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상상하는 나

스파이크 존즈,
『어댑테이션 :: Adaptation』입니다.
# 1.
스스로 말하다시피 '존 말코비치 되기'는 골치 아픈 영화다. 분류학적 자아의 매개변수 연구와, 그 독점성과 완결성에 대한 윤리학적 고찰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까. 차기작이 이 피곤한 영화의 촬영 현장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이전의 논의에서 이어지는 바가 있다는 뜻이다.
층고가 낮은 7과 1/2층에 숨겨진 터널에서 자아는 무수히 분리되지만, 사실 판타지적 조작을 통해 작위적으로 해체한 것일 뿐 현실에서 그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모두 인지하고 감각하며 평가하고 갈망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일 따름이다. 어떤 창의적인 사람들은 새로운 인격을 상상해 드라마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 데, 그 순간 독립적인 듯 보였던 분류학적 자아들은 다시 파편화되어 재구성된다. 이를테면 인지하는 나의 조각과, 감각하는 나의 조각과, 통제하는 나의 조각과, 행동하는 나의 조각이 모여 하나의 캐릭터에 투사되고, 또 다른 불규칙하게 조합된 자아들의 파편화된 조각들이 불확정적으로 모여 전혀 다른 캐릭터를 생산해 갈등하는 식이다.
어댑테이션은 창작의 내적 과정을 외부로 투사한 영화다. 비유하건대 존 말코비치 되기가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자아의 구성성분을 수평적으로 나열했다 한다면, 어댑테이션은 터널 스스로가 창작자 자신의 뇌 주름 사이로 파고든 형태, 파편화된 자아들의 수직적 충돌을 그린다. 덕분에 전작에서도 노골적이었던 8과 1/2의 지배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페데리코 펠리니가 막다른 길에서 환상으로 도피했다 한다면, 카우프만은 창작자 본인을 텍스트 안에 밀어 넣어 스스로를 해부하는 방식을 택한 꼴이랄까.

# 2.
작중 캐릭터들은 도날드의 각본 속 인물들이 그러하듯 모두가 한 사람, 찰리 카우프만들이다. 그렇기에 이들이 각각 받아들이는 인지와 감각과 평가와 갈망 등은 본질을 공유한다. 아니, 공유한다는 표현은 썩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뒤엉킨 하나다. 무수한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들 각각 운동성을 무수히 교환하며 일체화된 양상을 보이는, 그래서 자아란 중력이 없는 우주를 흘러 다니는 흐물흐물한 유체 같은 것이다.
요동치는 유체의 유영에 원인과 결과는 없고, 과거와 미래도 없으며, 진실과 허구도 없다. 가령 인지가 원인이 되어 행동하거나 그 역이 아니다. 행동이 인지의 원인이 됨과 동시에 인지가 행동의 원인이 되는, 무한 발산하며 무한 퇴행하는 우르보로스적인 것이다. 기억은 현실이고 갈망은 허구라 생각하겠지만 오해다. 기억조차 허구적인 갈망에서 독립적일 수 없고 갈망은 현실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우리는 기억과 갈망을 분리할 수 없고 현실과 허구도 분리할 수 없다. 수잔 올린의 난초 도둑을 각색하려 하지만, 각색하는 자기 자신을 각색하며 무너져 내려버린 찰리다. 동시다발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자아의 혼란스러움 속에서 익사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유령에게 손을 뻗는, 창작자의 시냅스다.

# 3.
찰리는 유체적 자아의 혼란 속에서 마비된 순수 예술가, 이를테면 새하얀 난초와 같은 '상'이다. 한편 도날드는 클리셰와 인과응보라는 명확한 골격을 가진 드라마틱한 자아다. 후반부 영화는 전반부 내내 거절하던 드라마를 선택하는데, 말인즉 찰리 카우프만의 자아가 드라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뜻이고, 그 선택이야말로 도날드의 죽음을 포함한 그 어떤 내적 결말보다 중요하다. 부유하는 자아의 혼란 속에서 해리되지 않기 위해 드라마라는 유령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결론. 여기서의 드라마는 물론 세부 장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층적 자아를 가지도록 진화되어 버린 인간이 그것을 자각하게 되어버린 비극에 적응하는 유일한 방법이 세계를 드라마로 이해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지나치게 클리셰적이고 때론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자아를 드라마에 기반하는 것은 그것이 적응(Adaptation)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괴한 형태로 변이 하는 난초의 적응과 닮은 것이다.
따라서 어댑테이션은 카우프만 스스로 난초를 관찰하던 시선이, 난초를 관찰하는 나를 거쳐, 살아남기 위해 난초처럼 변모하는 나로 전이되는 과정을 그린다. '나는 사랑하는 대상이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내가 무엇을 사랑하느냐가 나를 결정한다' 파편화된 자아들 사이에서 개인이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적 선택을 지목한다는 면에서 전작과 같은 윤리학적 결말이라 하겠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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