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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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264

그럴 줄 알았다 _ 피해자는 누구인가, 미할 블라슈코 감독

# 0. 전과자인 그 집시 놈이 내 그럴 줄 알았다. 미할 블라슈코 감독, 『피해자는 누구인가 :: Victim』입니다. # 1. 싱글맘 이리나가 부재한 사이 아들 이고르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에 황급히 체코로 돌아가며 영화는 시작된다. 의식을 찾은 이고르는 '하얀색 피부가 아닌 세 사람'에게 공격당했다 진술하고, 곧 위층의 로마니(집시) 형제가 용의자로 지목되어 체포된다. 이리나는 방송 인터뷰와 정치적 시위를 제안받고 망설이지만, 사건은 스스로 생명력을 가지기라도 한 듯 그녀의 의지와 무관하게 발전한다. 중반부 이고르가 거짓말을 실토하며 이야기는 크게 전환된다. 여자친구에게 자랑하려다 다친 것이 부끄러워 거짓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정치적 이해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된 상태다. 언론은 연일 사..

Film/Drama 2024.04.16

Sunburn _ 미드 90, 조나 힐 감독

# 0. 스케이트 보드를 왜 타는 거냐는 물음에 답하며 조나 힐 감독, 『미드 90 :: mid90s』입니다. # 1. 스케이트보딩을 다룬 영화들은 보드의 미학을 작품 안에 끌고 들어와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존재하는 듯하다. 래리 클락의 , 구스 반 산트의 , 크리스털 모젤의 과 같은 영화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영화에서 주로 활용되는 보드는 상당히 모순적인 활동이다. 무모하면서 무기력하다. 자유로우면서 구속적이다. 개인적이면서 계급적이고, 낭비적이면서 가난하다. 투쟁적이면서 도피적이고, 공격적이면서 비굴하며, 강인한 척하지만 나약하고, 물리적이지만 정신적이다. 화려한 트릭이 무색하게 내내 같은 공간을 맴돈다. 앞으로 나가는 듯 보이지만 정확히는 멈춤에 저항하는 것에 가깝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거친 ..

Film/Drama 2024.04.12

감독놀음 _ 은밀한 공범, 죠죠 히데오 감독

# 0. 평범한 소재로 비범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도 있지만,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내다 버리는 경우도 부지기수입니다. 죠죠 히데오 감독, 『은밀한 공범 :: 恋のいばら』입니다. # 1. 은 수입사가 지어 붙인 이름입니다. 원제는 恋のいばら. 그러니까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군요. 참고로 영어 제목은 Thorns of Beauty인데요. 이쪽이 그나마 더 직역에 가까운 번역이기는 합니다. 실제 영화의 핵심은 '가시'로 은유된 각자의 마음에 있다는 면에서, 관계 중심적인 뉘앙스가 강한 '공범'이라는 우리말 제목은 썩 정밀해 보이지는 않죠. 양가적 감정에 놓인 두 여자의 갈등을 그린 작품입니다. 원제에 긍부정이 배치되는 두 개념을 접붙여둔 이유죠. 모모는 켄타로에게 집착과 파괴를 함께 느낍니다. 수차례 복제하고 ..

Film/Romance 2024.03.30

달디단 _ 웡카, 폴 킹 감독

# 0. 달디달고 달디달고 달디단 초콜릿 초콜릿 폴 킹 감독, 『웡카 :: Wonka』입니다. # 1. 움파룸파의 것을 훔쳐간 사람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것이 순진한 웡카의 짓이든, 악독한 슬러그워스의 짓이든 괴팍한 주황색 소인은 괘념치 않죠. 웡카는 자신을 찾아온 누구나에게 초콜릿을 만들어 줍니다. 그것이 소버린을 지불한 도시의 사람들이든, 친절을 베푼 누들과 친구들이든, 오만한 피켈그루버든 상관없습니다. 웡카라는 이름을 이정표 삼아 극장을 찾은 관객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웡카를 찾아온 사람들은 누구나 웡카로부터 초콜릿을 선물 받습니다. 영화는 '엄마를 그리워 하는 소년 윌리가, 달콤 백화점에 가게를 차리고 초콜릿 공장을 세운 웡카가 된다'는 이야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영화 는 그 자체로 ..

