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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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 42

퐁당퐁당 _ 러브, 데스 + 로봇 시즌 4

# 0. 돌을 던지자. 애니메이션 앤솔로지『러브, 데스 + 로봇 시즌 4 :: Love, Death + Robots Vol. 4』입니다. # 1. 이쯤 되면 징크스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첫 번째 시즌의 성공, 두 번째 시즌의 혹평, 세 번째 시즌은 첫 시즌의 성공을 계승하며 반전을 거두었던 것에 반해, 네 번째 시즌은 두 번째 시즌의 단점을 답습하며 주저앉는 듯하다. 아이디어의 부재를 연성화된 표현들로 무마하려던 두 번째 시즌에서처럼 이번에는 귀여운 코미디, 만만한 판타지로 만회하려 한다는 인상이 지나치게 강하다. 물론 어떤 작품이 귀여움과 코미디로 승부를 보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문제는 이 엔솔로지가 이라는 것. 금기를 허용하지 않는 실험적인 세계관과 공격적인 플롯, 강렬한..

Series/Animation 2025.05.20

게으르고 지루하다 _ 서브스턴스, 코랄리 파르자 감독

# 0. 중독된 것은 미모도 인기도 파괴도 아닌 지적인 게으름        코랄리 파르자 감독,『서브스턴스 :: The Substance』입니다.     # 1. 푸른색 배경에 계란 하나. 노른자에 주사를 꽂자 분열하더니 둘로 나뉜다. 나란히 놓인 노른자 두 개와 흰자의 실루엣은 무언가의 얼굴처럼 보이는데, 그것의 정체는 알 수 없으나 은연중 불쾌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문제작 서브스턴스의 오프닝이다. 영화는 도입에서 경고하듯 강렬한 이미지를 난사하는 방식으로 일관한다. 비슷한 주제의식을 미리 다뤘던 단편 와는 썩 대조적인 시도다. 쏟아지는 이미지 속에서 함의를 찾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비단 디스플레이뿐 아니라 모든 프레임들, 이를테면 광고판이나, 액자, 창문, 통로, 주요하게는 거울까지 모두 각..

Film/Horror 2025.03.08

뉴식이 두마리 치킨 _ 루프 트랙, 토마스 세인즈버리 감독

# 0. 뉴질랜드산 특대사이즈 오골계 2마리 28000원. 계란 추가(+3)        토마스 세인즈버리 감독,『루프 트랙 :: Loop Track』입니다.     # 1. 태만하게 못 만든 호러 영화는 짜증스럽지만, 열심히 못 만든 호러는 의외로 재미있다. 특유의 진지함이 나름 귀엽기도 하고, 열심히 해 보려는 과정에서 벌어진 황당한 부분들이 되려 코믹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생소한 뉴질랜드산 크리처 영화는 문자 그대로 열심히 못 만든 호러다. 대체 뭘 했길래 제작하는 데 7년씩이나 걸린 건지 알 수 없지만, 비장의 무기였을 크리처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쉴 새 없이 웃음이 터져 나온다. 만약 이 영화를 보는 모습을 누군가 몰래 지켜봤다면, (2024)을 볼 때만큼이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발견했을지도 모른..

Film/Horror 2024.12.04

캡사이신 우유 _ 렌필드, 크리스 맥케이 감독

# 0. 유리멘탈 현대인을 위한 다정하고 매콤한 캡사이신 우유        크리스 맥케이 감독,『렌필드 :: Renfield』입니다.     # 1. 브램 스토커(Bram Stoker)의 소설 (1897)의 등장인물 렌필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호러, 코미디, 액션, 판타지 영화다. 한창 유행인 리메이크나 리부트가 아닌 보조적 인물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라는 것, 특히 외전 격의 이야기 대신 기존 서사를 전복시켜 독자적 주제의식을 가진 작품에 도전했다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다. 영화는 야심에 걸맞게 고전의 고풍스럽고 음습한 분위기를 대신하는 컬트적이고 경쾌한 현대적인 모습이다. 완성도와는 별개로 말이다. 감독은 드라큘라 신화를 현대 사회의 권력 구조와 종속 관계에 대한 알레고리로 재해석한다. 드라큘라와 렌..

