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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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305

안부 전화를 해요 _ 줄스, 마크 터틀타웁 감독

# 0. 어떤 영화는 소박해서 훌륭하다. 마크 터틀타웁 감독,『줄스 :: Jules』입니다. # 1. 전형적인 미국의 마을에는 전형적인 미국인 할아버지가 살고 있고 그가 사는 전형적인 미국식 저택 뒤뜰로 전형적인 회색빛 우주선이 추락한다. 다들 뒤뜰에 먹다 남은 외계인 하나쯤은 있을 테니 그리 이상할 것 없는 평범한 이야기다. 요염한 자세로 쓰러진 진지한 표정의 외계인과 그가 타고 온 우주선의 꼬락서니만 보더라도 이 영화가 얼마나 소박한 것인가를 가늠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니 SF가 아니다. 외계인이 초능력으로 강도의 머리통을 폭파시킨다거나, 수상한 노인 둘이서 죽은 고양이 시체 7구를 트렁크에 모은다거나, 검은 옷 빼입은 요원들이 문을 부수고 들이닥치는 등 몇몇의 사소한 장면들만..

Film/Comedy 2025.04.20

브레히트와 세 번의 기적 _ 더 원더, 세바스찬 렐리오 감독

# 0.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세바스찬 렐리오 감독,『더 원더 :: The Wonder』입니다. # 1. 기나긴 역사 속에서 운명은 수차례 인간을 짓밟았고, 19세기 초 아일랜드에 들이닥친 대기근은 유독 가혹한 것으로 기록된다. 터무니없는 결핍에 내동댕이쳐진 인간은 합리적인 대응 따위로는 벗어날 수 없고, 한계에 다다른 인간은 필연적으로 이 모든 위기를 단숨에 해결해 줄 기적에 종착한다. 따라서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수많은 이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기적은 보통 아름다운 것으로, 환상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그것은 그르지 않다.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로 인해 진보된 숱한 역사가 증명함이다. 다만 기적의 대상이 가뭄을..

작위 부작위의 법칙 _ 바질과 데이지, 정수진 감독

# 0. 모든 작위에 대해 크기는 같고 방향은 반대인 부작위가 존재한다. 정수진 감독,『바질과 데이지 :: Basil and Daisy』입니다. # 1. 성당 문을 빼꼼 들여다보는 오프닝은 안정적이다. 어색한 소녀는 이내 인자한 인상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풀어놓는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를 겪은 화자의 내적 성찰임을 표현하는 작품들의 익숙한 플롯이다. '오이를 붙이고 있었어요, 오이를.' 작품의 인상을 결정하게 될 첫 대사는 힘준 티가 너무 나서 어색하다. '아, 그전에 말씀을 드리면 저는 엄마랑 단 둘이 살아요, 3년 전부터. 아빠는 돌아가셨구요, 되게 오래 아프셨거든요. 그래서 준비를 했었어요, 예상했던 이별이었으니까.' 로 이어지는 도치 4연타가 어색함을 한껏 ..

Film/Drama 2025.04.12

무소유 _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 소아전 감독

# 0. 소유와 교환 사이에서 필요를 깨닫는다        소아전 감독,『타이페이 카페 스토리 :: Taipei Exchanges』입니다.     # 1. 우리는 소유하며 살아간다. 자산을 가지고 능력을 가지고 경력을 가진다. 공간과 시간, 생각, 기억, 기회를 가지고, 이 모든 것들의 총체로서 이야기를 가진다. 삶은 소유의 범위를 최대한 넓혀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여긴다. 역행하는 것은 불안하다, 심지어 불행하다 평가하길 꺼리지 않는다. 교환이라는 행위가 재미있는 건 언제고 굳건해 보이는 소유하는 마음이 해체되는 몇 안 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버리는 것과는 다르다. 버린다는 것은 가치가 없음을 전제하지만 교환은 여전히 가치 있다 여김에도 필요치 않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가진 무언가를 교환하기로..

