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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Comedy

다음 영화의 공간 _ 크레이지 컴페티션, 마리아노 콘 / 가스톤 두프라트 감독

그냥_ 2023. 2. 1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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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가짜 바위 아래 앉은 위선과 허세를 조소한 끝에 마주하게 될 다음 영화의 공간

 

 

 

 

 

 

 

 

마리아노 콘 / 가스톤 두프라트 감독,

『크레이지 컴페티션 :: Competencia oficial입니다.

 

 

 

 

 

# 1.

 

크레이지 컴페티션을 적당히 번역하자면 '미친듯한 경쟁' 쯤 될 텐데요. 아무래도 격정적인 대립과 갈등이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한다는 것을 전달하기 위함인 듯 보이죠. 하지만 스페인어 원제는 Competencia oficial. 영어 제목 역시 같은 의미의 Official Competition입니다. 영화제의 경쟁부문 출품작에 대한 은유일 것이라 추측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거겠죠. 결말에서 작중작 <라이벌>을 완성한 롤라와 펠릭스가 브리핑하는 뒤로 영화의 제목과 같은 Official Competition이 떡 하니 적혀있는 것으로 추측은 확신이 됩니다.

 

특별한 괴짜 미치광이들의 경쟁이라는, 일종의 대전 격투 게임이나 레이싱 게임처럼 이해한다면 다소 앙상한 해석이라는 생각입니다. 영화는 영화에 대한 영화, 정확히는 '영화제 경쟁부문 출품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로 상징되는 '현대 영화 비즈니스 그 자체에 대한 우화'라 이해하는 것이 보다 타당한 거겠죠.

 

 

 

 

 

 

# 2.

 

오프닝은 프로젝트의 기획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든 번째 생일을 맞은 어느 부호가 현타에 빠져 자기 이름을 남기기 위해 영화를 만든다는 설정이죠. 

 

노벨상을 탔다는 소설의 판권을 비싼 돈을 들여 사들인 부호는 정작 소설을 읽지 않았습니다. 감독 롤라를 섭외한 것 역시 그녀의 실력이 아닌 평판이 필요했을 뿐이죠. 심드렁하게 음료를 마시며 감독에게 어떤 이야기인지 '요약해 달라' 요구하는 대목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향한 도발로서는 백점이라 할 법합니다. 이후 관객이 보게 될 그 잘난 연기 거장과 무비 스타와 천재 감독이 치고받는 이유란 고작해야 기획한 사람조차 딱히 관심이 없는 변덕스러운 취미생활에 불과하다는 선언인 것이니까요.

 

일련의 오프닝은 영화인뿐 아니라 영화라는 환경의 위상까지 함께 추락시킵니다. 위상의 추락은 호화스럽고 휘황찬란한 공간 디자인과 만나 역설적인 천박함으로 승화되죠. 감독의 목적은 엔딩에서 영화가 완성된 후 도입에서 상의하던 부호의 이름을 딴 다리 완공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재차 확인됩니다. 작중작 <라이벌>은 제 아무리 고상한 예술이라 주장해 봐야 별 뜻 없이 지어 올린 다리와 같은 허상일 뿐이라는 것이죠.

 

오프닝의 도발을 이어받은 그대로 분량 대부분은 세 주인공에 대한 풍자로 전개됩니다. 페넬로페 크루즈가 연기한 감독 롤라 쿠에바스,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연기한 펠릭스 리베로, 오스카 마르티네즈가 연기한 이반 토레스가 그들인데요. 각각은 스스로도 강렬한 캐릭터임에 분명하지만 그에 앞서 영화판의 특정 지점을 의인화한 존재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보다 편안합니다.

 

 

 

 

 

 

# 3.

 