Film/Action 2024.09.08

잘 자요 _ 드림 시나리오, 크리스토퍼 보글리 감독

# 0. 잘 자요.        크리스토퍼 보글리 감독,『드림 시나리오 :: Dream Scenario』입니다.     # 1. 정갈한 머리의 니콜라스 케이지가 매일밤 꿈속에 나타나 당신을 지긋이 바라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런 니콜라스 케이지의 꿈을 수많은 세상 사람들이 똑같이 꾼다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심지어 갑자기 꿈속의 니콜라스 케이지가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도발적 상상의 판타지 영화 는 (2002)로 데뷔한 크리스토퍼 보글리의 차기작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번 작 역시 창의적인 설정과 도발적인 표현, 유쾌한 코미디 이면엔 알싸한 풍자가 가득하다. 주연은 니콜라스 케이지가 맡았다. (2021)에서 보여줬던 과격하고 야생적인 모습과 대조되는 소심하고 찌질한 연기를..

Film/Comedy 2024.07.10

죽거나 혹은 미치거나 _ 어메이징 디지털 서커스, 구스웍스 감독

# 0. 글리치 프로덕션(Glitch Productions)을 아시나요?        구스웍스 감독,『어메이징 디지털 서커스 :: The Amazing Digital Circus』입니다.     # 1. 닐 블룸캠프의 오츠 스튜디오 이후 오랜만에 스튜디오 소개글이다. 물론 하꼬 블로거 따위가 '소개'하기엔 지나치게 월클이지만 말이다.  글리치 프로덕션(Glitch Productions)은 다채롭고 개성적인 디자인, 매콤한 블랙 코미디, 재기 발랄한 스토리로 미래지향적인 가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호주 국적의 인디 애니메이션 제작사다. 초기작 (2019)와 (2021) 이후, 미국의 애니메이터 리암 빅커스(Liam Vickers)가 총괄로 합류한 (2021)으로 도약한 글리치는, 작년 또 다른 애니메이터 쿠퍼..

Series/Animation 2024.06.28

최면은 세 번이었습니다만 _ 악마와의 토크쇼, 케인즈 형제 감독

# 0. 도대체 언제부터... 내가 최면을 걸지 않았다고 착각한 거지? 캐머런 케언스, 콜린 케언스 감독『악마와의 토크쇼 :: Late Night with the Devil』입니다. # 1. 내레이터의 보이스오버가 주인공 잭 델로이의 배경을 설명하며 영화는 시작된다. 그는 인기 심야 토크쇼의 진행자로 능력과 야망을 겸비한 인물이지만, 전설적인 진행자 자니 카슨(Johnny Carson, 1925-2005)의 뒤에 가려진 만년 이인자다. 급작스런 아내의 죽음으로 극심한 슬럼프를 겪은 그는, 재기를 위해 오컬트 에피소드를 기획하며 승부수를 던진다. 사이비 종교의 생존자 릴리, 심령술사 크리스투, 초심리학자 준 로스-미첼, 트릭 파괴자 카마이클의 라인업은 영원히 역사에 남을 에피소드를 예고..

Film/Horror 2024.05.22

근본으로의 회귀 _ 러브, 데스 + 로봇 시즌 3

# 0. 회초리의 효과는 굉장했다!! 애니메이션 앤솔로지『러브, 데스 + 로봇 시즌 3 :: Love, Death + Robots Vol. 3』입니다. # 1. 어울리지 않게 15세로 간을 봤던 지난 시즌은 결국 혹평으로 마무리되고 말았습니다. 스타일리시한 화풍과 다이내믹한 액션으로 빚어낸 뛰어난 영상미.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아이템을 과감하게 동원하는 참신한 서사. 허무와 냉소를 테마로 한 철학적 주제의식이라는 세 축이 모조리 흔들리며 죽도 밥도 아닌 시즌이 되고 말았다 말씀드린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군요. 로튼 50%가 무너지며 회초리를 세게 맞은 효과가 굉장했나 봅니다. 전 시즌에 훼손된 평판을 복구하려는 듯 첫 번째 시즌에서 호평받았던 장점들을 노골적으로 답습합니다. 특히 호러와 ..

