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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Mystery & Thriller

세 쌍둥이의 일그러진 초상 _ 시스터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

그냥_ 2026. 1. 1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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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폭로와 은폐, 시선과 권력, 관음과 진실의 선혈 낭자한 스플릿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

『시스터스 :: Sisters』입니다.

 

 

 

 

 

# 1.

 

결국 시스터스의 야심은 쌍둥이 다니엘과 도미니크, 그들을 관찰하는 기자 그레이스에 비춰 당대 모순을 투사하는 것이다. 감독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평생 따라다닌 히치콕스러운) 카메라 워크를 통해 분화된 심리적 갈등을 통합함으로써, 객관적 사실의 관찰을 통해 살인 사건을 해결하려는 시도가 어떻게 비합리적이고 기괴한 모습으로 추락하는가 집요하게 추궁한다.

 

흥미진진한 분할 화면(Split-screen)은 인식론의 본질을 묻는다. 결합되어 있었으나 폭력적으로 분리된 샴쌍둥이로 구체화된 '분열된 본성'을 시각화하는 동시에, 은폐하려는 자와 폭로하려는 자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간극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인상적인 케이크 살인 직후 청소 장면. 왼쪽 화면에는 에밀과 다니엘이 범죄 현장을 은폐하는 모습, 오른쪽 화면에는 그레이스와 경찰이 아파트로 진입하는 모습이 비친다. 과정에서 관객은 두 가지 상반된 긴장감에 노출된다. 청소의 일사불란함에 매료되어 범죄자가 발각되지 않길 바라는 스릴러적 욕구(왼쪽 화면)와,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라는 도덕적 욕구(오른쪽 화면)다. 관객의 인식을 양갈래로 찢어놓음으로써 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보이는 것이 어떻게 조작되고 통제될 수 있는가 실시간으로 구현하는 것이고, 따라서 해당 시퀀스의 본질은 갈라진 틈과 그 틈을 비집어 지켜보는 관객의 시선 그 자체에 있다.

 

그렇기에 드 팔마의 분할 화면은 구로사와 아키라가 라쇼몽에서 선보인 기억의 불확실성과 유사하지만, 감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 인식을 통제하고 조작하는 매체에 매개된 시선을 비판한다. 영화가 개봉한 1972년은 베트남 전쟁이 끝나가는 무렵으로, 텔레비전을 통해 매일 밤 안방에서 중계하면서도 실제 전쟁의 본질은 소외시켰던 당대 관음증적 매체 환경을 영화적 형식을 빌려 재구축하고 있다.

 

 

 

 

 

 

# 2.

 

잔인한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영화의 도입이 하필 피핑 톰즈(Peeping Toms)라는 이름의 가상 게임쇼인 이유다. 관음증이 개인적 일탈을 넘어 하나의 사회적 오락으로 제도화되었음을 선언하며 시작하는 것이다. 드 팔마는 자신의 영화 관객을 게임 쇼의 방청객에 위치시킴으로써 타인의 사생활을 엿보는 자의 도덕적 태만을 즉각 공격하고 있고, 이처럼 보는 행위를 관찰 대상을 착취하는 폭력이자 권력으로 정의하고 있다는 면에서 사실 그의 이름 뒤에 히치콕이 붙어 다니는 건 딱히 억울할 것도 없다.

 

기자 그레이스는 초기에 관찰자로서의 우위—창문 너머의 살인 목격.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도도 소소하게 주요하다.—를 점하는 듯 보이지만, 그녀의 시선은 곧 가부장적 권위(경찰, 어머니, 의사)에 의해 부정당하고 전복당한다. 시선이 주체를 진실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정신병원으로 몰고 가게 된다는 전개다. 시선이 권력과 결합되지 못할 때 관찰자는 오히려 관찰당하는 자로 전락할 수 있고, 이는 관음 권력에 도취된 대중에 대한 신랄한 경고를 겸한다. 감독은 내내 안경, 망원경, 창문, 모니터 등을 통해 끊임없이 서로를 감시하게 만듦으로써 70년대 냉전, 미국이 직면한 불신과 감시의 공기를 시각화한다. 그래서 엔딩 장면은 과연 상징적이다. 고용한 사람의 사정을 모르는 사립 탐정이 소파를 멀리 망원경으로 지켜보는 모습은, 해결되지 않는 진실에 대한 집착과 멈출 수 없는 관음적 시선의 허망함, 그 모든 것들의 아슬아슬함을 보여준다.

