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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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268

문장의 모습, 소리, 그리고 맛 _ 쥐잡이 사내, 웨스 앤더슨 감독

# 0. 그 양반이 얼~마나 뛰어난 문장가였냐면 말이다~ 웨스 앤더슨 감독, 『쥐잡이 사내 :: The Rat Catcher』입니다. # 1. 로알드 달 원작의 단편입니다. 의 글에서도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넷플릭스가 로알드 달 스토리 컴퍼니(RDSC)를 인수한 후 웨스 앤더슨을 섭외해 진행한 네 편의 결과물 중 하나인 작품이죠. 본론에 앞서 프로젝트의 성격을 짚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시도일 겁니다. 감독 입장에서 한꺼번에 영화를 네 편씩이나 만들어야 한다면, 각각의 작품 이전에 프로젝트 자체에 대해서도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테니까요. 비슷한 프로젝트들의 경우 지난 시대의 작가를 새로운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고, 해당 프로젝트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

Film/Comedy 2023.10.18

세 번의 외출 _ 37초, 히카리 감독

# 0. 네온사인 어지러운 밤. 바람이 시원한 바다. 초록이 숨 쉬는 태국. 세 번의 외출 끝에 처음으로 돌아온 진정한 나의 집. 히카리 감독, 『37초 :: 37 セカンズ』입니다. # 1. 성장 영화입니다. 미숙하던 주인공이 서너 가지의 안전한 해프닝을 겪은 후 내면의 성장에 도달하고, 겸사겸사 주변인들도 함께 성장한다는 류의 전형적인 일본식 성장 영화죠. 뇌성마비 후유증이 있는 장애인을 주인공 삼았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을 테구요, 장애인의 성적 자각이 성장의 모멘텀이 되어주고 있다는 것 역시 주요한 특징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글의 제목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서사는 크게 '세 번의 외출'로 요약할 수 있는 데요. 본격적인 외출을 이야기하기 앞서 출발점으로서의 집에 대해 짚고 가..

Film/Drama 2023.10.16

안전막 없는 트램펄린 _ 풀타임, 에리크 그라벨 감독

# 0. 그 어린 엄마는 잘 지내고 있을까 에리크 그라벨 감독, 『풀타임 :: À plein temps』입니다. # 1. 싱글맘의 고단하고 치열한 일상을 스릴러의 긴박감으로 그려낸 드라마입니다. 이야기에 특별함은 없고 이야기를 즐기는 영화도 아닙니다. 캐릭터성이 강한 주인공을 탐구하는 류의 이야기도 아니구요, 연출에서 강한 개성이 발견되는 작품도 아닙니다. 영화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싱글맘을 상정한 후 그녀의 평범한 일상에 치밀하게 집요하게 접근합니다. 두 아이를 혼자 키워내는 싱글맘이 느낄 법한 감정들, 이를테면 압박감이나, 고독감, 피로감, 조바심 따위를 해체해 각기 다른 현실적 레이어로 흩뿌려 투영하는 것에 집중합니다. 감독은 싱글맘의 스트레스를 주인공의 감정 묘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

Film/Thriller 2023.10.14

헤어진 그녀와의 인터뷰 _ 선우와 익준, 양익준 감독

# 0. 찰나의 감정마저 이토록 두터운데 양익준 감독, 『선우와 익준 :: Sunwoo and Ikjune』입니다. # 1. 선우와 익준은 함께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자, 9년을 만난 연인입니다. 두 사람은 익숙함과 별개로 지나온 긴 시간만큼의 차이를 가지고 있고, 이는 오프닝에서부터 시선, 표정, 자세, 동선, 걸음의 속도, 배경 등 다양한 표현을 통해 부드럽게 은유됩니다. 오늘은 여자 수인이 남자 재석에게 이별을 고하는 신을 촬영하는 날. 두 사람은 완만한 오르막을 무겁게 걸으며 잠시 후 있을 촬영에 대해 논의합니다. 선우는 헤어지자 말하는 여자 수인을 두둔합니다. 익준은 그런 수인의 잔인함을 지적합니다. 촬영이 진행되고 감독 선우는 배우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요. 수인 역의 진서는 되려 수인이 비겁한 ..

