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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Thriller

야망의 초상 _ 맥베스의 비극, 조엘 코엔 감독

그냥_ 2023. 1. 3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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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빛의 캔버스 위, 잠식하는 그림자로 그려낸 살아 움직이는 야망의 초상

 

 

 

 

 

 

 

 

조엘 코엔 감독,

『맥베스의 비극 :: The Tragedy of Macbeth』입니다.

 

 

 

 

 

# 1.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입니다. 4대 비극 중 인지도가 떨어지는 편이지만 그래도 오셀로 덕에 꼴등은 면한 친구죠. 누구나 냉장고엔 먹다 남은 트러플이라도 있는 듯 맥베스를 읽은 것처럼 말하지만, 현실은 햄릿조차 인용하기 만만찮은 세상이니 익숙지 않으신 분들이 많으리라 가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겁니다. 영화 이야기에 앞서 대충의 줄거리 정도는 환기하고 시작하는 것도 괜찮은 거겠죠.

 

스코틀랜드의 장군이자 왕족이자 글라미스의 영주 맥베스입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친구 뱅코와 왕에게 돌아가는 데 광야에서 마녀를 만나 예언을 듣습니다. 맥베스는 코더의 영주를 거쳐 왕이 될 것이고, 뱅코는 본인은 왕이 되지 못하겠지만 자손에 이르러 언젠가 왕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죠. 맥베스는 예언을 아내에게 전하고, 부인은 왕을 죽여 왕위에 오를 것을 종용합니다. 갈등하던 맥베스는 결국 아내의 말을 실행에 옮기게 되고 참혹한 배신 끝에 예언대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죠.

 

코더의 영주부터 왕위에 오르기까지 일이 예언대로 흘러가자 뱅코의 자손이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에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맥베스는 뱅코와 그의 아들 플리언스에게 암살자를 보내게 되고, 뱅코는 살해하는 데 성공하지만 플리언스는 놓치고 말죠. 암살에 실패한 맥베스는 불안에 떨다 뱅코의 유령까지 보게 되며 점점 미쳐갑니다.

 

 

 

 

 

 

# 2.

 

맥베스는 예언의 마녀를 찾아가 새로운 예언을 듣습니다. 파이프의 영주 맥더프를 경계하라, 여인이 낳은 자는 맥베스를 죽이지 못한다, 버남의 숲이 던시네인을 넘지 않는 한 맥베스는 패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죠. 맥베스는 예언을 경계하는 과정에서 숱한 폭정을 일삼게 되고 그 사이 맥베스 부인은 몽유병에 미쳐 죽고 맙니다.

 

시해당한 던컨 왕의 아들 말콤과 가족을 잃은 맥더프가 잉글랜드의 지원에 힘입어 스코틀랜드로 되돌아옵니다. 맥베스의 대비가 무색하게도 이들이 쳐들어 오는 과정에서 마녀의 예언이 하나씩 맞아떨어지자 맥베스는 절망합니다. 맥더프와 최후의 결투를 벌인 맥베스는 목이 달아나게 되고, 그의 머리는 비참하게 조롱당하며 막을 내립니다. 대충 야망에 눈이 멀어 혈육인 왕을 배신한 반역자가 불안에 떨다 업보 청산 세게 먹고 참교육 당하는 서사에, 마녀와 예언 따위의 신화적 요소들을 더하고, 야망과 불안 따위의 내적 갈등을 비장미 넘치는 표현들로 녹여낸 작품이라 이해하시면 무난하겠네요.

 

워낙 네임드 희곡인 탓에 수차례 영상화 된 바 있는 맥베스인데요. 이번 영화화의 매가폰은 조엘 코엔이 잡았습니다. <파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인사이드 르윈>, <카우보이의 노래> 등으로 유명한 코엔 형제 중 형인 조엘이 처음으로 단독 연출한 작품이죠.

 

 

 

 

 

 

# 3.

 

원작이 있는 작품들의 경우 어떤 작품들은 모티브만 가져와 크게 각색하기도 합니다. 박찬욱의 <올드보이>는 대표적이라 할 수 있을 테구요, 당장 맥베스만 하더라도 윌리엄 올드로이드의 <레이디 맥베스>와 같이 변주된 작품들이 있었더랬습니다. 반면 어떤 작품들은 원작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가져오되 같은 이야기를 다루는 색다른 형식에 집중하기도 하는데요. 이번 영화는 명백히 후자 쪽이라 해야 할 겁니다. 이야기와 주제의식은 수백 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원작 그대로.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같은 이야기 속에서 조엘 코엔은 어떤 이미지를 발견하고 싶어 하는가라는 질문인 거겠죠.

 

셰익스피어가 쓴 원작의 제목은 그냥 맥베스(Macbeth)인데요. 조엘은 자신의 영화에 <맥베스의 비극>이라는 조금 다른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다. 왜 새로운 제목을 따로 만든 걸까. 개인적으로 추측해 보자면, 핵심은 '맥베스'도 '비극'도 아닌 '의(of)'라는 소유격에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입니다.

 

# 4.

 

대부분의 야망을 다룬 작품들은 갈망하는 대상의 과장에 미루어 표현하기 마련입니다.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의 야망이라면 호화스러운 부를 과시하는 것이고, 왕이 되고 싶은 사람의 야망이라 한다면 왕으로서의 강력한 권위를 자랑하는 식이죠. 일련의 방법론은 분명 편안하고 안전하지만,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것이기도 합니다. 결국 그 순간의 야망이란 영화 속 주인공의 야망이 아니라 주인공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리라 미루어 짐작하게 되는 '관객 본인의 야망'에 불과하기 때문이죠.