Film/Drama 2025.04.10

헤어지는 중입니다 _ 휴먼 보이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 0. 예술로 사색한다는 것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휴먼 보이스 :: The Human Voice』입니다.     # 1. 폭이 넓은 붉은 드레스의 틸다 스윈튼이다. 건조한 스튜디오를 걸어 의자에 앉는다. 창백해서 더욱 미술적인 마스크 위로 강한 그림자가 떨어진다. 검은색 드레스로 갈아입은 배우는 다시 스튜디오를 가로지른다. 오프닝이다. 푸른 정장의 여자는 도끼를 산다. 영수증은 거절. 교환할 일은 없다. 볼일을 마친 여자는 키우는 개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집을 수놓고 있는 수많은 그림들을 뒤로한 채. 개는 줄지은 여행가방의 냄새를 맡는다. 여자는 4년간 사귀었던 애인과 사흘 전에 헤어졌다. 책과 앨범을 정리한 그녀는 스튜디오의 콘크리트 벽이 눈앞에 펼쳐진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운다. ..

Film/Drama 2025.03.24

스코틀랜드의 횃불 _ 맥베스, 저스틴 커젤 감독

# 0. 거스를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처절한 횃불은 스스로 피고 진다        저스틴 커젤 감독,『맥베스 :: Macbeth』입니다.     # 1. 우리는 맥베스를 욕망의 화신이라 이해하고 있고, 그 욕망엔 별다른 불순한 것의 개입이 없음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욕망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어떤 면에선 지령과 달라 보이지 않는 마녀의 예언에서부터, 광기 어린 맥베스 부인의 몰아치는 추궁과 독려, 모두의 선망 위에 군림하는 던컨 왕을 향한 시기, 혈통만으로 왕위가 예정되어 버린 부조리한 말콤 왕자의 존재와, 이미 얻은 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표독스러운 집착까지. 이 모두는 맥베스가 욕망하는 분명한 이유임과 동시에 어느 것도 명징한 대답은 되지 못한다. 욕망은 어디에서 오는가...

Film/Drama 2025.03.02

간음한 여인 _ 창녀와 크리스마스, 페트라 비온디나 볼프 감독

# 0.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페트라 비온디나 볼프 감독,『창녀와 크리스마스 :: Dreamland』입니다.     # 1. 크리스마스이브, 스위스 취리히에 사는 외로운 네 가족의 이야기다. 매춘부 담당의 사회복지사이지만 늦은 밤이면 애인 몰래 다른 남자들과 성관계를 가지는 주디스. 남편이 매춘했음을 알게 된 부유층의 임산부 리나. 이혼의 괴로움과 외로움을 매춘을 통해 해소하려는 롤프. 남편과 사별한 후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친구 주앙을 유혹하는 마리아. 이들 네 가족의 이야기는 모두 불가리아 출신 창녀 미아와 연관이 있다. 짐짓 근대문학의 제목 같기도 한 창녀와 크리스마스는 한국의 배급사가 지어 붙인 이름으로 원제는 드림랜드, 꿈나라다. 대부분의 ..

Film/Drama 2025.02.04

숨을 참는다 _ 맘말, 레베카 달리 감독

# 0. 깊은 물속에서 숨을 참는다        레베카 달리 감독,『맘말 :: Mammal』입니다.     # 1.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 이혼녀와 가출 청소년의 이야기를 포유류(哺乳類)라 명명한다. 이면에 담긴 종 단위 본성을 관조하기 위함이다. 흥미로운 것은 동물 일반이 아닌 굳이 좁은 범위의 포유류로 특정했다는 것이다. 포유류는 젖먹이 동물로, 수컷과 암컷이 새끼를 낳고 암컷이 유선에서 분비된 젖을 먹여 새끼를 키우는 방식을 특징한다. 즉 영화는 젖을 먹이고 싶은 암컷의 본성과 번식하고자 하는 수컷의 본성에 대한 것이다. 인상적인 오프닝처럼 '물'은 작품을 장악하고 있는 핵심적인 메타포다. 영화의 착점으로서 '포유류스러움'을 의미한다 이해하면 무난하다. 수영장을 가로지르는 마가렛의 오프닝에서 ..

Film/Drama 2025.01.20

사랑을 믿어요 _ 더 리젬블런스, 데릭 응우옌 감독

# 0. goodbye son.        데릭 응우옌 감독,『더 리젬블런스 :: The resemblance 』입니다.     # 1. 부부에겐 아들이 있다. 아니,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와의 마찰로 집을 나간 아들은 2년 전 쓸쓸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부모에게 하나뿐인 아들의 상실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혼자만 다른 시간을 사는 화분처럼, 매일 꺼지지 않는 향처럼, 여전히 액자 속에서 웃고 있는 얼굴처럼 말이다. 과거에 정체된 부부는 서비스를 하나 신청한다. 패밀리 렌털 서비스는 가족과 최대한 닮은 배우를 단기 고용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고객들은 치유의 목적으로 신청한다 소개된다. 일종의 연극치료 같은 것이다.  물론 확신은 없다. 제 손으로 장례를 치른 죽은 아들과 닮은 배우를 만..

