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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우리 왜 이러는 거예요? _ 흔적 없는 삶, 데브라 그래닉 감독

그냥_ 2023. 10. 4.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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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초록색 나무와 노란색 꿀벌의 작별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건

 

 

 

 

 

 

 

 

데브라 그래닉 감독,

『흔적 없는 삶 :: Leave No Trace』입니다.

 

 

 

 

 

# 1.

 

참전군인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에 대한 영화입니다. 주인공 톰의 아빠 윌이 참전군인 자살 사건의 기사를 스크랩하고 있다거나, 공원 노숙자의 텐트에 걸려 있는 성조기, 공중 트램을 타고 이동하는 두 사람 머리 위로 날아가는 헬리콥터 등은 전쟁에 대한 뉘앙스를 암시합니다.

 

기차 짐칸에 자연스럽게 올라타는 모습이라거나, 우리 것과 타인의 것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에 집착한다거나, 다리를 다친 윌을 치료하는 사람이 굳이 군의관 출신이라는 설정 또한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테구요. 그 외에 피폐한 와중에도 이례적일 정도로 유능한 생활력, 전시상황을 연상시키는 듯한 사업장의 폭력적인 사운드, 연락되지 않는 딸에 대한 과장된 불안, 마약성 의약품에 대한 과도한 의존성,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음지적인 커뮤니티 역시 이 같은 해석에 기여합니다. 몸에 새겨진 문신은 거친 과거와 상처를 은유합니다. 아내가 없다는 설정은 참전군인 가족의 붕괴를 은유합니다. 이들 모두는 영화의 핵심에 닿아있는 일종의 '흔적'들이라 할 수 있죠.

 

부녀는 평소에는 숲에 살다 가끔 도시에 가는 데요. 도시의 공간이 병원과 식료품 가게뿐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신적 투쟁과 생명 유지로 점철되는 납작한 일상은 동선에 담겨 담백하게 소개됩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저 남자(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라며 딸에게 묻는 장면들은 참전 군인에 대한 사회의 배타성을 반복적으로 표현합니다.

 

 

 

 

 

 

# 2.

 

<흔적 없는 삶>이라는 제목이 역설적이게도, 영화는 자신의 흔적으로부터 달아나려 발버둥 치지만 끝내 달아날 수 없었던 한 남자의 이야기이라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앞선 단락에서 자신 있게 참전군인에 대한 영화라 말씀드렸는데요. 정작 주인공 윌은 자신이 참전군인이라는 것을 말하지도, 티 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최대한 숨기고 있죠. 관객이 그가 참전군인일 것이라 추측하는 것은, 그의 노력과 무관하게 앞서 말씀드린 사례와 같은 '흔적'들이 도처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윌은 흔적을 '싫어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흔적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합니다.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빠르게 정착한 후 흔적을 지우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만, 그는 자신의 동선 위로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거나 도움을 받는다거나 거래를 한다거나 먹고 남은 음식이 생긴다거나 하는 식의 흔적을 남기며 끊임없이 도주하고 있죠. 흔적에 떠밀려 도망치듯 이동하는 윌의 깊은 두려움은 피폐한 얼굴과 퀭한 눈동자로 표현됩니다.

처음 숨어 살다 들키게 된 것은 톰이 사람들에게 발각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탐지견에게 윌의 냄새를 들켰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내내 조심하던 목걸이나 신발 따위가 아닌 '시선'과 '냄새'라는 존재론적인 흔적들인 것이고, 이는 주인공이 자신의 흔적들로부터 끝내 달아날 수 없음을 암시하는 복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전군인에게 있어 PTSD라는 상흔은 결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이죠.

 

 

 

 

 

 

# 3.

 

숲은 영화의 배경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인물의 내면이 투사된 세계이기도 합니다. 윌은 나무 숲에 둘러싸인 사람이자 동시에 한 그루의 나무처럼 보이기도 하죠.

 

도입의 공원은 윌이 그나마 편안함을 느끼는 세계이지만 제도에 의해 점점 잠식되고 있습니다. 사회는 그를 폭력적으로 제압해 숲에서 끄집어내는 데요. 옮겨진 곳은 관상목 사업장이었죠. 윌에게 있어 무차별적인 질문을 쏟아내는 사회란 목적에 의해 재단되어 도열해 있는 관상목의 숲과 같고, 그 풍경은 전투 자산으로 취급되어 소비되던 과거의 트라우마를 직접적으로 타격합니다.