 

관객의 야망이라는 것은 개개인 성향만큼의 '오차'를 포함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안과 욕망과 갈등과 공포와 조바심 따위가 정교하게 배합되어 있는 [야망]이라는 정서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데 있어 치명적인 방해라 할 수 있겠죠. 감독은 맥베스'의' 야망으로 인한 맥베스'의' 비극을 구현하려 합니다. 영화를 통해 맥베스의 야망을 들여다본 끝에 목이 달아난 맥베스의 유령이 사라지고 나면, 그 순간 관객이 몰입해 감상한 것이야 말로 온전한 [야망의 초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 4.

 

영화의 착점은 맥베스의 야망이라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관객이 얻어가야 할 경험 가운데 '관객이 직접 야망을 느낄 법한 지점'들은 덜어내야 하죠. 미니멀리즘. 기하하적이고 미니멀한 공간 연출로 일관하는 이유입니다. 미장센은 인물 간의 관계, 윤리적 위상, 정서의 입체성 따위를 위한 정제되고 제한된 형식으로서만 허락됩니다.

 

극단적인 화면비 역시 같은 의미로 이해됩니다. 고전주의적인 뉘앙스를 더하기 위함도 없다 할 순 없겠으나, 가장 큰 목적은 인물을 가운데 놓고 그외에 관객을 위한 여백을 허락하지 않기 위함이라는 것이죠. 특정한 장면마다 등장인물들이 화면 가까이 다가와 집어삼킬 듯 스크린을 독점한다거나, 역으로 피사체를 매우 작게 잡아 여백을 던져버리는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1.37 대 1이라는 독특한 비율의 스크린을 가득 메운 것은 [빛]입니다. 여기서의 빛은 명예名譽나 신의信義 등 야망에 대립하는 개념으로도 볼 수 있을 테구요, 혹은 그 자체로 폭압적 감정에 잠식되기 이전 태초의 무언가를 의미한다 이해해도 무난합니다. 모래사장을 조금씩 갉아먹는 파도처럼 영화 내내 그림자라는 도료가 조금씩 조금씩 빛의 캔버스를 파고들며 인물의 얼굴과 실루엣을 잠식합니다. 일련의 과정을 보다 극적인 형태로 표현하기 위해 명암이 강조된 흑백의 화면 역시 크게 기여합니다.

 

구분지어야 할 것은 어둠과 그림자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어둠은 그 자체로 온전한 반면 그림자는 상대적인 개념인 것이고, 맥베스가 느끼는 야망이란 추락이라는 운동성과 결부된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한낮뿐 아니라 온 세상이 어두운 밤중에도 횃불을 집어넣어서까지 그림자를 만들어 인물 위로 끼얹는 건 감독이 그림자에 어떤 이미지를 부여하고 있는가를 분명히 합니다.

 

 

 

 

 

 

# 5.

 

얼핏 추락이라는 키워드를 말씀을 드렸는데요. 오프닝에서부터 미루어 알 수 있다시피 하늘과 땅 역시 영화를 관통하는 중요한 상징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돌이킬 수 없고 극복할 수 없는 일방향적인 관계, 지평선을 기준으로 단호하게 분절되는 위계, 과장된 카메라 구도와 맞물려 강하게 찍어 누르는 힘의 뉘앙스와, 통제력을 아득히 벗어나는 가속력 따위의, 물리적이기도 하고 형이상학적이기도 한 이미지들이 누적되어 야망이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두텁게 조화됩니다. 일련의 이미지는 단순히 심벌로서 전시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왕의 침소를 오르는 깎아지를 듯 높은 계단 등과도 연결되는 등 영화 속에서 치밀하게 조직되고 있죠.

 

감독이 해석하는 야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스스로의 것'이라는 점입니다. 스스로 만들어낸 광기이자 스스로 만들어낸 불안이자 스스로 응축시킨 자기 합리화라는 것이죠. 예언은 맥베스의 의지와 무관한 운명론이 아닌 철처한 자기실현적 예언입니다. 맥베스의 파멸은 덩컨 왕의 왕관이 매혹적이어서라거나, 마녀가 그렇게 예언했기 때문이라거나, 부인이 부추겨서라거나,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 아닌 오롯이 스스로의 선택과 스스로의 야망 때문이었다는 것이죠. 영화를 가득 메운 안개보다 중요한 것은, 운명의 안개를 스스로 가르고 나타난 건 다름 아닌 맥베스 본인이었다는 점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 6.

 

흑백의 화면, 간결한 구도, 미니멀한 표현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감상의 입체감은 대단한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고전의 품격과 연극 스타일의 연출이 주는 대체하기 힘든 비장미뿐 아니라, 찐득한 검은 물감을 조금씩 조금씩 덧칠하고 또 덧칠하는 유화의 감각도 일부 전달되구요, 동시에 검은색 잉크 한 방울이 톡 떨어지자마자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번져드는 수묵화의 감각도 일부 중첩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일련의 입체적인 감동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모두 [야망]의 본질을 탐구하고 탐닉하는 방향으로 두텁게 소집되어 있다는 점에서 걸작이라 아니할 수 없는 거겠죠.

 

여담으로 배우들을 생각하면 고생이 참 많았겠다 싶기도 합니다. 한도 끝도 없이 어려운 작품이지 않았을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고독한 내면을 직접적으로 투사하는 것이 핵심인 작품인데, 그 내면을 표현함에 있어 상황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고, 연출의 도움도 거의 기대할 수 없으며, 심지어 장황한 고전적 화술에 절대적으로 묶여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맥베스 부인을 연기한 '프란시스 맥도맨드'와, 맥베스의 '덴젤 워싱턴'이 표현하는 폭발력의 수직적 진폭과, 통제력의 수평적 진폭은 작품을 완성시키는 화룡점정이라 하기에 과연 부족함이 없습니다. 조엘 코엔 감독, <맥베스의 비극>이었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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