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728x90

드라마 268

Skip _ 투 마더스, 안느 퐁텐 감독

# 0. 두 절친 아줌마가 서로의 아들을 바꿔 연애하는 영화, 즉 불륜물입니다. 관객에 따라선 작품을 보기도 전부터 소재의 파격만으로 혀를 찰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박훈정' 감독의 『V.I.P.』 리뷰에서도 말씀드렸듯 영화의 소재가 그 자체로 문제시되는 건 합리적이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궁금해하고 즐겨야 할 건 소재의 파격성이 아니라 소재로부터 감독이 무엇을 발견하고 있는가여야 하는 거겠죠. '안느 퐁텐' 감독, 『투 마더스 :: ADORE』입니다. # 1. 전반부는 이들의 관계를 최대한 긍정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소위 판을 까는 작업이죠. 아들들은 키 크고 잘생긴 몸짱 출신 서핑 중독자들입니다. 엄마들은 해녀보다 더 자주 물질을 하는 수영의, 보다 정확히는 '수영복'의 화신들이죠. ..

Film/Romance 2021.12.10

가발을 처음 본 머리카락 _ 가발, 아타누 무케르지 감독

# 0.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 문학평론가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p.133 '아타누 무케르지' 감독, 『가발 :: Wig』입니다. # 1. 인도 국적의 여성 '알리타'가 집 건너 거리에서 몸을 파는 트랜스젠더 매춘부를 만나 성장하는 내용의 드라마입니다. 주인공은 I.T 회사에 다닙니다. 미혼이 흠이 되는 인도 사회에서 자기 삶의 주도권을 쟁취해 나가고자 하는 현대적 인간이죠. 그녀는 이상적입니다. 도전적입니다. 발전적이고 논리적이며 긍정적이고 가치지향적이죠. 하지만 이 인물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다름 아닌 '자기 확신'입니다. 알리타는 충분히 똑똑하고 상냥하지만, 자신만의 철학과 방식의 합리성에..

Film/Drama 2021.12.08

붉은 날 _ 슬라롬, 샤를렌느 파비에 감독

# 0. 새하얀 설원을 가르는 붉은 날. * 날² [명사] _ 연장의 가장 얇고 날카로운 부분. 베거나 찍거나 깎거나 파거나 뚫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표준국어대사전- '샤를렌느 파비에' 감독, 『슬라롬 :: Slalom』입니다. # 1. 서사는 날카롭고 직선적입니다. 숨겨진 비밀 따위의 과장된 변주 없이 날 것 그대로를 전개합니다. 시니컬해 보일 정도의 선명성이 드라마가 작동하기 위한 높은 몰입도를 정석적으로 설득합니다. 프랑스 영화는 이 강단이 참 매력적이죠. 미성년자 성폭행이란 소재는 충격적이지만 핵심은 아닙니다. 일정 규모 이상의 집단에서 특별히 문제적인 개인이 특별히 문제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건 종종 일어나는 일이며 그걸 원천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는 건 감독도 알고 있습니다. 영화가 주목하는..

Film/Drama 2021.12.02

겁쟁이의 기억법 _ 애플, 크리스토스 니코우 감독

# 0. 인물을 고립시킵니다. 화면 끝으로 강하게 밀어냅니다. 스크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큰 거울과 등지고 앉은 남자입니다. 머리 위나 뒤를 최대한 넓게 잡은 구도와, 멍하니 흐릿한 초점의 표정 연기가 남자의 머릿속을 공간에 던져 시각화합니다. 이 영화는 거울 속에 온전히 갇혀버린 남자의 이야기군요. 집을 나서 거리를 걷습니다. 줄지은 검은색 차량과 단조로운 패턴의 건물이 남자의 걸음에 방향성과 연속성을 부여합니다. 차 앞에 기억을 잃은 누군가가 주저앉아 있습니다. 일련의 시퀀스는 이후 남자가 걷게 될 선택을 압축적으로 은유합니다. 일정한 방향으로 연속되던 시간을 거칠게 단절하는 기억 상실입니다. '크리스토스 니코우' 감독, 『애플 :: Mila』입니다. # 1. 반전 영화입니다. 언제나의 반전 영화들처..

