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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아쿠아리움이 문을 닫으면 (2026, dir. 올리비아 뉴먼): 작은 기적들

그냥_ 2026. 5. 20. 06:30

 

 

# 0.

 

이별 이후에도 삶을 지속시키는 작은 기적들

 

 

 

 

 

 

# 1.

 

문어가 이목을 끌고 있지만 진짜 주인공은 '물'이에요. 영화 속 물은 슬픔, 그 가운데 이별의 슬픔을 의미해요. 도입에서 마셀레스가 아쿠아리움의 의미를 자유롭던 바깥 세계와의 이별로 규정한 이유구요, 토바의 아들이 죽은 장소가 물인 이유이기도 해요. 재미있는 건 이 물에 대립항이 없다는 거예요. 붉은빛이나, 노란 온기, 초록 수풀로 대조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감독은 그런 상징을 일절 쓰지 않아요. 그냥 푸른 물이 전부죠.

 

마셀레스는 아쿠아리움에 들어오기 전에도 물에 있었어요. 아쿠아리움 안에서도 물에 있고, 수조 밖에서도 물을 흘리고 다니고, 아쿠아리움을 나가서도 물에서 생을 마감하겠죠. 우리는 결국 물, 이별의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들인 거예요. 바다로 돌아간 마셀레스가 미래를 이야기하는 대신 토바와의 이별에 대해 소회 하는 이유예요. 작품의 인생관은 따뜻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제법 우울해요.

 

심지어 수조 밖을 나온 마셀레스는 물이 없으면 생명이 위험해져요. 슬픔을 벗어날 수 없다는 관점을 넘어, 슬픔조차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바라보는 거예요. 영화는 슬픔을 부정하긴커녕, 오히려 인간은 상실이 있는 자리로 다시 돌아가려 하고, 돌아가야 한다 말하는 영화예요. 토바가 물가를 떠나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캐머런이 혈연을 계속 추적하는 것도 그렇고, 마셀레스가 결국 바다로 돌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영화 속 운동은 모두 전진이 아니라 귀환의 형태를 띠고 있어요.

 

그래서 물은 슬픔임과 동시에, 관계의 매질로도 기능하고 있어요. 인물들은 물 안에서 서로 연결돼요. 패들보드를 타는 바다, 수조의 아쿠아리움은 물론 소소하게 술과 차 모두 물이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관계하죠. 보통 슬픔은 인간관계를 단절시키잖아요.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상실의 슬픔이 인간을 이어 붙인다고 보고 있어요.

 

 

 

 

 

 

# 2.

 

영화는 그 슬픔의 가치를 '의미'에서 찾아요. 이별은 외면하는 것도, 극복하는 것도, 투쟁하는 것도 아니에요. 집과 같아서 그냥 함께 살아가는 것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며 이어지는 존재라는 거예요. 마치 패들보드처럼요. 흘러가는 물 위에서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고요하게 노를 젓는 모습이죠.

 

인물들은 저마다 개성적이지만 이별의 슬픔을 짊어지고 있다는 면에서 공통돼요. 사람을 좋아하고 음악을 사랑하고 토바를 신경 쓰는 이선의 삶은 과거의 슬픔 속에서 의미를 찾아 나왔기에 가능한 거예요. 장성한 아들을 홀로 키우고 있는 에이버리 역시 만만찮은 이별을 지나 가족의 의미를 찾아 나왔겠죠. 수다스러운 토바의 친구들도 다가오는 이별 속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영화 초반 밴드 동료들이 캐머런에게 작별을 고하잖아요. 캐머런은 밴드 해체를 단순히 상처로 받아들이지만, 그들은 새로운 의미를 찾았다 말해요. 영화는 처음부터 이별 이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던 셈이죠. 아버지를 찾아간 캐머런이 애먼 사람한테 총으로 위협당하는 장면이 있는데요. 그 모습은 이별을 거절하고 있는 토바와 캐머런을 바깥에서 바라본 모습과 다르지 않아요. 일종의 거울이죠.

