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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케인스의 경고 _ 구명보트,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그냥_ 2023. 9. 1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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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궁서설묘(窮鼠齧猫).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구명보트 :: Lifeboat』입니다.

 

 

 

 

 

# 1.

 

때는 제2차 세계 대전, 독일 잠수함의 공격에 미국 상선이 침몰합니다. 몇몇의 사람들이 구명보트에 간신히 올라 목숨을 부지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되죠. 그러던 중 어느 독일인 병사 하나가 구조되는데요. 사람들은 처음엔 그를 불신하지만, 점점 그의 능력에 의지하고 의존하기 시작합니다. 어느덧 구명선의 키까지 잡게 된 독일인은 그의 입장에서는 자기 방어,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기만적인 행동들을 몇 차례 보이게 되고. 결국 모두에 의해 배 밖으로 떠밀려 처단당하고 말죠. 독일인 선장은 죽었지만 배는 이미 영국의 버뮤다가 아닌 독일의 보급선에 가까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먹고 마실 것 없어 절실했던 생존자들은 포로의 입장에서라도 구조되길 바라게 되죠.

 

보급선에서 내보낸 작은 보트가 구명보트에 닿으려던 찰나. 연합의 공격에 의해 독일의 보급선이 침몰하고 맙니다. 간절한 희망이 눈앞에서 같은 편에 의해 침몰하자 사람들은 연합을 맹렬히 비난하죠. 하지만 연합의 배가 다가오자 금세 마음이 180도 뒤바뀝니다. 때마침 자신을 구조하라 오던 독일인 병사 하나가 구명보트에 오르게 되고. 사람들은 새로운 독일인 포로의 처우에 대해 다투는 것으로 작품은 막을 내립니다.

 

가혹한 상황 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판단의 전환은 작품의 핵심적 재미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제한적 공간 안에서 풀어내는 풍부한 캐릭터 쇼와, 누구라도 납득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의 조화는 감독의 명성에 걸맞은 완성도를 넉넉히 지탱합니다.

 

 

 

 

 

 

# 2.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감독의 특기라 할 수 있을 쫄깃쫄깃 서스펜스 스릴러와는 결이 제법 다른 작품이긴 합니다. 흔히 히치콕 하면 떠올리실 영화들. 이를테면 이창이나 현기증, 사이코, 새,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등과는 10여 년 이상의 차이가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죠. 감독의 생애를 모두 팔로우한 것은 아니기에 커리어 중후반의 영화철학적 변화로 인한 차이인지, 전쟁통이라는 특수한 상황 탓인지, 혹시 모를 개인사가 영향을 미친 것인지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만, 여하튼 작품은 상대적으로 전통적 의미에서의 드라마에 훨씬 가깝기는 합니다. 물론 장르물로서의 재미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지만요.

 

주제의식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인간 본성과 사회 전반에 대한 염세적 탐구라 할 수 있을 작품이죠. 물자와 체력과 정신력이 점점 소모되는 가혹한 환경 속 놓인 인간의 유약함과, 그 유약함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민망한 반목과 갈등은 작품의 핵심 내러티브라 할 수 있습니다. 몇몇의 러브 라인 따위 조차 극한에 다다르면 결국 수면욕과 식욕, 성욕만 남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일 뿐 특별히 아름답다거나 하지 않은 이유죠. 거스의 잘려나간 다리, 버려진 신발과 대비되는 코니의 발장난은 그 순간 구명보트라는 공간이 어떤 곳인지를 단호하게 정의합니다.

 

다만 이건 너무 표면적이고 얕습니다. 인간 탐구라는 면에서만 본다면 염세적인 자세로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한 작품이라 해도 무리는 없을 정도죠. 그렇다면 질문을 뒤집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어떤 인간 탐구를 하고 있는가 보다, 히치콕은 인간 탐구를 왜 하필 '구명보트'라는 환경을 통해 풀어내고 있는가. 를 물어보는 것이 더 흥미로울 수 있다는 것이죠.

 

 

 

 

 

 

# 3.

 

드라마에서 한 발짝 떨어져 구조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영화의 서사는 사람들이 하나하나 낙오되는 과정으로 점철된다 할 수 있습니다. 신체적으로 연약한 아이는 가장 먼저 낙오됩니다. 아이 잃은 엄마도 낙오됩니다. 장애인이 되어버린 거스도 낙오됩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공동체의 생존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아이 엄마는 밍크코트를 소비하고, 거스 역시 얼마 없는 술과 담배를 소비할 뿐이죠. 이들의 낙오는 평범한 일반에 비해 열등한 존재들의 낙오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독일인 선장은 우월한 존재입니다. 그는 바닷길을 알고 있고, 나침반을 가지고 있고, 수술을 할 줄 알고, 노를 저을 힘이 있고, 폭풍에 앞서 물을 챙겨둘 준비성까지 갖추고 있죠. 군중은 그의 우월함에 도움을 받으며 노래 부르지만, 그 우월한 존재가 키를 잡고 군림한다 생각하자 되려 몰려가 공격합니다.

 

결과적으로 영화 속 모든 인물은 하향평준화됩니다. 부자는 가진 물건을 잃고, 지식인은 교양을 잃고, 자본가는 양아치와 같은 눈높이에서 도박하고, 종교인은 소매치기로 돌아가죠. 하향평준화의 평균으로 소집하지 못하는 태생적으로 열등한 존재들과 태생적으로 우월한 존재들은 강제로 집단의 폭력에 의해 잔인하게 낙오합니다. 

