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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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Comedy 85

노스탤지어의 풍경화 _ 문라이즈 킹덤, 웨스 앤더슨 감독

# 0. 사진이 아닌 그림이고 설명이 아닌 문학이며 대화가 아닌 음악이다.        웨스 앤더슨 감독,『문라이즈 킹덤 :: Moonrise Kingdom』입니다.     # 1. 사소하다. 뉴 펜잔스 섬의 곳곳도, 카키 스카우트의 야영장도, 낡은 경찰서와 항구도, 사랑의 도피를 떠난 샘과 수지도, 그들의 탐험과 낙원도 모두 작고 사소하다. 웨스 앤더슨은 그 심각성이 사소해 보일 수 있도록 다운스케일링된 이야기를 최대한의 사랑스러움으로 가다듬어 인형의 왕국을 축조한다. 사소함을 역설하는 달뜨는 왕국에서 감독은 무엇을 찾고 싶었던 걸까. 무엇을 담고 싶었던 걸까. 세계는 안전함과 별개로 구속적이다. 바다에 둘러싸인 섬이 그러하다. 울타리에 둘러싸인 야영지가 그러하다. 스카우트의 규율과 규율을 증명하는 무..

Film/Comedy 2025.01.30

정신적 보톡스 _ 백 인 액션, 세스 고든 감독

# 0. 현기증을 유발하는 보톡스 냄새        세스 고든 감독,『백 인 액션 :: Back in Action』입니다.     # 1. 당신은 마피아다. CIA 소속 비밀요원이 조직의 행사에 잠입해 중요한 키를 탈취했다. 열심히 스파이들을 뒤쫓았지만 유능한 요원들을 붙잡는 덴 역부족이다. 다행히도 보스는 스파이들이 타게 될 비행기를 포섭하는 데 성공했고, 당신에게 비행기에 올라 가방 안에 들어있을 키를 회수하라 지시한다. 명령을 받은 당신은 비행기에 탔다. 기다리던 요원들을 능숙하게 제압해 화장실에 집어넣는 데까지 성공했다. 때마침 스파이가 도착했다. 감쪽같은 변장 덕에 당신을 CIA 요원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스파이는, 한껏 방심한 상태로 대화를 나눈다. 자, 여기서 질문.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해야..

Film/Comedy 2025.01.22

뉴저지의 자신감 _ 패밀리 맨, 브렛 라트너 감독

# 0. 자신감 넘치던 그 시절 중산층을 위한 프로파간다        브렛 라트너 감독,『패밀리 맨 :: The Family Man』입니다.     # 1. 나무로 지어진 2층 집에는 적당한 크기의 정원이 딸려있다. 유머러스한 아빠는 익숙한 듯 잔디를 깎고, 아름다운 엄마는 주방에서 펜케이크를 굽는다. 어린 아들은 아빠 옆에서 자전거 타거나 물놀이 하자며 잔망을 떤다. 사춘기 딸은 하이틴 스타의 포스터로 뒤덮인 다락방 침대에서 미래를 꿈꾼다. 할머니는 거실 흔들의자에 누워 스웨터를 뜨고, 멋들어진 페도라를 쓴 할아버지는 낡은 벤치에 앉아 시가를 태운다. 틈틈이 집 앞을 지나가는 친구 가족과 반갑게 인사하는 걸 제외하면 주말마다 맥주를 곁들인 바비큐 파티가 소소한 이벤트의 전부인 나날들. 미국의 시스템이 ..

Film/Comedy 2024.12.24

설익은 야심의 결과 _ 나이스 가이즈, 셰인 블랙 감독

# 0. 노래 시작했다, 노래 끝났다.        셰인 블랙 감독,『나이스 가이즈 :: The Nice Guys』입니다.     # 1. 오역 논란으로 홍역을 치렀던 나이스 가이즈다. 실소조차 나오지 않는 수준 낮은 번역을 나열하는 건 생략한다 하더라도, 영화 자체적으로도 하자가 적지는 않다. 몸값 비싼 두 주연배우의 슬랩스틱과 앵거리 라이스의 귀여움이 단점의 상당 부분을 만회하고 있고, 그 코미디의 리듬에 감화되어 버디물의 매력을 즐겼을 몇몇 관객들의 무난한 호평을 존중하는 것과 별개로 말이다. 포르노 배우의 도발적인 오프닝이 무안하게도, 미스터리 추리극은 힘없이 가족주의 드라마로 주저앉는다. 홀랜드(라이언 고슬링 분)의 직업이 탐정이 맞긴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미스터리의 짜임새는 빈약하다. (..