Film/SF & Fantasy 2024.03.20

오스카가 또 _ 디 애프터, 미산 해리먼 감독

# 0.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미산 해리먼 감독, 『디 애프터 :: The After』입니다. # 1. 나이지리아계 영국인 사회 운동가 겸 사진작가인 미산 해리먼 감독의 데뷔작입니다. 2015년 개봉된 영화 에서 마틴 루터 킹 주니어를 연기한 데이비드 오예로워가 주인공 다요 역으로 참여합니다.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18분짜리 단편 영화인데요. 올해 아카데미 단편영화 부문에 노미네이트 된 작품이기도 하니, 시상식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제목을 들어보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수상은 웨스 앤더슨의 가 차지합니다.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작품이었죠. 묻지 마 테러의 참상 이후를 그립니다. 전반적으로 평이하고 예측가능한 전개이지만 사안의 심각성과 시의성이 관객을 안정적으로 몰입하게 합니다. 테러로 아내와 ..

Film/Drama 2024.03.18

마른 인간 연구소 _ 우주인, 조한 렌크 감독

# 0.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갑니다. 조한 렌크 감독, 『우주인 :: Spaceman』입니다. # 1. 징그러운 거대 거미와 징그러운 아담 샌들러가 포옹하는 우주 영화입니다. 야로슬라프 칼파르시의 소설 을 원작으로 합니다. 조한 렌크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아담 샌들러가 주연으로 열연합니다. 같은 작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많은 양산형 로코물 탓에 비아냥을 많이도 샀던 아담인데요. 넷플릭스와의 계약은 확실히 분기점이 된 듯합니다. 노아 바움백의 와 샤프디 형제의 에 이어 2022년 공개된 까지 필모그래피가 만개하고 있는데요. 정극 연기하는 아담 샌들러에 대한 신뢰가 쌓이는 건 격세지감이라 할 법하죠. 다만, 앞서의 작품들과 이번 은 결이 조금 다르기는 합니다. 익숙한 불안과 폭발보다는 오히려 ..

Film/SF & Fantasy 2024.03.12

에펠탑의 뒤편 _ 오 머시!, 아르노 데플레솅 감독

# 0. 어두운 밤 보다 더 어두운 에펠탑의 뒤편 아르노 데플레솅 감독, 『오 머시! :: Oh Mercy!』입니다. # 1. 통상 영화 속 사건과 인물은 창작된 것이라며 도망갈 길을 열어두기 마련인데요. 되려 등장하는 모든 사건은 소소한 것이든 큰 비극이든 실화라 강조하며 시작됩니다. 실존하는 문제를 강하게 지적하는 고발성 작품이라는 것이죠. 배경인 프랑스 루베(Roubaix)는 감독 데플리솅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덕분에 강한 비판 아래로 자전적이고 온화한 시선이 함께 느껴지는 독특한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밥 딜런의 앨범(Oh Mercy(1989))으로부터 끌고 들어온 듯한 영화의 제목은, 도시의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숙연한 기도로서 감독의 지향을 엿보게 하죠. 오프닝의 선언처럼 전반..

Film/Drama 2024.03.10

도메크의 망원경 _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 0. 마그다의 정신을 들여다보는 도메크의 망원경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 A Short Film About Love』입니다. # 1. 어지간한 변태가 아니고서야 이름 외우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생소하신 분들도 이나, 시리즈는 한 번쯤 들어보셨을 텐데요. 그 작품들 만든 동유럽 영화계를 대표하는 거장이죠. 30여 년 전, 성경의 십계를 주제로 각색 제작된 데칼로그(Dekalog)라는 폴란드 Tv시리즈가 있었는데요. 그중 6번째, 간음을 주제로 한 에피소드에 분량을 추가 개봉한 작품입니다. 관음은 작품의 핵심적인 설정입니다. 멀리는 히치콕의 이창, 가까이는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에 이르기까지 엿보기는 에로스를 다룬..

