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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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개봉 109

돈키호테의 선택 _ 더 플랫폼, 갈데르 가스텔루-우루티아 감독

# 0. 상승과 하강으로 과격하게 축조해낸 원론적이면서 허무한 계급 우화?! 갈데르 가스텔루-우루티아 감독, 『더 플랫폼 :: El Hoyo』입니다. # 1. 선입견이라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유럽 영화하면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은 걸 굳이 그렇게까지 하는 영화들이라는 이미지가 생각나곤 합니다. 가끔은 미술적이고 미학적이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하는 한국의 영화들과 달리 얘네는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건가 싶을 정도로 뒤 없이 내지르는 맛이 있곤 하죠. 이를테면 봉준호가 음흉한 지하실을 숨기고 있는 고급스러운 저택과 똥물이 역류하는 반지하를 섬세하게 계획하는 동안, 갈데르라는 이름의 스페인 감독은 냅다 333층짜리 탑을 쌓아 버리는 식입니다. 미친놈인가 싶죠. # 2. 황당할..

Film/SF & Fantasy 2022.06.06

what's wrong with you? _ 버닝, 마이크 갠 감독

# 0. 어지간하면 주인공은 호감이기 마련입니다. 마이크 갠 감독, 『버닝 :: Burn』입니다. # 1. 주유소 딸린 편의점에서 벌어진 하룻밤 사이 참극입니다. 장난기 많은 이쁘장한 직원 '쉴라'는 알바하다 총 맞아 변사체가 됩니다. 쉴라의 남자친구 '페리' 역시 여자친구 데리러 왔다 처음 보는 놈팽이에게 살해당합니다. 합리적인 제안을 좋아하는 편의점 털이범 '빌리'는 아포가토 되었다가 결박 플레이당한 후 통구이 앤딩을 맞았구요, 처음으로 관할 구역이 생긴 초보 경관 '리우'의 커리어는 시작부터 작살나고 말았습니다. 가게 주인은 알바생 잘못 쓴 대가로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죠. 이 모든 사단을 일으킨 빌런은 '멜린다'라는 이름을 가진 쉴라의 동료 직원인데요. 문제는 얘가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점입니다. #..

닫힌 방, 열린 서사 _ 더 룸, 크리스티앙 볼크망 감독

# 0.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 '크리스티앙 볼크망' 감독, 『더 룸 :: The Room』입니다. # 1. 전능한 신과 도전하는 인간의 판타지 통제하는 부모와 일탈하는 아이의 드라마 스토커 살인마와 사냥감의 스릴러 # 2. 하나의 공간에 중첩된 세 층위의 이야기입니다. 일방향적 서사 속에서 세 캐릭터 모두 각자의 주제에서는 주연으로, 서로의 주제에서는 조연으로 기능합니다. 신과 인간의 서사 구조에서 관객은 셰인의 입장이 됩니다. 가족주의 서사에서는 케이트에 교감합니다. 스릴러의 기준에서는 멧과 정서적으로 밀착되는 식이죠. 나 혼자만 레벨업식 유치찬란 양판소 설정에서 출발한 영화는 방에서 태어난 아이 셰인과 정신병원에 수감된 존 도의 등장에 힘입어 ..

고슴도치 딜레마 _ 각자의 입장, 강정인 감독

# 0.  거리 조절이 서툰 고슴도치들의 연약한 속살        '강정인' 감독, 『각자의 입장 :: Each』입니다.     # 1.  오프닝입니다. 전화를 하며 길을 걷습니다. 짜증이 잔뜩 묻어납니다. 길 가던 사람과 어깨를 부딪힙니다. 더욱 짜증스러운 표정입니다. 그녀는 무언가 화를 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보상을 단단히 벼르고 있는 듯합니다. 피해의식도 발견되고 손해보지 않겠다는 보상심리도 발견됩니다. 감독은 그녀를 퇴근길 평범한 사람들의 무리에 숨겨 넣습니다. 특별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감독 강정인의 현대인입니다. 네 명의 주인공란희, 싱싱, 기 감독, 선준입니다. 인물들은 얽히고설키는 우위와 열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⑴ 예술적 재능, ⑵ 경제력, ⑶ 도덕성, ⑷ 갑을 관계 등이 그..

