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A picture with a smile—and perhaps, a tear

찰리 채플린 감독,
『키드 :: The Kid』입니다.
# 1.
예컨대 모던 타임스나 시티 라이트의 트램프는 홀로 세계와 대결하는 존재다. 그는 시스템의 톱니바퀴에 끼이거나 도시의 불빛 아래 서성일지언정, 언제나 관객이 감정 이입하는 유일한 창구로서 스크린을 장악했다. 반면 키드에서는 다르다. 화자는 모호하고 시선은 분산되며 정서는 독점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의 텍스트는 채플린이라는 거대한 자아가 파편으로 비산해 스크린에 투사된 듯 느껴진다. 거리의 부랑자, 버려진 아이, 그리고 어머니. 세 존재 모두 채플린의 내면에서 발원한 페르소나라는 뜻이다.
1919년 7월 7일. 기형으로 태어난 첫아들 노먼 스펜서가 사망한 날이다. 자녀의 죽음은 서른 남짓의 예술가에게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 되었음에 분명하다. 의외의 사실은 그가 비탄에 잠겨 침묵하는 대신, 불과 열흘 만에 아역 배우 오디션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보드빌 무대에서 아버지 잭 쿠건 시니어의 춤을 완벽하게 흉내 내던 네 살배기 천재 재키 쿠건을 발견했을 때, 채플린은 그 아이에게서 죽은 아들의 환영과, 런던 램버트 빈민가를 헤매던 자신의 유년기를 겹쳐 떠올린다. 상처와 우연이 창작의 모티브로 승화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또 다른 화자 어머니다. 채플린은 자신의 어머니 해나 채플린이 겪었던 정신적 붕괴와 가난의 트라우마를 투영함으로써, 그녀의 존재를 이해받아야 할 자신의 근원으로 규정한다. 병원문을 나서는 미혼모의 고통스러운 얼굴과 십자가를 진 예수의 이미지가 몽타주 되는 오프닝은 아이를 버린 비정한 모성을 단죄하는 대신, 그녀를 사회적 편견과 가난에 의해 희생된 비극적 화자로 격상시킨다. 그렇기에 감독은 슬랩스틱 사이사이 아이를 찾아 헤매는 어머니의 절망을 끈질기게 교차한다. 트램프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뿐 아니라 아이 잃은 부모의 찢어지는 심정으로도 서사를 체험케 하기 위함이다.

# 2.
카메라는 롱 숏과 딥 포커스를 통해 빈민가의 비루한 풍경을 정직하게 담아낸다. 기울어진 천장과 낡은 가구로 채워진 다락방 세트는 채플린이 어린 시절 살았던 다락방을 고스란히 재현한 것이다. 과거의 공간으로 회귀한 트램프가 아이에게 밥 먹이는 일상의 디테일들은, 채플린이 자신의 유년 시절 결핍되었던 돌봄의 기억을 스스로에게 제공하는 치유의 과정과 같다. 즉, 트램프는 과거의 자신을 먹이고 입힘으로써 현실의 채플린이 아들에게 해주지 못했던—그리고 어린 시절 자신이 받지 못했던—보호를 뒤늦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트램프와 키드는 낭만적인 부자 관계라기보다, 생존을 위해 결탁한 경제 공동체에 가깝게 그려진다. 우스꽝스러운 유리창 수리공 시퀀스처럼 말이다. 두 사람의 완벽한 타이밍과 안무는, 파괴와 재건이라는 자본주의 순환 논리를 희화화하는 것임과 동시에, 두 사람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임을 암시하는 셈이기도 하다. 작중의 서스펜스는 트램프와 키드의 관계가 발각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부터 발원한다. 자아의 연대를 위협하는 법과 제도의 폭력이다. 경찰 등은 미혼모와 빈민의 아이들을 강제로 격리했던 1920년대 시스템의 대리자들이고, 채플린은 이 무자비한 공권력을 아이의 시선으로 조롱하지만, 언제나의 채플린이 그러하듯 그가 조롱하는 폭력은 결코 가볍지 않다.
클라이맥스, 이별 장면이다. 고아원 직원이 아이를 짐짝처럼 트럭에 싣고 키드가 울부짖으며 팔을 뻗을 때, 카메라는 드라마틱한 클로즈업을 통해 재키 쿠건의 절절한 표정을 화면 가득 담아낸다. 현실의 채플린은 운명 앞에 아들을 떠나보내야만 했고 그 무력감은 내면에 깊은 상처로 남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못난 아버지는 예술을 통해 그 무력했던 결말을 거절한다. 트램프는 목숨 걸고 지붕을 넘어 트럭을 쫓는다. 기어이 트럭을 따라잡아 아이를 품에 안고 키스하는 트램프. 슬랩스틱 코미디의 탈을 쓴 멜로드라마적 승리다. 이번에는 뺏기지 않겠어. 채플린은 영화를 통해 스스로에게 구원을 선물한다.

# 3.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 없다. 분열된 자아 어머니 역시 끊임없이 주위를 맴돌기 때문이다. 성공한 가수가 되어 빈민가에 자선을 베풀면서도 정작 자신의 아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아이러니란, 채플린이 바라보는 잔혹한 세상의 부조리다. 어머니가 무의식적으로 키드에게 끌리는 장면들은 혈연의 인력을 암시하는 동시에, 트램프-키드-어머니가 언젠가 통합되어야 함을 예고한다. 트램프가 지켜낸 아이가 결국 어머니의 품으로, 그리고 트램프 자신도 그 관계망 안으로 들어가야만 이 거대한 심리극은 완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종반부 추격전 끝에 꿈 시퀀스(Dreamland)다. 빈민가가 꽃으로 뒤덮이고 이웃들이 날개 단 천사가 되는 초현실적 풍경은 먼저 떠난 아들에게 보내는 뒤늦은 안부다. 꿈속에서나마 아이는 천사가 되어 날아다니고, 트램프 역시 중력(현실의 고통)을 벗어나 비행한다. 물론 죄책감의 악마가 침입해 천국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말지만 말이다. 깨어난 트램프를 기다리는 것은 또다시 경찰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감옥이 아닌 키드와 어머니가 기다리는 저택으로 안내한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비로소 분열되어 떠돌던 세 개의 자아는 통합된다. 트라우마를 봉합하고 복원하려는 예술가의 간절한 기도다.
흥미로운 후일담은 보호와 치유를 다룬 영화가 스크린 밖에서 또 다른 형태의 보호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작중 아이를 지켜내려 분투했던 트램프와 달리, 현실의 법은 아역 스타 재키 쿠건이 부모에게 착취당하는 것을 막지 못했는데, 훗날 캘리포니아의 쿠건 법(Coogan Law) 제정으로 이어져 수많은 아역들을 보호했다 생각하면 뭉클하다. end.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Netflix, Tving, WatchaPlay, CoupangPlay, Appletv,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 본 블로그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글에서 다루는 작품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댓글, 포스트를 자신의 블로그로 유인하는 데 이용하려는 댓글, 무분별한 맞팔로우 신청 댓글 등은 삭제 후 IP 차단될 수 있습니다.
좋아요, 댓글, 구독
은 블로거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