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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세 번의 외출 _ 37초, 히카리 감독

그냥_ 2023. 10. 1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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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네온사인 어지러운 밤. 바람이 시원한 바다. 초록이 숨 쉬는 태국.

세 번의 외출 끝에 처음으로 돌아온

진정한 나의 집.

 

 

 

 

 

 

 

 

히카리 감독,

『37초 :: 37 セカンズ』입니다.

 

 

 

 

 

# 1.

 

성장 영화입니다. 미숙하던 주인공이 서너 가지의 안전한 해프닝을 겪은 후 내면의 성장에 도달하고, 겸사겸사 주변인들도 함께 성장한다는 류의 전형적인 일본식 성장 영화죠. 뇌성마비 후유증이 있는 장애인을 주인공 삼았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을 테구요, 장애인의 성적 자각이 성장의 모멘텀이 되어주고 있다는 것 역시 주요한 특징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글의 제목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서사는 크게 '세 번의 외출'로 요약할 수 있는 데요. 본격적인 외출을 이야기하기 앞서 출발점으로서의 집에 대해 짚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주인공 유마의 집은 엄마로 정의됩니다. 엄마는 장애인 딸을 홀로 키우는 사람의 과보호적 성향을 충실히 대변합니다. 계단 손잡이나 문틀 등 프레임 안에 인물을 집어넣고 넘나드는 방식이라거나, 왼쪽으로 돌아들어가는 주인공의 동선을 오른쪽의 화장실로 끌어당기는 장면, 샤워를 위해 옷을 벗는 순간 무력하고 비참한 주인공의 자세, 마치 어린아이인양 관객을 향해 거리낌 없이 내던져지는 젖가슴은 강한 통제의 이미지입니다. 이후로도 머리 길이라거나 옷차림, 외출 여부까지 통제하는 것을 넘어, 프라이버시는 전혀 고려치 않고 폭력적으로 방을 헤집는 장면은 유마에게 집이라는 공간과 엄마와의 관계라는 것이 어떤 환경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할 수 있겠죠.

 

감독은 그런 엄마와의 관계를 다시 '인형'으로 상징합니다. 엄마의 직업이 인형사인 이유이구요, 이쁘장한 친구 사야카에게 건네는 인사가 굳이 '인형 같네'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인형 같은 사야카의 엄마 앞에서 주눅 드는 것 역시, 엄마가 느끼는 유마와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비추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 2.

 

인형이 '엄마의 통제'를 상징한다면, 그림은 '유마의 꿈'을 상징합니다. '장애 없이 태어난 가상의 나'를 꿈꾸는 대칭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죠. 소망의 간절함은 우주의 크기와 수많은 별들로 표출됩니다. 성적 충동의 발현 역시 그림의 형태로 표현된다는 점은 이 같은 해석에 설득력을 더합니다.

 

첫 번째 외출인 홍등가 배회는 인형을 벗어나 그림이 되고 싶은 충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스스로를 지구에 떨어진 외계인이 아니라 외계행성에 떨어진 지구인으로 묘사하는데요. 이를테면 일련의 일탈은 '외계인이 되려는 시도'라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지구인이 노력한다고 외계인이 될 수 없듯, 장애인이 장애인이 아니게 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니까요. 몇 차례의 소개팅 실패 끝에 호스트와 객실을 잡은 유마. 그녀가 남자를 사지 못한 것은 돈도, 거절도 아닌 침대에 실수를 했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신체적인 이유인 것이죠. 아래 버튼이 눌리지 않는 엘리베이터는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밑바닥의 절망감입니다. 그 순간 유마의 옆으로 어느 창부의 단골손님인 장애인 남자 한 명이 등장하는데요. 그는 이성을 구매하는 상황에 만족하고 길들여져 버린 미래의 유마라 할 수 있겠죠.

 

거짓말과 딜도와 칵테일의 허상에 한껏 취한 유마. 늦게 귀가한 그녀는 집 나간 아빠를 거론하는 둥, 혼자 할 수 있으니 간섭하지 말라는 둥 엄마에게 못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몸은 정직합니다. 밤이 새도록 욕조에서 나오지 못한 유마는 이튿날이 되어서야 엄마의 도움으로 간신히 방으로 돌아갑니다. 핸드폰은 압수. 외출은 금지. 엄마도 정상은 아님에 분명하지만, 첫 번째 외출이 정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그보다 더 중요합니다.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죠.

