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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Horror

꽃과 손 _ 부화, 한나 버그홀름 감독

그냥_ 2023. 9. 2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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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그 손에 담긴 마음을 들어 보자꾸나.

 

 

 

 

 

 

 

 

한나 버그홀름 감독,

『부화 :: Pahanhautoja』입니다.

 

 

 

 

 

# 1.

 

호러라기에는 조금 애매합니다. 몇몇의 제한적인 점프스케어가 사실상 전부라 공포 영화를 힘들어하시는 분들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죠. 오컬트의 분위기에 살짝 발을 담그는 듯도 하지만 이 역시 크리처의 디자인에만 선택적으로 적용될 뿐입니다. 영화는 과보호 환경에서 성장한 사춘기 소녀의 불안을 드라마틱하게 과장한 우화라 보는 것이 차라리 정확합니다. 알레고리는 제법 단편적이고 또 노골적이라 따라가는 것은 편안합니다. 실제 관객이 즐기게 되는 대부분은 미려하고 문학적인 서사 따위가 아닌, 주인공 티니아의 불안과 배우 시이리 솔랄리나의 열연이 차지하고 있죠.

 

영화는 가족을 '둥지'로 정의합니다. 도입의 높다란 나무 숲에 둘러싸인 마을이라거나 귀를 어지럽히는 새 울음소리 등은 이 같은 이미지를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둥지는 알을 '품는' 공간이고, 이 '품는다' 이미지는 영화 내내 반복적으로 묘사됩니다. 죽은 까마귀 아래 알이 놓여 있다거나, 주워온 알을 침대에 올린다거나, 인형의 배를 갈라 그 안에 담는다거나, 손은 얹어 끌어안는다거나 하는 식이죠.

 

영화는 품는다는 행위를 그 자체로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충분히 품다 '부화'하고 나면 독립되어야 한다 역설할 뿐이죠. 이미 부화되었음에도 계속 품고 있다 보면 결국 사단이 벌어지게 된다는 메시지의 작품이랄까요. 엄마의 과보호뿐 아니라, 품어서 부화시킨 크리처가 창문 밖으로 나갔음에도 계속해서 집으로 돌아오려는 장면들은 이 같은 주제의식을 반복합니다.

 

 

 

 

 

 

# 2.

 

오프닝의 까마귀는 연기된 행복에 '혼란'을 가하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유리잔, 유리 샹들리에를 골라 깨먹는 것은 메시브 한 검은색의 까마귀와 대비되기도, 그에 의해 파괴되는 연기된 행복의 연약함을 은유하기도 합니다. 깨진 파편의 날카로움이나 비가역적인 이미지 역시 부분적으로 더하고 있구요.

 

티니아는 까마귀가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창문을 연 사람이자, 까마귀를 품는 사람입니다. 딸에게 혼란과 의심이 파고들었음을 부드럽게 암시한다 할 수 있겠죠. 반면 엄마는 까마귀의 모가지를 비틀어 죽이게 되는 데요. 이는 혼란을 몰아내거나 통제하는 것을 넘어 살해한다는 면에서 강한 지배력을 암시합니다. 다음 시퀀스의 나무 숲은 초현실적인 공간입니다. 티니아는 목이 부러지고도 살아남은 까마귀를 돌로 찧어 죽이지만 혼란과 의심의 씨앗은 알의 형태로 남아있게 됩니다. 그 순간 크게 과장되는 헤드룸은 알로 비유된 혼란이 딸의 인식과 생각 속에 있음을 구도를 통해 은유합니다.

 

엄마는 영화 속 모든 사건의 원흉이자 그 자체로 환경과도 같은 인물입니다. 강압적이고 과보호적인 가정환경의 의인화 같은 존재인 것이죠.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그 자체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 영상으로 걸러 담아낸다거나, 이를 사람들에게 공유해 인정받고 있음에 집착하는 장면들은 왜곡된 가정을 의미합니다. 티니아가 배우는 체조라는 코드 역시 어릴 적부터 경쟁적으로 가혹하게 트레이닝하는 이미지의 차용이라 할 수 있겠죠. 딸에게 불륜을 고백하는 순간 딸의 일그러진 표정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거나, 코치의 만류에도 하드 트레이닝을 강요한다거나, 결말부에서 딸을 노려보며 "적어도 내 행복을 망치지는 말았어야지"라 말하는 장면은 캐릭터의 성격을 분명히 합니다.

 

 

 

 

 

 

# 3.

 

엄마는 그 자체로 환경과도 같다 말씀드렸듯, 그녀의 지배력은 티니아를 둘러싼 환경들로 확장되어 있습니다. 특히 대표적인 것은 역시나 '꽃' 혹은 '꽃무늬'라 할 수 있겠죠. 옆집을 넘어보는 딸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앞을 가로막는 꽃으로 치장된 새하얀 울타리입니다. 감옥과도 같은 울타리에서 손을 내밀자 개에게 물려버린다는 것은 울타리에 폭력적인 통제력이 작동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침실을 포함해 온 집을 뒤덮고 있는 꽃무늬 벽지들은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집니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디자인의 테로의 집에서 아기의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맞이하는 강렬한 꽃무늬 벽지는 새로운 공간에서도 똑같이 잠식해 들어가는 과보호의 폭력성을 역설적으로 시각화하고 있죠.