Film/Romance 2023.10.10

모성 만세 _ 노웨어, 알베르트 핀토 감독

# 0. 눈부신 모성을 우러르는 눈물겹고 집요하고 처절하고 지독한 신화적 예찬 알베르트 핀토 감독, 『노웨어 :: Nowhere』입니다. # 1. 요 며칠 깜냥에 맞지 않는 어려운 영화를 연이어 보았는데요. 모처럼 날로 먹는 글이 될 것 같습니다. 나이스. 모성 만세! 모성에 대한 영화라 말하기도 뭣한 게 그냥 모성이 전부입니다. 아빠는 잘 모르겠고 아무튼 엄마 최고예요 엄마 사랑해요 노래를 부르는 작품이죠. 제한적인 영화라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노골적입니다. '연약한 여자'였던 주인공이 '강인한 엄마'로서의 모성을 각성한다는 내용이고, 영화는 그 목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일련의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한 폭력적인 장치들, 이를 테면 위험천만한 컨테이너에..

Film/Thriller 2023.10.06

우리 왜 이러는 거예요? _ 흔적 없는 삶, 데브라 그래닉 감독

# 0. 초록색 나무와 노란색 꿀벌의 작별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건 데브라 그래닉 감독, 『흔적 없는 삶 :: Leave No Trace』입니다. # 1. 참전군인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에 대한 영화입니다. 주인공 톰의 아빠 윌이 참전군인 자살 사건의 기사를 스크랩하고 있다거나, 공원 노숙자의 텐트에 걸려 있는 성조기, 공중 트램을 타고 이동하는 두 사람 머리 위로 날아가는 헬리콥터 등은 전쟁에 대한 뉘앙스를 암시합니다. 기차 짐칸에 자연스럽게 올라타는 모습이라거나, 우리 것과 타인의 것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에 집착한다거나, 다리를 다친 윌을 치료하는 사람이 굳이 군의관 출신이라는 설정 또한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테구요. ..

Film/Drama 2023.10.04

꽃과 손 _ 부화, 한나 버그홀름 감독

# 0. 그 손에 담긴 마음을 들어 보자꾸나. 한나 버그홀름 감독, 『부화 :: Pahanhautoja』입니다. # 1. 호러라기에는 조금 애매합니다. 몇몇의 제한적인 점프스케어가 사실상 전부라 공포 영화를 힘들어하시는 분들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죠. 오컬트의 분위기에 살짝 발을 담그는 듯도 하지만 이 역시 크리처의 디자인에만 선택적으로 적용될 뿐입니다. 영화는 과보호 환경에서 성장한 사춘기 소녀의 불안을 드라마틱하게 과장한 우화라 보는 것이 차라리 정확합니다. 알레고리는 제법 단편적이고 또 노골적이라 따라가는 것은 편안합니다. 실제 관객이 즐기게 되는 대부분은 미려하고 문학적인 서사 따위가 아닌, 주인공 티니아의 불안과 배우 시이리 솔랄리나의 열연이 차지하고 있죠. 영화는 가족을 '둥지'로 정의합니다...

Film/Horror 2023.09.28

케인스의 경고 _ 구명보트,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 0. 궁서설묘(窮鼠齧猫).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구명보트 :: Lifeboat』입니다. # 1. 때는 제2차 세계 대전, 독일 잠수함의 공격에 미국 상선이 침몰합니다. 몇몇의 사람들이 구명보트에 간신히 올라 목숨을 부지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되죠. 그러던 중 어느 독일인 병사 하나가 구조되는데요. 사람들은 처음엔 그를 불신하지만, 점점 그의 능력에 의지하고 의존하기 시작합니다. 어느덧 구명선의 키까지 잡게 된 독일인은 그의 입장에서는 자기 방어,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기만적인 행동들을 몇 차례 보이게 되고. 결국 모두에 의해 배 밖으로 떠밀려 처단당하고 말죠. 독일인 선장은 죽었지만 배는 이미 영국의 버뮤다가 아닌 독일의 보급선에 가까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먹..

