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장르를 기워붙인 인위적인 봉제선이 그렇게나 즐겁다.

ZAZ 사단 감독,
『특급 비밀 :: Top Secret!』입니다.
# 1.
외교 문화 교류를 위해 동독에 초청된 미국인 록스타가 납치된 과학자를 구출하려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공작에 휘말린 김에 겸사겸사 연애한다는 이야기. 별생각 없이 들으면 냉전 시대 스파이 스릴러와, 2차 세계대전 저항군 드라마와, 1950년대 록앤롤 뮤지컬을 적당히 접붙인 평범한 멀티 장르 영화처럼 보이지만, 사실 시놉에서부터 코미디의 냄새가 솔솔 풍긴다. 아니, 동독에 레지스탕스가 왜 돌아다니세요?
짐짓 동독은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한 무난한 배경인 듯 보이지만 핑계.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흡사하게 묘사된 메타 풍자의 공간일 따름이다. 제복부터 하켄크로이츠만 제거되었을 뿐 나치의 것과 거의 동일한 것처럼, 서구 대중문화가 '동구권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시각적으로 구별하지 않은 채 단순히 '악의 세력'으로 평면화해 소비하는 방식을 조롱한다. 물론 그렇다고 동독의 편을 든다는 뜻은 아니다. 내내 멍청하기 짝이 없는 당국의 행각은 물론, 노골적인 동독 국가에 비춰 국가주의의 잔혹성과 폭력성을 드러내는 것도 잊진 않았다. 원래 이런 영화에서 모두 까기는 기본이다.
그렇다고 긴장할 필요는 없다. 스탈린이 죽었다!(2017) 나, 조조 래빗(2019), 바이스(2018)처럼 역사적 지식을 마구 요구하는 까다로운 블랙 코미디는 아니다. 에어플레인을 연출한 ZAZ 사단의 차기작답게 당연하게도 노골적인 패러디 코미디일 뿐이고, 이런 영화는 차라리 장르 영화의 래퍼런스를 알아보는 편이 훨씬 유효하다.

# 2.
남녀 주인공이 처음 마주치는 레스토랑 장면은 고전 영화 컨스피레이터(1944)의 패러디. 닉의 테이블로 몸을 숨기는 힐러리의 시퀀스는 몽땅 (발명가로도 유명한) 헤디 리마의 연기를 고스란히 재현한 것이다. "어떤 일들은 설명하지 않는 것이 훨씬 낫다." 섹도시발 누아르 대사가 직후 저속하고 구체적인 일상 묘사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지는 패턴은 정석적. 노점상으로 위장한 스파이 세드릭이 깜짝 벨이나 가짜 개똥 같은 장난감을 판매하는 장면들은, 하나 짚기도 뭣한 무수히 많은 스파이 영화들이 모방했던 심층 위장 관습을 희화화하는 요소다.
감옥에 갇힌 닉의 장면은 대탈주(1963)의 주인공 스티브 맥퀸의 패러디. 수용소 영화 특유의 인고의 시간을 상징하던 묘사들은 비장미가 제거되어 앙상하게 뼈만 남는다. 찾아본 바에 의하면 레지스탕스들이 작전 수행하는 방식은 특공대작전(1967)이라는 영화에서 참조되었다는 듯 하나 모르니 패스. 침투 계획을 위해 사용하는 구호는 사실주의 영화들 속 복잡한 작전 지시를 희화한 것이고, 특히 크루아상, 에스카르고, 쇼콜라 무스 따위의 맛있는 암호명은 타국의 기호를 평면적(이라는 말도 부족할 정도로 납작하게)으로 소모하는 할리우드의 작법을 비꼬는 장치다.
이젠 아재를 지나 할아재에 진입중일 형님들의 책받침 여신 브룩 쉴즈. 냅다 등장하는 힐러리와 나이젤의 과거 회상 장면은 골든라즈베리에 빛나는 블루 라군의 패러디다. 무인도에 고립된 두 남녀가 자연 속에서 순수한 사랑을 키워나가는 척하다, 갑자기 대나무 쪼가리 모아 자동 차고 문이 달린 현대식 가옥을 짓고 사는 모습은 문자 그대로 가관이다. 자연으로의 회귀라는 나태한 로맨틱 판타지를 기술적 편리함에 중독된 현대인의 시각으로 비튼 명장면.