 

색깔은 꽃무늬만큼이나 중요한 미장센입니다. 분홍색은 통제의 색입니다. 벽면의 꽃무늬가 분홍색이라거나 딸의 침대에 놓인 곰 인형, 머리를 빗는 공주빗 모두 분홍색이죠. 반면 하늘색은 자유의 색이라 할 수 있겠죠. 엄마의 요구를 수용하는 아빠는 분홍색 옷을 입고 있지만 딸을 걱정해 딸의 방으로 올라온 아빠는 하늘색 옷을 입고 있는 이유입니다. 다정한 새아빠가 되어주려 했던 테로 역시 푸른색 청바지를 입고 있죠. 체조 선생님의 옷 또한 하늘색 상의에 청바지인데 반해, 엄마는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옆집 개가 짖는 소리에 잠을 설치던 밤. 크리처가 집 밖으로 나가 개를 죽였다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순간 하늘을 가득 메운 드넓은 하늘색입니다. 강력한 통제에 대한 반동으로서 해방에 대한 욕구를 각성하는 순간임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4.

 

크리처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크리처는 단순히 어딘가에서 뚝 떨어진 괴물이라기보다는 주인공과 연동된 존재처럼 묘사됩니다. 잔뜩 웅크린 앙상한 등뼈로 소개되는 주인공의 모습은 부화 직후 크리처의 형상과 연결됩니다. 옷장에 거울이 달려 있다는 것과 그 안에 숨어든 크리처 역시 두 캐릭터를 반복적으로 연결하고 있고, 이후 일련의 암시는 감각의 공유로 증명되기까지 하죠. 엄마가 부르는 자장가를 크리처에게 불러준다거나 공주빗을 들고 크리처를 자기처럼 꾸미는 딸의 모습은 인상적입니다. 크리처는 까마귀에서 난 것이고, 까마귀는 곧 딸의 머릿속에 담긴 혼란이라 한다면, 티니아는 자신의 혼란과 스트레스를 엄마와 같은 방식으로 통제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밖에 경험한 것이 없으니까요.

 

크리처는 2차 성징에 대한 은유로 추측합니다. 흔적을 보고 딸이 첫 월경을 한 것이라 생각한 아빠의 장면이라거나, 침대 밑이라는 가장 프라이빗한 공간, 자신의 방이나 욕실로 가족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장면, 끈적한 진액이나 검붉은 피 따위는 모두 비슷한 암시를 주고 있죠. 처음 크리처에게 듬성듬성 난 깃털 혹은 하나씩 떨어진 깃털들은 이제 막 나기 시작한 음모의 은유라는 생각입니다. 유독 징그러운 디자인은 처음 겪게 되는 자신의 '생소한' 변화를 징그럽다 느끼는 소녀의 감정을 시각화한 것이라 할 수 있겠죠. 체조가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신체적 변화로 인한 문제로 이해할 수 있는 등, 영화 전반에 신체적인 뉘앙스가 가득합니다. 괴물이 부리를 떼고 보다 사람에 가까워진 직후, 엄마는 딸에게 젖살이 없어졌다 말하는 데요. 이 역시 유아기를 지나고 있음을 은유하는 것이죠.

 

볼일이 급한 동생을 욕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장면은, 역으로 이전까지는 누나가 씻는 동안 동생이 볼일을 봐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이상하다 여기지 못했던 어린 과거라 할 수 있죠. 하지만 2차 성징과 함께 성을 인지한 이후로 동생이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동생은 결국 침대에서 실례를 하게 되는데요. 침대에서 소변을 봤다는 것은 유아적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누나의 변화와 대비를 불러일으킵니다.

 

 

 

 

 

 

# 5.

 

앞서 분홍색과 하늘색에 대해 말씀드렸는데요. 딸의 잠옷은 흰색이라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아직 어렸던 소녀는 어떤 색이든 받아들일 수 있었던 흰색이었던 것이죠. '하얀색이었던 소녀'가 사춘기에 접어들며 '하늘색 자아'를 스스로 찾아갈 기회를 잃고 '분홍색 통제'를 겪은 끝에 '검은색 자아'로 타락하는 이야기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영화를 상징하는 검은색은 혼란의 까마귀 외에 딱 하나뿐입니다. 함부로 마주치지조차 못하게 만드는 엄마의 짙은 아이라인이죠.

 

꽃이나 색깔이 환경과 같은 외부 요인을 은유한다면, 손은 내면을 상징하는 메타포라 할 수 있습니다. 손은 소유와 집착, 통제와 같은 이미지를 가짐과 동시에 혼란과 구원을 복합적으로 은유하고 있죠. 엄마가 딸을 부르는 손짓이라거나, 알 위에 올려놓는 손, 크리처를 쓰다듬는 손길, 친구의 잘려나간 손목 등 영화는 요소요소에서 인물의 정서를 손의 움직임을 통해 묘사합니다. 비유하자면 작품은 인물의 손 안을 들여다보는 영화라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죠. 결말을 통해 완벽히 티니아의 모습을 얻은 크리처 알리는 과연 티니아를 닮은 걸까, 엄마를 닮은 걸까라는 질문을 눈앞에 전시하며 막을 내립니다. 과보호의 끝에 부화시킨 것은 자녀가 아니라 나의 모습을 빌린 삐뚤어진 또 다른 나일 뿐이라는 결말은 언제나 위력적이죠.

 

... 작품 일반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를 하자면 흥미로운 착상에도 불구하고 상상력의 한계가 일부 발견되기는 합니다. 특히 마지막의 식칼 메타는 조금 태만해 보일 정도죠. 우리 관객 입장에서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이 떠오르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을 작품이기도 합니다. 저택을 중심으로 한 가족의 파멸 서사라거나, 강력한 꽃무늬 벽지의 지배력, 귀신과 크리처 등의 장르적 효과와 의의, 딸과 엄마의 갈등이라는 면에서 여러모로 함께 떠올릴 법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죠. 한나 버그홀름 감독, <부화>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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