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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Mystery & Thriller

소나티네 (1993, dir. 기타노 다케시): 자기 소거의 비애

그냥_ 2026. 5. 1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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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아직 오지 않은 소멸을 향한 노스탤지어

 

 

 

 

 

 

# 1.

 

소나티네에는 목적이 없어요. 지극히 목적지향적인 폭력은, 그 목적의 부재를 드러내기 위한 반동일 뿐이에요. 모두는 목적이 상실한 인간들이 반복하는 놀이처럼 보여요. 생존 투쟁이 전부인 것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야쿠자들조차 그 움직임에 생의 긴장감이 없어요. 야쿠자 영화는 흔히 조직 간 권력투쟁과 남성적 의리를 중심으로 구축되잖아요. 소나티네는 그 장르 문법을 일거에 비워버려요.

 

움직이지만 방향감은 없어요. 조직의 명령도, 복수도, 관계도 심지어 생존도 진지한 동기가 되지 못해요. 조직은 존재하지만 중요하지 않고, 의리는 무의미한 형식일 뿐이에요. 야쿠자는 거대한 사회악도, 비극적 영웅도 아니에요. 단지 부랑자에 불과해요. 무언가를 원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원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 움직이는 거예요.

 

인물들은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사건조차 무심하게 통과해요. 냉혹함은 아니에요. 그냥 비어버린 상태에 가깝죠. 내내 위험한 장난을 반복하는 아이들 같아요. 총을 다루는 방식조차 진지한 의식이라기보다 놀이의 연장선에 가까워 보이죠. 범죄는 현실적 이해관계보다 공허를 견디기 위한 무료한 게임인 거예요. 그래서 모든 종류의 카타스시스도 거절돼요. 총격도, 배신도, 죽음도 과장되지 않은 채 지나가며, 관객은 오히려 그 빈자리 자체를 체감하게 돼요.

 

폭력은 예고 없이 발생해요. 평온한 흐름 속에 갑자기 총성이 침입해요. 소나티네의 세계에서 죽음과 일상은 분리되지 않아요. 기타노는 그 폭력의 순간을 과잉하지 않고, 정확히는 과잉할 수도 없어요. 카메라는 담담하고, 편집은 냉정해요. 그 무감각함이 더 잔혹하게 작동해요. 폭력이 놀이이기에 죽음은 놀이의 종료일 뿐이고, 기타노는 이 유희성과 잔혹성을 병치시켜 기묘한 탈현실감을 만들어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잃어버린 듯한 감각 말이에요.

 

 

 

 

 

 

# 2.

 

특히 해변에 들어서면서부터 아예 서사 자체가 중단되어 버리죠. 중단된 서사를 뒤로하는 대신 멈춰 있는 시간을 오랫동안 응시해요. 인물들은 아이처럼 모래놀이를 하거나 멍하니 시간을 보내요. 현실의 도피처이자 죽음을 잠시 유예한 어딘가에요. 길게 이어지는 바다의 수평선과 파도 소리는 끝자락에 와 있다는 감각을 드러내요. 표류하는 듯한 느낌. 느린 호흡과는 달라요. 인물들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어요. 이미 끝난 삶의 잔여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여요.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체류랄까요.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엉뚱한 장난을 치고, 폭력 직전까지도 우스꽝스러운 분위기가 유지되잖아요. 하지만 이때의 웃음은 결코 해방적이지 않아요. 오히려 세계가 얼마나 공허한가를 더 극명하게 드러낼 뿐이에요. 관객은 실없는 코미디에 웃고 난 직후, 곧바로 죽음과 침묵에 직면하게 되는데요. 그 감정의 단절이 소나티에 특유의 이상한 감정을 낳아요.

 

일련의 장난들은 야쿠자의 남성성을 해체하는 동시에, 그들이 사실상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데요. 흥미로운 건 이 소년성조차 순수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미 폭력과 죽음에 깊이 잠식된 인간들이니까요. 때문에 놀이 장면은 따뜻하기보다 기묘하고, 심지어 슬퍼 보여요. 유년성은 구원의 흔적이 아니라 끝내 성장하지 못한 인간들의 잔재에 불과해요.

 

 

 

 

 

 

# 3.

 

기타노 다케시의 연출에서 가장 중요한 건 종종 '보이지 않는 것'에 있어요. 감독은 설명적인 대사나, 과장된 음악 대신 침묵과 멈춘 프레임을 애용해요. 인물의 감정을 읽기보다 시간 자체의 흐름을 먼저 체감하게 되기에, 폭력조차 긴장보다는 이미 발사되어 버린 총구에서 피어나는 연기처럼 허무하다 느껴요. 작중에는 묘한 계절감이 있잖아요. 강한 햇살, 아름다운 바다는 마치 여름휴가 마지막 날 저녁 같은 감각을 주는데요. 마치 장례식 직전의 고요처럼 느껴지고 이 역시 작품의 허무를 두텁게 은유해요.

 

총성조차 사건의 완성이 아니라 잠시 침묵을 찢을 뿐이고, 긴 정적과 갑작스러운 발포의 교차는 감각의 단절을 강조할 뿐이에요. 그래서 총격 이후로도 카타르시스는 없는 거예요. 모두는 죽음이 발생해도 동요하지 않고 침묵으로 회귀해요. 찢어진 침묵을 붙잡아 두는 거예요. 히사이시 조의 음악 역시 감정을 밀어붙이지 않고 담담하게 흘러갈 뿐이에요. 영화는 전체적으로 느린 소나타처럼 움직이는데요. 제목인 소나티네는 이런 구조적 리듬감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면에서 지극히 형식주의적인 작품인 셈이에요.

 

 

 

 

 

 

# 4.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정조는 결국 '권태'에요. 폭력적인 영화임에도 이상할 정도로 피로하고 느슨하다 느낄 텐데요. 지독한 영화는 세계를 냉소적으로 바라보지만, 그 냉소조차 지쳐버린 상태라는 면에서 더욱 지독해요. 인물들은 자기 개성보다 사라져 가는 존재처럼만 보여요. 희미해질 뿐이에요. 죽음을 향해 흘러가는 것처럼요. 인물들은 적극적으로 자살을 시도하지 않더라도, 위험을 회피하려는 의지가 현저히 약해요.

 

특히 무라카와는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기다리는 태도를 보이기에, 후반으로 갈수록 그의 행동은 생존 전략이 아니라 자기 소멸을 향한 흐름처럼 읽여요. 소위 기타노 블루라 부르는 소나티에의 비애는 이 '자기 소거의 감각'에서 피어나요. 백미는 그 허무를 철학적으로 설명하지조차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요. 무의미를 의미로 설명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기타노의 허무주의는 사상이 아니라 공기 같은 것. 소나티에는 그 어떤 논평들에도 불구하고 다분히 감각적인 영화예요.

 

그리고 이 허무주의는 기묘한 낭만성, 심지어 노스탤지어를 자아내요. 삶을 향한 낭만이 아니라 소멸을 미학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의 낭만이고, 유년기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소멸을 향한 노스탤지어예요. 허무주의와 낭만주의가 동시에 공존하는 드문 감각. 삶은 무의미하지만 그 무의미 끝에 형식적인 아름다움이 발생하는 찰나에 관한 영화이고, 오랫동안 멍청히 엔딩 크레디트를 지켜봤을 숱한 관객들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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