이반은 연기 거장입니다. 고전적이고 보수적이죠. 철저한 캐릭터 연구라는 학구적 태도로 연기를 대합니다. 스스로를 속여야 비로소 진정한 연기라는 식의 메서드 연기에 대한 자부심도 엿보입니다. 연극 무대에서 학생들을 만나는 장면이라거나 장애인 학교에서 강의를 한다는 데에서 현장주의적인 면도 발견되구요. 세속적인 성취와 거리를 두고 있는 것에는 본연의 가치관뿐만 아니라 자신과 자신이 지향하는 진정한 연기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그런 도도한 나라는 가상의 평판에 취해있기도 합니다. 장애인 학교에서 받은 트로피에는 일부의 진심도 포함되어 있겠으나 못지않게 '장애인 학교의 상을 소중히 여기는 나'에 대한 과시욕도 포함됩니다. 소탈과 관용을 지향한다 주장하지만 내면은 더없이 편협하고 쪼잔합니다. 펠릭스의 기만을 기억했다 복수한 다음 그때의 복수라 꼬집어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인물이거니와, 심지어 그 복수의 성격이란 펠릭스를 진심으로 걱정한 진정성에 대한 배신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깔보는 연기법의 인물이 자신을 속인 것에 대한 분함에 가깝다는 것이 인물을 더욱 쪼잔해 보이게 만들죠.

 

펠릭스가 지각을 일삼는다면 구태여 2시간을 늦어야 하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늦는 것이 얼마나 정합한 자신의 권리인가를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일련의 위선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신은 편엽 하지 않다 변호하고 방어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구태여 아직 받지도 않은 영화제 시상식에 올라 영화제를 조롱하는 수상 소감을 기대감과 우쭐함을 내비치며 준비하는 모습은, 이 인물이 가진 이율배반적인 성격을 간결하면서도 입체적으로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죠.

 

그는 시니컬하게 바라본 예술 영화계에 대한 은유처럼 보입니다. 스스로 특별히 도도하고 고상하고 지적이라 여기지만 무비 스타들의 풍요 앞에 열등감과 질투심을 느끼고 있으며, 제 아무리 고상한 척을 해봐야 그들 역시 돈을 대주는 부호의 취미 생활의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지적은 통렬하기도 하고 잔혹하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펠릭스를 비롯한 파트너뿐 아니라 관객들까지 고압적으로 내려다보는 엘리트주의가 만연하며, 일련의 거만함은 절정부에 이르러 높은 곳에서 남을 깔보다 결국 스스로의 힘을 역이용한 펠릭스에 의해 스스로 올라간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모습으로 풍자되며 완성되죠.

 

 

 

 

 

 

# 4.

 

펠릭스는 무비 스타입니다. 세속적이고 실용적이죠. 연기는 대본에 쓰여 있는 것을 집중해 표현할 수만 있다면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디렉팅에 대한 거부감도 덜합니다. 숫자로 표현된 취기를 순식간에 연기하는 장면에선 요청하면 납품한다는 식의 태도가 분명해 보이죠. 도구를 써서 눈물을 내는 것 역시 거부감은 없습니다. 눈물은 똑같은 눈물일 뿐이니까요. 연기는 예술이기도 하지만 기술에 조금 더 가깝습니다.

 

이반이 거만하고 위선적이라면 펠릭스는 허영에 차있고 천박합니다. 경박하고 섣부르며 무례하죠. 자신이 암에 걸린 시한부라는 끔찍한 거짓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지를 수 있는 것은 이 인물의 성격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연기란 상황으로 상대를 속이는 것이고 상대를 잘 속일 수만 있다면 장땡입니다. 제 멋대로 약속에 늦고 모르는 사람의 뒷담화를 스스럼없이 저지르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즉각 해고할 수 있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마뜩잖은 이반의 조카에게 전해질 생일 축하 메시지쯤은 얼마든지 연기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죠.

 

다만 마냥 물렁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연기에 대해 감독이 지적하자 곧바로 거짓말을 연기하는 대목에서 테크닉에 대한 자부심도 강하게 발견됩니다. 그 아래로 연기 기술자로서의 평가가 예술가들의 연기법에 비해 뒤처지는 것으로 취급되는 것에 대한 콤플렉스도 살짝 발견된다는 것 역시 중요한 포인트라 할 수 있겠죠.

 

그는 시니컬하게 바라본 상업 영화계에 대한 은유처럼 보입니다. 화려한 스포츠카라는 부와, 애인과의 화끈한 키스라는 쾌락, 줄지은 오스카와 같은 명예가 커리어를 정의합니다. 영화는 어디까지나 비즈니스고 겉으로 드러나는 성취가 곧 본질입니다. 배고픈 예술가는 초라할 뿐입니다. 펠릭스가 자신이 건물 아래로 떨어트려 식물인간이 된 이반을 걱정했을까요? 전혀.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쏟아지는 카메라와 마이크 앞에서 흘리는 눈물이 본질이죠. 적어도 할리우드는 그런 곳이고 일련의 모습은 어떤 면에서 식물인간이 된 이반보다 더 무언가가 죽어있는 인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 5.

