 관한 영화이니만큼 독서와 책의 교환 역시 주요하다.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여러 문화적 조각들로 기워진 고스트 독의 정체성을 친절하게 은유한다. 케네스 그레이험의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은 고스트 독과 펄린이 공유하는 우정의 순수성을 대신한다. 펄린은 이 책들을 도시락 가방에 넣고 다니는 데, 육체적 허기에 우선하는 정신적 자양을 역설하기 위함이다. 자무쉬는 일련의 텍스트 순환을 통해 비록 육체는 멸종될지라도 생각과 이야기는 다음 세대로 전이되어 생존할 것임을 간절히 희망하고 있다.

# 3.
그럼에도 가장 주요한 것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이다. 주인공이 루이를 주군으로 섬기게 된 '구원 사건'은 두 번의 회상으로 진술된다. 고스트 독의 기억 속에서 루이는 자신을 죽이려던 인종차별주의자들을 용감하게 물리친 영웅이다. 그러나 루이의 관점에서의 루이는 그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총을 쏜 겁쟁이 조직원에 불과하다. 자무쉬는 무엇이 진실인지 밝히지 않고 사실 관심도 없다. 대신 고스트 독이 자신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그 우발적인 사건을 신화적 구원으로 재구성한 후, 평생 헌신하는 모습으로 허구적 진실에 의존하는 양식에 집중할 따름이다. 현대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있어 자기 신화화는 유일하고 또 필연적이므로. 고스트 독에게 중요한 것은 루이가 실제 어떤 사람이냐가 아니라 자신이 루이를 통해 사무라이라는 정체성을 획득했다는 사실 그 자체인 것이다.

# 4.
아이스크림 장수 레이몽. 서브플롯의 그는 프랑스어, 고스트 독은 영어만 사용하기에 두 사람은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완벽하게 소통할 수 있다.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감수성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자무쉬에게 진정한 소통이란 언어적 규칙의 기계적 준수가 아닌, 타자의 존재 방식에 대한 세심한 공감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스트 독과 루이는 모두 영어를 사용함에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루이는 고스트 독이 보내는 하가쿠레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가신의 봉건적 충성심을 부담스러워하거나 조롱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도덕적 실패. 바고 패밀리의 보스가 고스트 독의 메시지를 전쟁의 시라 이해하며 경의를 표하는 동안, 루이의 무지는 그를 영적인 패배자로 만든다. 결말에서 모든 조직이 파괴되었음에도 루이는 보스가 될 수 없었던 이유다. 라쇼몽을 읽고 자신의 신화를 만들어나가게 된 루이즈 바고의 수하로 전락한 결말의 함의다.
고스트 독은 자신이 주군의 보스를 죽였기에 루이가 조직의 규율에 따라 자신을 죽여야만 함을 인지한다. 달아날 수 있었음에도 일부러 총알을 비운 총을 들고서 루이와의 대결을 선택하고, 총탄에 쓰러졌음에도 웃으며 책을 건넨다. 평생 명상해 온 죽음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영화는 펄린이 부엌 바닥에 앉아 하가쿠레를 읽는 모습으로 끝난다. 소녀는 고스트 독으로부터 규율과 정신적 자립을 계승하는 존재다. 고스트 독이 평소 펄린에게 보여준 것은 킬러로서의 기술 따위가 아니라 독서에 대한 열정과 친구에 대한 진심 어린 배려였으므로. 따라서 펄린은 도시의 빈곤과 억압 속에서도 고스트 독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설 것이고, 규율이 멸종한 파편화된 도시의 우리들도 마땅히 그러할 것이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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