Film/Drama 2022.02.09

근사한 전개, 이상한 결말 _ 병(病), 이우동 감독

# 0. 선입견 [先入見] (명사) 어떤 사람이나 사물 또는 주의나 주장에 대하여, 직접 경험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리 마음속에 굳어진 견해. '이우동' 감독, 『병(病) :: Sick』입니다. # 1. 선입견은 제법 경제적입니다. 누적된 기억이 만든 직관은 시행착오의 위험을 줄여주죠. 섣부른 예단이 예외적 가능성을 차단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체계적인 데이터베이스나 논리 검증이 없던 문명 이전에서부터 선입견은 효과적으로 리스크를 관리하는 시스템이 되어 주었음에 분명합니다. 또한 필연적이기도 합니다. 인류의 발전사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미지의 영역으로의 탐험과도 같으니까요. 거창하게 역사 거론하며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영화 속 90년 대 에이즈에 당황하는 병원 직원들을 비웃기에는 2020년 코로나 앞에 보..

Film/Drama 2021.12.15

가발을 처음 본 머리카락 _ 가발, 아타누 무케르지 감독

# 0.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 문학평론가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p.133 '아타누 무케르지' 감독, 『가발 :: Wig』입니다. # 1. 인도 국적의 여성 '알리타'가 집 건너 거리에서 몸을 파는 트랜스젠더 매춘부를 만나 성장하는 내용의 드라마입니다. 주인공은 I.T 회사에 다닙니다. 미혼이 흠이 되는 인도 사회에서 자기 삶의 주도권을 쟁취해 나가고자 하는 현대적 인간이죠. 그녀는 이상적입니다. 도전적입니다. 발전적이고 논리적이며 긍정적이고 가치지향적이죠. 하지만 이 인물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다름 아닌 '자기 확신'입니다. 알리타는 충분히 똑똑하고 상냥하지만, 자신만의 철학과 방식의 합리성에..

Film/Drama 2021.12.08

인생의 트램펄린 _ 럭키 몬스터, 봉준영 감독

# 0. 불행한 토끼는 사자가 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봉준영' 감독, 『럭키 몬스터 :: Lucky Monster』입니다. # 1. 가냘픈 토끼로 태어난 남자, 도맹수의 이야기입니다. 태생이 나약하고 겁 많고 소심하고 비굴한 인간입니다. 직업은 그의 성격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피라미드 회사 녹즙기 판매원이죠. 고달픈 와중에 거액의 빚까지 지고 있는데요. 사채꾼 노만수의 독촉에 허덕이던 그는 결국 아내 성리아에게 위장이혼을 제안하게 되고 이를 받아들인 아내와 잠시 떨어져 지내게 됩니다. 한편 언젠가부터 들려오기 시작한 환청은 스스로를 도맹수만을 위한 라디오 DJ 럭키 몬스터라 소개합니다. 도맹수는 환청이 들릴 때면 용각산을 먹어 뿌리치곤 했죠. 그러던 어느 날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럭키 몬스터의 멘..

수집형 RPG _ 퓨어 시즌 1, 채널 4 제작

# 0. 선명한 아이템이 있다. 선명한 아이템만 있다. 채널 4 드라마, 『퓨어 :: PURE』입니다. # 1. 선명한 아이템이 있습니다. 성 강박장애를 다룬 드라마군요. 일상에서 실시간으로 소집되는 정보를 최대한 자극적인 형태의 성적 메시지로 재구성해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되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단순히 '저 사람과의 잠자리는 어떨까?' 라는 정도의 수위는 아득히 넘어섭니다. 대상에 대한 분별 능력 역시 전혀 작동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춘기 즈음을 지나며 거치게 되는, 자신이 가진 성적 지향성을 구분하고 해석하고 정의하는 일체의 작업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관객에게 시리즈를 소개하는 첫 번째 화의 첫 번째 시퀀스로, 기념일을 맞은 부모가 자신 혹은 타인과 변태적 성애를 나누는 상상을 연..

Series/Drama 2021.09.17

그림자의 성녀 _ 세인트 모드, 로즈 글래스 감독

# 0.  한 톨도 새지 않게 꼭꼭 눌러 담아 응축된 광기의 에너지        '로즈 글래스' 감독,『세인트 모드 :: Saint Maud』입니다.     # 1.  피를 뒤집어쓴 얼굴, 내면의 무언가가 망가진 사람의 눈을 한 여인이 고개를 들어보지만 머리 위엔 막힌 천장의 모서리와 혐오스러운 벌레 한 마리뿐입니다. 모드는 작은 골방에 살고 있습니다. 소란스러운 바깥의 소리는 옆으로 길게 찢어진 모양의 창이 닫히며 조용해집니다. 사회와 단절된 공간은 마치 감옥의 독방처럼 보입니다. 무언가 '죄'를 짓고서 홀로 감옥에 갇힌, 보다 정확히는 스스로를 감옥에 가둔 인격이군요. 그녀의 직업은 호스피스입니다. 새롭게 일하게 된 곳으로 가기 위해 짐을 싸 방 밖을 나섭니다. 빛이 스며드는 좁은 골목이 마치 어둠을..