 

마셀레스는 이미 수명이 다했어요. 하지만 마셀레스는 바다로 돌아가고 그곳에서 만족을 표해요. 바다가 특별히 좋은 곳이어서, 다른 문어를 만날 수 있어서,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어서도 아니에요. 바다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토바와 캐머런이라는 '의미'를 찾았기 때문이에요. 토바와 캐머런 역시 영영 마셀레스를 만나지 못하겠지만 괜찮아요. 마셀레스 또한 토바와 캐머런에게 의미가 되었기 때문이에요. 그 가치는 마셀레스 대신 보호되어 들어온 어린 문어로 이어져요.

 

 

 

 

 

 

# 3.

 

이별은 필연이고, 그 슬픔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건 알겠어요. 그걸 어떻게 하라는 걸까요. 작중 토바는 말버릇처럼 모든 것에는 옳은 방법과 틀린 방법이 있다 말하는데요. 중요한 건 진단이 아니라 방법이에요.

 

'청소'는 틀린 방법, '수리'는 옳은 방법이에요. 청소는 흔적을 제거한다는 면에서 부정에 가깝고, 수리는 손상을 인정한다는 면에서 공존에 가까워요. 그래서 이별에 발 묶인 토바와 캐머런의 직업은 청소부인 거예요. 아쿠아리움뿐 아니라 집을 청소하고 차량을 청소하는 등 치우는 것에 집착하죠. 토바의 집 바닥이 망가진 것을 캐머런이 수리하려 하자 토바가 화를 내는 이유예요. 그녀는 수리를 거절하는 인물이거든요. 그래서 아들의 방을 헤집는 장면은 오래도록 미뤄뒀던 손상을 인정한다는 면에서 감동이 있어요. 아들은 망가진 나무 바닥 아래 숨겨둔, 부서진 목각인형을 '수리'해 돌려줌으로써 엄마의 삶을 회복시켜요.

 

늙은 문어가 지적인 네레이션을 말하는 영화는 애초부터 판타지적이고, 결말은 상당한 우연, 아니 우연보다 더한 기적이 벌어지며 마무리돼요. 마셀레스가 늑대장어의 수조에 들어가 반지를 찾아 나오고, 토바와 캐머런이 사실 할머니와 손주였다는 건 모두 터무니없는 기적적인 일이니까요. 직후 감독은 두 번의 기적을 바닷가 단란한 파티로 연결해요. 그래요. 이별의 슬픔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건 놀랍도록 영리한 존재들(Remarkably Bright Creatures)이기에 가능한 참 기적적인 일이에요.

 

상당히 우화적인 작품이죠. 문어가 철학적 독백을 하고, 모든 인물들이 우연처럼 엮이고, 마지막엔 거의 동화처럼 화해하니까요. 그럼에도 영화는 그 동화성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요. 그 동화성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 고마운 영화예요.

 

 

 

 

 

 

# 4.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 여기까지는 모두 드라마적인 이야기예요. 좋게 말하면 선택, 나쁘게 말하면 한계예요. 원작의 스토리에는 지금까지 설명드린 휴먼 드라마와, 주연들의 과거와 관련된 수사물의 재미가 공존하는 데요. 후자를 상당히 희생하고 있기에 그 부분의 재미는 거의 느낄 수 없어요. 토바의 과거와 캐머런의 아버지 찾기는 구색처럼 느껴지고, 그걸 핑계로 돌아다니는 로드무비이자 버디무비에 가까워 보여요.

 

마셀레스는 스스로 독립적인 존재라기보다 감독 대신 논평하는 존재처럼 쓰여요. 어떤 면에선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현자'일 뿐이에요. 빈말로도 캐릭터의 잠재력을 모두 활용했다 말하긴 힘들죠. 관객이 쉽게 감정이입하도록 돕기 위해, 존재론적 낯섦과 긴장을 포기한 셈이죠. 뒤집어 말하면 영화는 끝까지 인간 중심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어요. 깊이 따뜻하지만 동시에 꽤나 안전한 작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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