Film/Romance 2024.03.04

노을이 지난 후에도 _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미야케 쇼 감독

# 0. 처연하고 찬란한 노을이 지난 후에도 이어져 나갈 소중한 것들에 대하여 미야케 쇼 감독,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 ケイコ 目を澄ませて』입니다. # 1. 오가와 케이코. 도쿄 아라카와구 출생. 선천적 감음 난청으로 양쪽 귀가 모두 들리지 않는다. 2019년 프로복서 라이선스 취득. 데뷔전 1라운드 1분 52초 KO 승리. 선천적 청각장애인 여성 복서 오가사와라 케이코의 자서전 를 원작으로 합니다. 청각장애인 여성 복서라는 캐릭터가 목적의 전부였다면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요. 감독은 구태여 영화라는 형식을 선택하고 있죠. 비슷한 경우 왜 굳이 그녀의 이야기를 영화로 각색한 걸까. 조금 더 정밀하게 질문하자면 감독은 그녀의 인생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있는가. 에 대한 대답을 탐미해 보는 ..

Film/Drama 2024.02.26

치명적인 무해함 _ 침입자들의 만찬, 미즈노 이타루 감독

# 0. 부조리 위에 펼쳐진 탐욕과 위선을 제압하는 치명적인 무해함 미즈노 이타루 감독, 『침입자들의 만찬 :: 侵入者たちの晩餐』입니다. # 1. 영화는 뻔뻔스럽게 범죄 스릴러를 주장하지만 전반적인 톤은 코미디 어드밴처라 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사건이 벌어지는 후지사키 나츠미의 집 역시 현실적 주거 공간이나 차가운 범죄 현장이라기보다는 흥미진진한 던전에 가깝게 연출되어 있죠. 응큼하고 지저분하지만 엉성하고 귀엽기도 한 여섯의 인물들이 각자의 음흉한 목적을 위해 지지고 볶는 하룻밤 소동극입니다. 소동극의 묘미라면 역시나 분투하는 인간들의 소동을 귀엽고 가엽게 그리는 시선이라 할 수 있을 텐데요. 역시 그 온건함에 대단히 충실합니다. 각본가 바카리즈무의 기질이 묻어나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죠. 작품을 견인..

Film/Comedy 2024.02.04

낡은 선풍기의 표정 _ 패닝, 전예진 감독

# 0. 무더운 여름날, 시각장애인 해담은 고장 난 선풍기를 고치기 위해 수리기사를 부른다. 전예진 감독, 『패닝 :: Fanning』입니다. # 1. 해담은 시각장애인입니다. 낡은 선풍기가 고장 났다는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파생된 몇몇의 사건들과, 그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주인공의 감정을 진지하면서도 담백하게 그려낸 작품이죠. 서사를 들여다보기 앞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배치와 구도'입니다. 선풍기를 단순히 소재로 소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간 전체로 확장시키려는 듯 보이거든요. 수리기사, 윗집여자, 집주인. 세 명의 침입자들은 공통적으로 거실 중앙을 차지합니다. 해담은 수리기사의 시퀀스 동안에는 3시 방향의 침실에, 윗집여자의 시퀀스 동안에는 7시 방향의 거실 구석에, 집주인의 ..

Film/Drama 2024.01.30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_ 믿을 수 있는 사람, 곽은미 감독

# 0. 박한영은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곽은미 감독, 『믿을 수 있는 사람 :: A Tour Guide』입니다. # 1. 정착을 꿈꾸는 20대 이방인 한영의 서울 생존기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믿음'이라는 개념에 대한 고찰이기도 합니다. 믿음은 통상 신뢰, 신앙, 신념, 신용 등 다양한 의미를 가지는데요. 작품에서는 신뢰와 신용을 선택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신뢰는 개인 간 주고받는 다정함에 대한 기대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겁니다. 신용은 사회인으로서 합의된 사항을 충실히 이행하는 도리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죠. 영화는 북한을 신용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로, 탈북민은 신용을 경험해 보지 못해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한국을 외국인 손님들에게 소개하는 일이 영광스럽..