Series/Animation 2022.05.26

손가락 _ 자이고트, 닐 블롬캠프 감독

# 0. 오츠 스튜디오(Oats Studios)를 아시나요.         닐 블롬캠프 감독,『자이고트 :: Zygote』입니다.     # 1. 의 닐 블롬캠프 감독이 설립한 실험 영화 제작사입니다. 감독 특유의 성향이 물씬 묻어나는 단편들을 적당히 뿌려 간을 보다가 각이 나온다 싶으면 장편으로 태세 전환하려는 응큼한 속셈의 프로젝트죠. 이렇게 말하면 뭔가 온갖 감독들의 사적 프로젝트들을 줄줄이 꿰고 있는 듯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까짓 게 그런 걸 어떻게 알겠어요. 넷플릭스 긁어보다 얻어걸린 거 맞습니다. 좋은 세상입니다. 적당한 광고 시청을 지불하면 어지간한 단편 영화나 고전 영화들은 공짜로 볼 수 있는 세상이죠. 앞서 넷플릭스에서 보았다 말씀드렸습니다만 오츠 스튜디오의 작품들은 유튜브와 스팀에..

Film/Horror 2022.05.22

그림자의 성녀 _ 세인트 모드, 로즈 글래스 감독

# 0.  한 톨도 새지 않게 꼭꼭 눌러 담아 응축된 광기의 에너지        '로즈 글래스' 감독,『세인트 모드 :: Saint Maud』입니다.     # 1.  피를 뒤집어쓴 얼굴, 내면의 무언가가 망가진 사람의 눈을 한 여인이 고개를 들어보지만 머리 위엔 막힌 천장의 모서리와 혐오스러운 벌레 한 마리뿐입니다. 모드는 작은 골방에 살고 있습니다. 소란스러운 바깥의 소리는 옆으로 길게 찢어진 모양의 창이 닫히며 조용해집니다. 사회와 단절된 공간은 마치 감옥의 독방처럼 보입니다. 무언가 '죄'를 짓고서 홀로 감옥에 갇힌, 보다 정확히는 스스로를 감옥에 가둔 인격이군요. 그녀의 직업은 호스피스입니다. 새롭게 일하게 된 곳으로 가기 위해 짐을 싸 방 밖을 나섭니다. 빛이 스며드는 좁은 골목이 마치 어둠을..

Film/Horror 2021.08.24

극본과 연출 사이 _ 킹덤 아신전, 김성훈 감독

# 0. Netflix 오리지널 드라마 의 첫 번째 외전입니다. 두 개의 정규 시즌을 끝낸 후 신규 캐릭터에 대한 외전이 전개될 계획이었던 듯합니다만 팬더믹으로 인해 외전 시리즈가 몇 편 더 이어지는 요량인가 본데요.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습니다만 시리즈를 애정 하는 입장에서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되는군요. '김은희' 작가, '김성훈' 감독, 『킹덤 _ 아신전 :: Kingdom _ Asin of the North』입니다. # 1. 특정 캐릭터에 집중하는 '인물전'은 보통 두 가지의 접근법을 가집니다. 하나는 본편에서 충분히 활약한 인물의 남겨진 떡밥을 회수하는 경우구요, 또 다른 하나는 새롭게 등장할 인물이 곧바로 본편에 안착할 수 있도록 필요한 과거 설정들을 미리 전달하는 경우죠. 전자는 시리즈나 시리즈 ..