Film/Drama 2025.01.14

비열한 망각에 복수하다 _ 복수는 나의 것,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 0. 안식과 풍요에 숨은 비열한 망각에 복수하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복수는 나의 것 :: 復讐するは我にあり』입니다.     # 1. 박찬욱의 영화를 기대한 독자에겐 유감을 표한다. 이 글은 1979년작에 대한 이야기다. 송강호와 신하균이 열연한 박찬욱의 그것은 정직하게 복수에 대한 것이었던 반면,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복수와 무관한 연쇄 살인에 대한 것이다. 실제 주인공 에노키즈와 대부분의 희생자들 사이에는 뚜렷한 원한이 없고, 심지어 느슨하게나마 호의를 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희생자들은 하나같이 선량하고 무고한 사람들이며, 이는 경찰에 붙잡혀 스스로 말하듯 에노키즈 역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감독은 자신의 이야기를 '복수는 나의 것'이라 이름 ..

대도시의 고고학 _ 머더리스 브루클린, 에드워드 노튼 감독

# 0. 이야기가 이미지와 뉘앙스를 떠받치지 못한다.        에드워드 노튼 감독,『머더리스 브루클린 :: Motherless Brooklyn』입니다.     # 1. 지금의 뉴욕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 시작을 탐구하려는 영화의 시선은 거침없는 제목처럼 서늘하다. 에드워드 노튼의 1950년 맨해튼은 대립하는 양면성과 그로 인한 고독감으로 요약된다. 풍요와 빈곤이 대립하고, 개발과 파괴가 충돌하는 뉴욕. 사랑과 죽음이 공존하고, 신용과 배신이 교차하는 브루클린. 낮은 자본과 다투고 밤은 낭만에 물드는 도시와, 이를 배회하는 외로운 개인들의 시대라고 말이다. 각자의 사정에 따라 내외면이 유리된 모두는 영화 내내 고독하다. 이들은 빠짐없이 뉴욕을 모자이크 하는 조각이라는 면에서,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

사그라드는 제국의 선율 _ 클로징 다이너스티, 로이드 리 최 감독

# 0. 팔아선 안될 것들을 파는 동안 사그라드는 제국의 선율        로이드 리 최 감독,『클로징 다이너스티 :: Closing Dynasty』입니다.     # 1. 위력적인 단편의 결말은 두 가지 이미지의 중첩이다. 하나는 퀴니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식당이 문을 닫는다는 것, 다른 하나는 소녀가 하루종일 벌어들인 돈을 부모님의 금고에 넣었다는 것이다. 전자를 세계에 대한 감독의 진단이라 한다면, 후자는 그 진단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이자 원리다. 즉발적인 감동은 제목의 언어유희와 관련된 폐업을 앞둔 다이너스티의 꺼진 간판에 있을지 모르나, 그럼에도 영화의 본질은 소녀가 돈을 버는 방식과 그 이유에 있다. 저연령 빈곤층 이민자라는, 연령과 계급과 신분을 복합적으로 은유하는 퀴니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교..

Film/Drama 2024.12.20

실망입니다 _ 더 납작 엎드릴게요, 김은영 감독

# 0. 기대가 배신되면 관객은 반드시 실망한다.        김은영 감독,『더 납작 엎드릴게요 :: Will you please stop, please』입니다.     # 1. 사람은 누구나 선입견을 가지고 있고 영화를 대하는 관객 역시 다르지 않다. 제목의 개성이든, 시놉시스의 창의성이든, 감독의 스타일이든, 배우의 명성이든, 박스오피스의 성적이든, 작품의 규모든 그 근거가 뭐가 됐든 말이다. 이때의 선입견은 다시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예측이고 다른 하나는 기대다. 예를 들어 조커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 가정할 때 '배트맨도 나오지 않을까?'라는 것은 예측이고 '겁나 멋진 조커가 나를 가슴 뛰게 하겠구나!'라는 건 기대다. 예측은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예측한 대로 배트맨이 나온다 해서 문제 될 ..