Film/Drama 2024.01.26

불안을 다독이는 영화라는 축복 _ 라모나, 안드레아 바그네이 감독

# 0. 안정과 충동 사이에서 불안한 인간 현실과 허구 사이에서 확장되는 시네마 안드레아 바그네이 감독, 『라모나 :: Ramona』입니다. # 1. 주인공은 둘입니다. 하나는 불안한 인간 라모나구요, 둘은 그런 불안한 인간에게 있어 영화의 의미라 할 수 있겠죠. 최대한 있어 보이게끔 말을 굴려보자면 안정과 충동 사이에서 불안한 인간, 현실과 허구 사이에서 확장되는 시네마랄까요. 라모나는 '불안'한 인간입니다. 부정하든 극복하든 분출하든 어떻게든 불안을 처리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자, 희망이나 욕망이 아닌 불안에 근거해 행동하는 사람이죠. 고아라는 설정은 최소한의 기반조차 없다는 면에서 불안에 내동댕이 쳐진 인물의 처지를 과장합니다. 구체적 개인임과 동시에 보편적 도시인이기도 합니다. 클래식 음악 위로 비..

Film/Drama 2024.01.24

소외된 자 기댈 곳 믿음뿐일지니 _ 신세계로부터, 최정민 감독

# 0.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최정민 감독, 『신세계로부터 :: From the New World』입니다. # 1. 화신교 교주 신택과 신도 명선은 탈북자입니다. 화신교란 화신님을 믿음으로 모시면 죽은 사람을 부활시킬 수 있다는 교리를 가진 작은 종교죠. 신택은 신도를 모으기 위해, 명선은 죽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경남 고성의 한 마을에 정착하는 데요. 그 과정에서 벌어진 마을 사람들과의 갈등을 서늘하게 그린 미스터리 오컬트 드라마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겁니다. 주인공 명선은 배우 정하담이 맡았습니다. 독립영화 쪽에서는 착실히 인지도를 쌓고 있는 배우인데요. 대중에겐 에서 질곡동 살인사건의 용의자 홍산호의 연인으로 익숙하지 않으실까 싶군요. 작품의 전개는 비틀린 부조리로 점철됩니다. 탈북자가 자유..

Film/Drama 2024.01.22

민규는 민규 _ 당신도 주성치를 좋아하시나요?, 강동완 감독

# 0. 우디 앨런을 좋아하시나요? 강동완 감독, 『당신은 주성치를 좋아하시나요? :: Do you like Chow Shing Chi?』입니다. # 1. 여친한테 차이고 찐따처럼 혼자 영화 보던 민규는 불쑥 홍콩 여행을 떠납니다. 숙소에 막 도착한 민규는 침대에 기대 잠시 쉬려 하는데요. 최강희병 말기 환자 같은 여자 하나가 냅다 들이닥치더니 자기 방이라 우기기 시작합니다. 알고 봤더니 예약이 꼬여 같은 방을 둘 다 잡았던 것이었죠. 졸지에 이스라엘 당한 팔레스타인 꼴이 된 민규는 서윗하게 방을 빼기로 하는데요. 그냥 물러서기엔 본전 생각이 났던 건지 시은에게 따라다녀도 되냐 제안하고, 여자는 승낙합니다. 시은의 전직은 가이드였던 걸까요. 어지간한 패키지 투어보다 코스가 깔끔합니다. 세기말 홍콩 영화들..