Film/Drama 2021.11.28

홉스의 영화적 증명 _ 갓즈 포켓, 존 슬래터리 감독

# 0.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연기를 볼 마지막 기회" - The Telegraph, 영화 홍보 카피 중에서- '존 슬래터리' 감독, 『갓즈 포켓 :: God's Pocket』입니다. # 1. 영화의 제목은 갓즈 포켓, 신의 호주머니입니다. 호주머니에는 보통 볼품없는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잡동사니라 불리는 것들이죠. 각각의 용도나 정체성을 주목하지 않는 잡다한 것들의 무리. 값지지 않아 이리저리 구르고 깨져도 걱정이 없는 것들을 뜻합니다. 호주머니 속 잡동사니들은 걸음에 따라 뒤엉킵니다. 어느 조각이 위에 오르기도 하고 어떤 조각은 아래에 깔리기도 하지만 이는 걷는 사람의 의도가 아닌 운에 따를 뿐입니다. 무언가가 부서졌다거나 부서지지 않았다면 그 역시 조금 운이 나쁘거나 운이 좋았을 뿐이죠. 잡동..

Film/Drama 2021.11.18

폭주하는 자기애 _ 필름시대사랑, 장률 감독

# 0. 확실히 해이해진 요즘입니다. 며칠 연이어 편하게 떠먹여 주는 영화들만 골라봤다 싶죠. 조수석에 앉아 감독이 직접 말하는 대화만 따라가면 되는 . 타란티노 옆에서 미녀의 발가락이나 빨면 되는 . 세상 친절한 옴니버스 음식 영화 까지. 이쯤되면 슬슬 스스로의 기강을 잡을 때가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리스트에 묵혀뒀던 비장의 카드를 꺼내야겠군요. '장률' 감독, 『필름시대사랑 :: Love and...』입니다. # 1. 제목부터 피곤합니다. 각기 따로 노는 어휘뿐 아니라 특히 혼란스러운 건 조사助詞가 없기 때문이겠죠. 필름 시대의 사랑인 건지, 필름과 시대와 사랑인 건지 아니면 필름으로 담은 시대적 사랑인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으니까요. 영화가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감독이 직접 내건 제목을 만나게..

Film/Drama 2021.11.14

소녀는 엄마는 친구 _ 좋은날, 황슬기 감독

# 0. 단편 옴니버스 의 마지막 에피소드입니다. '황슬기' 감독, 『좋은날 :: A Good Day』입니다. # 1. 진수성찬입니다. 이전 두 편의 음식과는 결이 많이 다르군요. 장소도 휴양지에 있을 것만 같은 호젓한 한정식집입니다. 네 명의 여사님들이 등장합니다. 진한 사투리를 쓰고 있습니다. 흔히 그 나이대 여자들이 모여 나눌 법한 이야기와, 생길 수도 있을 법한 갈등이 전개됩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발견되는 키워드는 친구와 엄마입니다. 친구는 상황이 성립되기 위한 관계를 만들고 정체성을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돕는 보조적 역할을 수행합니다. 감독은 엄마의 정체성을 진수성찬으로 정의합니다. 풍요롭고 화려하고 든든하지만, 때론 지루하고 까다로우며 불편하기도 합니다. # 2. 서울입니다. 유독 티격태격하던..

Film/Drama 2021.11.10

올해의 단편 _ 맛있는 엔딩, 정소영 감독

# 0. 이번 옴니버스 너무 좋은데요? 단편 옴니버스 두 번째 에피소드입니다. '정소영' 감독, 『맛있는 엔딩 :: Tasty Ending』입니다. # 1. 무수히 많은 신발과 오브젝트는 누적된 무언가를 의미합니다. 특유의 물 빠진 색감과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깊은 한숨이 인물과 공간의 수분을 제거합니다. 제법 긴 시간 동안 대사는 단 한 마디도 없습니다. 물건을 챙기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는 손길에 과격하면서도 처연한 정서가 엿보입니다. 서랍장에서 상자를 꺼냅니다. 상자 속에서 다이어리를 꺼냅니다. 1000일. 3년 여가 넘는 긴 시간을 만났다는 것보다, 1000일 이후론 세지도 않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시콜콜한 잘잘못에 대한 작품이 아닙니다. 여자의 이별은 어떤 사연 어떤 핑계를 댄다 하더라도 결국..