Film/Comedy 2024.11.26

빚지지 않는 편안함 _ 극한직업, 이병헌 감독

# 0. 수중엔 100만 원밖에 없다.        이병헌 감독,『극한직업 :: Extreme Job』입니다.     # 1. 부모님께 150만 원짜리 안마의자를 선물하려 하는 데 수중엔 100만 원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단순하게는 부업을 하면 된다. 힘들고 피곤하겠지만 정직하게 50만 원어치 더 일해서 소득을 늘릴 수만 있다면야 뭐, 이상적이다. 아니면 부모님께 50만 원을 빌릴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당신을 위한 선물이니 말이다. 양해를 구할 염치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나중에 150만 원짜리 안마의자를 돌려드리면 기뻐하실 게 분명하다. 상황을 조금 바꿔보자. 이번엔 영화감독이다. 당신의 시나리오 초안엔 100만큼의 재미가 담겨있지만 관객에게 150만큼의 재미를 선사하려 한다. 어떻게 하..

Film/Comedy 2024.11.24

독의 촉감 _ 독, 웨스 앤더슨 감독

# 0. 결국 뱀에 물리고만 의사였다.        웨스 앤더슨 감독,『독 :: Poison』입니다.     # 1. 넷플릭스가 주도하고 웨스 앤더슨이 연출한 4편의 로알드 달 단편 프로젝트 중 하나다. 에서 자유로운 이야기의 역동성을, 에서 절륜한 문장력의 위력을 증명했던 감독은 을 통해 간결한 이야기로 녹여낸 인간 탐구를 서늘한 촉감으로 구현한다.  인도 땅에서 인도 뱀의 위협을 피해 인도 의사의 도움을 받게 된 영국 군인 해로 포프의 이야기다. 해리의 부름을 받은 우즈와 함께 영화는 시작되는 데 이후로도 우즈는 사건의 관찰자로서 화자를 겸한다. 침대에 곧게 누은 해리는 배 위에 치명적인 독을 가진 우산뱀이 잠들어 있어 옴짝달싹할 수 없다. 깜짝 놀란 우즈는 잠시의 혼란 끝에 의사 간더바이에게 도움을..

Film/Comedy 2024.10.24

시그니처 아웃렛의 속셈 _ 데드 돈 다이, 짐 자무쉬 감독

# 0. 아 씨발, XXX 죽이고 싶네.        짐 자무쉬 감독,『데드 돈 다이 ::The Dead Don't Die』입니다.     # 1. 자필 서명을 뜻하던 시그니처(Signature)는 '개인이나 기업의 아이덴티티를 변별하게 하는 모든 것'으로 점차 그 의미가 확장되는 듯하다. 고급 의류 브랜드의 대표 라인업이나 디자인에 엄격한 몇몇의 공산품은 물론, 파인 다이닝의 시그니처 메뉴, 스포츠 스타의 시그니처 무브, 셀러비리티의 시그니처 픽 등은 좋은 예다. 유사한 의미에서 영화에도 수많은 시그니처가 존재한다. 멀리는 채플린의 콧수염과 버스터 키튼의 무표정부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웨스턴, 히치콕의 돌리 줌, 브루스 윌리스의 존 맥클레인, 웨스 앤더슨의 스타일과 에드가 라이트의 편집에 이르기까지 ..