Film/Drama 2024.01.16

맑은 하늘의 자화상 _ 어느 멋진 아침, 미아 한센 로브 감독

# 0. 불안한 선택의 미로 끝에 뒤돌아 깨닫는 맑은 하늘의 자화상 미아 한셀 로브 감독, 『어느 멋진 아침 :: One Fine Morning』입니다. # 1. 파리라는 배경, 불안이라는 코드, 걷는다는 이미지는 아녜스 바르다의 같은 작품을 생각나게 합니다. 마침 프랑스 영화이기도 하고, 각각 코린 마르샹과 레아 세두의 존재감으로 견인하는 작품이기도 하니까요. 혹은 삶의 무게에 떠밀린 주인공의 분투를 현실적으로 그린다는 면에서 노아 바움백의 같은 작품이 연상되기도 하는군요. 겉보기에는 주인공 산드라의 고단한 삶을 진중하게 조명하고 독려하는 드라마처럼 보이는데요. 생각하기 따라서 그보다 조금 더 깊은 주제의식을 가진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벤슨 증후군에 걸린 산드라의 아버지 게오르그의 메모에 담긴 ..

Film/Drama 2024.01.12

극한신파 _ 3일의 휴가, 육상효 감독

# 0. 지금까지 이런 엄마는 없었다. 이것은 모성인가 학대인가. 예에~ 3일의 휴가입니다~ 육상효 감독, 『3일의 휴가 Our Season』입니다. # 1. " 한평생 딸을 위해 희생하다 혼자 쓸쓸하게 죽은 엄마가 딸이 정신병 걸린 걸 알고 죽어서까지 힐 넣어주고 사라진다. " 영화는 위의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그나마의 전개도 마지막 10여 분에 바짝 몰려 있는 터라, 예정된 결말에 도달하기까지의 지난한 시간들은 감정적 이완과 수축의 반복이라는 단조로운 구성으로 점철되어 있죠. 이때의 수축이라 함은, 엄마는 희생하고 딸은 대못 박는 회상장면들을 통해 관객을 심정적으로 옥죄는 것을 말하구요, 이완은 밥 먹는 장면과 조연들에게 기계적으로 배분된 몇몇의 코미디를 통해 느슨하게 풀어주는 과정을 뜻합니다. ..

Film/Drama 2024.01.08

떡볶이도 해주라 _ 문경이네 집, 김수현 감독

# 0. 편안한 표현들로 편견을 포착해 나가는 각본의 힘 김수현 감독, 『문경이네 집 :: The House of MunGyeong』입니다. # 1. 편견에 대한 영화입니다. 핵심적인 미장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겁니다. 하나는 편견에 대한 박약한 근거로서의 '냄새'와 관련된 코드들. 담배라거나 화장품, 양말 등이 될 테구요. 다른 하나는 편견으로 인한 차별로서의 '단절'과 관련된 코드들. 보호의 영역으로서의 인도와 배타의 영역으로서의 차도, 횡단보도를 아슬아슬하게 건너고 건너지 못하는 모습, 그 앞을 가로지르는 가드레일의 단절감, 모범생 반장과 노는 친구들의 대비라거나, 자동차를 타고 집에 가는 주인공 채진과 혼자 걸어가는 친구 문경 등이죠.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이미지가 응집된 '문경이..

Film/Drama 2023.12.04

불쾌함의 이유 _ 다섯 번째 흉추, 박세영 감독

# 0. 불쾌하니까 별로라는 감상은 시시합니다. 박세영 감독, 『다섯 번째 흉추 :: The Fifth Thoracic Vertebra』입니다. # 1. 비단 영화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향유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제 아무리 포용적이고 개방적이라 한들) 저마다 최소한의 기준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편하게는 취향, 조금 더 고상하게 말한다면 감식안(鑑識眼)이라 부르는 것들이죠. 제 스스로 견제하고 점검하는 몇 가지 대전제 중 하나는 '감독은 바보도, 괴물도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비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못 만든 영화라는 것은 엄연히 존재하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관객은 보편타당한 근거를 들어 합리적인 수위에서 평가할 권리를 가짐에 분명합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저 감독이란 사람들도 관객..