Film/Romance 2021.11.08

숙주와 라임. 고수는 빼고 _ 나이트 크루징, 김정인 감독

# 0. 단편 옴니버스 의 첫 번째 에피소드입니다. '김정인' 감독, 『나이트 크루징 :: Night Cruising』입니다. # 1. 오르막길의 뒷모습. 누군가를 부축하는. 지나는 차량에 가려진. 물리적으로 홀로 남겨진. 사회적으로 홀로 낙오된. 주인공 '송이'에 대한 감독의 소개입니다. 줄지은 건물들 앞 대로를 가로지르는 차량들과, 언제 밥이나 먹자는 형식적인 인사는 '김정인' 감독의 도시인이죠. 두리번거리는 송이는 미로 같은 골목길이라는 중간지대를 지나 초현실적 공간으로 이동합니다. 오프닝에서부터 차근차근 진행된 공간 변화로 점층 된 기대감은 작은 트럭에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에 연결되고, 이내 한 그릇의 음식 위에 강하게 집중됩니다. 높은 밀도의 기대감에 부응하듯, 감독은 최대한 가까..

Film/Drama 2021.11.06

추악한 리얼리즘 _ 택시, 자파르 파나히 감독

# 0. 더 이상 영화를 찍을 수 없게 되었다. 고민 끝에 택시를 몰아야겠다 생각했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 『택시 :: Taxi』입니다. # 1. 첫 번째 손님입니다. 강경한 법 적용을 주장하는 남자와 죄와 벌의 등가성에 대해 주장하는 여자입니다. 대화 내내 남자는 앞 좌석에 여자는 뒷 좌석에 앉아 있습니다. 남자는 화면의 정중앙에 여자는 귀퉁이에 위치합니다. 남자는 편안한 일상복을 여자는 차도르를 두르고 있습니다. 남자는 대화 내내 앞이나 옆자리 남자 운전사만을 쳐다봅니다. 여자은 돌아보지 않는 남자의 뒷모습을 응시합니다. 두 사람은 짐짓 같은 주제에 대해 논쟁하고 있는 듯 하지만 다른 위계에 존재합니다. 여자는 교사입니다. 여자의 직업을 들은 남자는 말합니다. "그럼 그렇지. 현실과 동떨어진 일..

Film/Drama 2021.10.27

그게 뭔데 씹덕아 _ 헤일, 시저!, 코엔 형제 감독

# 0. 앤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걸 보며 생각했습니다. 아...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다 죽었겠다. 평론가들은 좋아 죽었을 테고, 대중들은 지루해 죽었겠구나. '코엔 형제' 감독, 『헤일, 시저! :: Hail, Caesar!』입니다. # 1. 걸작 영화 만드는 공식을 알려드릴까요. 이리저리 베베 꼬인 철학 논문을 하나 가져다 살을 붙여 영상화하세요. 참 쉽죠? # 2. 철학이 영 복잡하고 어려우시다면 유명 감독과 함께 영화를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명성을 쌓은 덕에 '까면 무식한 사람'이란 수식어가 붙어버린 몇 감독과 함께라면 이너 서클의 상호 감시와 견제가 무수한 악수의 요청으로 승화되는 모습을 어렵잖게 목격하실 수 있을테죠. 글로벌 PC질에 편승해 당위로 무장한 무거운 ..