Film/Drama 2024.11.28

북쪽의 사람들 _ 노스맨, 로버트 에거스 감독

# 0. 선량한 복수의 세계로 빨아 당기는 일렁임, 이글거림, 으르렁거림.        로버트 에거스 감독,『노스맨 :: The Northman』입니다.     # 1. 우리는 그리스-로마 신화를 즐기는 동안 올림푸스와 동시에 그런 상상을 만개하던 아고라를 함께 떠올린다. 길가메시 서사시를 읽으며 인생의 유한함을 고찰하면서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고민을 했던 그 옛날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자취를 함께 즐긴다. 히브리 신화를 읽는 동안 기독교 교리 아래로 당대 서아시아 지역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생활상을 상상하고, 단군신화를 배우며 쑥과 마늘의 이야기 이면에 담긴 오래전 한반도에 자리했던 조상들과의 문화적 연결성을 확인한다. 이처럼 신화가 특별한 건 이야기만큼이나 특별한 화자의 세계가 동시에 느껴진다는 것..

Film/Drama 2024.11.18

단단해지기 _ 아침이 오면 공허해진다, 이시바시 유호 감독

# 0. 단단해지기를(을) 사용했다!효과는 굉장했다!        이시바시 유호 감독,『아침이 오면 공허해진다 :: 朝がくるとむなしくなる』입니다.     # 1. 평범하게 소박한 이이츠카의 이야기는 솔직함에 관한 것이다. 대부분에게 당연하고 평화로울 아침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애써 커튼을 당기듯 스스로 거짓되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거짓이란 타인을 향한 거짓과 자신을 향한 거짓을 모두 의미한다. 흔히 모든 거짓은 이기적이라 생각하지만 오해다. 여전히 직장을 다니고 있다 숨기는 거짓말은 유리한 것이지만, 그런 자신의 인생에서 채워진 것으로서의 대견함을 인지하지 못하는 건 불리한 거짓말이다. 대부분의 거짓말이 유리함에도 어떤 거짓말들이 그렇지 않은 건, 그들에겐 거짓이 아플지언정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방..

Film/Drama 2024.11.12

시간과 격려 _ 라스트 버스, 질리스 맥키넌 감독

# 0. 맞닥뜨리는 죽음에서 받아들이는 죽음으로        질리스 맥키넌 감독,『라스트 버스 :: The Last Bus』입니다.     # 1. 시작과 출발이 정해진 노인의 여행은 무릇 인생을 은유하기 마련이나, 티모시 스폴의 이야기는 다소 이질적이다. 아내의 죽음에서 시작해 자신의 죽음으로 끝난다는 면에서, 탄생에서 죽음까지 훑어나가는 '인생'보다는 '죽음' 그 자체를 들여다보는 것에 가깝다. 또한 죽음에도 서사가 있으며, 출발점으로서의 죽음과 도착점으로서의 죽음이 달리 존재함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입에서부터 그러하듯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관한 것이다. 브리튼섬 서남단 랜즈엔드(Lands' End)에서 시작된 사랑이 동북단 존 오그로츠(John o' Groats)로 숨어든 것은 눈에 넣..

Film/Drama 2024.11.02

카타르시스 _ 아일린, 윌리엄 올드로이드 감독

# 0.  콤플렉스의 교도소. 트라우마의 지하실. 성탄절의 카타르시스        윌리엄 올드로이드 감독,『아일린 :: Eileen』입니다.     # 1. (2017)를 통해 억눌린 욕망과 반동을 서슬 푸른 광기로 그려낸 감독은, 차기작에서도 음습하고 내밀한 욕구를 억누르며 사는 여인 아일린에게 주목한다. 주인공 역은 세상의 모든 불안을 담고 있는 듯한 눈망울의 토마신 맥킨지가 맡았다. 레베카 역은 매 순간 관객의 시선을 장악하는 앤 해서웨이가 연기한다. 오테사 모시페그의 원작 소설에서 영감을 얻은 윌리엄 올드로이드는 뛰어난 두 배우와의 협업을 통해 엄격하고 배타적인 환경과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내면 사이 유리된 자아의 혼란을, 급작스러운 범죄 사건에 얹어 탐구한다. 아일린은 보수적인 1960년대 미국 ..