Film/Thriller 2023.11.28

납득할 수 없는 위기 _ 앰부배깅, 한정재 감독

# 0. 아무리 다양한 이미지를 담고 있다 한들 위기에 납득할 수 없다면 이야기 역시 휘발되고 만다. 한정재 감독, 『앰부배깅 :: Ambubagging』입니다. # 1. 내과 인턴의사 김민지는 이숙자 환자에게 앰부배깅을 하고 있다. 86세인 이숙자의 상태는 좋지 않다. 곧 숨이 끊어질 것 같다. 병원에선 이숙자 환자의 보호자를 찾는 방송을 계속 하지만 병원에 있던 이숙자의 손자는 처치실로 오지 않는다. 이숙자의 호흡을 유지시키기 위해 계속 앰부배깅을 하는 민지에게 엄마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동생이 아기를 낳는다고 빨리 오라는 전화다. (2017년 제34회 부산국제단편영화제) # 2.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인간의 아이러니를 병원이라는 제한된 공간과 의사 민지의 상황 위로 두텁게 겹쳐 놓은 단편입니다...

Film/Drama 2023.11.26

파스텔색 울타리 _ 스크래퍼, 샬롯 리건 감독

# 0. 혼자라는 오해가 만든 파스텔색 울타리를 사랑스럽게 넘는다. 샬롯 리건 감독, 『스크래퍼 :: Scrapper』입니다. # 1. 큰 틀에서는 가족영화 겸 성장영화라 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일찍 엄마를 여읜 열두 살 배기 엄복동 조지와, 뜬금 나타나 아빠라 주장하는 짝퉁 에미넴 제이슨이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는 식의 가족영화이구요, 동시에 각자 나름의 자기 성찰에 도달한다는 면에서 성장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죠. 비슷한 경우 결말에 이르러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립한다는 식으로 흘라가기 마련입니다. 내내 퉁명스럽던 사람들이 팀워크가 요구되는 어떤 극적인 사건을 겪은 끝에, "...아빠...", "...우리 딸..." 뭐 이런 식의 눈물 폭발 엔딩은 익숙하죠. 그렇게 변..

Film/Drama 2023.11.24

오만과 편견 _ 가면과 거울, 민병훈 감독

# 0. 왜 하필 백영수인가. 민병훈 감독, 『가면과 거울 :: Mask and Mirror』입니다. # 1. 백영수 화백(1922~2018)과의 동행입니다. 김환기, 이중섭, 유영국, 장욱진 등과 함께 신사실파(新寫實派)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유명한 1세대 원로 화가인 데요. 다소 생소하신 분들조차 대표작이라 할 수 있을 시리즈만큼은 눈에 익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을 향해 다가가듯, 달아나듯, 밀려나듯 걷는 예술가와 그의 뒤를 쫓는 카메라입니다. 과감한 클로즈업은 인물의 상황에 주목할 것을 반복적으로 요구합니다. 초라하고 무방비한 아침 화장실과, 아래로 낮게 침전되는 동선과, 눈 마주칠 것을 강요하는 거울과, 짐짓 무덤처럼도 보이는 둔덕과, 늙고 마른 나무껍질을 만지는 늙고 마른 손길과, 줄지어 환영..

Film/Drama 2023.11.14

열린 볼라드 너머 _ 보통의 카스미, 다마다 신야 감독

# 0. 안드로메다에 가지 못해 슬픈 사람은 없어. 다마다 신야 감독, 『보통의 카스미 :: そばかす』입니다. # 1. 카스미는 연애를 하고 싶지도, 그런 감정이 들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정이 있어서는 아니구요, 타고나길 그렇게 태어난 인물이죠. 세상은 그녀의 성향을 이해하기는커녕 존재를 인지하지조차 못합니다. 직장 동료들의 최대 관심사는 언제나 연애고, 엄마는 의무감과 부채의식에 결혼을 닦달하고, 동생은 사랑의 결실을 몸소 증명하고 있는 '모범적인' 임산부죠. 카스미와 세계의 관계는 대표적으로 직업에 은유됩니다. 콜센터 상담사는 매뉴얼에 따라 수행하는 사무적이고 기계적인 사회적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후 이직하게 되는 어린이집 역시 나이와 무관하게 사랑으로 관계가 이루어지는 세상에 적응해야 하는 ..