Film/Comedy 2021.10.21

완만한 하강곡선 _ 웰다잉, 오누리 감독

# 0. 야, 야. 있잖아. 어떤 남자가 자살을 하려는데 딱 죽기 직전 그때! 하필 똑같이 죽으러 온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거야. 어때? 재밌을 거 같지 않아? '오누리' 감독, 『웰다잉 :: Well dying』입니다. # 1. 생각해봐. 모든 걸 포기하고 유서까지 써 놓고 낭떠러지를 뛰어내리려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하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거야. 죽음은 끝이잖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시작이고. 끝과 시작의 중첩. 뭔가 그림 나오지. 벼랑 끝에 선 사람들만이 주고받을 수 있는 거침없는 위로. 미련도 뭣도 없는 순간에 선 사람들의 홀가분한 진심. 그런 진심들이 예기치 않게 쌓아나가는 연약하지만 생동감 있는 생生의 이유들과, 그 순간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감동. 뭐 이런 류의 주제의식으로 영화를 만들어..

Film/Drama 2021.10.10

인생의 트램펄린 _ 럭키 몬스터, 봉준영 감독

# 0. 불행한 토끼는 사자가 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봉준영' 감독, 『럭키 몬스터 :: Lucky Monster』입니다. # 1. 가냘픈 토끼로 태어난 남자, 도맹수의 이야기입니다. 태생이 나약하고 겁 많고 소심하고 비굴한 인간입니다. 직업은 그의 성격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피라미드 회사 녹즙기 판매원이죠. 고달픈 와중에 거액의 빚까지 지고 있는데요. 사채꾼 노만수의 독촉에 허덕이던 그는 결국 아내 성리아에게 위장이혼을 제안하게 되고 이를 받아들인 아내와 잠시 떨어져 지내게 됩니다. 한편 언젠가부터 들려오기 시작한 환청은 스스로를 도맹수만을 위한 라디오 DJ 럭키 몬스터라 소개합니다. 도맹수는 환청이 들릴 때면 용각산을 먹어 뿌리치곤 했죠. 그러던 어느 날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럭키 몬스터의 멘..

Film/Thriller 2021.10.05

수집형 RPG _ 퓨어 시즌 1, 채널 4 제작

# 0. 선명한 아이템이 있다. 선명한 아이템만 있다. 채널 4 드라마, 『퓨어 :: PURE』입니다. # 1. 선명한 아이템이 있습니다. 성 강박장애를 다룬 드라마군요. 일상에서 실시간으로 소집되는 정보를 최대한 자극적인 형태의 성적 메시지로 재구성해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되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단순히 '저 사람과의 잠자리는 어떨까?' 라는 정도의 수위는 아득히 넘어섭니다. 대상에 대한 분별 능력 역시 전혀 작동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춘기 즈음을 지나며 거치게 되는, 자신이 가진 성적 지향성을 구분하고 해석하고 정의하는 일체의 작업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관객에게 시리즈를 소개하는 첫 번째 화의 첫 번째 시퀀스로, 기념일을 맞은 부모가 자신 혹은 타인과 변태적 성애를 나누는 상상을 연..

Series/Drama 2021.09.17

쓰러지지 않는 도미노 _ 산나물 처녀, 김초희 감독

# 0. 아, 부끄러워라. '김초희' 감독, 『산나물 처녀 :: Ladies of the Forest』입니다. # 1. 도미노를 만들 겁니다. 주어진 땅은 좁지만 그래도 알차게 블록들을 모았습니다. 테마도, 밑그림도 그럴싸하게 준비했습니다. 세심한 손길로 줄지어 놓기 시작합니다. 하나... 둘... 셋... 블록이 서 있는 지금은 의미 없어 보이겠지만 쓰러트리고 나면 멋진 그림이 완성될 겁니다. 각기 다른 색깔의 블록들이 뉘어지는 순간 뭇사람들이 예상치 못할 의외성과 창의성이 드러나게 될 겁니다. 다시, 하나... 둘... 셋... 드디어 완성입니다. 처음 블록을 놓았던 자리로 돌아갑니다. 관객도 충분히 모였으니 이제 쓰러트리기만 하면 되는... 데? 어라? 왜 안 쓰러지지? 첫 블록이 쓰러질 듯 쓰러질..