 

 

 

 

 

 

# 3.

 

두 번째 외출은 병원에서 시작되는데요. 병원문을 나선다는 것은 통상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고, 자연스럽게 두 번째 외출은 인생을 부분적으로나마 축약해 은유하는 것이라 추측할 수 있겠죠. 스물셋의 나이에야 엄마라는 요람을 벗어난 주인공은 첫 번째 여정에서 사귄 친구 마이를 찾아가고, 곧 이후 여정을 함께 하게 될 도시야의 집에 잠시 머무르게 됩니다. 자신을 과도하게 보호하지 않고 평범하게 대하는 그의 목소리 뒤로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들어차는 빛은, 소녀가 그린 우주에는 존재하지 않던 처음 느끼는 종류의 감동입니다. 유마는 '레몬 넣은 라면'에 대한 대화를 계기로, 오래전 집 나간 아빠를 찾아가기로 합니다.

 

네온사인이 어지러운 밤과 대비되는, 시원한 바람의 바닷가에 사는 아빠를 찾아가는 데요. 그곳에서 삼촌을 만나 아빠는 이미 5년 전 돌아가셨음을 듣게 됩니다. 23살인 유마의 5년 전은 10대였을 테니, 5년 전에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것은 곧 청소년기의 공백을 의미한다 할 수 있습니다. 유마는 삼촌으로부터 아빠 손에 키워진 쌍둥이 언니가 있었음을 듣게 되고 그녀를 찾아 태국으로 건너갑니다.

 

쌍둥이 언니 유카는 태국에서 선생님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또 다른 자신과도 같아 보였을 두 사람은 대화를 통해 서로의 결핍과 두려움을 확인합니다. 유마는 내가 아니었더라도 반드시 행복했을까를 처음으로 의심합니다. 유마의 장애에는 무조건적인 슬픔이 아닌 온 가족의 사랑과 희생이 흔적으로 남아있음을 깨닫습니다. 쌍둥이 언니에게 엄마를 소개하며 과보호하긴 하지만 내가 장애가 없었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말하는 데요. 커다란 내면의 도약이라 할 수 있겠죠.

 

 

 

 

 

 

# 4.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외출은 침대에서 혼자 하는 독백입니다. 뇌성마비가 온 이유가 되었던 37초의 의미를 스스로에게 말하는 최초의 순간이자, 자기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한 주인공이 처음으로 격앙된 모습을 보이는 순간입니다. 오르내리는 가슴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가는 독백 끝에 도달한 "그래도 저라서 다행이에요"라는 한 마디는 한 인격의 내면이 스스로 우뚝 서는 위대한 성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별빛이 가득한 우주. 네온사인 어지러운 밤. 바람이 시원한 바다. 초록이 숨 쉬는 태국을 지난 유마는 세 명의 가족이 사는 자신의 집이 일본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외출을 끝낸 유마는 앞으로 온전한 한 명의 여자로서, 성인으로서, 작가로서, 인간으로서 살아가게 되겠죠.

 

외출의 게기가 되었던 데 대한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출판사를 찾아간 유마. 그녀의 작품을 본 에디터가 건네는 앤딩의 한마디, "당장 섹스신은 없지만 꽤 괜찮은 작품"은 유마가 그려 간 데뷔작뿐 아니라 관객이 보고 있을 영화와 지금까지의 유마의 삶까지 중의적으로 의미합니다.

 

# 5.

 

영화는 '장애인인 나는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으로 요약할 수 있을 텐데요. 통상의 작품들은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부정하기 마련입니다. 장애인이라도 다를 것 없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게 살아라라는 식이죠.

 

영화 <37초>의 가치는 그런 류의 막연한 이상주의를 거절하는 데 있습니다. 엄마와 인형으로 상징되는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에 함몰되어 버린 인생도 문제적이지만, 홍등가와 그림으로 상징되는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외면하고 부정하는 인생도 문제적이긴 매한가지입니다. 나는 장애인이 아니라 되뇌는 삶은 평생 사야카에게 그림을 대신 맡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죠. "그래도 저라서 다행이에요"라는 한 마디는, 고작 37초를 이유로 장애인이 되어버린 자신의 삶을 그 어느 부분도 배격하는 바 없이 끌어안아버린 한 인격의 성장을 상징하는 명대사라 할 수 있습니다. 노련한 에디터의 말처럼 37초간 숨 쉬지 않아 생겨버린 공백을 느리지만 힘 있는 호흡으로 두텁게 채워나가는, 꽤 괜찮은 작품이군요. 히카리 감독, <37초>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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