Film/Drama 2023.09.16

팽팽하게 당겨진 원단처럼 _ 아웃핏, 그레이엄 무어 감독

# 0. 팽팽하게 당겨진 원단처럼. 촘촘하게 새겨진 바느질처럼. 단호하게 가르는 가위처럼. 그레이엄 무어 감독, 『아웃핏 :: The Outfit』입니다. # 1. 서스팬스는 팽팽하게 당겨진 원단 같습니다. 내러티브는 촘촘하게 새겨진 바느질 같습니다. 연기는 단호하게 가르는 가위 같습니다. 핏이 딱 떨어지는 정장 같은 고급스러움으로 가득합니다. 속을 알 수 없는 캐릭터들이 만드는 입체적인 스릴러와, 예측을 거부하는 전개 역시 위력적입니다. 그 아래로 잔잔하게 흐르는 시대에 대한 은유는 작품에 유의미한 깊이까지 더하고 있죠. 이 모든 것들을 좁디좁은 양장점 안에 들어선 여섯 남짓의 인물들을 통해 구현했다는 것이야 말로 작품의 가장 큰 성취라 할 수 있습니다. 영화는 '바늘', '가위', '총'이라는 세 도..

Film/Thriller 2023.09.12

변경의 동물 _ 에브리띵 윌 체인지, 마튼 페지엘 감독

# 0. 수십, 수천 세기가 흘러도 사건이 일어나는 건 현재뿐이다. 마튼 페지엘 감독, 『에브리띵 윌 체인지 :: Everything Will Change』입니다. # 1. 모큐멘터리(Mockumentary), 우리에겐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하실 영화들이 있습니다. 연출된 상황극을 다큐멘터리의 기법으로 촬영해 마치 실제 상황처럼 보이도록 만든 작품들이죠. 파라노말 액티비티 같은 파운드 푸티지 물들도 큰 틀에서 모큐멘터리의 일종이라 할 수 있을 테고요. 아파르트헤이트를 은유했던 닐 블롬캠프의 디스트릭트 9이라거나, 딘 플라이셔-캠프의 마르셀 신발 신은 조개, 한가닥 하는 여배우들이 기싸움하던 이재용 감독의 여배우들 같은 작품들도 있었더랬습니다. 영화 는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방법론을 뒤집어 ..

Film/SF & Fantasy 2023.09.08

언어의 여백 _ 폴라로이드 일기, 김채윤 감독

# 0. 언어로는 온전히 채울 수 없는 삶의 흔적들을 탐구하는 여정 김채윤 감독, 『폴라로이드 일기 :: Polaroid Diary』입니다. # 1. '일기'는 일상적이고 회고적인 뉘앙스만을 전담하는 일종의 그릇이라 보는 게 맞을 겁니다. 핵심은 그런 일기를 형용하는 '폴라로이드'죠. 폴라로이드는 회사명임에도 불구하고 즉석 사진을 뜻하는 보통 명사로 쓰이는 것이 일반적인데요. 이 작품에서의 쓰임 역시 그러하다 해야 할 겁니다. 사진은 순간순간의 단편적 장면들이 파편화되어 있는 상황을 건조하게 의미합니다. 구태여 '즉석' 사진이라 설정한 것은, 영화가 활용하려는 사진이라는 개념에 불필요한 예술성 따위를 배제하고 현장감과 생활감, 즉시성 따위만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이해할 수 있겠죠. 영화는 가정 폭력이라는 ..