Film/Drama 2023.11.04

어차피 목적지는 같으니까 _ 골목길, 오수연 감독

# 0. 두려움과 불편함의 갈림길에서 함께 걷는 법을 배운다. 오수연 감독, 『골목길 :: A Blind Alley』입니다. # 1. 늦은 밤 골목길을 걷던 문영이 추행을 당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됩니다. 폭력성과 별개로 흥미로운 것은 치한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것이 아니라, 굳이 조깅하는 모습을 보여준 후 추행한다는 점입니다. 처음부터 뒤에서 와락 덮치는 장면으로 연출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라는 걸 생각할 때, 해당 장면은 의도된 것이라 추측하는 것이 썩 자연스럽겠죠. 오프닝의 치한은 이후 서사에 유의미하게 개입하지는 않습니다. 은채가 치한과 만난다거나, 중간에 치한이 잡혀 서사의 흐름이 바뀐다거나 하는 것은 없으니까요. 즉, 일련의 오프닝은 상당히 제한적이고 목적지향적인 시퀀스라 할 수 있고, 그렇다면..

Film/Drama 2023.10.30

허무의 얼굴들 _ 이니셰린의 밴시, 마틴 맥도나 감독

# 0. 굳이 그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었던 허무의 얼굴들 마틴 맥도나 감독, 『이니셰린의 밴시 :: The Banshees of Inisherin』입니다. # 1. 작게는 개인의 인생, 넓게는 역사를 포함한 온 우주를 허무하고 공허한 것으로 규정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는 그 자체로 세계의 허무를 상징한다 할 수 있죠. 영화는 좁게는 두 명, 넓게는 네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데요. 콜린 패럴의 파우릭 설리반, 브렌던 글리슨의 콜름 도허티, 케리 콘던의 시오반 설리반, 배리 키오건의 도미닉 키어니가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은 허무에 대응하는 각기 다른 방식들을 대변합니다. 적극성을 기준으로 나열한다면 가장 소극적인 사람부터 도미닉, 파우릭, 콜름, 시오반의 순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

Film/Drama 2023.10.26

내가 너의 장례식에 갈게 _ 테스와 보낸 여름, 스티븐 바우터루드 감독

# 0. 인생의 모든 순간에서 함께 자라고 함께 추억하는 우리 스티븐 바우터루드 감독, 『테스와 보낸 여름 :: Mijn bijzonder rare week met Tess』입니다. # 1. 가족 여행을 온 '샘'이 휴가지에서 만난 '테스'와 보낸 1주일입니다. 평화롭고 귀엽고 안전한 가족 영화 혹은 어린이 영화라 소개해도 무리는 없을 작품이죠. 영화는 어디로 튈지 모를 아이들의 하루가 다른 성장기이자, 사랑하는 사람들과 추억을 쌓아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성장기이며, 이들의 휴가를 통해 인생의 의미를 반추하게 될 우리들의 성장기입니다. 아이들은 유치하지만 심오하고, 섬세하지만 거침이 없습니다. 전반부의 모호한 전개는 그 자체로 아이들의 세계를 은유합니다. 감독은 샘과 테스를 묘사함에 있어 각기 다른 방법론..