Film/Horror 2021.07.31

오히려 좋아 _ 더 템플, 마이클 바렛 감독

# 0. 의외로 평점 1점은 보기 힘듭니다. 어지간히 욕먹는 영화들도 대부분 4점대, 정말 열심히 노력해도(?) 3점대가 최선이죠. 네임드 망작들도 있습니다만 되려 이런 류들은 컬트적인 유명세 덕에 평점이 높기 마련입니다. 다음영화 기준 클레멘타인 무려 9.1 이구요, 무서운집 8.2, 라스트 갓파더 6.9, 자전차왕 엄복동 4.6, 주글래 살래 4.0,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3.9, 리얼 3.7이죠. 그 와중에 긴급조치 19호는 2.0 이네요. 역시 갓동님 존경합니다. 이 영화는 다음 영화와 왓챠피디아 모두에서 평점 1.2를 찍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 정도면 얼마나 못 만들었을지 너무 궁금하지 않나요? 나만 궁금해? 나만 쓰레기야? '마이클 바렛' 감독, 『더 템플 :: Temple』입니다. # 1. ..

Film/Horror 2021.07.21

랩탑 무비 _ 블레어 위치, 다니엘 미릭 / 에두아르도 산체스 감독

# 0. 시리즈를 연이어 보다 보니 문득 요런 류의 영화가 땡기더라구요. '다니엘 미릭', '에두아르도 산체스' 감독, 『블레어 위치 :: The Blair Witch Project』입니다. # 1. 코시국이라 곤란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어지간하면 영화는 극장에서 보는 편이 좋습니다. 호러든 코미디든 드라마든 멜로든 스릴러든. 압도적인 스크린 크기가 주는 박력과 디테일한 화질, 전문가들이 세심하게 설계한 음향 등 감독의 의도에 최적화되어 있는 환경이 주는 경험의 퀄리티는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죠. 오가는 데 필요한 유무형의 비용이 만만치 않고 집 안 소파에 비해 좌석도 불편하며 다른 무엇보다 에티켓을 담보할 수 없는 불특정 다수와 함께 볼 수밖에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좋아하시는..

Film/Horror 2021.07.19

앙코르 _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스핀오프, 나카이즈미 유야 감독

# 0. 보통 맛있는 음식은 두 번 먹어도 맛있습니다. 처음 먹을 때만큼은 아니지만요. 나카이즈미 유야 감독,『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스핀오프 할리우드 대작전!カメラ を止めるな! スピンオフハリウッド大作戦!』입니다. # 1. 최대 강점은 컨셉을 잘 잡았다 라는 점일 겁니다. 속편이 아니라 스핀오프를 기획했다는 점 말이죠. 속편은 전작과 동등한 위계에서 온전한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증명해야 합니다. 충분한 볼륨은 물론이거니와 시리즈물로서의 일관성은 유지하면서 동시에 고유의 차별점 혹은 개선책을 준비해야 하죠. 특히 전작이 많은 사랑을 받은 명작이라면 난이도는 급상승합니다. 고생해서 잘 만들어 놓으면 겨우 당연한 거 아냐?라는 소리밖에 못 듣는 반면, 못 만들기라도 했다간 욕만 바가지로..

Film/Horror 2021.07.13

번뇌와 번민에 빠진 건 누구? _ 제8일의 밤, 김태형 감독

# 0. 애매하게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하기보단 각 잡고 하나를 제대로 하는 편이 낫습니다. 특히나 데뷔작이라면 더더욱 말이죠. 영화는 크게 불교, 오컬트, 범죄 스릴러라는 세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요. 안타깝게도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하게 작동하지 못하는데 그 원인은 각각의 코드가 서로의 발목을 붙잡기 때문인 듯 보입니다. '김태형' 감독, 『제8일의 밤 :: The 8th Night』입니다. # 1. 시작과 동시에 부처님은 눈깔 뽑기 장인이 됩니다. 흔히 불교 하면 떠올릴법한 자비나 참선 등의 이미지와 배치된 다소 폭력적인 설정이지만, 뭐 그럴 수 있죠. 감독은 이 부분의 문제를 후반부 관념화를 통해 극복합니다. 빨간 눈깔은 번뇌하는 눈, 검은 눈깔은 번민하는 눈이라는 건데요. 확실히 이 토대에서라면..

