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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이런 얼굴이었을까 _ 파라노이드 파크, 구스 반 산트 감독

그냥_ 2023. 8. 8.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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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그때 내 뒷모습은 이런 얼굴이었을까

 

 

 

 

 

 

 

 

구스 반 산트 감독,

『파라노이드 파크 :: Paranoid Park』입니다.

 

 

 

 

 

# 1.

 

제법 난해하고 제법 독특합니다. 누가 구스 반 산트 아니랄까 봐 지독할 정도로 긴 롱 테이크가 영화의 호흡을 붙잡고 깊은 어딘가를 향해 침전시킵니다. 느리고 몽환적인 사운드와 대비되는 과격한 파열음은 침전된 관객의 마음에 의도된 파형을 반복적으로 유도합니다. 주인공 알렉스의 목소리를 빌린 독백 전개와, 혼자 기대앉는 낡은 의자, 일기나 편지 따위의 코드는 내적 고독감을 점층적으로 쌓아나갑니다. 1.33:1의 화면비와 레트로 캠코드의 질감까지 곁들여지면 작품은 현장적이고 회고적이며 감각적이고 동시에 사유적인 무언가로 두텁게 승화됩니다. 인물을 집어삼키고 고립시키는 프레임은 그 안을 독점하는 피사체에 대한 탐구, 강렬한 인간 탐구입니다.

 

그래서 이야기라 할만한 것은 없습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긴 하는 데요. 처참하긴 합니다만 어쨌든 예기치 못한 사고였던 데다, 경과가 의미 있게 발전되느냐 하면 그러지도 못합니다. 주인공이 어떤 특별한 선택을 함으로써 서사의 경로가 뒤바뀌거나 하지도 않고요. 보다 보면 애초에 살인이라는 것조차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닌 사소한 맥거핀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보편적인 사람들의 보편적인 특질을 탐구하는 가운데, 살인은 그저 그 특질을 추출하기 위한 과장된 충격에 불과한 듯 보인달까요. 

 

 

 

 

 

 

# 2.

 

작품을 장악하고 리드하는 것은 사건도 인물도 아닌 '공간'입니다. 파라노이드 파크와, 밤의 철길, 혼자 남은 집, 바다가 보이는 들판 따위죠. 특히 중요한 것은 역시나 제목에서처럼 파라노이드 파크라 해야 할 겁니다.

 

"파라노이드 파크에 갈 준비된 사람은 아무도 없어." 

 

라는 한 마디 대사는 친구 제라드의 말 이전에 공간에 대한 감독의 소개입니다. 아직 미성숙한 소년이 준비할 새 없이 마주하게 되는 무언가라면, 통상 필연의 성장을 의미한다 이해하면 무난합니다. 스케이트 보드는 파라노이드 파크라는 공간을 정의합니다. 자동차, 열차, 보드, 자전거 등 탈것들이 미장센으로 적극 활용된다는 측면에서 '운동성'에 집중하는 것은 썩 효과적인 접근법이라 할 수 있겠죠.

 

아시다시피 스케이트 보드에는 자체적인 동력이 없습니다. 주기적으로 발을 굴러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그러지 않으면 이내 멈춰버리고 맙니다. 성장이란 스스로 땀 흘려 애써야 하는 것처럼 말이죠. 밤새도록 공원을 맴도는 모습에서는 일정한 불안이, 하프 파이프를 오르내리는 모습 따위에서는 처연함과 무기력함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각양각색의 보드는 개성과 정체성을 은유하는 듯 보입니다. 그것이 연습과정에서 지워지고 깨지고 부서져 나간다는 점은 성장에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될 고통이라 할 수 있겠죠.

 

 

 

 

 

 

# 3.

 

그런 파라노이드 파크를 알렉스는 동경합니다. 그는 보드를 가지고만 있을 뿐 아직 탈 줄은 모르는 소년입니다. 성장을 앞둔 미숙한 존재라는 것이죠. 소년은 우연히 만나게 된 누군가와의 대화 끝에 일탈에 다다르게 되는데요. 낯선 이의 모습은 썩 흥미롭습니다. 덥수룩한 수염과 또렷한 눈빛은 소년이 미처 가지지 못한 강인한 남성성을 과시합니다. 그를 둘러싼 매력적인 여자, 거래를 제안하는 방식, 스케이트 보드를 다루는 능력, 자기 말을 지키는 신용, 새로운 세계의 경험 따위는 소년이 상상하고 바라마지않던 어른스러움입니다.

 

확인되지 않은 누군가에 이끌려 소년은 새로운 공간으로 내딛습니다. 밤의 철길이죠. 열차는 보드보다 훨씬 크고 무겁고 과격합니다. 타는 사람의 의지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미숙한 존재라면 휩쓸려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폭력이죠. 몰래 열차를 타는 과정에서 사고에 휘말리게 된 사람이, 무언가를 보호하는 존재로서의 경비원이라는 것도 중요합니다. 열차에 치인 경비원의 상하반신이 절단되었다는 것은 삐뚤어진 성장이 낳게 될 비가역적인 단절의 이미지를 과격하게 전시합니다. 구스 반 산트의 성장이란, 무조건적인 친절함과 구분되는 자유와 욕망과 불안과 파괴를 통할하는 가치중립적 개념인 것이죠.

 

살인 사건의 전말이 연출된 이후 후반부 분량은, 다소 도식적이기도 한 파라노이드 파크라는 공간을 세밀하게 분절한 후 소년의 삶으로 끌고 들어와 반복합니다. 소년이 겪게 되는 다양한 관계들. 이를 테면 그저 경험을 위한 경험으로서 여자친구와 처음 잠자리를 가지는 순간이라거나, 가족의 해체 앞에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는 순간, 압박감과 그에 걸맞은 대응이 요구되는 학교에서의 순간 등은 본질적으로 의도치 않고 예기치 않았던 살인과 같은 성격의 사건들입니다. 그런 충격 앞에 나약한 알렉스의 내면은 왜소하고 깡마른 몸뚱이의 헐벗은 모습이라거나,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양복이라거나, 뜬금없는 아프리카와 이라크에 대한 이야기 따위로 재차 은유됩니다.

 

 

 

 

 

 

# 4.

 

알렉스가 느낄 오만가지 감정들은 각각의 시퀀스들과, 앞과 옆과 뒤의 얼굴들에 할당되어 진득하게 집요하게 전시됩니다. 탁월한 영화적 연출로 완성된 시간, 시각, 청각. 세 감각을 복합적으로 넘나드는 미장센들이 콜라주 되어 창조하는 공감각적 경험은, 뒤돌아서 앞으로 걸어가는 누군가의 내면을 마치 등 뒤에 숨겨진 얼굴을 바라보기라도 하듯 들여다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순간들에 있었을, 절대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내 뒷모습에 숨겨진 또 다른 얼굴을 비춰 보여주는 것만 같은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알렉스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성장의 기로에 놓인 위태로운 인간을 탐구하다 결국 그 시점에 있었을 과거 자신을 아스라이 회고하는 순간은 그야말로 영화적 경험의 진수라 할 법합니다. 일련의 압도적인 밀착감은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감각하고' 있다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키는 듯하군요. 감정을 다듬어 관객의 손에 들려주는 일반의 영화는 아닙니다. 관객 스스로에게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물어볼 것을 요구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죠.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듯한 낡은 화면과 기나긴 롱 테이크는 관객에게 충분한 여유를 제공하고 있으니까요. 구스 반 산트 감독, <파라노이드 파크>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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