Film/Drama 2023.10.20

문장의 모습, 소리, 그리고 맛 _ 쥐잡이 사내, 웨스 앤더슨 감독

# 0. 그 양반이 얼~마나 뛰어난 문장가였냐면 말이다~ 웨스 앤더슨 감독, 『쥐잡이 사내 :: The Rat Catcher』입니다. # 1. 로알드 달 원작의 단편입니다. 의 글에서도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넷플릭스가 로알드 달 스토리 컴퍼니(RDSC)를 인수한 후 웨스 앤더슨을 섭외해 진행한 네 편의 결과물 중 하나인 작품이죠. 본론에 앞서 프로젝트의 성격을 짚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시도일 겁니다. 감독 입장에서 한꺼번에 영화를 네 편씩이나 만들어야 한다면, 각각의 작품 이전에 프로젝트 자체에 대해서도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테니까요. 비슷한 프로젝트들의 경우 지난 시대의 작가를 새로운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고, 해당 프로젝트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

Film/Comedy 2023.10.18

세 번의 외출 _ 37초, 히카리 감독

# 0. 네온사인 어지러운 밤. 바람이 시원한 바다. 초록이 숨 쉬는 태국. 세 번의 외출 끝에 처음으로 돌아온 진정한 나의 집. 히카리 감독, 『37초 :: 37 セカンズ』입니다. # 1. 성장 영화입니다. 미숙하던 주인공이 서너 가지의 안전한 해프닝을 겪은 후 내면의 성장에 도달하고, 겸사겸사 주변인들도 함께 성장한다는 류의 전형적인 일본식 성장 영화죠. 뇌성마비 후유증이 있는 장애인을 주인공 삼았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을 테구요, 장애인의 성적 자각이 성장의 모멘텀이 되어주고 있다는 것 역시 주요한 특징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글의 제목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서사는 크게 '세 번의 외출'로 요약할 수 있는 데요. 본격적인 외출을 이야기하기 앞서 출발점으로서의 집에 대해 짚고 가..

Film/Drama 2023.10.16

안전막 없는 트램펄린 _ 풀타임, 에리크 그라벨 감독

# 0. 그 어린 엄마는 잘 지내고 있을까 에리크 그라벨 감독, 『풀타임 :: À plein temps』입니다. # 1. 싱글맘의 고단하고 치열한 일상을 스릴러의 긴박감으로 그려낸 드라마입니다. 이야기에 특별함은 없고 이야기를 즐기는 영화도 아닙니다. 캐릭터성이 강한 주인공을 탐구하는 류의 이야기도 아니구요, 연출에서 강한 개성이 발견되는 작품도 아닙니다. 영화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싱글맘을 상정한 후 그녀의 평범한 일상에 치밀하게 집요하게 접근합니다. 두 아이를 혼자 키워내는 싱글맘이 느낄 법한 감정들, 이를테면 압박감이나, 고독감, 피로감, 조바심 따위를 해체해 각기 다른 현실적 레이어로 흩뿌려 투영하는 것에 집중합니다. 감독은 싱글맘의 스트레스를 주인공의 감정 묘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

Film/Thriller 2023.10.14

헤어진 그녀와의 인터뷰 _ 선우와 익준, 양익준 감독

# 0. 찰나의 감정마저 이토록 두터운데 양익준 감독, 『선우와 익준 :: Sunwoo and Ikjune』입니다. # 1. 선우와 익준은 함께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자, 9년을 만난 연인입니다. 두 사람은 익숙함과 별개로 지나온 긴 시간만큼의 차이를 가지고 있고, 이는 오프닝에서부터 시선, 표정, 자세, 동선, 걸음의 속도, 배경 등 다양한 표현을 통해 부드럽게 은유됩니다. 오늘은 여자 수인이 남자 재석에게 이별을 고하는 신을 촬영하는 날. 두 사람은 완만한 오르막을 무겁게 걸으며 잠시 후 있을 촬영에 대해 논의합니다. 선우는 헤어지자 말하는 여자 수인을 두둔합니다. 익준은 그런 수인의 잔인함을 지적합니다. 촬영이 진행되고 감독 선우는 배우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요. 수인 역의 진서는 되려 수인이 비겁한 ..

Film/Romance 2023.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