Film/Horror 2021.08.24

앙코르 _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스핀오프, 나카이즈미 유야 감독

# 0. 보통 맛있는 음식은 두 번 먹어도 맛있습니다. 처음 먹을 때만큼은 아니지만요. 나카이즈미 유야 감독,『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스핀오프 할리우드 대작전!カメラ を止めるな! スピンオフハリウッド大作戦!』입니다. # 1. 최대 강점은 컨셉을 잘 잡았다 라는 점일 겁니다. 속편이 아니라 스핀오프를 기획했다는 점 말이죠. 속편은 전작과 동등한 위계에서 온전한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증명해야 합니다. 충분한 볼륨은 물론이거니와 시리즈물로서의 일관성은 유지하면서 동시에 고유의 차별점 혹은 개선책을 준비해야 하죠. 특히 전작이 많은 사랑을 받은 명작이라면 난이도는 급상승합니다. 고생해서 잘 만들어 놓으면 겨우 당연한 거 아냐?라는 소리밖에 못 듣는 반면, 못 만들기라도 했다간 욕만 바가지로..

Film/Horror 2021.07.13

사장님, 스릴러 1인분 추가요 _ 침입자, 손원평 감독

# 0. 주인공은 보통 두 명입니다. 멜로라면 20대를 캐스팅하겠지만 중량감도 조금 필요한 스릴러에선 30~40대 배우를 섭외하는 게 정석이죠. 한 명은 영화 내내 물리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서사적으로든 잡으러 다닐 테구요. 나머지 한 명은 영화 내내 도망 다닐 겁니다. 둘 중 한 명은 놀래키는 역할, 다른 한 명은 놀라는 역할일 텐데요. 도망가는 쪽이 놀랄 수도 있고 쫓기는 쪽이 놀랄 수도 있습니다. 요 정도는 감독의 재량이죠. '손원평' 감독, 『침입자 :: intruder』입니다. # 1. 도망가는 애는 싸움을 겁나 잘하든 돈이 겁나 많든 머리가 겁나 좋든 쪽수가 겁나 많든 아니면 아싸리 만능약이 있든. 뭐가 되었든 특별한 능력이 있어 저게 말이 돼? 싶은 난관들을 아주 손쉽게 돌파합니다. 쫓아가는 ..

직업병 _ 사라진 시간, 정진영 감독

# 0. 문소리 감독은 를 통해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한 사람의 치열한 현실과 페이소스를 묘사합니다. 김윤석 감독은 을 통해 배우의 시선에서 캐릭터를 해석하는 방식을 풍부하게 표현합니다. 그리고 정진영 감독 역시 지금 이야기하려는 영화 을 통해 배우가 필연적으로 겪게 될 정체성 갈등을 전개합니다. 배우, 특히 배테랑 배우가 영화를 만들면 첫 작품에서 배우 이야기를 하고 싶어 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정진영' 감독, 『사라진 시간 :: Me and Me』입니다. # 1. 영화 초반 이영은 세 인격에 빙의됩니다. 돌아가신 수혁의 어머니와 코미디언 이주일, 레슬러 역도산이죠. 얼핏 세 인물은 아무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백종렬 감독의 처럼 저녁이면 랜덤 하게 찾아오는 각기 다른 인격의 예시인..

Film/Drama 2021.06.23

위령제 _ 후쿠오카, 장률 감독

# 0. 여긴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장률' 감독, 『후쿠오카 :: Fukuoka』입니다. # 1. '제문'의 헌책방입니다. 켜켜이 쌓인 헌책은 오랜 시간에 걸친 누적의 산물입니다. 책방은 축적된 기억의 공간이자 관념의 공간입니다. 환청이 들립니다. 이름 모를 남자의 목소리입니다. 모든 정보는 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되어 있지만 남자의 목소리만큼은 순간 휘발되어 사라지는 에 머물러 있습니다. 제문이 전화를 걸어 해효의 소식을 묻는 동안 소담은 책방 깊숙한 곳에 숨겨진 하얀색 을 꺼내 듭니다. 등의 형상은 책방에 있는 것이라기엔 이질적입니다. 밝고 선명하며 장식 없이 둥근 모양입니다. 완전하고 원형적이며 순수합니다. 소담은 묻습니다. "아저씨, 이런 거 좋아해요?" 제문과 소담이 20년 넘게 연락하지 않..