Film/Drama 2021.09.05

힐링은 없어. 그리고 힘냅시다 _ 바다의 뚜껑, 토요시마 케이스케 감독

# 0. '오기가미 나오코'의 작품들이 흘러가는 구름과 바다를 보며 느리게 드라이브를 하는 것만 같은 영화라 한다면, 이 작품은 바다 앞에 차를 세워둔 채 운전석에 앉아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는 영화 쪽에 조금 더 가깝습니다. 1시간 넘는 동안 가만히 멈춰 서 있다가 차의 시동을 탁 걸며 끝나는 것만 같은 이야기랄까요. '토요시마 케이스케' 감독, 『바다의 뚜껑 :: 海のふた』입니다. # 1. 거리감이 인상적입니다. 차분한 드라마로서는 이례적일 정도로 최대한의 거리를 유지합니다. 주요 인물인 '마리'와 '하지메', '오사무' 모두 영화 내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배치되거나, 걷는다 하더라도 서로 멀찍이 떨어져 주변을 배회합니다. 오프닝에서부터 빙글빙글 겉도는 자전거와, 오열하는 '하지메'와 지켜보는 '..

Film/Drama 2021.09.01

닿아버렸네요 _ 조인성을 좋아하세요, 정가영 감독

# 0. 대사 맛있다. '정가영' 감독, 『조인성을 좋아하세요 :: Love Jo. Right Now.』입니다. # 1. 작품을 관통하는 한마디. 감독과 교감하며 느낀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을 모조리 관통하는 단 한마디의 대사가 목소리가 되어 귀를 파고드는 순간의 전율입니다. 오랜만이네요. 꿈속의 꿈이라는 키워드로 표현되는 이야기 구조라거나, 감독이 일관되게 보여온 형식들과 그 속에서의 소소한 변화, 중간중간 삽입되는 인서트의 함의 등에 대해 썰을 풀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럼에도. 이 영화는 "닿아버렸네요."라는 한 문장으로 끝난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닿았네요 아니고, 닿고 싶었어요도 아니고, 닿았으면 좋겠어요도 아니고, 닿으면 얼마나 좋을까요도 아니고, 닿으면 어떡하죠도 아닌. 닿아 버렸네요..

Film/Drama 2021.08.20

무시하는 겁쟁이 _ 오목소녀, 백승화 감독

# 0. 촉망받던 유망주였지만 바둑 대회에서 실패를 겪은 후 기원 알바를 전전하던 주인공이 생활고를 극복하기 위해 오목 대회에 도전하는 영화입니다. 전반적으로 짧은 호흡의 가벼운 말장난 개그로 승부 보는 코미디물인데요. 57분 내내 한방의 훅 없이 잔펀치만 집요하게 때리다가 마지막에 따뜻한 메시지로 반창고를 붙여주는 영화라 말씀드린다면 무난하겠네요. '백승화' 감독, 『오목소녀 :: Omok Girl』입니다. # 1. 2014년 이후 만들어진 바둑과 인생을 엮는 다른 모든 창작물들처럼 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작품입니다만 감독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아예 패러디물로 가볼까?' 라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듯합니다. 알파고 드립과 같은 잔잔한 농담뿐 아니라 후반부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나 드립 등은 특히 노골..

Film/Comedy 2021.08.18

영화에 대한 한숨 _ 낯설고 먼, 트라본 프리 / 마틴 데스몬드 로 감독

# 0. "역사에 대한 울분. 영화에 대한 한숨." ★★✩✩✩ 이동진, 영화 한줄평 '트라본 프리', '마틴 데스몬드 로' 감독, 『낯설고 먼 :: Two Distant Strangers』입니다. # 1. 인종차별, 그중에서도 흑인에 대한 경찰의 과잉진압을 다룬 영화입니다. 시작부터 등장하는 '제임스 볼드윈'이라는 저명인사의 이름과, 경찰이 주인공을 제압하는 모습을 보며 떠올리게 될 '조지 플로이드'라는 이름이 작품의 메시지를 분명히 하죠. 유색인종에게만 차별적으로 작동하는 공권력의 폭력적 사례를 모아 루프 속에 갇힌 한 인간에게 소집시켜 극으로 재구성합니다. # 2. 귀여운 강아지의 모습이 본래의 평온한 일상을 은유합니다. 미모의 여성 '페리'와의 하룻밤이 설레는 매일을 상징합니다. 미국의 흑인 작가이..