Film/Drama 2023.09.04

이런 얼굴이었을까 _ 파라노이드 파크, 구스 반 산트 감독

# 0. 그때 내 뒷모습은 이런 얼굴이었을까 구스 반 산트 감독, 『파라노이드 파크 :: Paranoid Park』입니다. # 1. 제법 난해하고 제법 독특합니다. 누가 구스 반 산트 아니랄까 봐 지독할 정도로 긴 롱 테이크가 영화의 호흡을 붙잡고 깊은 어딘가를 향해 침전시킵니다. 느리고 몽환적인 사운드와 대비되는 과격한 파열음은 침전된 관객의 마음에 의도된 파형을 반복적으로 유도합니다. 주인공 알렉스의 목소리를 빌린 독백 전개와, 혼자 기대앉는 낡은 의자, 일기나 편지 따위의 코드는 내적 고독감을 점층적으로 쌓아나갑니다. 1.33:1의 화면비와 레트로 캠코드의 질감까지 곁들여지면 작품은 현장적이고 회고적이며 감각적이고 동시에 사유적인 무언가로 두텁게 승화됩니다. 인물을 집어삼키고 고립시키는 프레임은 그..

Film/Drama 2023.08.08

학생출입금지 _ 착한 사람은 거짓말 하지 않는다, 조중건 감독

# 0. 그때의 나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었을까. 조중건 감독, 『착한 사람은 거짓말하지 않는다』입니다. # 1. 애매합니다. 이야기는 분노를 일정하게 독려하는 방향으로만 흘러갑니다. 메시지는 제목의 역설에 과도하게 집착합니다. 인물 구도는 도식적이고, 선악 관계는 이분법적입니다. 감상의 대부분이 각자의 '어떤 선생'을 떠올리며 성토하거나, 혹은 교사를 이런 식으로 싸잡아 매도하지 말라 두둔하거나의 이지선다라면 분명 문제가 없다 할 순 없는 거겠죠. 영화를 보는 동안 작품 자체의 내러티브보다, 씨발... 그 새끼 아직 잘 살까?라는 식의 PTSD가 더 크게 느껴진다는 건 관객에게도 감독에게도 서글픈 일임에 분명합니다. 다양한 층위의 다양한 요소들이 동원됨에도 그래서 이 영화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

Film/Drama 2023.07.30

그저 최선을 다할 뿐 _ 검찰 측 증인, 빌리 와일더 감독

# 0. 우리가 재판을 받아들이는 건 완벽해서가 아니라 최선이기 때문일 뿐이야. 빌리 와일더 감독, 『검찰 측 증인 :: Witness for the Prosecution』입니다. # 1. 최고의 추리 소설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작품입니다. 최고의 영화감독 중 하나인 빌리 와일더가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세 명의 주연은 찰스 로튼, 타이런 파워, 그리고 마렌느 디트리흐가 연기합니다. 라인업 살벌하죠. 물론 70년 후의 관객에까지 전달되는 고전 명작들이 대부분 그러하긴 하지만요. 인간의 이기적인 추악한 욕망이 물고 물리는 동안의 긴장감을 지적 호기심으로 견인하는 법정 스릴러입니다. 감독의 명성에 걸맞은 밀도 높은 각본과 다소 복잡할 수도 있었을 스토리를 편안하게 전달하는 연출의 묘가, ..

Film/Thriller 2023.07.19

압박과 환희가 교차하는 완성의 순간 _ 보일링 포인트, 필립 바랜티니 감독

# 0. 주인공은 단연 촬영입니다. 인물이든 환경이든 사건이든 요리든 그 무엇이 되었든 촬영 방식에 우선하지는 못합니다. 필립 바랜티니 감독, 『보일링 포인트 :: Boiling Point』입니다. # 1. 보일링 포인트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나 롱 테이크(Long take)일 텐데요. 본론에 앞서 테이크(Take)가 뭔지부터 가볍게 짚고 가도 좋겠죠. 다음백과에서 제공하는 김광철 씨의 저서 영화사전은 '중간에 끊지 않고 촬영한 하나의 연속적인 화면 단위를 지칭하는 용어'라 설명하는 데요. 대충 카메라 녹화 셔터를 한번 누른 후 정지를 위해 다시 셔터를 누르는 사이를 의미하는 촬영의 최소 단위정도로 이해하면 무난하겠네요. 쇼트(Shot)라는 말도 비슷한 의미로 쓰이곤 하는데요. 테이크는 촬영 용어, 쇼트..