Film/Comedy 2024.10.10

나는 거절한다 _ 욕망의 모호한 대상, 루이스 브뉘엘 감독

# 0.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면 당신은 절 사랑하지 않게 될 거예요.        루이스 브뉘엘 감독『욕망의 모호한 대상 :: That Obscure Object of Desire』입니다.     # 1. 거장 루이스 브뉘엘(Luis Buñuel, 1900-1983)의 유작이다. 피에르 루이(Pierre Louys)의 (1898)를 원작으로 한다. 주인공은 중년의 부호 마티유(페르난도 레이 분), 매혹적인 여인 콘치타(카롤 부케/안젤라 몰리나 분)다. 주요 플롯은 집착적 사랑을 기망당한 마티유가 기차 안 사람들에게 고발하는 동안의 플래시백이다. 영화는 제목처럼 욕망의 본질을 탐구한다. 욕망의 주체와 타인의 대상화, 결핍 및 폭력과의 관계성 따위를 특유의 초현실주의적 문법과 유머러스한 표현으로 풀어낸 걸..

Film/Comedy 2024.09.12

하늘을 보는 사람 _ 노 맨스 랜드, 다니스 타노비치 감독

# 0.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이 없는 세계        다니스 타노비치 감독,『노 맨스 랜드 :: No Man's Land』입니다.     # 1. 보스니아 전쟁의 역학관계를 비무장지대에 고립된 인물들로 치환한 실험극으로, 전쟁의 참상과 부조리를 염세적 시선에서 내려다본 일종의 우화다. 보스니아 지원병 치키, 세르비아 군 신참 니노, 지뢰 위에 붙잡힌 체라의 이야기는 자조적인 블랙 코미디와 전쟁 드라마로서의 균형이 돋보인다.  세계 각지, 특히 1세계 밖의 전쟁 당사자가 느낄 감각을 일반론적으로 통찰한다는 면에서 의의가 있다. 한국의 외교적 입지 상 1세계적 관점에서 세계사를 교육받게 되는 데, 그것을 재고하게 만든다는 것은 이색적인 경험으로, 이는 접근이 쉬운 영미권 외의 영화를 애써 찾아볼 때 얻을..

Film/Comedy 2024.08.24

잘 자요 _ 드림 시나리오, 크리스토퍼 보글리 감독

# 0. 잘 자요.        크리스토퍼 보글리 감독,『드림 시나리오 :: Dream Scenario』입니다.     # 1. 정갈한 머리의 니콜라스 케이지가 매일밤 꿈속에 나타나 당신을 지긋이 바라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런 니콜라스 케이지의 꿈을 수많은 세상 사람들이 똑같이 꾼다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심지어 갑자기 꿈속의 니콜라스 케이지가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도발적 상상의 판타지 영화 는 (2002)로 데뷔한 크리스토퍼 보글리의 차기작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번 작 역시 창의적인 설정과 도발적인 표현, 유쾌한 코미디 이면엔 알싸한 풍자가 가득하다. 주연은 니콜라스 케이지가 맡았다. (2021)에서 보여줬던 과격하고 야생적인 모습과 대조되는 소심하고 찌질한 연기를..

Film/Comedy 2024.07.10

이유와 방법 _ 난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 거야, 아리안 감독

# 0. 사랑보다 먼 우정보다는 가까운        아리안 루이-세즈 플루프 감독,『난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 거야』입니다.     # 1. 사람을 불쌍히 여겨 피를 빨지 못하는 뱀파이어 사샤와, 따돌림을 견디다 못해 죽고 싶은 인간 폴의 이야기다. 굶주린 그녀를 위해 대신 죽어주겠다는 폴이지만 마음 여린 사샤는 소년을 헤치지 못한다. 대신 소년에게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을 하자 말하는데, 그러면 조금이라도 마음 편히 피를 빨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년은 자신을 괴롭히던 또래들과 이를 방치하던 교사에게 소심한 복수를 하고, 마지막으로 메인 빌런인 앙리에게 복수하려 하지만 역으로 된통 당하고 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샤는 순간 이성을 잃고 앙리를 공격, 처음으로 사람을 ..

