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제니퍼 맥셰인 감독,
『희망을 꿰매는 사람들』입니다.
# 1.
미주리주 소재 최고 보안 등급 교도소. 모범수 일부에게는 매년 보호 시설 아이들에게 선물할 퀼트를 만들 자격이 허락된다. 다큐멘터리에는 작업하는 죄수들이 담담하게 묘사되지만 그것을 보는 마음은 생각만큼 편하지 않다. 인터뷰가 있을 때마다 죄질을 가늠케 하는 형량을 성실히 알려주기에 자연스레 미움이 생기지만, 그들의 겸허한 태도와 평온한 표정, 퀼트에 몰두하는 모습, 아이들의 감사편지는 그러한 미움이 온전히 정당한가 되묻는다. 만약 죄수라는 정보가 부재했다면 그저 평범한 기술자로만 보였을 것이고,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움트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를 통해 반성하며 속죄하는 죄수들을 지켜보는 나는 과연 무엇을 미워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을 미워하는 것이 과연 나 자신의 도덕률을 스스로 확인하는 것 외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자문은 윤리적 사유를 부른다. 어쩌면 이 미움은 단순한 응보적 감정을 넘어, 죄지은 이가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불편함, 즉 '나 또한 언제든 저들처럼 악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무의식적 불안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미셸 푸코가 논의했다던 것처럼 죄수들을 미워하는 행위는 우리 사회의 규범적 틀 안에서 '정상적인 인간'이 지녀야 할 도덕적 태도를 재확인하려는 무의식적 과정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정의롭지 못한 행위에 대한 분노는 그 자체로 도덕적 기준을 재확인하고 사회 질서와 윤리를 유지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의미가 없지는 않다. 무엇보다 피해자와 유가족의 씻을 수 없는 고통은 충분히 실존적인 것이고 말이다. 그러나 그 미움이 ‘죄’ 자체에 대한 거부감을 넘어 ‘사람’으로서의 그들을 향할 때 딜레마에 직면한다. 과거의 끔찍한 행위와 현재의 속죄하는 모습 사이의 충돌은, 악한 행위를 한 사람을 단순히 ‘악인’이라는 단일한 프레임에 영구적으로 가두는 것은 그것대로 윤리적으로 정당한가라는 문제의식으로 이어진다. 얼핏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이야기한 악의 평범성도 연상되는 대목이다.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도 일상 속에서 평범한 인간의 면모를 지닐 수 있다면, 우리의 미움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 것일까.
# 2.
결국 작품의 감상은 응보적 정의와 회복적 정의 사이에서의 긴장으로 축약된다. 응보주의가 범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통해 정의를 실현하려는 관점이라면, 회복적 정의는 범죄로 인해 발생한 피해와 관계의 손상을 회복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퀼트 제작을 통해 지역 사회 아이들에게 기여하는 모습은 단순한 교화 프로그램을 넘어, 자신의 죄가 타인에게 미친 영향을 반복적으로 상기하고 능동적으로 회복에 참여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는 면에서 회복적 정의에 부합하고, 따라서 감독의 지향 역시 그곳에 있음을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다. 특히 퀼트는 조각난 천들이 모여 하나의 온전한 형태를 이루는 작업이라는 면에서 구성적으로도 구조적으로도 연관되는 맛이 있다. 죄수들의 조각난 삶이 부분적으로나마 치유되고 통합되는 과정을 은유하는 동시에, 그들의 부정적 과거가 긍정적 기여로 전환되는 상징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말이다.
인간을 그 자체로 목적인 존재로 보았던 칸트의 주장에 따르면, 죄지은 이들이 자신의 죄를 직시하고 속죄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존엄성을 회복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타율적인 처벌에 굴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도덕적 의무를 수행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고, 따라서 그 노력까지 미워하는 것은 짐짓 부당하다. 실제 작품 내내 그들은 자신의 죄를 회피하지 않고, 처벌을 부정하지 않으며, 용서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형량이 줄어들 것을 바라지도 않고 그 끝에 종신수는 옥중 사망하기까지 하니, 적어도 그들이 보인 속죄의 진정성은 굳이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 3.
물론 죄수들의 노력이 그들이 저지른 죄의 무게를 상쇄할 수 있는가 반문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다큐멘터리는 용서의 문제를 제기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용서의 가능성을 내포하지만 끔찍한 죄의 경우 용서는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과정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교도소와 지역 사회가 힘을 모아 죄수들에게 지원하는 프로그램의 본질은 응보도 회복도 아닌 가녀린 화해의 가능성이라는 지극히 간접적인 접근이다. 피해자들의 고통을 간과하거나 죄의 심각성을 경감시키지 않으면서도, 죄수들의 속죄를 전제로 사회가 그들이 가진 최소한의 존엄을 인정하고 변화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의미의 느슨한 화해 말이다.
다큐멘터리 속 죄수들의 평온한 모습과 속죄의 노력은 인간이란 단순히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보여준다. 퀼트 제작을 통해 연약하게나마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려는 노력은 인간 본연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난 발버둥의 증거다. 시스템과 환경이 인간을 규정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재규정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본 끝에 관객 역시 환경과 역사를 불문한 인간의 존재론적 지위를 담대하게 재고할 것이다. end.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Netflix, Tving, WatchaPlay, CoupangPlay, Appletv,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 본 블로그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글에서 다루는 작품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댓글, 포스트를 자신의 블로그로 유인하는 데 이용하려는 댓글, 무분별한 맞팔로우 신청 댓글 등은 삭제 후 IP 차단될 수 있습니다.
좋아요, 댓글, 구독
은 블로거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