# 3.
여기까지 쓰다 문득 생각했다. 솔직히 컨스피레이터니, 대탈주니, 카사블랑카니, 블루 라군이니 하는 고전을 다 챙겨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치만 로큰롤의 황제는 알겠지. 주인공 닉 리버스의 캐릭터성은 눈 감고 보더라도 앨비스 프레슬리의 패러디다. 닉을 연기한 배우는 이후 탑건의 아이스맨 대위로 명성을 떨치게 되는 발 킬머인데, 작중 모든 곡을 직접 소화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던 신인 배우는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도 진지한 정극 연기를 꼿꼿이 유지해 패러디의 한 축을 전담했다. Rest in peace.
패러디 영화라고 모든 코미디가 패러디여야 한다는 법은 없다. 짤로나 볼 법한 역방향 촬영을 무려 40년도 더 전의 영화에 때려 박은 서점 장면은 대표적이다. 외국어 듣는 듯한 어색한 느낌을 주겠답시고 필름을 뒤로 감아버린 시퀀스다. 영어 대사를 음절 단위로 나눠 거꾸로 발음했기에 역재생했을 때 영어가 들리면서 억양은 스웨덴어처럼 들리는(정확히는 스웨덴어처럼 들린다고 우기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당연히 배우들 모두 계산된 동선에 따라 뒤로 움직이는 와중에, 뻔뻔하게 거꾸로 걷는 개를 버젓이 보여주는 건 촬영 방식의 아이러니를 역이용한 코미디.
누군가 달리는 차에서 다리 아래로 떨어진다면 금세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쉽게 갈 리가 없다. 뜬금없이 서부극의 술집에서 벌어지는 수중 난투 장면. 파인우드 스튜디오에 대형 수조를 마련해 놓고 그 안에 실제 서부 시대 술집 세트를 제작해 촬영했다 한다. 카메라 밖의 다이버들이 틈틈이 산소를 공급해 주는 동안, 배우들은 산소 호흡기 없이 10~15초 동안 숨 참아가며 액션 안무를 소화해야 했다는 비하인드. 물속에서 느릿하게 부서지는 의자, 깨진 창문으로 들어오는 기포, 수중에서 떨어지는 샹들리에 등 다른 물리 환경에서 발생하는 시각적 이질감은 그 자체로 즐겁다.

# 4.
ZAZ 특유의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의 거리를 이용해 인식을 왜곡하는 강제 투시법 또한 유쾌하다. 일반적인 크기로 보였던 전화기가 손을 뻗는 순간 실제 거대한 소품이었음이 드러나는 장면은 대표적. 기차가 역을 떠나는 대신 기차역 건물 전체가 뒤로 이동하는 장면은 영상 언어를 가지고 노는 기술적 전복이고, 끝없이 이어지는 군용 차량 행렬을 보여주던 카메라가 뒤로 빠지자 사실 대여섯의 차량이 뱅뱅 돌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데 이 역시 프레임 인-아웃을 가지고 노는 코미디다.
대부분 패러디 코미디를 대할 때면 그 창의성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당장의 글에서 놀라워하는 것도 대부분 창의성이니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할 것이다. 다만, 시간이 흐를수록 창의성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창의성을 위해 거침없이 수고로움을 감수한다는 것이다. 수용소에서의 작은 코미디를 위해 세트 뒤 동선을 설계하고, 수중 결투 씬 하나를 찍기 위해 수조에 물을 채우며, 외국어 억양을 만들기 위해 모두가 뒤로 움직이는 그 장인 정신 말이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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