Film/Drama 2021.06.21

이스라엘 캐슬 _ 피아니스트의 비밀, 이타이 탈 감독

# 0.  우리나라가 너희 나라보다 작을 수는 있어도 우리나라 역시 위대한 나라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휴대전화와 자동차를 만들고 세계 피겨 스케이팅 챔피언 김연아와 박지성의 오른발과 왼발이 있는 나라라고. 다시는 한국을 무시하지 마라.        이타이 탈 감독,『피아니스트의 비밀 :: God of the Piano』입니다.     # 1.  음악에 인생 갈아 넣은 피아니스트 아낫은 네지가 되고 싶었지만 재능은 히나타였습니다. 졸렬잎 마을 호카게들과 달리 공과 사가 확실한 예술학교 교장 아빠는 끝내 딸을 인정하지 않았죠. 아낫은 한을 풀기 위해 민머리 남편을 낚아 2세를 통한 대리전을 계획합니다. 임신 중에도 피아노를 놓지 않을 정도로 부푼 기대로 아이를 낳았건만, 저런. 아기가 소리를 듣지 못하는..

Film/Drama 2021.06.09

주인공만 3명 _ 조안, 김지산 / 유정수 감독

# 0. 이젠 제법 익숙한 소셜 미디어 까는 영화입니다. '김지산', '유정수' 감독, 『조안 :: Joan』입니다. # 1. 일반적으로 떠올릴 법한 소셜 미디어의 비판적 문제의식을 소집해 하나의 이야기 속에 녹여낸 단편입니다. 제프 올롭스키의 나, 츠노 메구미의 와 유사한 문제의식 위로 불쾌하고 섬뜩한 미스터리 호러의 장르적 재미를 살짝 더한 작품 정도로 이해하시면 적당하겠군요. 영화에는 총 세 인물이 등장합니다. 조안과, 소개팅남, 그리고 이름 모를 내레이터죠. 이야기는 조안이 남자 친구와 헤어진 후 데이팅 어플을 통해 새로운 남자와 소개팅한다는 내용입니다. 그 과정을 소셜 미디어의 의인화로서 내레이터가 전개하는 구성이죠. 각 인물들은 저마다 다른 소셜 미디어의 폐해를 비판적으로 대변합니다. '조안'..

통제력의 상실 _ 리틀 조, 예시카 하우스너 감독

# 0. 꽃가루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연인과 꽃구경하는 대신 고고하고 시크한 싱글 라이프를 택한 이유죠. 애인 사귈 능력은 되냐구요? 그게 중요한가요? 누가 너랑 사귀겠냐구요? 손님, 싸울래요?! '예시카 하우스너' 감독, 『리틀 조 :: Little Joe』입니다. # 1. 굳이 말하자면 공포 스릴러 영화... 이긴 한데요. 솔직히 무섭다기보다는 '찝찝한 영화' 쪽에 조금 더 가깝습니다. 각기 다른 세 층위의 정서가 하나의 이야기 속에 중첩되어 있는데, 그 실체는 구체적 공포보다는 일련의 과정이 낳게 될 미래에 대한 잠재적 공포에 닿아있기 때문이죠. 가장 표면의 테마라 한다면, 역시 유전자 조작 기술과 과학자의 윤리적 일탈로 인한 리스크가 될 테구요. 그다음은 확인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강요된 판단과 ..

없다 _ 화이트 라이, 요나 루이스 / 캘빈 토마스 감독

# 0. 거짓말에 관한 영화입니다. 심리 드라마라는 거죠. '요나 루이스', '캘빈 토마스' 감독, 『화이트 라이 :: White Lie』입니다. # 1. 점점 더 깊은 거짓말의 수렁에 빠져드는 주인공 '케이티'의 심리상태를 추적합니다. 의도적으로 반복되는 주인공의 헐벗은 모습과 특정 장면에서의 인물 배치, 음영의 활용 정도를 제외하면 '극'으로서 조작된 문학적 메타포는 절제되어 있습니다. 살갗이 틀 정도로 건조하고 냉정하게 주인공의 발 뒤를 물듯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언제가 될진 알 수 없지만 머지않아 터질 거라는 것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는 시한폭탄. 그 폭탄을 두 손에 꼭 쥔 채 어쩔 줄 몰라하는 주인공의 불안과 인지부조화를 직선적으로 쫓아가는 작품이죠. # 2. 심리 드라마의 평가는 대체로 주인공과..