독의 촉감 _ 독, 웨스 앤더슨 감독

# 0. 결국 뱀에 물리고만 의사였다.        웨스 앤더슨 감독,『독 :: Poison』입니다.     # 1. 넷플릭스가 주도하고 웨스 앤더슨이 연출한 4편의 로알드 달 단편 프로젝트 중 하나다. 에서 자유로운 이야기의 역동성을, 에서 절륜한 문장력의 위력을 증명했던 감독은 을 통해 간결한 이야기로 녹여낸 인간 탐구를 서늘한 촉감으로 구현한다.  인도 땅에서 인도 뱀의 위협을 피해 인도 의사의 도움을 받게 된 영국 군인 해로 포프의 이야기다. 해리의 부름을 받은 우즈와 함께 영화는 시작되는 데 이후로도 우즈는 사건의 관찰자로서 화자를 겸한다. 침대에 곧게 누은 해리는 배 위에 치명적인 독을 가진 우산뱀이 잠들어 있어 옴짝달싹할 수 없다. 깜짝 놀란 우즈는 잠시의 혼란 끝에 의사 간더바이에게 도움을..

Film/Comedy 2024.10.24

Fuxxing Man _ 조커 폴리 아 되, 토드 필립스 감독

# 0. 그 ㅈ같았던 영화를 위한 사소한 변호        토드 필립스 감독,『조커 폴리 아 되 :: Joker Folie à Deux』입니다.     # 1. 당황스러운 영화다. 전작을 호평한 사람들이 느꼈을 이질적인 인상은 평가와 별개로 부정할 수 없다. 더 잘 만든 영화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전작, 1편이다. 담백하게 그쪽이 완성도가 더 높다. 개인적으로도 영화는 상당히 양가적인 감정으로 즐겼다. 대단히 ㅈ같은 영화이면서, 그렇기에 흥미로운 영화라는 것이 솔직한 양심이다. 리뷰한다면 내적인 디테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당장은 어색할 듯하다. 언젠가 적당한 시기가 있지 않을까. 뮤지컬 영화인 탓에 (2016)가 함께 거론되곤 하는 데, 사실 방법론적으로는 같은 감독의 (201..

길 잃은 남자 _ 고립된 남자, 바실리스 카추피스 감독

# 0. 그 사람이 바로 나예요.        바실리스 카추피스 감독,『고립된 남자 :: Inside』입니다.     # 1. 고백하자면 나는 영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보는 동안 적어도 두어 번 이상 길을 잃었다. 이후의 글은 그 과정만을 간신히 옮긴 것이다.  자, 일단 스릴러는 아니다. 주인공은 처음 보는 늙은 도둑이고, 그의 위기를 걱정해야 할 동인이 없는 상황에서 긴장은 성립할 수가 없다. 호화로운 펜트하우스에 갇혀 말라죽어가는 윌렘 데포를 보며 안타까워할 사람보다는 연기에 감탄할 사람이 훨씬 많을 거라 예상하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실험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작위적 환경과, 감상을 어지럽히는 난해한 암시 탓에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면의 알레고리를 탐색하게 되는 데, 감독은 그 부분에서 ..

Film/Drama 2024.10.14

규범을 회의하는 두 개의 눈 _ 가여운 것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 0. 바라보는 눈과, 바라보는 눈을 바라보는 눈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가여운 것들 :: Poor Things』입니다.     # 1. 요르고스 란티모스다. 여지없이 과격하고 기괴한 스타일이지만, 진정 궁금한 것은 이번엔 또 어떤 관념에 도전하고 있을까라는 것이다. (2009)를 통해 언어와 사고 체계의 상관관계를 재고하고, (2015)를 통해 자아와 관계의 함의를 탐구했던 감독은, 야심 찬 엠마 스톤과 함께 규범과 사상을 회의한다. 단순히 규범을 어기는 일탈이 아니다. 규범을 어기는 것은 기존의 규범에 반하는 형태로 종속된 새로운 규범을 실천함이고, 이는 그가 어떤 명분과 대안을 제시하는 지와 무관하게 여전히 규범적이다. 란티모스는 규범이라는 것 그 자체에 대해 가치중립적으로 주목하고..