Film/Drama 2023.07.14

만용을 도닥이는 온화함, 용기를 발견하는 세심함 _ 더 브레이브, 코엔 형제 감독

# 0. 어떤 이야기를 쓰느냐보다 그 이야기에 어떤 인과를 부여하고 감동을 포착하느냐가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코엔 형제 감독, 『더 브레이브 :: True Grit』입니다. # 1. 서사만 보면 제법 가혹합니다. 삭막하고 잔인합니다. 현상금 걸린 범죄자 쫓는 서부극의 전형을 따라가고 있으니까요. 시작부터 살인 피해자와 사형수와 이미 죽은 시신이 즐비합니다. 죽거나 죽이거나의 이지선다가 매 순간 강요됩니다. 결국 결손까지 겪습니다. 애꾸 보안관 루스터 카그번은 총에 맞습니다. 레인저 라 뷔프는 혀가 찢어지고 턱이 부서져 내내 웅얼거리구요, 아버지를 잃은 소녀 매티 로스는 어린 나이에 팔을 잃습니다. 끔찍하죠. 모두는 개인입니다. 동기는 돈과 복수가 전부죠. 세 주인공의 동행이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합니..

Film/Drama 2023.07.02

피해망상의 주인 _ 웨더링, 메갈린 에치쿤워크 감독

# 0. 피해망상의 주인은 누구인가. 메갈린 에치쿤워크 감독, 『웨더링 :: Weathering』입니다. # 1. 확실히 넷플릭스는 단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단편을 낼 거라면 차라리 시리즈를 선호하는 편인데요. 체류시간을 최대한 길게 뽑아내자는 운영방침에 반하기 때문인 거겠죠. 그럼에도 가끔씩은 단편을 제작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단편은 왓챠에서 주로 본다지만 외국 단편은 보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소소하게나마 제작되는 넷플릭스산 단편들은 생각보다 더 쏠쏠합니다. 아이를 유산하게 된 엄마가 느끼는 자책감과 트라우마를 조명하는 작품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겁니다. 병원과 집을 오가는 각각의 장면들은 실제 일어난 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인공 '제미나'를 짓누르는 가혹한 감정들의 시각적 ..

Film/Thriller 2023.06.30

풍성한 가지, 앙상한 줄기 _ 킬링 로맨스, 이원석 감독

# 0. 진짜 독특한 감독이긴 합니다. 솔직히 미친놈 같아요. 이원석 감독, 『킬링 로맨스 :: Killing Romance』입니다. # 1. 다음 씬은 커녕 다음 컷조차 예상되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예측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정신 나간 농담들로 100분에 달하는 시간 동안 관객을 붙들어 매는 것을 상상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데요. 그 아이디어를 밀고 나가 이 정도의 결과물을 관철해 냈다는 건 어쨌든 인정해야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감독은 미친놈이 맞는 것 같아요. 코미디라는 게 워낙 기호를 많이 타는 장르라 주관적 감상을 말씀드리는 것에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당장 세간의 평을 들여다봐도 호불호가 극심한 듯 보이니까요. 어쨌든 제법 좋았습니다. 혹자는 민망함을 표하기도 하던데요...

Film/Comedy 2023.06.26

아이슬란드의 몽타주 _ 램, 발디마르 요한손 감독

# 0. 흥미롭습니다. 이야기는 단순함에도 여러 가지 알레고리가 동시에 읽히거든요. 순리와 부정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하구요. 이민과 혼혈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될 여지도 있어 보입니다. 기독교 신화의 비틀린 재해석 같은 맛도 있군요. 발디마르 요한손 감독, 『램 :: Dýrið』입니다. # 1. 우선 첫 번째, 순리와 부정을 중심으로 이야기해 볼까요. 작품은 스스로를 [프레임]으로 소개한다 해도 무방할 정도로 해당 코드를 강조합니다. 양 한 마리씩 들어있는 울타리라거나, 공간을 위계로 구분 짓는 긴 복도, 안팎을 분리하는 문틀과 창문틀, 하다 못해 부부가 타고 다니는 트랙터 운전석까지 모두 프레임이죠. 심지어 잉그바르와 마리아의 집이라거나 최종적으로 아이슬란드의 대자연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이 모든..