 

나치죠.

 

정리하자면 구명보트의 무리들은 독일군에 공격받은 연합 쪽이라는 입장만을 가지고 있을 뿐, 철저하게 나치식 전체주의의 사고로 행동합니다. 역으로 독일군 선장은 독일군이라는 입장만을 가지고 있을 뿐, 나치에 의해 핍박받는 유대인의 속성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죠. 당대 유럽인들은 유대인이 셈에 밝고 약삭빠르다 여겼습니다. 욕심이 많고 꿍꿍이가 있어 숨기는 것이 있다는 선입견도 있었죠. 그들이 모은 것은 어쨌든 원래 우리의 것을 빼앗은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유용하다 여겼던 동안에는 이용했지만 그들이 유럽에 퍼져 자신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나가리라 생각하는 순간 제거했습니다. 홀로코스트죠.

 

'자네 본명이 슈미츠라는 것을 잊지 말게'라는 대사는 그런 의미에서 중요합니다. 이름은 뿌리와 같습니다. 죽으며 자신의 뿌리를 잊지 말라 말하는 모습은 아우슈비츠에서 죽기 직전 유대인들이 남은 사람들에게 네 뿌리가 유대인에 있음을 잊지 말라 말하는 모습으로 오버랩됩니다.

 

 

 

 

 

 

# 4.

 

연합의 입장에서, 세계대전은 나치라는 특별한 괴물들과 정상인의 투쟁이라 여겨졌을 텐데요. 작품은 이 같은 인식을 정면에서 부정합니다. 히치콕은 추악한 본성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생각합니다. 보트에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던 것처럼 나치 독일 역시 지식인도 자산가도 종교인도 직업인도 있었을 겁니다. 다만 그들은 '지독한 궁핍'에 의해 모두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쥐떼와 같은 맹목적인 나치스트'가 되고 말았을 뿐이죠.

 

구명보트에 올라탄 사람인들이 되려 나치 독일의 알레고리라 한다면, 중요한 질문은 그런 독일인을 구명보트에 태운 유보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일 텐데요. 실마리는 거시 경제학의 아버지 '존 메이너드 케인스'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케인스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경제를 초토화하는 내용의 혹독한 배상금이 무자비한 인플레이션을 발생시킬 것이라 예상합니다. 이는 독일 국민들을 빈곤으로 내몰아 '극단적 혁명'이 발생, 전체주의 정권의 등장과 새로운 전쟁을 일으킬 것임을 경고했죠. 즉, 독일에 물린 막대한 배상금이 전후 독일을 식량도 물도 없는 구명보트에 올려버린 것이라는 건데요. 침공당한 배가 여객선도 전함도 아닌 '상선'이라는 설정은 이 같은 경제적 맥락으로 이야기를 읽는 데 기여합니다.

 

영화 <구명보트>의 가치는 독일과 연합을 대비시키되 연합에 위치한 관객을 독일인의 위치에 앉히겠다는 발상에 있습니다. 이타적이고 윤리적이었던 문명인들은 굶주림에 금세 타락하지만, 다시 최소한의 물질이 확보되자 입술을 바르는 등 교양을 회복하는 데요. 소름 끼치죠. 결말에서 추축국과 연합국에 대한 손바닥 뒤집 듯한 입장 변화는, 작품의 말미에 이 영화의 핵심이 '입장의 전환'에 있음을 은근슬쩍 내비치는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관객은 왜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보는 것인가. 추악함을 흥미롭다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재미있죠. 반목과 갈등이 재미요소가 되는 아이러니는 관객에게 내재된 폭력성과 야만성을 발견하게 합니다. 당대 관객이었을 미국인들도 80년이 지난 지금의 현대인들도 모두 '지독한 궁핍'에 처한다면 언제든 나치스트가 될 수 있습니다. 이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은 영화의 표면에 묘사된 물리적인 공격도, 이면에 숨겨진 경제적인 공격도 될 수 없습니다. 거대한 반전주의 내지 평화주의적 주제의식으로 승화되고 있는 작품인 것이죠.

 

 

 

 

 

 

# 5.

 

이동진 평론가가 기생충을 이야기할 때면 주로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한 계급론을 중심으로 해석해 설명하곤 합니다만, 그보다 그가 정말 경탄해 마지않는 것은 '탁월함'에 우선하는 '신랄함'처럼 들리기도 하는 데요. 이 영화 역시 그와 같은 성격의 카리스마가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전쟁이 아직 종식되지 않은 1944년에 관성적으로 인간을 선악으로 이분화하지 않고, 피아를 넘어선 전쟁과 인간에 대한 신랄한 통찰을 담아냈다는 면에서 말이죠. 인간 본성을 통찰하는 대담함. 치부를 들추고 반성을 촉구하는 패기. 그것을 프로파간다의 형식이 아니라 지극히 영화적인 방법론으로 구현하는 유능함은 새삼 놀라게 됩니다.

 

물론 창작자로서의 야심도 간과해서는 곤란합니다. 무려 80년 전에 나무배 한 척 띄워 놓고 그 위에서만 장편(!) 전쟁(!) 영화를 찍어내겠다는 야심은 어마어마합니다. 당연히 그래픽이라는 게 존재할 수 없던 시대의 작품일 텐데요. 영화를 따라가며 저 장면들은 어떤 영상적 기교, 영화적 착시를 통해 풀어내었던 걸까를 역산해 보는 것 역시 이 작품만의 큰 재미라 할 수 있겠죠.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구명보트>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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