 

도망치듯 이동한 곳에는 비가 내립니다. 습기가 가득하고 얼어붙을 듯 춥고 위압적인 높이의 창백한 숲이죠. 이 공간은 내면 깊은 곳의 트라우마이자 이미 죽은 전우들이 주는 압박감이고, 그런 내면에 잠식된 결과 윌은 생명이 위태로운 큰 상처를 입고 맙니다. 다행히 구조받은 곳은 숲 속에 자리한 소박한 마을입니다. 기타 연주를 곁들인 컨트리 음악과 느긋한 개 짖는 소리와 꿀벌이 있는 곳은 그의 목숨을 구하지만 그럼에도 정착할 수는 없습니다. 끝내 윌은 자신의 흔적을 마음껏 지울 수 있는 공간에 홀로 도달하며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결국 작품은 참전군인의 트라우마가 편리하게 극복될 수 없음을 인정하자는 메시지로 귀결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테스트하고 집을 내어주고 직장을 구해주는 등 기계적으로 시스템에 편입하는 것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비슷한 처지의 포용적인 사람들이 다독여 주는 것조차 충분하지 않을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 4.

 

이처럼 상당히 강력한 사회적 문제의식을 녹여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데요. 흥미로운 것은 정작 영화는 윌 대신 톰을 중심으로 흘러간다는 점입니다.

 

생각해 보면 윌의 위치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설득에는 훨씬 편리했을 겁니다. 트라우마에 힘겨워하는 모습을 과장되게 묘사한다거나, 불안한 순간마다 전시 상황을 재연해 인서트 했더라면 참전군인의 내면을 묘사하는 데에는 훨씬 쉬웠을 테니까요. 하지만 감독은 톰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굳이 에둘러가는 것을 선택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인간의 이상한 모습을 옆에서 가감 없이 전시하고 있죠. 중반 즈음 딸이 "우리 왜 이러는 거예요?"라 묻는 대사에는 영화의 방법론이 함축적으로 녹아있습니다.

 

작품의 메시지는 트라우마가 타인에 의해 편리하게 극복될 수 없음을 인정하자는 것이라 말씀드렸는데요. 본인조차 극복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타인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게 당연합니다. 감독은, 사회가 참전군인들에게 트라우마의 극복을 요구하는 것에는 타인의 트라우마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오만이 숨겨져 있음을 통찰합니다. 톰을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플롯은 관객들로 하여금 윌의 트라우마를 이해하고 있다 착각하는 상황을 방지합니다. 톰이라는 캐릭터의 존재는 그 자체로 영화의 메시지와 방법론이 합치되어 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죠.

 

어차피 타인은 이해할 수도 없고 따라서 극복시킬 수도 없다. 흔적 없는 삶은 없다. 그 흔적을 모르는 척해주는 것이 최선이다. 숲에서 끄집어 내려 애쓰지 말고 넌지시 가방을 걸어 두자라는 주제의식을 담담한 발걸음에 얹어 풀어낸 드라마라 할 수 있습니다.

 

 

 

 

 

 

# 5.

 

물론 그렇다고 톰을 마냥 도구적인 캐릭터라 이해하시면 곤란합니다. 톰은 부녀 관계라는 면에서 윌의 가장 큰 흔적이자 유산이라 할 수 있을 텐데요. 표면적으로는 참전군인들 덕에 안전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면에서 관객 일반을 극으로 끌고 들어오는 역할이라 이해할 수 있겠죠.

 

반면, 조금 더 공격적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서로 인간적으로 사랑하는 인격이자, 같은 텐트에서 잠을 자는 사이이며, 톰이 윌을 살리고 윌이 톰을 살리기도 한다는 면에서 강력한 연결성이 발견되는 데요. 그 자체로 한 인간의 분리된 인격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죠.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참전군인의 연약한 희망의 의인화와 같은 존재랄까요. 이 같은 추측은 수많은 등장인물들 가운데 유독 윌만이 딸을 데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나름 설득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톰은 배고픔으로 소개됩니다. 목걸이를 가지고 싶어 하고 집에서 살고 싶어 하고 동물을 좋아하는 등 세상과 연결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전반부에서 윌이 톰에게 '옐로'라 부르는 장면이 있는 데요. 영화는 톰으로 의인화된 연약한 희망을 노란색으로 정의하고 있고, 이는 다시 수많은 관계로서 살아가는 꿀벌의 노란색으로 확장됩니다. 윌은 그런 노란색과 대비되는 숨어드는 트라우마로서의 초록색이라 할 수 있고, 이는 흔적을 감춰주는 녹음의 숲과 말린 당근이 담긴 초록색 가방으로 확장됩니다. 결말은 톰이 자신의 내면에 억눌러 둔 노란색을 인정하고 분화되는 마무리이라는 면에서 사회가 참전군인을 바라보는 방식뿐 아니라, 참전군인 스스로 자신의 자아를 탐색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데브라 그래닉 감독, <흔적 없는 삶>이었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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