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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7번방의 노마 _ 블론드, 앤드류 도미니크 감독

그냥_ 2022. 10. 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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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논란의 작품입니다. 고인 모욕에 대한 이야기도 들리구요. 왜곡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더 크게 들리는 듯합니다. 수위가 세다는 마케팅에 속은 일부의 관객들이 화를 내는 듯한 모양새도 있군요.

 

혹자는 '마릴린 먼로를 창녀로 만드는 영화'라며 분개하기도 합니다만, 그건 원작 소설에 대한 비판에 조금 더 가깝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과연 그것만으로 영화에 대한 감상은 충분한 것인가에 다소 의문이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영화를 보고 있으니까요.

 

 

 

 

 

 

 

 

앤드류 도미니크 감독,

블론드 :: Blonde』입니다.

 

 

 

 

 

# 1.

 

전기 영화란 몇몇의 예외적 시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인물의 인생을 구체적으로 묘사해 소개하거나, 간과되기 쉬운 입체성을 재조명하기 마련일 텐데요. 문제의 <블론드>는 왜곡을 차치하고서라도, 인물의 정체성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편협하게 단정하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호불호라거나 방법론, 완성도에 대한 평가 이전에 이 영화는 대체 왜 만들어진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을 불러일으킨달까요.

 

'노마 진'이라는 인물은 끔찍했던 유년기 트라우마로 '단정'됩니다. 과격하게 말하자면 자녀란 부모라는 원인의 결과물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되는 식이죠. 인물을 아동 학대와 트라우마의 화신으로 규정한 후, 주변인들을 동원해 이 인물의 트라우마를 꼬집고 할퀴고 비트는 가학으로 전개됩니다. 학대에 대한 영화이지만 정작 그 어떤 인물보다 더 폭력적으로 주인공을 학대하는 주체가 감독인 것이죠. 장르의 결은 다릅니다만 방법론에 있어서 만큼은 <7번 방의 선물>과도 유사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네요.

 

 

 

 

 

 

# 2.

 

흑백의 화면은 금발의 주인공을 도드라지게 만들어 세계로부터 고립시킵니다. 상하 개방감 없이 좌우를 잘라먹는 식으로만 활용되는 특유의 화면비는 인물을 가두는 수단으로만 소비됩니다. 위력 관계가 직접적으로 투사된 공격적인 구도와 배치 역시 인물을 통제하는 방향으로만 작동합니다.

 

Blonde라는 제목 보다, Blonde라 이름 붙인 사람의 사고방식이 영화의 핵심에 더 깊이 닿아 있습니다. 노마 진도 아니고 마릴린 먼로도 아닌 그저 금발. 심지어 원래 금발이 아니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짚어내기까지 하죠. 영화가 단정하는 마릴린 먼로는 정체성을 만들어야 할 시간을 학대와 트라우마로 잃어버린, 그래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연기된 금발의 누군가에 불과합니다.

 

노마 진은 누구로부터도 위로받을 수 없고, 정체성은 불에 탄 집처럼 사라져 회복될 수 없으며, 생애는 트라우마의 부산물에 불과하고, 대중이 기억하는 마릴린 먼로는 연기된 허구일 뿐이다. (천박한 의미를 중의적으로 곁들인) Good Girl 이라는 허구적 목표에 발버둥 치다 끝나버린 불우하고 역겨운 인생이다.

 

라는 것을 영화가 선제적으로 결정하기에 관객 역시 이 평가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절규하는 주인공을 보며 연민하고 불쾌해하는 것 외에 다른 감상은 조금도 가져나가지 못하죠. 실존 인물이 경험했을 여타의 시간들 이를테면 생각, 감정, 선택, 관계, 활동 모두 유년기 트라우마로 인한 결핍과 고립 앞에 완벽히 압도됩니다. 만나는 남자마다 Daddy 라고 부르는 모습을 강조하는 연출은, 인물을 납작하게 짓누르려는 목적이 너무 노골적이라 헛웃음이 나올 정도죠.

 

 

 

 

 

 

# 3.

 

재연 장면이 다수 인서트 되는데요. 촬영의 완성도는 상당합니다만, 용도는 편협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인서트를 통해 재해석되는 이미지란 웃고 있는 얼굴, 팬티를 보이는 자세, 사랑을 구걸하는 가사, 다이아몬드와 멍청이, 그리고 창녀뿐인데요. 이러한 장면들은 모두 영화가 자행하고 있는 왜곡들을 마치 과학적 사실인양 증명하는 근거처럼 동원되고 있습니다. 비윤리적이죠.

 

심지어 관객으로 하여금 학대의 참상을 관음하라 강요합니다. 몇몇 장면들을 구태여 극장에 거는 것은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을 당대의 관객과 같은 객석에 앉히기 위함입니다. 수없이 터지는 플래시들과, 군중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직시하는 샷 역시 마찬가지로 관객을 압박하기 위함이죠. 너다. 예나 지금이나 너 같은 애들이 마릴린 먼로를 추행한 것이다. 라며 자신의 관객들을 힐난하는 방식으로 밖엔 달리 해석되기 어려운 연출들이라는 생각입니다.

 

존 F. 캐네디와의 유사 성행위는 앞서 말씀드린 감독의 의도가 뾰족하게 튀어나온 순간입니다. 해당 장면은 마릴린 먼로와 케네디의 루머뿐 아니라, 케네디라는 개인에게 미국이라는 사회를 통째로 투사한 후 '미국이 마릴린 먼로의 머리채를 잡아 추행한 것'을 은유하는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죠. 감독은 애초에 이런 폭력적 메시지에 대해 전혀 동의를 구한 적도 없거니와, 설령 그런 주장을 하고 싶었다 하더라도 이런 천박한 방식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인가라는 비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겁니다.

