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자유와 개입의 아슬아슬한 긴장 속에서 고통스럽게 성장해야 하는 우리들.

# 1.
중요한 건 환경도 의상도 앵글도 조명도 연기도 아니에요. 이 모든 이야기가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서 끝나느냐'에요. 영화는 달바가 구조되는 모습에서 시작해, 법정에 앉는 모습으로 끝나는데요. 학대의 전사를 영화 밖으로 밀어낸다는 것, 구조 이후로도 한동안 혼란만 내비칠 뿐 학대의 내용을 최대한 숨겨둔다는 것 모두 가스라이팅의 형식에 집중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아버지 자크의 법정 서사, 이를테면 끔찍한 범죄를 두고 판사에게 질타당한다거나, 달바에게 통렬한 일침을 듣는다거나, 차가운 감옥에 걸어 들어가는 뒷모습 따위를 걷어낸 것 역시 윤리적 평가에 천착하지 않겠다는 뜻이죠. 감정적인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다면 손쉽게 활용할 수단이 다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두를 회피하고 있다면, 감독의 의도를 점검해 보는 것도 자연스러울 거예요.
그래서 매우 다루기 어려운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재의 개성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아요. 영화가 탐구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에 최대한 신중하게 접근하게 하기 위해 사고의 관성질량을 부여하는 것에 불과해요. 어차피 아버지가 딸을 세뇌해 이성으로 탐했다는 건 재고의 여지가 없는 미친 짓이고, 그걸 몰라서 영화를 통해 배워야 하는 바보는 없어요.
한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인지적인 틀을 스키마라 부른다면, 통상의 학대는 스키마를 파괴하는 과정이라 여겨져요. 가족은 화목해야 하는 데, 그 화목한 가족을 파괴하면 학대라는 식이죠. 자유롭게 살아야 하는 데, 자유롭지 못하게 납치하면 학대구요. 잘 먹어야 하는 데 밥을 안 먹이면 학대죠. 한편, 자크의 행위는 스키마 자체를 왜곡시킨 것이기에 아이러니하게도 표면적인 파괴는 인지되지 않아요. 어린 달바의 여린 피부에 흔한 상처 하나 없다는 걸 공들여 보여주는 연출은 그런 의미예요.

# 2.
실제 달바에게는 믿어 의심치 않는 세계가 있고, (그 세계가 아무리 왜곡되어 있다 한들) 어쨌든 그 안에서 소녀는 안정적이라 느껴요. 어울리지 않는 드레스, 화장, 장신구, (아마도 엄마를 대신하게 만들기 위함인 듯한) 염색된 머리카락은 관객을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불편하지만, 달바에겐 가장 편안한 모습이고, 소녀는 그것에 거짓될 이유가 없어요. 영화 전반부, 자신이 행복하다는 데 판사가 무슨 권리로 나를 통제하느냐 저항하는 장면의 함의죠.
그래서 소녀를 구출하는 과정은 역설적으로 스키마를 파괴하는 행위, 즉 일반의 학대와 닮아있어요. 딜레마는 이 지점에서 발생해요. 소녀를 집에서 꺼내 강제로 보호 시설에 집어넣는 모습은 겉보기에 폭력적이에요. 자크와의 성관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의사가 생식기를 들여다보는 모습도 매우 가혹하죠. 제이든이 달아나는 소녀를 쓰러트린 후 올라타 손발을 통제하는 모습은 강간범의 자세와 다를 바 없어 보여요. 과정에서 달바는 크게 불안해하거나 좌절하고 있고, 관객은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럼에도 우리는 자크는 끔찍하고 제이든은 선량하다는 걸 의심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자크의 행위와 제이든의 행위는 무엇이 다른 걸까라는 원론적인 질문에 도달할 수밖에 없겠죠.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감정적인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더 실존적이고 철학적인 작품인 거예요.
감독은 해답을 자유와 개입의 아슬아슬한 긴장 속에서 찾아요. 소녀가 마음껏 걸어갈 수 있게 지켜보면서도, 횡단보도의 빨간 신호를 보지 못한다면 멈춰 세우는 것처럼요. 소녀가 입고 싶은 옷을 살 수 있게 하면서도, 무엇을 사야 할지 모른다면 도와주는 것처럼요. 엄마가 자신을 오해하고 있는 딸 앞에서 사려 깊게 대화하려 애쓰는 것처럼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소녀에게 다가가는 소년을 밀어내고, 아직 준비되지 않은 소녀가 다가오는 것 역시 밀어내는 것처럼요.

# 3.
빛과 프레임은, 이 자유와 개입의 긴장 관계를 두텁게 상징하고 있어요.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소녀가 움추러드는 좁은 옷장은 물론 작은 거울, 창문, 달바의 집, 보호시설, 학교, 심지어 스크린까지 모두 각 단계에서 인지하는 세계를 대변해요. 달바는 각각의 단계가 주는 안정감에 안주하고 싶다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새어드는 빛에 이끌려 더 넓은 프레임을 향해 나아가며 성장한다는 것이 이 작품의 내적 논리예요. 집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문은 열려있어야 한다는 것. 자크와 제이든은 모두 달바에게 집으로 기능하지만, 문을 열어두느냐 닫아두느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어요. 타자의 세계를 갱신할 가능성을 차단하는 닫힌 프레임은 폭력, 열린 프레임은 성장이라 말하고 있는 영화는 결국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상의 소통에 대한 이야기예요.
스스로 능동적인 영화이기에 달바는 대신 구원받을 수 없어요. 선생님도, 엄마도, 의사도, 검사도 소녀를 구원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예요. 영화 내내 달바는 스스로 세계를 탐색해요. 스스로 사미아와의 관계에 부딪히고, 스스로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스스로 학교 밖으로 걸어 나가고, 스스로 자크를 면담하고, 스스로 폐허가 된 닫힌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그 집에 새어드는 빛을 직시해요. 마침내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후련한 장면은, 윤리적인 결말이 아니라 성찰적인 결말이에요.
달바는 분명 안타깝지만 연민하는 데에서 그치는 건 심심해요. 그런 감정이 나쁜 건 아니지만 그 감정이 손쉽게 윤리적 확신으로 미끄러져 버리는 건 시시하니까요. 진짜 느껴야 할 것은 달바와, 달바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에요. 우리는 스스로의 프레임 너머 자유롭게 세계를 인지하고 있는 걸까. 달바를 연민하는 우리 모두 알게 모르게 자신의 작은 옷장 안에서 바깥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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