Film/Drama 2021.08.10

내일도 날씨는 맑음 _ 병훈의 하루, 이희준 감독

# 0. 오염 강박과 공황 장애를 앓고 있는 병훈은 남들에겐 별일 아닌 숙제를 전쟁처럼 치러낸다. 하루의 끝에는 그를 위한 진짜 선물이 있었다. 병훈은 늘 가지고 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제대로 보지 못했던 선물을 재발견하고 이 순간에 감사를 느낀다. '이희준' 감독, 『병훈의 하루 :: Mad Rush』입니다. # 1. 이희준 감독 작품입니다. 이희준이란 이름은 배우밖에 모르신다구요? 네, 그 사람 맞습니다. 영화는 제목 그대로 '병훈'의 하루입니다. 시나리오 특성상 메시지는 주인공을 묘사하는 방식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고 묘사의 완성도는 다시 배우의 연기력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역할을 담당한 배우가 바로! 이희준이죠. 감독도 하고 주연도 하는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

Film/Drama 2021.08.04

극본과 연출 사이 _ 킹덤 아신전, 김성훈 감독

# 0. Netflix 오리지널 드라마 의 첫 번째 외전입니다. 두 개의 정규 시즌을 끝낸 후 신규 캐릭터에 대한 외전이 전개될 계획이었던 듯합니다만 팬더믹으로 인해 외전 시리즈가 몇 편 더 이어지는 요량인가 본데요.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습니다만 시리즈를 애정 하는 입장에서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되는군요. '김은희' 작가, '김성훈' 감독, 『킹덤 _ 아신전 :: Kingdom _ Asin of the North』입니다. # 1. 특정 캐릭터에 집중하는 '인물전'은 보통 두 가지의 접근법을 가집니다. 하나는 본편에서 충분히 활약한 인물의 남겨진 떡밥을 회수하는 경우구요, 또 다른 하나는 새롭게 등장할 인물이 곧바로 본편에 안착할 수 있도록 필요한 과거 설정들을 미리 전달하는 경우죠. 전자는 시리즈나 시리즈 ..

Film/Horror 2021.07.31

따뜻한 이미지, 희미한 메시지 _ 종천지모, 최한규 감독

# 0. 종천지모 [終天之慕] 이 세상(世上) 끝날 때까지 계속(繼續)되는 사모(思慕)의 정 '최한규' 감독, 『종천지모 :: 終天之慕』 입니다. # 1. 낡은 괘종시계가 오래된 무언가를 은유합니다. 시곗바늘이 가리키는 늦은 저녁 9시는 누군가의 시간이 저물어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시계의 옆면에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붓으로 쓴 것이 아니라 조각도로 파 놓았다는 점은 불변성과 정성 등을 상징합니다. 글귀 는 작품의 제목이자 주제의식입니다. 천천히 죽을 쑤는 할아버지입니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과 그 시간을 녹여 더한 공덕입니다. 건더기를 넣지 않은 듯한 맑은 죽은 할아버지의 정성에 순수성의 이미지를 더합니다. 쌓인 약병은 식사하실 분이 많이 아프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겠죠. 낡은 칫솔 두 개가 가지런히 ..