Film/Drama 2024.10.08

그녀 _ 행복, 아녜스 바르다 감독

# 0. 모든 면에서 그녀, 아녜스 바르다.        아녜스 바르다 감독,『행복 :: Le bonheur』입니다.     # 1. 남자 프랑수아는 도덕적으로 파탄한 인물임에 분명하나 그것은 전혀 논쟁적이지 않은 것이기에 매몰되는 것은 시시하다. 오히려 외도보다 중요한 것은 외도하는 인간의 사고방식이다. 작품이 이질적인 것은 프랑수아의 외도에도 불구하고 아내에 대한 불만이나 권태, 불성실을 연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전히 아내와 가족을 사랑하고 그로부터 큰 행복을 얻고 있지만, 새로운 여자 에밀리로 인해 추가적인 행복을 얻을 수 있었고, 그것이 행복의 총량을 증진시켰을 뿐이라는 식이다. 프랑수아를 정의하자면 '지극히 행복지향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인생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라는 명제를..

Film/Drama 2024.10.02

통제하는 눈빛과 다그치는 목소리 _ 황혼의 빛,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

# 0. 코이스티넨.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황혼의 빛 :: Lights in the Dusk』입니다.     # 1. 소외된 인간을 향한 연민과, 인간 소외를 강요하는 사회구조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고유한 스타일로 풀어내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2006년작이다. 네오리얼리즘적 전통에 특유의 북유럽 감성을 더해 새로운 영화 언어를 창조했다 평가되는 감독은, 언제나 북유럽 노동자의 구체적 현실을 배경으로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주변화된 인간을 담백하게 건조하게, 그럼에도 섬세하게 포착한다. 브레히트나 소격효과 같은 식상한 이름을 빌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누구나 위화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의 필모그래피는 이질적이다. 작품의 연대를 추측하는 게 힘들 정도의 미니멀리즘은 비단 이야기뿐 아니라 캐..

Film/Drama 2024.09.24

나는 거절한다 _ 욕망의 모호한 대상, 루이스 브뉘엘 감독

# 0.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면 당신은 절 사랑하지 않게 될 거예요.        루이스 브뉘엘 감독『욕망의 모호한 대상 :: That Obscure Object of Desire』입니다.     # 1. 거장 루이스 브뉘엘(Luis Buñuel, 1900-1983)의 유작이다. 피에르 루이(Pierre Louys)의 (1898)를 원작으로 한다. 주인공은 중년의 부호 마티유(페르난도 레이 분), 매혹적인 여인 콘치타(카롤 부케/안젤라 몰리나 분)다. 주요 플롯은 집착적 사랑을 기망당한 마티유가 기차 안 사람들에게 고발하는 동안의 플래시백이다. 영화는 제목처럼 욕망의 본질을 탐구한다. 욕망의 주체와 타인의 대상화, 결핍 및 폭력과의 관계성 따위를 특유의 초현실주의적 문법과 유머러스한 표현으로 풀어낸 걸..

Film/Comedy 2024.09.12

꿈과 광기의 세계 _ 영화 너무 좋아 폼포 씨, 히라오 타카유키 감독

# 0. ようこそ。夢と狂気の世界へ。        히라오 타카유키 감독,『영화 너무 좋아 폼포 씨 :: Pompo, The Cinephile』입니다.     # 1. 제목처럼 진솔한 영화는 말랑말랑한 표현과 달리 영화 제작의 세계를 진지하게 묘사한다. 우연히 기회를 얻은 젊은 영화인의 이야기 이면엔, 예술과 상업의 균형, 이상과 현실의 조율, 협업과 성장의 가치 등이 폭넓게 다뤄진다. 영화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작품은 비단 영화뿐 아니라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통용될 선량한 응원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작품이 정의하는 영화를 만들고 보는 행위의 의의로 환원된다. 폼포는 '날'리우드가 주목하는 천재 프로듀서다. 그녀는 예리한 직관과 산업에 대한 통찰을 가진 인물로, 진과 진의 눈을 빌린 관객들로 하여금 상업..

Film/Animation 2024.09.06

두려운 자의 품격 _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 맷 브라운 감독

# 0. 고통이 두려워 신을 부정하는 자와 고통이 두려워 신을 갈망하는 자 사이에서의 품격        맷 브라운 감독,『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 :: Freud's Last Session』입니다.     # 1. 은 미국의 극작가 마크 세인트 저메인(Mark St. Germain)이 아몬드 M. 니콜리 주니어(Armand M. Nicholi Jr.)의 저서 에서 영감을 얻어 쓴 희곡이다.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계기로 영국이 전면전을 선포하며 2차 세계대전에 돌입한 1939년 9월 3일을 배경으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 겸 기독교 호교론자 C. S. 루이스(C. S. Lewis)가 논쟁을 벌인다는 상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파크컴퍼니가 ..