Film/Comedy 2024.07.04

현대영화 _ 킬 룸, 니콜 페이온 감독

# 0. 어. 느새. 부터. 미. 술~~ 은 안 멋져.        니콜 페이온 감독,『킬 룸 :: The Kill Room』입니다.     # 1. 현대미술이 영화에 머리채를 잡히는 건 연례행사다. 끝없이 관념적으로 뻗어나가는 현대미술 일체를 스노비즘(snobbism)으로 치부하거나, 부자들의 친목 모임 뒤에 숨겨진 재산 은닉과 탈세에 복무하는 시종이라 조롱하는 식이다. 때문에 제 아무리 이런저런 킬링포인트를 추가한다 하더라도 큰 틀에서의 작동은 죄다 거기서 거기다. 예술을 가벼이 여기는 사람이 대충 만든 작품을 미끼로 던져 놓은 후, 그 황당한 작품에 허망한 형용을 난사하는 업계를 조소하는 구조로 흘러간다. 코미디언 장동민이 잭슨 폴록의 드리핑을 흉내 낸 그림에 미학자 진중권이 진땀 흘렸던 모 예능을..

Film/Comedy 2024.07.02

개판 _ 스트레이스, 조쉬 그린바움 감독

# 0.  대체 무슨 짓을 해야 유기견 이야기로 19금을 받을 수 있는 거지?!        조쉬 그린바움 감독,『스트레이스 :: Strays』입니다.     # 1. 누구에게나 감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수천 편 이상의 영화를 보다 보면 (매번 적중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지간하면 견적이 보인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가 복수를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로 소개된 넷플릭스 영화에 큰 기대를 걸 정도로 미련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봤던 것은 딱 하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짓을 해야 이 소재로 19금을, 호러도 아닌 코미디로 19금을 받을 수 있었던 걸까. 확인 끝에 찾은 대답은 음담패설이다. 사랑스러운 네 마리의 강아지 위로 섹스와 성기와 마약과 기타 등등의 이야기가 ..

Film/Comedy 2024.06.02

노 아담 플리즈 _ 노 하드 필링스, 진 스텁닛스키 감독

# 0. 아담 샌들러가 꼭 필요한 거야? 진 스텁닛스키 감독, 『노 하드 필링스 :: No Hard Feelings』입니다. # 1. 죽지도 않고 또 오는 게 엿장수만은 아니다. 세상엔 잊을만하면 돌아오는 것이 너무나 많지만, 할리우드식 로맨틱 코미디는 그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수도 없이 반복된 탓에 레시피도 공개된 것과 진배없다. 배경은 보통 휴양지인데 기왕이면 바닷가가 좋다. 부자를 시기하고 부러워하는 서민이 주인공이지만, 연기하는 배우들이 그 시기와 질투의 대상인 백만장자라는 것은 괘념치 않는다.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통속적인데, 철없는 주인공과 비슷한 수준의 친구 하나가 옆에 붙어 코미디를 전담하는 동안 주변을 배회하는 노년의 현자가 틈틈이 교훈을 토해낸다. 영화는 뜬금 이벤트 당첨이나, 우연한 헌..

Film/Comedy 2024.04.18

원래 그런 거야 _ 무서운 영화, 키넌 아이보리 웨이언스 감독

# 0. 원래 그런 거야, 인마~ 키넌 아이보리 웨이언스 감독, 『무서운 영화 :: Scary Movie』입니다. # 1.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매년 설추석이면 특수를 노리고 여러 신작들이 개봉되곤 합니다만, 그래도 명절엔 추억의 옛날 영화죠. 2000년에 개봉한 영화를 옛날 영화라 이야기하는 게 어색하긴 한데요. 벌써 2024년이니까요. 세월 참 빠르군요. 개막장 B급 싼마이 코미디 영화 되시겠습니다. 명작의 반열에 오른 이나 007 시리즈를 가지고 논 등과 함께 가장 성공적인 패러디 영화이기도 하죠. 속편은 없다!! 라는 선언이 무색하게 무려 다섯 편에 걸쳐 제작된 시리즈물이기도 한데요. 언제나 그렇듯 첫 편의 용머리 이후로는 지난한 뱀꼬리가 이어지니 굳이 찾아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로부터 2년 ..