Film/Drama 2021.07.11

누군가의 평범 _ 점보, 조이 위톡 감독

# 0. 사물을 사랑하는 오브젝토필리아 Objectophilia, 그중에서도 특히 기계를 사랑하는 메카노필리아 Mechanophilia에 대한 영화입니다. 사용성이나 수집욕 혹은 지적 욕구 등으로 기기를 즐기는 IT 덕후들이나 애인과의 성적 페티시를 충족하기 위한 기계 소품을 탐닉하는 사람들이 아닌 아예 기계 그 자체를 성적으로 사랑하는 도착증을 말합니다. '조이 위톡' 감독, 『점보 :: Jumbo』입니다. # 1. 기계를 사랑하는 여자 '잔'입니다. A.I. 탑재된 로봇형 기계 아니구요. 그냥 쌩기계(...), 놀이동산 어트랙션을 사랑하게 된 사람이죠. 히치콕 감독은 "드라마란 지루한 부분을 잘라낸 인생이다. Drama is life with the dull parts cut out." 라 말하는데요..

Film/Drama 2021.07.01

직업병 _ 사라진 시간, 정진영 감독

# 0. 문소리 감독은 를 통해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한 사람의 치열한 현실과 페이소스를 묘사합니다. 김윤석 감독은 을 통해 배우의 시선에서 캐릭터를 해석하는 방식을 풍부하게 표현합니다. 그리고 정진영 감독 역시 지금 이야기하려는 영화 을 통해 배우가 필연적으로 겪게 될 정체성 갈등을 전개합니다. 배우, 특히 배테랑 배우가 영화를 만들면 첫 작품에서 배우 이야기를 하고 싶어 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정진영' 감독, 『사라진 시간 :: Me and Me』입니다. # 1. 영화 초반 이영은 세 인격에 빙의됩니다. 돌아가신 수혁의 어머니와 코미디언 이주일, 레슬러 역도산이죠. 얼핏 세 인물은 아무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백종렬 감독의 처럼 저녁이면 랜덤 하게 찾아오는 각기 다른 인격의 예시인..

Film/Drama 2021.06.23

위령제 _ 후쿠오카, 장률 감독

# 0. 여긴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장률' 감독, 『후쿠오카 :: Fukuoka』입니다. # 1. '제문'의 헌책방입니다. 켜켜이 쌓인 헌책은 오랜 시간에 걸친 누적의 산물입니다. 책방은 축적된 기억의 공간이자 관념의 공간입니다. 환청이 들립니다. 이름 모를 남자의 목소리입니다. 모든 정보는 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되어 있지만 남자의 목소리만큼은 순간 휘발되어 사라지는 에 머물러 있습니다. 제문이 전화를 걸어 해효의 소식을 묻는 동안 소담은 책방 깊숙한 곳에 숨겨진 하얀색 을 꺼내 듭니다. 등의 형상은 책방에 있는 것이라기엔 이질적입니다. 밝고 선명하며 장식 없이 둥근 모양입니다. 완전하고 원형적이며 순수합니다. 소담은 묻습니다. "아저씨, 이런 거 좋아해요?" 제문과 소담이 20년 넘게 연락하지 않..

Film/Drama 2021.06.21

1초 _ 내가 어때섷ㅎㅎ, 정가영 감독

# 0. 대화하는 두 사람 뒤로 흐르는 시계 소리 똑. 딱. 똑. 딱. '정가영' 감독, 『내가 어때섷ㅎㅎ :: What's Wrong with Me? KK』입니다. # 1. 일부러 조금 더 반가운 척 말하는 목소리 1초. 수찬의 적당한 핑계에 무안해져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는 1초. 최대한 티 나지 않게 유진과 얼마나 만났는 지를 떠보는 1초. 일부러 심드렁한 척 한창 좋을 때네 말하는 1초. 5년, 8년, 10년. 27 평생 도합 23년을 연애했노라 말하는 뻔뻔한 1초. 이 남자가 내 나이도 이름도 모른다는 것에 내심 자존심 상하지만 티를 내고 싶지는 않은 1초. 그럼에도 "저 연애 잘해요!" 라 발끈 해 말하는 1초. 개구진 표정으로 "저랑 연애하실래요?" 라 말한 후 잠깐 가만히 멈춰 선 가영의 1..