Film/Horror 2021.07.07

진라면 순한맛 _ 러브, 데스 + 로봇 시즌 2

# 0. 이건 다 매운맛 진영의 모함입니다? 애니메이션 앤솔로지『러브, 데스 + 로봇 시즌 2 :: Love, Death + Robots Vol. 2』입니다. # 1. 꿀잼! 거리면서 호들갑을 떨었던 러브, 데스 +로봇의 두 번째 시즌입니다. 새 작품을 보는 김에 이전 리뷰를 다시 읽어봤는데요. 아무리 취향에 맞았기로서니 낯간지러운 소리를 많이도 했더군요. 돌이켜보면 한창 감동에 취해 적당히 나이브하고 편의적인 구성도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외면하기도 했었습니다. 칭찬을 위한 칭찬을 찾아 헤맨 티가 나기도 하구요. 아, 그럼에도 종합적으로 훌륭한 앤솔로지였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지금까지도 시간 날 때마다 간간히 다시 보고 있기도 하죠. 시리즈의 성격은 제목 그대로입니다. 사랑과..

Series/Animation 2021.05.24

3단변신로봇 _ 인비저블맨, 리 워넬 감독

# 0. 하나의 영화처럼 보이지만 사실 서사를 부분적으로 공유하는 세 장르물이 접붙여져 있는 쪽에 조금 더 가까운 작품입니다. 인트로 아카펠라, 발라드, 기타 솔로, 오페라, 하드 락, 아우트로의 6개 부분으로 구성된 '퀸'의 처럼 이 영화는 전반부, 중반부, 종반부에 걸쳐 각기 다른 세 장르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습니다. '리 워넬' 감독, 『인비저블맨 :: The Invisible Man』입니다. # 1. 전반부 장르는 호러입니다. '세실리아'가, 잠든 '애드리안' 몰래 집을 벗어나는 6분. 결코 짧다 할 수 없는 긴 시간 동안 아무런 대사도, 음향도 없이 감독은 영화의 분위기를 최대한 침전시킵니다. 가장 내밀한 공간인 침대, 그중에서도 '애드리안'의 끌어안은 손아귀에서 출발한 주인공은 수많은 공간과 ..

Film/Horror 2021.01.09

회색지대의 남자 _ 그 남자의 집, 레미 위크스 감독

# 0. 바다 건너 영국 땅에 닿은 난민 부부 '볼'과 '리알'의 이야기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던 아프리카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삶의 과정 전체를 폭력적으로 압도하는 난민이라는 정체성. 상반된 두 정체성이 과격하게 충돌하는 동안의 심리적 불안을 오컬트 풍의 공포감으로 치환해 감각화한 작품입니다. '레미 위크스' 감독, 『그 남자의 집 :: His House』입니다. # 1. 어느 국가 어느 부족의 어떤 사람이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아왔는가, 어떤 과정을 거쳐 영국에 도착했는가, 새롭게 정착하게 된 곳에서의 생활을 앞두고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가 역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한 사람들입니다."라는 '볼'의 말은 영국 난민청 직원들에게 전혀 고려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진심은..

Film/Horror 2020.11.04

언럭키 곡성 _ 데블, 존 에릭 도들 감독

# 0. 오컬트에 기반한 초현실적 세계관 속 인물들이 만드는 독특한 위화감으로 승부를 보는 소위 샤말란스러운 영화입니다. 사건의 해석 전체를 뒤흔드는 강렬한 반전 결말 대신, 결말에 도달하기까지의 적당히 경제적인 낚시성 호러 연출로 승부를 보고자 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네요. '존 에릭 도들' 감독, 『데블 :: Devil』입니다. # 1. 실망스럽습니다. 잘만 버무리면 충분히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을 법한 각기 다른 세 장르의 매력을 동시에 쫓았습니다만 결과적으로 그 어떤 장르의 매력도 효과적으로 살려내지 못합니다. 단일 사건이 발생하는 동안 세 공간을 의식적으로 구획한 후 각각 특정한 장르에 귀속시킵니다. 악마에 의해 지배당하게 된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섯 명의 승객과 함께 영화를 바라보는 동안은 철저..