Film/Comedy 2024.02.12

치명적인 무해함 _ 침입자들의 만찬, 미즈노 이타루 감독

# 0. 부조리 위에 펼쳐진 탐욕과 위선을 제압하는 치명적인 무해함 미즈노 이타루 감독, 『침입자들의 만찬 :: 侵入者たちの晩餐』입니다. # 1. 영화는 뻔뻔스럽게 범죄 스릴러를 주장하지만 전반적인 톤은 코미디 어드밴처라 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사건이 벌어지는 후지사키 나츠미의 집 역시 현실적 주거 공간이나 차가운 범죄 현장이라기보다는 흥미진진한 던전에 가깝게 연출되어 있죠. 응큼하고 지저분하지만 엉성하고 귀엽기도 한 여섯의 인물들이 각자의 음흉한 목적을 위해 지지고 볶는 하룻밤 소동극입니다. 소동극의 묘미라면 역시나 분투하는 인간들의 소동을 귀엽고 가엽게 그리는 시선이라 할 수 있을 텐데요. 역시 그 온건함에 대단히 충실합니다. 각본가 바카리즈무의 기질이 묻어나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죠. 작품을 견인..

Film/Comedy 2024.02.04

가장 사소한 우주 _ 애스터로이드 시티, 웨스 앤더슨 감독

# 0. 그놈은 그냥 돌멩이를 던져분 것이고, 자네들은 그것에 놀라 확 달아난 것이여. 웨스 앤더슨 감독, 『애스터로이드 시티 :: Asteroid City』입니다. # 1. 가장 사소한 우주 영화입니다. 통상의 우주 SF라면 웅대한 우주를 탐험하는 초라한 인간의 대비라는 식으로 풀어가기 마련일 텐데요. 웨스 앤더슨은 독특하게도 스케일의 역전을 시도합니다. 우주의 구조를 도식화해 미니어처처럼 끌고 내려온 후, 관객으로 하여금 이를 내려다보게 만들어 관조적으로 삶과 우주의 원리를 통찰해 볼 것을 제안하는 것이죠. 작품은 연극을 준비하는 무대 뒤 흑백 화면과, 그렇게 실현된 연극의 컬러 화면으로 구분되는 극중극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데요. 사실 수많은 관객들이 혼란스러워했던 것처럼 구체적인 레이어는 그보다 ..

Film/Comedy 2024.01.04

시나리오 특강 _ 세븐 싸이코패스, 마틴 맥도나 감독

# 0. 거만한 천재가 들려주는 잔인하고 선량한 시나리오 특강 마틴 맥도나 감독, 『세븐 싸이코패스 :: Seven Psychopaths』입니다. # 1. 마틴 맥도나입니다. 역작 의 감독이자, 얼마 전 글로도 옮긴 바 있는 를 연출한 감독인 데요. 두 작품에 앞서 만들어진 2012년 개봉작이죠. 일반적으론 코미디 범죄 영화라 해야겠습니다만, 아시다시피 메타픽션(Metafiction)적인 작품이기도 합니다. 콜린 패럴이 연기한 마티는 극 중 시나리오 작가임과 동시에 감독이 자신을 투영한 캐릭터라 할 수 있습니다. 영화의 제목과도 같은 세븐 사이코패스를 집필한 사람이기도 하거니와, 다른 무엇보다 마티(Marty)라는 이름은 누가 보더라도 감독의 이름 마틴(Martin)에서 가져온 애칭이죠. 영화는 로스앤젤..

Film/Comedy 2023.11.22

모닥불 _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

# 0. 값비싼 자동차를 몰기 위해 뾰족구두에 못은 박았지만, 그럼에도 모닥불은 피어나 얼어붙은 기타리스트를 깨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입니다. # 1. 핀란드의 거장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작품입니다.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함께, 시네필인 척하고 싶을 때 써먹으면 가성비가 무지 좋은 감독이죠. 나 그리고 지금 이야기하려는 정도를 거명한 후, 차갑고 건조한 미장센, 비정한 세상에 대한 날 선 조소, 투쟁하는 노동자 계급을 향한 다정함, 무성 영화에 대한 동경 따위를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 늘어놓다가, 대화가 끝날 즈음 그의 진가는 작품을 지배하는 서늘한 문제의식보다 그럼에도 결코 잃는 법이 없는 웃음이라는 말과 함께 커피 한 모금 홀짝이며 창밖 멀리를 쳐다보면..