 

 

 

 

 

 

# 4.

 

자극적인 화면을 한 꺼풀 걷어내고 나면 영화는, 당대 미국이 마릴린 먼로라는 인물을 섹시 아이콘으로서 폭력적으로 소비한 데 대한 지극히 감정적인 힐난으로 축약됩니다. 문제는 '마릴린 먼로는 섹시 아이콘으로서 사회적 강간을 당했고 그녀는 이를 스스로 이용하기도 했다'라는 폭력적 해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있다는 것을 넘어 학대의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영화 스스로 앞장서서 인물을 공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불 같은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인생이지만 그 속은 새까맣게 타버린 재 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묘사하는 것보다, 비어있는 인생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직접 하나하나 비워내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감독과 작가의 손으로 인물의 생애를 폭력적으로 비워내놓고선, 애먼 관객들에게 니들이 이 인물을 학대한 것이라 질책한 후, 그녀의 트라우마를 발견하고 위로하는 나(감독 혹은 작가)를 스스로 대견해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기까지 하죠. 검고 어두운 폭력으로 가득한 영화의 끝을 하얀빛으로 채운 건, 인물의 죽음에 빛을 주고 있는 나(감독 혹은 작가)의 정신적 자위가 분출되는 순간입니다.

 

# 5.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피'와 '나쁜 꿈'은 감독이 제멋대로 정의한 후 전시한 마릴린 먼로의 존재 의의입니다. 이후의 너저분한 앤딩의 절차란 주인공에 대한 다층적 살해의 과정에 불과합니다. 마릴린 먼로라는 명예를 살해하고, 노마 진이라는 인격을 살해한 것을 넘어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을 트라우마 속에 영원히 가두는 결말은 처참합니다. 자기 손으로 인물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선, 죽음이 유일한 안식이기라도 하다는 듯 편안하게 누이는 장면은 역겹기 그지없죠.

 

서두에서 마릴린 먼로를 창녀로 만든 영화라는 평이 있다 말씀드렸는데요. 정확히는 영화가 직접 160분이 넘는 시간 동안 마릴린 먼로를 학대하고 강간하는 작품에 훨씬 가깝다는 생각입니다. 세간의 끔찍한 평보다도 훨씬 더 끔찍한 작품인 것이죠.

 

 

 

 

 

 

# 6.

 

오로지 폭력과 희생자의 비명만이 과장된 열감과 은유로 전시됩니다. 정체성은 학대와 트라우마의 산물로, 생애는 연기하는 창녀로 정의하는 것이 전부라 영화 전반이 압도적으로 납작합니다. 짐짓 주변 인물들이 주인공을 무릎 꿇리는 듯 보이지만, 실제는 영화가 먼저 주인공의 머리채를 휘두르고 있는 것에 훨씬 가깝습니다. 그러면서 폭력의 책임은 비겁하게 당대의 관객들과 지금의 관객들에게 전가하고 있기에 '모욕적인 느낌을 받았다'는 평은 분명 정당합니다.

 

감독의 해석과 작품의 의도를 짚게 되는 1/3 즈음부터, 아빠 찾기로 상징되는 트라우마의 반복 밖에 없기에 폭력적인 상황, 자극적인 표현, 공격적인 화면이 아무리 동원된다 하더라도 한없이 지루합니다. 작품의 의의가 창작자의 도덕적 자위에 있다는 것은 곧 주인공이 학대당하면 당할수록 창작자에게 유리해진다는 것을 의미할 텐데요. 이를 증명하는 대표적인 증거라면 역시나 3시간에 달하는 미친 듯이 비대한 볼륨을 꼽을 수 있겠죠.

 

핵심은 정직성입니다. 인물을 정직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정직하게 묘사해야 합니다. 최소한 해석에 대한 책임이라도 정직하게 짊어져야 합니다. <블론드>는 그 어느 것 하나 정직하지 못한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인물의 입체성을 겸허한 태도로 탐구하려 노력했더라면. 쓸데없는 수사들, 이를테면 반복적으로 등장해 가학적 대사를 토해내는 태아라거나, 설득력 없이 과격하게만 연출된 낙태의 과정, 카메라 플래시의 공격적인 표현, 태만하게 동원된 아빠의 편지, 질책의 도구로서만 활용되는 성기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와 같은 개 같은 연출을 걷어내 콤팩트하게 만들었더라면 훨씬 나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는 영화라는 것에 새삼 한숨을 쉬게 되는군요.

 

과잉된 기교가 시나리오의 부실과 문제적 인식을 가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적극적인 각색과 보다 유능한 연출자가 있었더라면 할리우드 버전의 <라비앙로즈>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아이템이 이런 식으로 휘발되는 것은 서글프군요. 앤드류 도미니크 감독, <블론드>였습니다.

 

# +7. 아나 데 아르마스는 이 개 같은 영화의 유이한 장점입니다. 중반부도 채 접어들기 전에 불쾌감을 크게 느꼈던 영화를 그래도 끝까지 볼 수 있었던 건 온전히 배우의 덕이라 해야 할 겁니다. 납작한 캐릭터임에도 최소한의 생동감이 발견되는 것은 모두 배우가 분투한 결과입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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