Film/Horror 2020.11.02

겉멋 올인 -2- _ #살아있다, 조일형 감독

이전글 : 겉멋 올인 -1- [#살아있다, 조일형 감독] # 9. 아기자기한 트랩과 북유럽 감성 자연주의 텐트를 뚝딱 만들어 재끼는 작고 귀엽지만 생존력은 만렙인 똘똘한 여캐 는 인간적으로 너무 식상한 것 아닐까요. 대체 왜 자기 집 거실 한복판에서, 썩어 나는 조명에도 불구하고 촛불을 켜 놓은 채, 담요를 둘둘 감아 만든 아동용 임시 텐트 안에서, 불편하게 대기를 타는 건지 1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아무래도 감독님이 영화를 찍을 즈음해서 『슈퍼맨이 돌아왔다』 같은 육아 예능에 꽂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 한 방울이 아까워 날짜별로 마킹해 한 모금 한 모금 아껴 마셔야 하지만 화분에는 물을 아낌없이 나눠주는 갬성충 유빈의 모습은, 감독이 자신이 지금 뭘 만들고 있는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Film/Horror 2020.09.10

겉멋 올인 -1- _ #살아있다, 조일형 감독

# 0. 한없이 어색한 디스코드 대화가 등장하는 순간. 좀비가 된 아이가 단아하게 걸어와 "엄마 어딨어"를 내뱉는 순간. 눈 앞에서 딸이 엄마를 물어뜯는 아비규환을 목격했음에도 우리의 주인공이 걸쇠 하나 걸지 않고 문을 열어재끼는 순간. 갑툭튀한 옆집 남자와 전혀 이해되지 않는 억지스러운 대화를 주고 받고 그 남자가 밑도 끝도 없이 화장실을 쓰겠다 말하는데 그걸 냉큼 받아주는 순간. 때 마침 세상 편리하게도 TV 앵커는 정확히 필요한 이야기를 해주는 설명충을 자처하고. 배경 설명이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 옆집 남자가 각기춤을 선보이는 순간. '유아인'이 댄스 장인을 현관문을 향해 밀치자 마치 누가 손잡이를 돌려 잡기라도 한 듯 문이 쉽게 열리는 걸 목격하는 순간. 정확히 10분 만에 영화에 대한 기대감은 ..

Film/Horror 2020.09.09

첫 단추의 중요성 _ 도시괴담, 홍원기 감독

# 0. 살짝 번아웃이 와서 이글까지만 쓰고 보름 정도 짧게 블로그질을 쉴 생각입니다. 원래는 가스파 노에 감독의 『러브』까지만 쓰고 쉬려고 했는데 짧은 런타임에 혹해서 본 국산 호러물에 마음이 동해 한편을 더 남기게 됐네요. '홍원기' 감독, 『도시괴담 :: Goedam』입니다. # 1. 기대 이하의 노잼입니다. 만, 사실 당연한 결과입니다. 잠시만 생각해보면 이건 감독의 역량과 무관하게 기획단계에서부터 망할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거든요. # 2. 마지막화 을 제외하면 모든 에피소드들이 짧으면 7분 길면 8분입니다. 그마저도 마지막 2분은 엔딩 크레디트이죠. 말인즉 호러물이 성립하기 위한 최소한의 뼈대 1. 기본적인 배경과 주인공 소개 2. 위화감을 형성하는 오싹한 분위기 조성 3. 웅장한 음악과 함께 ..

Series/Horror 2020.08.22

드디어 보았노라 _ 무서운집, 양병간 감독

# 0.  대작이 올라왔네요. 이런 기회를 놓칠 수야 없죠. 뭐가 되었든 한 분야에 최고의 자리에 오른 작품들은 한 번쯤 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양병간' 감독,『무서운집 :: Scary House』입니다.     # 1.  여타의 글들은 작품을 보고 느낀 감정이나 주제의식 혹은 철학에 대한 생각, 이야기의 구성이나 표현의 방식 따위에 대한 제 개인적인 썰들을 풀어놓곤 했습니다만 이 작품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원테이크로 담아낸 가정주부의 무료한 일상에 관한 하이퍼 리얼리즘공포, 계단 따위로 재해석된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의 고립감과 무력함귀신과 여사님 간의 역할 경계가 붕괴되어 가는 시퀀스에 대한 함의 수차례 등장하는 베사메무초와 춤사위에 담긴 제의적 이미지의 의미  따위..