Film/Comedy 2023.11.06

문장의 모습, 소리, 그리고 맛 _ 쥐잡이 사내, 웨스 앤더슨 감독

# 0. 그 양반이 얼~마나 뛰어난 문장가였냐면 말이다~ 웨스 앤더슨 감독, 『쥐잡이 사내 :: The Rat Catcher』입니다. # 1. 로알드 달 원작의 단편입니다. 의 글에서도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넷플릭스가 로알드 달 스토리 컴퍼니(RDSC)를 인수한 후 웨스 앤더슨을 섭외해 진행한 네 편의 결과물 중 하나인 작품이죠. 본론에 앞서 프로젝트의 성격을 짚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시도일 겁니다. 감독 입장에서 한꺼번에 영화를 네 편씩이나 만들어야 한다면, 각각의 작품 이전에 프로젝트 자체에 대해서도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테니까요. 비슷한 프로젝트들의 경우 지난 시대의 작가를 새로운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고, 해당 프로젝트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

Film/Comedy 2023.10.18

개 같은 날의 저녁 _ 좋은 말, 이용수 감독

# 0. 남의 돈 벌어먹기 힘들어요.        이용수 감독,『좋은, 말 :: Advice』입니다.     # 1. 악의 없는 무례를 견뎌야 하는 사회인의 스트레스를 담백하다면 담백하게, 코믹하다면 코믹하게 그려낸 단편입니다. 하나하나는 사소하지만 쌓이면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일이라는 건 비슷한 경험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너무나 잘 알고 계시겠죠. 그럴 수도 있지만 굳이 그러지 않으려 서로 양보하고 지나가는 사회적 에티켓들이 의뭉스럽게 삐져나와 선을 넘는 순간들. 저 연놈(...)이 일부러 저러는 거라는 걸 뻔히 알고 있어 잔뜩 긁히긴 긁히는 데, 그걸 굳이 입에 올려 탓하는 순간 나만 쪼잔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마냥 티 낼 수 없는 간질간질한 순간들을 흥미롭게 묘사합니다. 일처리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

Film/Comedy 2023.10.12

패러디와 떡밥 회수 _ 슈퍼 후?, 필립 라쇼 감독

# 0. 패러디와 떡밥 회수. 그게 전부입니다. 진짜루요. 필립 라쇼 감독, 『슈퍼 후? :: Super-héros malgré lui』입니다. # 1. 프랑스 엉아들이 만든 B급 싼마이 패러디 코미디입니다. 우리의 주인공은 스몰 사이즈 팬티 모델 출신 무명 배우입니다. 미쿡 엉아들이 마블 유니버스로 장사하는 게 배 아팠던 돈 많은 프랑스 할머니가 BADMAN이라는 제목의 짝퉁 히어로 영화를 기획합니다. 여차저차 캐스팅되는 데 성공한 주인공은 촬영 중 집으로 돌아가다 사고가 나는데요. 거 참 공교롭게도 몸뚱이는 멀쩡하지만 기억상실에 걸리고 말았죠. 정신 차리고 보니 슈퍼 히어로 옷을 입고 있길래, 어라? 와타시 어쩌면 배드맨이었던 걸지도? 지가 자경단 노릇하던 슈퍼 히어로라 믿은 무명 배우는 돌아다니는 ..