Film/Drama 2023.06.22

하염없는 더하기 _ 멍뭉이, 김주환 감독

# 0. 유연석 좋아하는 사람 + 차태현 좋아하는 사람 + 개 좋아하는 사람 + 엄마 사랑하는 사람 + 제주 풍경 좋아하는 사람 + 스튜어디스 좋아하는 사람 = ? 김주환 감독, 『멍뭉이 :: My Heart Puppy』입니다. # 1. 호감력 만렙인 주연배우 빨로 개떡 같은 영화를 찰떡 같이 흥행시킨 감독이 같은 방식으로 재탕에 도전합니다. 그것도 귀염뽀짝 강아지들을 뭉탱이로 쏟아부으면서 말이죠. 영화는 이런저런 곁가지들도 이야기하긴 합니다만 어쨌든 핵심은 개입니다. 아래 레트리버 혓바닥 귀여운 거 보세요. 산책 가까?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두 형제가 차 타고 여행하는 동안 개가 눈덩이처럼 불어났지만 어쨌든 우리 모두 파이팅" 이라는 주제의식의 좌충우돌 코믹 감동 가족 힐링 우정 핑계고 자연 행복 ..

Film/Drama 2023.03.22

송곳니를 지킬 수 있겠나 _ 송곳니,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 0. 언어는 인식을 조직한다. 인식은 사고를 통제한다. 사고는 상상을 지배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송곳니 :: Kynodontas』입니다. # 1. , , 등을 통해 세계적 명성을 얻은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출세작입니다. 불쾌하고 찝찝한 영화 깎는 장인답게 호불호를 많이 타는 감독임엔 분명하지만, 특유의 초현실적 설정과 음울한 분위기, 치밀하고 절제된 미장센 덕에 수많은 팬을 거느린 인물이기도 하죠. 몇 년 전 라는 제목으로 이야기 나눈 게 어렴풋이 기억나는데요. 오랜만에 요르고스 란티모스를 다시 보게 되었군요. 끔찍한 가족입니다. 아빠는 보호라는 명목 하에 가족을 고립시킨 후 왜곡되고 통제된 정보들로 자녀를 세뇌합니다. 장성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어른의 행동과 말투를 보이지 못하는 아이들을 지..

Film/Drama 2023.02.26

다음 영화의 공간 _ 크레이지 컴페티션, 마리아노 콘 / 가스톤 두프라트 감독

# 0. 가짜 바위 아래 앉은 위선과 허세를 조소한 끝에 마주하게 될 다음 영화의 공간 마리아노 콘 / 가스톤 두프라트 감독, 『크레이지 컴페티션 :: Competencia oficial』입니다. # 1. 크레이지 컴페티션을 적당히 번역하자면 '미친듯한 경쟁' 쯤 될 텐데요. 아무래도 격정적인 대립과 갈등이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한다는 것을 전달하기 위함인 듯 보이죠. 하지만 스페인어 원제는 Competencia oficial. 영어 제목 역시 같은 의미의 Official Competition입니다. 영화제의 경쟁부문 출품작에 대한 은유일 것이라 추측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거겠죠. 결말에서 작중작 을 완성한 롤라와 펠릭스가 브리핑하는 뒤로 영화의 제목과 같은 Official Competition이 떡 ..

Film/Comedy 2023.02.18

카타르시스 _ 조지타운, 크리스토프 왈츠 감독

# 0. 그리스어로 정화를 의미하며, 마음속에 쌓여 있던 불안, 우울 긴장, 등의 응어리진 감정이 풀리고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말한다. 한편 이러한 정화작용을 비극에서 등장인물의 비극적인 상황이나 비참함을 보고 마음에 있던 응어리나 슬픔이 해소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카타르시스를 쾌감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엄밀히 따지면 카타르시스는 비극에서 비참한 모습이 해소된 이후에만 사용 가능하기 때문에 카타르시스로 이를 표현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을 수 있다. - 카타르시스 [κάθαρσις / Catharsis] - 크리스토프 왈츠 감독, 『조지타운 :: Georgetown』입니다. # 1. '그' 크리스토프 왈츠 맞습니다. 바스터즈에서의 한스 란다, 장고에서의 닥터 슐츠로 익숙하실 오스..