Film/Drama 2024.09.04

그리움에 대하여 _ 이름 없는 다방에서, 정수지 감독

# 0. 이제 다시는 싫어. 웃는 것도 싫어졌네.이제 다시는 싫어. 웃는 것도 싫어졌네.        정수지 감독,『이름 없는 다방에서 :: Heyday』입니다.     # 1. 레트로 잡지와 오려 모은 스크랩. 십수 년은 더 돌아갈 금성사 선풍기. 한 장씩 뜯어 넘기는 달력. 엔틱 가구와 레이스 커튼. 둥근 다이얼의 전화기. 무자비한 괘종시계. 푹신하면서 불편했던 신기한 소파. 이젠 생소해져 버린 커피 배달.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던 보자기. 때 묻은 팔토시. 분홍색 머리띠. 노란색 드레스. 노른자 한 알 곁들인 모닝커피. 200자 원고지 위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 꼬깃한 종이에 수기로 쓴 주소. 팔각 성냥. 담배 연기. 이 모든 것들로 어우러진 1986년의 이름 없는 다방. 우리의 다방은 당신의 스타벅..

Film/Drama 2024.09.02

추락하는 조각상 _ 맨 오브 마스크, 알베르 뒤퐁텔 감독

# 0. 국가는 죽은 용사의 조각상을 가질 자격이 있는가        알베르 뒤퐁텔 감독,『맨 오브 마스크 :: Au revoir la-haut』입니다.     # 1. 콧수염이 유독 잘 어울리는 알베르 뒤퐁텔이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는, 피에르 르메트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알베르와 에두아르의 이야기로, 전쟁의 무자비함과 그보다 더 참혹한 이후를 탐구하며, 심미적 아름다움과 감동적인 스토리텔링, 유려한 블랙 코미디를 두루 선사한다. 매드 아티스트의 예술적 요소와 채플린을 연상시키는 듯한 블랙 코미디의 절묘한 조화는 작품의 매력이다. 감독은 전후 프랑스 사회의 위선과 부조리, 생존자들의 투쟁과 몰락을 예술적으로 풍자적으로 그려낸다. 연출은 놀라운 상상력과 감각으로 전쟁..

Film/Drama 2024.08.08

상상하는 것 _ 번개가 떨어졌다, 김지홍 감독

# 0. 영화란 나의 불완전함을 치열하게 상상하는 것이다.        김지홍 감독,『번개가 떨어졌다 :: Lightning Fell』입니다.     # 1. 번개에 맞아 식물인간으로 지내다 깨어난 남자가 역할 대행 서비스를 신청한다는 내용의 영화는, 불행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 이면에 영화에 대한 영화로 보인다. 실제 영화 속에 담긴 장면들은 남자가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여자와 함께 연기하는 순간들로 점철된다. 캐스팅과 디렉팅과 리허설과 본 촬영이 축약된 모습은 미니멀리즘적인 마이크로 시네마다. 영화 속에 실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배우 최기욱은 번개 맞은 남자를 연기할 뿐 남자가 아니다. 고등학생을 연기하는 남자는 고등학생이 아니다. 그가 기억하는 누나와의 기억이 정확한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후반부..

Film/Drama 2024.08.04

개미굴 _ 고스포드 파크, 로버트 알트먼 감독

# 0. 개미굴을 관찰하는 건 개미의 역사와 본성을 알기 위함이다.        로버트 알트먼 감독,『고스포드 파크 :: Gosford Park』입니다.     # 1. 거장 로버트 올트먼은 2001년작 를 통해 관객을 100여 년 전 영국 상류층의 세계로 초대한다. 하나같이 꼬장꼬장한 귀족들의 차량이 줄지어 들어오는 동안 카메라는 보이지 않는 손님이 되어 끔찍한 주말 파티의 현장으로 스며든다. 쏟아지는 비를 지나 웅장한 문을 넘어 마주하는 미로와 같은 복도는 그 자체로 제국주의의 한계와 불안한 미래를 앞둔 1930년대 영국의 단면이다. 저택의 내부는 과시적인 우아함으로 가득하다. 눈 둘 곳을 정하기 힘들 만큼 정교하게 꾸며진 장식, 교양과 위선을 연기하는 귀족들의 화려한 의상, 정중하면서도 기계적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