Film/Comedy 2023.09.14

가장 날 것의 주성치 _ 당백호점추향, 이력지 감독

# 0. 다시 보니 선녀 같다! 이력지 감독, 『당백호점추향 :: 唐伯虎點秋香』입니다. # 1. 희극지왕 주성치입니다. 성룡과 함께 본인 그 자체로 장르라 인정받는 단 두 명의 배우 중 하나죠. 통상 그를 상회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유덕화나 주윤발, 양조위조차 자기 작품에서 그 정도의 지배력은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분명 의심의 여지없는 대배우이긴 합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인생을 사는 건가 싶을 정도로 논란이 많은 인물이라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말이죠. 주성치의 이름을 들은 보통의 관객들은 아무래도 소림축구나 쿵푸 허슬을 떠올릴 겁니다. 그 소리를 들은 골수팬들은 두 작품도 충분히 좋지만 아무리 그래도 주성치는 월광보합과 선리기연으로 이어지는 서유기 시리즈라며 팔짝 뛰는 게 십수 년간 반복된 패턴..

Film/Comedy 2023.07.22

풍성한 가지, 앙상한 줄기 _ 킬링 로맨스, 이원석 감독

# 0. 진짜 독특한 감독이긴 합니다. 솔직히 미친놈 같아요. 이원석 감독, 『킬링 로맨스 :: Killing Romance』입니다. # 1. 다음 씬은 커녕 다음 컷조차 예상되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예측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정신 나간 농담들로 100분에 달하는 시간 동안 관객을 붙들어 매는 것을 상상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데요. 그 아이디어를 밀고 나가 이 정도의 결과물을 관철해 냈다는 건 어쨌든 인정해야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감독은 미친놈이 맞는 것 같아요. 코미디라는 게 워낙 기호를 많이 타는 장르라 주관적 감상을 말씀드리는 것에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당장 세간의 평을 들여다봐도 호불호가 극심한 듯 보이니까요. 어쨌든 제법 좋았습니다. 혹자는 민망함을 표하기도 하던데요...

Film/Comedy 2023.06.26

성장하는 꿈들의 유쾌한 합주 _ 스쿨 오브 락,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

# 0. Let's Rock~ Everybody, Let's Rock~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 『스쿨 오브 락 :: The School of Rock』입니다. # 1. 제목에서처럼 '스쿨'과 '락'에 대한 영화입니다. 스쿨은 [성장]이라는 가치를 공간화합니다. 락은 [꿈]이라는 가치를 청각화합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와 잭 블랙이 정의하는 성장과 꿈은 그 자체만으론 불완전합니다. 호레이스 그린 사립 초등학교의 학생들은 성장을 위한 성장에 매몰된 아이들입니다. 성적과 시험에 기계적으로 반응합니다. 성적에 따라 우쭐하거나 주눅 들거나 삐딱하거나 무기력하는 등 종속되어 있는 모습으로 소개됩니다. 듀이는 성장 없이 꿈만 좇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낭만을 추구하기만 할 뿐, 낭만에 다가가기 위한 어떤 종류의 성실성..

Film/Comedy 2023.06.04

손가락의 방향 _ 이츠 어 디재스터, 토드 버거 감독

# 0. 빌어먹을 세상이 또 망했습니다. 이쯤 되면 망하지 않는 세상이 잘못인 것 같아요. 토드 버거 감독, 『이츠 어 디재스터 :: It's a Disaster』입니다. # 1. 네 쌍의 커플이 커플 브런치라는 이름의 소소한 파티에 참석하는데요. 갑자기 세상이 망했다 합니다. 이유 모를 공격으로 미국 한 복판에 방사능 오염과 신경독 가스가 퍼지게 되고, 파티 중인 집 안에 모조리 고립되어 버렸다는 설정인 것이죠. 나름의 발버둥이랍시고 덕트 테이프를 문틀에 처덕처덕 발라보지만 그 정도로 해결될 리 없습니다. 결국 몇 시간 못가 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된 상황. 사람들이 보이는 각양각색의 발버둥을 수다스러운 대사에 얹어 관찰하는, 고런 느낌적인 느낌의 코미디 영화라 할 수 있겠네요. 방사능이 어쩌..