Film/Thriller 2023.02.10

야망의 초상 _ 맥베스의 비극, 조엘 코엔 감독

# 0. 빛의 캔버스 위, 잠식하는 그림자로 그려낸 살아 움직이는 야망의 초상 조엘 코엔 감독, 『맥베스의 비극 :: The Tragedy of Macbeth』입니다. # 1.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입니다. 4대 비극 중 인지도가 떨어지는 편이지만 그래도 오셀로 덕에 꼴등은 면한 친구죠. 누구나 냉장고엔 먹다 남은 트러플이라도 있는 듯 맥베스를 읽은 것처럼 말하지만, 현실은 햄릿조차 인용하기 만만찮은 세상이니 익숙지 않으신 분들이 많으리라 가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겁니다. 영화 이야기에 앞서 대충의 줄거리 정도는 환기하고 시작하는 것도 괜찮은 거겠죠. 스코틀랜드의 장군이자 왕족이자 글라미스의 영주 맥베스입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친구 뱅코와 왕에게 돌아가는 데 광야에서 마녀를 만나 예언을 듣습니다..

Film/Thriller 2023.01.30

습기와 그늘 _ 매혹당한 사람들, 소피아 코폴라

# 0. 똬리 틀고 돌아보는 뱀. 이름 모를 버섯의 군락. 습기. 그늘. 그리고 매혹이란 이름의 독. 소피아 코폴라 감독, 『매혹당한 사람들 :: The Beguiled』입니다. # 1. 1864년 전쟁으로 인해 모두가 떠난 인적 드문 마을. 심각한 다리 부상으로 죽음 직전 상태에 놓인 군인 '존'이 구조되고, 7명의 여자들만 살고 있는 비밀스러운 대저택에 머물게 된다. 유혹하는 여인 '미스 마사'부터 사로잡힌 처녀 '에드위나', 도발적인 10대 소녀 '알리시아'까지 매혹적인 손님의 등장은 그녀들의 숨겨진 욕망을 뒤흔들고, 살아남으려는 '존'의 위험한 선택은 모든 것을 어긋나게 만드는데... # 2. 기본적으론 제목에서처럼 [유혹]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잘생긴 남정네 하나를 두고..

Film/Thriller 2022.11.06

질문이 아니라 협박이죠 _ 다우팅 토마스, 윌 맥파든 감독

# 0. 물론 의심한다면 너는 인종차별자가 된다는 것만 알아둬. 윌 맥파든 감독, 『다우팅 토마스 :: Doubting Thomas』입니다. # 1. 뼈대만 덩그러니 있는 듯한 영화입니다. 백인 부모 아래 태어난 흑인 아기라는 설정과 인종차별 메시지 정도를 제외하면 의미 있는 정보를 거의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죠. 영화의 전개란 시나리오 단계에서 설정된 인물 관계의 내막을 주인공 등이 순차적으로 제공받는 과정으로 점철됩니다. 그로 인한 갈등이나 변화, 고민, 선택 따위는 사실상 전무해 대부분의 인물들은 내내 제자리에 멈춰있는 것과 다를 바 없죠. 서사가 존재하지 않으니 플롯이라 부를 만한 것도 없구요. 장르적 효과도 당연히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작품의 목적이 네가 톰이라면 어떤 ..