Film/Drama 2021.06.19

현실은 더 잔인하다 _ 다운, 이우수 감독

# 0. 늦은 나이에 임신한 부부. 기쁨도 잠시 양수 검사 결과 태아가 다운증후군이라는 사실을 듣게 된다. 배는 점점 불러오고, 이대로 낳을 수도 지울 수도 없는 상황에 부닥친다. '이우수' 감독, 『다운 :: Down Syndrome』입니다. # 1. 현실은 상상보다 더 잔인하고, 잔인한 현실은 예고없이 찾아옵니다. 작품은 중반부 아내가 의사에게 건네는 대사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 거 같으세요?" 이 질문은 감독이 배역의 입을 빌어 스크린 너머 관객 개개인에게 직접 건네는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황을 발견하고 그 속에 놓인 인물의 심리와 시선에 집중한 연출이 섬세합니다. 윤리와 현실과 책임과 각기 다른 책임을 지는 방식들과 특정한 책임을 강요하는 법의 폭력 사이의..

Film/Drama 2021.06.11

이스라엘 캐슬 _ 피아니스트의 비밀, 이타이 탈 감독

# 0. 우리나라가 너희 나라보다 작을 수는 있어도 우리나라 역시 위대한 나라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휴대전화와 자동차를 만들고 세계 피겨 스케이팅 챔피언 김연아와 박지성의 오른발과 왼발이 있는 나라라고. 다시는 한국을 무시하지 마라. '이타이 탈' 감독, 『피아니스트의 비밀 :: God of the Piano』입니다. # 1. 음악에 인생 갈아 넣은 피아니스트 '아낫'은 네지가 되고 싶었지만 재능은 히나타였습니다. 졸렬잎 마을 호카게들과는 달리 공과 사가 확실한 예술학교 교장 아빠는 끝내 딸을 인정하지 않았죠. 아낫은 한을 풀기 위해 민머리 남편을 낚아 2세를 통한 대리전을 계획합니다. 임신 중에도 피아노를 놓지 않을 정도로 부푼 기대로 아이를 낳았건만, 저런. 아기가 소리를 듣지 못하는군요. 하지만..

Film/Drama 2021.06.09

어린 공주 _ 버터플라이, 필립 뮬 감독

# 0. 《어린 왕자》(프랑스어: Le Petit Prince)는 프랑스의 비행사이자 작가인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가 1943년 발표한 소설이다.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한 조종사가 자기의 작은 별에서 여러 별들을 거쳐서 드디어 지상에 내려온 소년의 이야기를 듣고 결국 소년이 뱀에게 물려 자신의 별로 돌아갈 때까지의 이야기이다. ... 순결한 소년과 장미(여성)의 사랑 이야기나 갖가지 지상의 성인을 반영하는 다른 별에서 겪은 체험을 통하여 인생에 대한 일종의 초월적 비판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비판을 담은 시(童心)는 그것이 비판과 분리되지 않고 일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작자의 심정과 윤리가 혼연히 융합되고 표백(表白)되어 있어, 프랑스는 물론 미국·독일 등 각국에서도 비상한 호평으로 환영하였다. - 위키백..

Film/Drama 2021.06.03

대종상스러운 _ 불륜, 김준성 감독

# 0. 제50회 대종상 단편영화제 대상 수상작입니다. '김준성' 감독, 『불륜 :: Unlawful Love』입니다. # 1. 드라마 단편선을 보는 것만 같은 익숙하고 안정적인 구성입니다. 노년의 삶이라는 인본주의적 아이템과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의 정서와 그 속에서 발견하게 될 보수적 가치들을 곧게 묘사합니다. 감독의 연출보다는 배우들의 연기가 작품을 이끌어 나갑니다. 특히, 배우 '신구' 선생과 '김지영' 선생의 연기는 언제나처럼 탁월합니다. '노년'하면 떠올릴 법한 , , , , , 등의 부정적 이미지들을 라디오 따위의 보편적이고 직관적인 아이템들로 연결지어 영화가 전개되는 공간 전체를 주제의식으로 감싸 안습니다. 주·조연 가릴 것 없이 모두 선명한 만화적 캐릭터로 묘사해 남녀노소 편안하게..

Film/Romance 2021.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