Film/Comedy 2023.05.06

다음 영화의 공간 _ 크레이지 컴페티션, 마리아노 콘 / 가스톤 두프라트 감독

# 0. 가짜 바위 아래 앉은 위선과 허세를 조소한 끝에 마주하게 될 다음 영화의 공간 마리아노 콘 / 가스톤 두프라트 감독, 『크레이지 컴페티션 :: Competencia oficial』입니다. # 1. 크레이지 컴페티션을 적당히 번역하자면 '미친듯한 경쟁' 쯤 될 텐데요. 아무래도 격정적인 대립과 갈등이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한다는 것을 전달하기 위함인 듯 보이죠. 하지만 스페인어 원제는 Competencia oficial. 영어 제목 역시 같은 의미의 Official Competition입니다. 영화제의 경쟁부문 출품작에 대한 은유일 것이라 추측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거겠죠. 결말에서 작중작 을 완성한 롤라와 펠릭스가 브리핑하는 뒤로 영화의 제목과 같은 Official Competition이 떡 ..

Film/Comedy 2023.02.18

급발진 _ 중성화, 김홍기 감독

# 0. 굳이? 갑자기? 그렇게까지? 김홍기 감독, 『중성화 :: DESEX』입니다. # 1. 혜수는 남자 친구와 함께 고양이를 중성화시키러 왔다. 이김에 진절머리 나는 남자 친구와도 끝낼 생각이다. 우연히 담당 수의사가 남자 친구의 옛 애인이었다. 찝찝한 와중에 수술이 끝난 고양이가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2020년 제19회 미장센 단편영화제) # 2.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다시피 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정확히는 [성욕]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겠죠. 스트레스를 표현하는 방식이 '죽이고 싶다'가 아니라 '중성화시켜버리고 싶다'라는 건 구체적 인물과의 갈등이라기보다 성욕 그 자체에 주목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혜수가 스트레스를 느끼는 성욕이란, 발정을 주체 못 하고 온갖 여자들에게 들이대는 상민..

Film/Comedy 2022.12.02

사과해 _ 사람 냄새 이효리, 구교환 / 이옥섭 감독

# 0. 유튜브 지박령이 또 희한한 영상에 얻어걸렸습니다. 구교환 / 이옥섭 감독, 『사람 냄새 이효리 :: Super Star LeeHyori』입니다. # 1. 코피로 혈서 써주며 먹고사는 구교환과 아이들이 돈 많은 이효리 오퍼 받고 신나서 찾아갑니다. 구교환은 트로피에 피 묻히고 이효리는 계단 내려오며 쌍욕 합니다. QR코드 찍어 옛날 테레비 시청하고 햄스터 80마리 택배로 날아와서 학교도 못 간 김에 노숙자로 전직하게 한 거 사과해. 요가하며 트림하는 이효리가 개 잡아먹은 사람 잡아먹었다고 자수합니다. 글자 겁나 많은 혈서 덕에 구교환은 한몫 땡겼겠네요. 부럽다. # 2. 어찌 되었든 언어유희를 활용한 반전 한 방을 향해 가는 작품이라 해야 할 겁니다. 결말에 도달하는 과정은 사회-경제적 계급과 도..

Film/Comedy 2022.08.04

너는 샐러드바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지 _ 전우치, 최동훈 감독

# 0. 뷔페 좋아하세요? 최동훈 감독, 『전우치 :: Woochi』입니다. # 1. 뷔페도 식당인 이상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맛이겠습니다만, 그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음식의 구성일 겁니다. 손님마다 입맛도 다 다르거니와 어차피 먹을 수 있는 양, 느낄 수 있는 맛은 한정적이니까요. 대부분의 고객들은 맛있고 값비싼 음식을 풍성하게 먹는 것만큼이나 다양한 음식을 조화롭고 편안하게 맛보길 원합니다. 제 아무리 산해진미라 하더라도 계~속 고기, 고기, 고기만 먹다 보면 얼마 못가 물리기 마련이죠. 서울시 중구 충무로 일대에 '케이퍼 무비(Caper Movie)'라는 간판의 전문점을 운영해온 사장 최동훈 씨가 뷔페 창업에 도전합니다. 과 , 이후 과 로 이어지는 대박 메뉴를 내리 개발하는 데 성공한 사장님은 자..

Film/Comedy 2022.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