Film/Horror 2020.08.04

뱀과 사다리 _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우에다 신이치로 감독

# 0. 자칫 간과하곤 합니다만 이해력에도 한계는 있습니다. 일정 범위, 규모, 시행을 넘어서는 정보에 대해선 취합해 정리하는 것은커녕 아예 이해를 포기하게 되죠. 백조 천조가 넘어가는 돈의 규모에 단위 감각 자체가 사라진다거나 수십만 수백만 광년을 넘나드는 우주적 스케일 앞에 현실 감각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우에다 신이치로 감독,『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 カメラ を止めるな!』입니다. # 1. 합의된 허구로부터 어떻게 리얼리티를 설득해 낼 것인가 라는 질문은 창작자에게 있어 벗어날 수 없는 필연적 화두일 겁니다. 창작의 자유로움과 관객에 대한 존중을 위해 자신이 풀어놓는 이야기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충분히 합의하면서도 동시에 가..

Film/Horror 2020.07.22

날개 없이 추락하는 자들을 위한 _ 레퀴엠,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

# 0.  레퀴엠[requiem] 위령 미사 때 드리는 음악. 정식명은 이지만 가사의 첫마디가 "requiem (안식을...)"으로 시작하는 데서 이와 같이 부르게 된 것이다. 진혼곡, 장송 또는 진혼미사곡 등으로 번역되어 쓰이기도 한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레퀴엠 :: Requiem for a Dream』입니다.     # 1.  고차원적인 철학적 사유나, 다양한 층위에서의 감정적 낙차, 치밀하게 조립된 서사를 즐기는 영화는 아닙니다. 충격적인 연출에 힘입은 전율이 일 정도의 육중한 감수성입니다. 글의 제목 그대로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계곡 아래로 날개 없이 추락하는 자들의 비장한 마지막을 달래는 진혼곡입니다. 서사의 완성도를 짚는 건 부질없는 짓입니다. 엄마 사라 골드팝은 꿈에 ..

Film/Drama 2020.07.14

이유있는 자신감 ⅱ _ 드라마 킹덤 시즌2, 김성훈 / 박인제 감독

이유있는 자신감 ⅰ _ 드라마 킹덤 시즌2, 김성훈 / 박인제 감독 # 0. 전 시즌의 리뷰 와는 달리 이번 시즌은 화 별로 짧게 짧게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이전 시즌이 넓고 평탄하게 설정과 인물을 나열하고 소개하는 시즌이었던 것에 반해 이번 시즌 morgosound.tistory.com # 7. 4화 _ 조범팔 『기생충』도 그렇고 온갖 장르를 버무리는 게 요즘 트렌드인 걸까요. 『킹덤』 역시 오컬트, 좀비, 액션, 드라마를 지나 이번엔 타임어택 레이스에 살짝 발을 걸칩니다. '조학주'의 뒤를 쫓는 '창'의 물리적 추격전과, '중전'의 음모와 어영청의 수사 사이의 서사적 추격전을 동시에 내달립니다. 전편의 글을 '빌런의 중량감을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하다'라는 말과 함께 마무리했었는데요. 작..

Series/Horror 2020.03.20

이유있는 자신감 ⅰ _ 드라마 킹덤 시즌2, 김성훈 / 박인제 감독

# 0. 전 시즌의 리뷰 와는 달리 이번 시즌은 화 별로 짧게 짧게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이전 시즌이 넓고 평탄하게 설정과 인물을 나열하고 소개하는 시즌이었던 것에 반해 이번 시즌은 인과를 바탕으로 서사를 쭉 뽑는 시즌이기 때문이죠. 아, 물론 하나의 글로 정리하자니 귀찮기 때문인 것도 맞습니다. '김은희' 작가, '김성훈', '박인제' 감독, 『킹덤 시즌 2 :: Kingdom season 2』 입니다. # 1. 1화 _ 풀 액셀 전 시즌의 호평과 인기에 조금 더 자신감을 얻은 걸까요. 한국적인 것이 발목 잡는 게 아니라 신선함으로 먹히는구나라는 걸 확인한 제작진이 조금 더 과감해진 듯한 인상입니다. 액션물, 좀비물, 정치극 등의 보편적 장르를 코어로 삼았던 전 시즌에 비해 이번 시즌은 ..