 

 

 

 

 

 

# 3.

 

이 모든 사건의 시작과 끝, 에밀 박사다. 그는 여성의 신체와 정신을 재구성해 통제하려 한다는 면에서 이른바 프랑켄슈타인적이다. 샴쌍둥이 분리 수술은 겉으로 의학적 치료를 표방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도미니크(공격적이고 반항적인 자아)를 제거하고 다니엘(순종적이고 수용적인 자아)만을 남기려는 시도와 다르지 않다. 수술 끝에 다니엘은 불임이 되는데 그녀의 신체가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 '기능적으로 거세된'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제거된 것으로 믿었던 도미니크는 다니엘의 무의식 속에 일종의 '환상통'처럼 남아, 그녀가 이성에 대한 친밀감을 경험할 때마다 남성(침입자)을 공격하는 분열된 인격으로 회귀하게 만든다. 사회가 규정한 '정상적 여성성'이란 것은 허구적인, 심지어 위태로운 환상이며, 그 억압된 분노가 때론 크리처적인 형태로 귀환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클라이맥스에서 그레이스가 겪는 고초는 여성의 주체성, 이를테면 정치적 의식이나 사회적 야망, 질서에 대한 도전 따위가 해체되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에밀은 그레이스를 최면 상태에 빠트려 그녀가 본 진실을 '없었던 일'로 재프로그래밍한다. 여성의 증언을 히스테리로 치부해 무력화해 온 무수한 역사의 알레고리다. 결과적으로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다니엘은 약물 치료를 통한 자아 억제를, 공격적이고 소유적인 도미니크는 사회적 낙인을 통한 제거를, 도전적이고 야심 찬 그레이스는 정신의학적 가스라이팅을 통한 기억 말살을 당한다는 결말. 그러하므로 브라이언 드 팔마의 영화는 둘이 아닌 세 쌍둥이에 대한 영화인 것이다.

 

 

 

 

 

 

# 4.

 

물론 세 여성은 불행하지만 그럼에도 가장 불쌍한 인물은 따로 있다. 모든 면에서 이용당하다 소파 안에 갇혀버린 희생자, 필립 우드다. 짐짓 맥거핀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는 주류 백인 사회의 질서 유지 과정에서 가장 먼저 지워지는 타자를 상징한다. 그레이스가 경찰이 사건 조사를 게을리하는 이유로 살인 용의자가 백인 여성이며 희생자가 흑인 남성이기 때문이라 지목하는 것처럼 말이다. 드 팔마는 공권력을 체제 안정을 위해 타인의 신체를 방치하는 방관자로 그려냄으로써, 당대 미국 사회 밑바닥에 흐르던 두터운 불신과 회의주의를 포착한다. 무엇보다 필립의 시신이 든 소파가 결국 아무도 찾지 않는 시골에 방치된다는 결말은 흑인의 생명권이 사회적 무관심 속에서 어떻게 소멸하는 가를 냉소하는 것이다.

 

결국 그레이스는 제도의 힘에 짓눌려 자아를 상실한 채 살인은 없었다 뇌까리는 수동적 존재로 전락한다. 체포된 다니엘은 육체적 자유는 물론 죽은 동생의 그림자 속에 갇혀 정신적 자유까지 잃는다. 사건은 전혀 해결되는 바 없이 한심한 소파 안에 숨겨지고, 그 소파를 무의미하게 관찰하는 시선만을 남긴 채 영화는 끝난다. 따라서 다분히 비관적인 시스터스는 괴리를 선보이는 영화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괴리, 보는 것과 아는 것의 괴리, 보는 권력과 보여주는 권력의 괴리. 관객은 그 틈을 통해 진실의 조각을 목격함에도 사회는 진실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말이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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