Film/Drama 2022.10.26

뉘앙스 ⅱ _ 캐롤, 토드 헤인즈 감독

뉘앙스 ⅰ _ 캐롤, 토드 헤인즈 감독 # 0. 대상(Her)이 주체(She)가 되는 순간에 찾아오는 어른의 사랑 - 영화평론가 이동진, 그녀(Her) 한줄평 - 토드 헤인즈 감독, 『캐롤 :: Carol』입니다. # 1. 창살과 함께 영화는 시작됩니다. 감독은 자 morgosound.tistory.com # 6. 테레즈의 '안심이 되냐'는 물음에 캐롤은 놀라운 사람이라 답하며 회피합니다. 두려운 게 있다면, 도와줄 것이 있다면 청하라는 말에는 단호하게 두려운 것이 없다 말하죠. 여행 캐리어는 캐롤의 깊고 은밀한 내면을 의미합니다. 그 속에 숨겨둔 총을 보여준 다음 두려움에 대한 대화를 풀어내게끔 편집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캐롤은 내면에 두려움을 숨기고 있으며 그 두려움이 [총]이라는 아이템으로 연결되..

Film/Romance 2022.10.22

뉘앙스 ⅰ _ 캐롤, 토드 헤인즈 감독

# 0. 대상(Her)이 주체(She)가 되는 순간에 찾아오는 어른의 사랑 - 영화평론가 이동진, 그녀(Her) 한줄평 - 토드 헤인즈 감독, 『캐롤 :: Carol』입니다. # 1. 창살과 함께 영화는 시작됩니다. 감독은 자신이 펼쳐놓으려는 이야기의 환경을 똑같은 모양의 틀이 군집된 창살로 정의합니다. 거칠고 건조한 철제 질감과 오밀조밀한 구성은 단절감이나 통제력 따위의 이미지를 복합적으로 암시합니다. 정체성을 제약하는 압박감과 획일성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기본적으론 짙은 정서의 멜로 영화입니다만 못지않은 드라마적 깊이를 겸비한 작품인 것이죠. 다양한 형태의 [프레임]을 징검다리 삼아 풀어낸 작품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대표적으로 창문을 꼽을 수 있을 테죠.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상황에 따..

Film/Romance 2022.10.20

외롭고 버거운 별들의 맞잡은 손 _ 애드 아스트라, 제임스 그레이 감독

# 0. 남을 따라서 살 일이 아니다 네 가슴에 별 하나 숨기고 살아라 끝내 그 별 놓치지 마라 네가 별이 되어라 - 너는 별이다. 나태주 - 제임스 그레이 감독, 『애드 아스트라 :: Ad Astra』입니다. # 1. 우주 SF입니다. 문제적 감독 제임스 그레이가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갈수록 멋있어지는 브래드 피트가 주연 '로이 맥브라이드'를 연기하구요, 맨 인 블랙의 K로 익숙하실 토미 리 존스가 로이의 아버지 '클리포드 맥브라이드'를 맡았습니다. 지적 생명체 탐사 프로젝트 '리마'를 이끌던 클리포드는 오래전 실종되었다 합니다. 그를 영웅으로 여긴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우주 비행사로 성장하게 되죠. 그러던 어느 날 해왕성 방면으로부터 전류 급증 현상이 초래되어 지구가 위험에 노출됩니다. 사태에 리마 ..

Film/SF & Fantasy 2022.10.12

7번방의 노마 _ 블론드, 앤드류 도미니크 감독

# 0. 논란의 작품입니다. 고인 모욕에 대한 이야기도 들리구요. 왜곡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더 크게 들리는 듯합니다. 수위가 세다는 마케팅에 속은 일부의 관객들이 화를 내는 듯한 모양새도 있군요. 혹자는 '마릴린 먼로를 창녀로 만드는 영화'라며 분개하기도 합니다만, 그건 원작 소설에 대한 비판에 조금 더 가깝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과연 그것만으로 영화에 대한 감상은 충분한 것인가에 다소 의문이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영화를 보고 있으니까요. 앤드류 도미니크 감독, 『블론드 :: Blonde』입니다. # 1. 전기 영화란 몇몇의 예외적 시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인물의 인생을 구체적으로 묘사해 소개하거나, 간과되기 쉬운 입체성을 재조명하기 마련일 텐데요. 문제의 는 왜곡을 차치하고서라도, 인물의 정체성을 ..

Film/Drama 2022.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