 

롤라는 천재 감독입니다. 유럽식 예술 영화와 할리우드 스타일 상업 영화라는 두 꼭짓점과는 또 다른 꼭지점의 괴짜죠. 그녀는 아직 정의하기 이른 작가주의적 현대 예술가처럼 보입니다. 그녀 역시 두 노인과 같이 무례하긴 매한가지입니다만 성격은 다소 다릅니다. 이반이 '지금 이 상황에서라면 나는 무례할 권리가 있다'라는 쪽이고, 펠릭스가 '그래봤자 연기고 장난인데 왜 심각해하고 그래?'라는 쪽이라 한다면, 롤라의 무례는 '너에 대한 예의 따위는 예술의 숭고함에 비하면 아무짝에 쓸모없다'는 사고방식에 훨씬 가깝습니다. 자의식에 과충전 된 침실 디자인과 과격한 스케치와 겨드랑이 털은 이 인물을 손쉽게 상징하고 있죠.

 

이반은 펠릭스가 암으로 죽거든 자신이 1인 2역을 하겠다 슬쩍 제안하는 데요. 결말에서 이반이 식물인간이 되자 자신의 아이디어 대로 펠릭스가 수염을 기르고 1인 2역으로 영화를 완성하게 되죠. 기자는 질문합니다. 이반이 출연하는 영화를 상상해 본 적이 있냐고. 롤라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없다' 답합니다. 어차피 <라이벌>은 자신의 영화입니다. 어떤 놈이 뛰든 상관없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드높은 예술적 기준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모든 것들을 통제하고 있다 자신합니다.

 

작품을 상징하는 장면을 하나 꼽으라면 크레인에 매달린 거대한 바위 아래서 두 배우에게 연기를 주문하는 장면이라 해야 할 겁니다. 두 거장은 불안을 숨기지 못하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사실 바위는 한 손으로도 번쩍 들어 올릴 수 있는 가짜였던 장면이죠. 물론 이 장면은 두 배우를 대놓고 놀리기 위함이긴 합니다만, 이들이 호소하는 긴장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조소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작품이 지적하는 위선과 허세라는 것은 자신이 불안해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들의 무지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통렬한 맛이 있는 것인데, 그 가짜 바위아래에서는 감독 롤라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역시 의미심장합니다. 그녀 역시 결국은 부호(돈 혹은 자본)의 취미생활 속 장기말일 뿐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으니까요.

 

 

 

 

 

 

# 6.

 

좋습니다. 여기까지는 세 인물이 상징하는 영화 산업 속 누군가들에 대한 거대한 블랙 코미디입니다. 장르적 재미로서 인정할 순 있겠습니다만, 사실 이렇게 놀리기만 하고 끝나는 것은 영 시시합니다. 결국 이 작품 역시 영화라는 면에서 결국 누워서 침 뱉기 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요. 이렇게 영화하는 사람들도 놀리고, 저렇게 영화하는 사람들도 놀렸다면 그 다음은 그럼 영화라는 것은 어떤 걸까라는 질문에 도달하게 될 겁니다.

 

시네마 그 자체를 탐미하는 작품들은 대체로 영화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준 끝에 매시브한 입체감으로 귀결되기 마련인데요. 이 작품은 현대 영화의 비루한 모습들을 다채롭게 풍자한 끝에 새로운 영화의 가능성을 보이드한 공간감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일련의 주제의식은 영화를 채우고 있는 수많은 텅 빈공간들로도 연결되는 맛이 있구요. 식물인간에서 깨어난 이반의 결말 역시 이후의 영화적 상황이라는 거대한 여백을 통째로 관객에게 던지는 결말이라 이해할 수 있겠죠. 다음 시대 영화의 공간을 관객의 통찰로 남겨두겠다는 작품의 의도는, 도입에서 부호에게 롤라가 소설 <라이벌>을 설명하다 결말을 들려주지 않는 대목과도 수미상관으로 연결됩니다. 마리아노 콘 / 가스톤 두프라트 감독, <크레이지 컴페티션>이었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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