Series/Horror 2020.03.18

용두사미 _ 높은 풀 속에서, 빈센조 나탈리 감독

# 0. 두 남녀가 차를 타고 인신매매를 위해 캘리포니아로 갑니다. 오빠는 햄버거를 혼자 맛있게 먹고 그 꼴이 뵈기 싫었던 임산부 동생은 토를 하죠. 동생의 헛구역질에 입맛이 떨어진 오빠는 차를 세우는데요. 때마침 찝찝하기 그지없는 풀떼기들 사이에서 웬 꼬마 아이의 "도움!" 소리가 들립니다. 오지랖이 발동한 임산부는 뱃속의 아이는 나 몰라라 하고 남의 아이를 구하겠다 말하는군요. 동생은 갓 구운 피자 옆에다 읽던 책을 살포시 내려놓고 오빠는 먹던 햄버거를 남깁니다. 꼬마의 미끼에 낚여 풀 숲에 갇히게 된 오누이는 결국 아이언드래곤에게 빨래질을 당한 박무석이 되죠. 네. 이 작품은 햄버거를 남기면 변사체가 된다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빈센조 나탈리' 감독, 『높은 풀 속에서 :: in the Tall G..

Film/Horror 2019.10.12

너무 줄인걸까 -2- [버드 박스, 수사네 비르 감독]

이전글 : 너무 줄인걸까 -1- [버드 박스, 수사네 비르 감독] 공산품 캐릭터 자, 이제 아쉬운 점들을 이야기해 볼까요? 솔직히. 주인공 파티의 캐릭터 구성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상투적입니다. 뭔가 '이야기'라는 걸 하라면 으레 갖추어야만 할 것 같은 캐릭터들이 기계적으로 군집해 있는 모양새랄까요. 만능에 가까운 잔다르크 주인공과 수다스럽고 정 많은 여동생, 건강하고 밝고 착하면서 희생정신으로 온데 무장한 스테레오 타입의 백마 탄 왕자님과 차분하고 이성적인 게이 집주인,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백인 중년 마초, 조용하고 지혜로운 할머니와 회의적 허무주의에 빠진 약쟁이, 어설픈 여자 경찰 연수생에, 살찐 오덕 너드, 유약한 임산부까지. 딱히 작가의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 캐릭터들이 주..

Film/SF & Fantasy 2019.08.15

너무 줄인걸까 -1- [버드 박스, 수사네 비르 감독]

영화의 제목에서처럼 디스토피아 속 사람들 역시 케이지에 갇힌 새의 신세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해할 수 없고, 파훼할 수 없는 압도적 존재 앞에서의 무력감이 영화의 분위기를 육중하게 지배합니다. 극단적인 상황 하에 강제로 발가벗겨진 사람들의 본성과, 관계나 외로움과 같은 인성의 근원에 닿아 있는 관념들에 대한 고찰을 흥미롭게 제시합니다. 영화의 장르는 분명 공포, 서스펜스, 스릴러임에도 불구하고 진중하고 건조한 미스터리 소설과 같은 분위기가 기저에 흐르는 건 이런 철학적 주제의식과도 연관이 있는 거겠죠. 『진격의 거인』의 그것도 얼핏 연상됩니다만, 빌어먹을 쓰레기 극우 작가 놈 때문에 손절한 만화를 다시 떠올리고 싶지는 않으니, 최근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킹덤』을 연상하는 걸로 대신하도록 합시다. '수사..

Film/SF & Fantasy 2019.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