Film/Drama 2021.04.22

수동 숨쉬기 _ 최후의 호흡, 리처드 다 코스타 / 알렉스 파킨슨 감독

# 0.  북해 해저에 고립된 잠수부 크리스 레몬스의 사고와, 그를 구조하기 위한 동료들의 고군분투를 기록한 다큐멘터리입니다.        리처드 다 코스타, 알렉스 파킨슨 감독,『최후의 호흡 :: Last Breath』입니다.     # 1.  잠수 지원선 토파즈가 거친 북해의 격랑에 떠밀립니다. 챔버와 잠수부 사이에 연결된 케이블이 끊어지고 맙니다. 산소 공급은 중단되었고 수면으로 올라올 수도 없고 올라와서도 안 되는 상황. 5분여 밖엔 버티지 못할 산소통 하나에 의지해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깊은 바닷속에서 크리스는 살아남아야 합니다. 작품은 크게 두 개의 파트로 나눠볼 수 있는데요. 1시간 여 까지는 크리스의 약혼녀와 같은 팀 잠수사 데이브 유아사, 던컨 올콕을 비롯한 동료들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철창 안의 새 _ 엘리사와 마르셀라, 이자벨 코이젯트 감독

# 0. 사람들은 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녀들을 싫어한 걸까.그녀들은 대체 왜 그렇게까지 서로를 사랑한 걸까.        이자벨 코이젯트 감독,『엘리사와 마르셀라 :: Elisa y Marcela』입니다.     # 1.  사랑을 다루고 있음에도 멜로보다는 드라마에 더 가까울 영화입니다. 엘리사와 마르셀라의 사랑이 쌓여나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긴 합니다만, 그보다는 두 사람이 시대의 폭력을 피해 정착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떠도는 여정과, 그 과정에서의 존재론적 외로움을 더 많이 포착한 작품이기 때문이죠. 20세기 초 '다양성의 가치'를 '종교적 미덕'이 폭력적으로 압도하던 시대. 두 주인공이 서로 사랑하기 위해 치러야 했던 고통의 시간을 다룹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사랑하기 위해서라는 점입니다. ..

Film/Drama 2021.04.11

1달러 79센트 _ 러브 송 포 라타샤, 소피아 날리 앨리슨 감독

# 0. 아카데미가 한 달도 남지 않았네요. 이전 같으면 노미네이트 된 작품들을 챙겨보려다 티켓값에 허리가 휘거나 심지어 개봉조차 하지 않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만 코로나로 인해 영화판 헤게모니가 멀티플렉스에서 OTT로 넘어간 덕에(?) 물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보다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례적으로 이번 오스카에 노미네이트 된 작품 중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작품만 해도 두 자리 수가 훌쩍 넘어가죠. 개꿀. 극한의 반골기질 덕에 남들이 호들갑 떨면 괜히 고까워 외면하기 일쑤입니다만 이상하게 또 이런 건 혹 해서 챙겨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역시 찐따의 취향이란 건 이렇게나 종잡을 수 없죠. 나 같은 런타임 오지게 길고 대충 봐도 겁나 무거워 보이는 작품들에..

Documentary/Social 2021.04.01

유쾌하게 조롱당할 수 밖에 _ 디어스킨, 쿠엔틴 두피유 감독

# 0.  조르주는 전 재산을 털어 100% 사슴가죽 재킷을 구매한다. 덤으로 받은 캠코더로 영화감독 행세를 하던 그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재킷을 입은 사람이 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재킷을 없앨 계획을 세운다. 이 설명을 읽고 어떻게 안 볼 수 있겠어요.        '쿠엔틴 두피유' 감독,『디어스킨 :: Le daim』입니다.     # 1.  서두에 말씀드린 괴랄한 소개 그대로입니다. 조르주라는 이름의 남자가 순도 100% 사슴 가죽 재킷 하나에 전재산을 꼬라박습니다. 덥수룩한 수염의 털북숭이 호구를 낚은 사기꾼은 등쳐먹은 게 영 찝찝했던지 덤으로 캠코더를 하나 선물하죠. 사슴 재킷을 입고 신난 호구는 바에서 술을 마시는 데 웬 창녀가 직업이 뭐냐 묻자 영화감독이라 구라를 칩니다. 의자에 걸쳐둔 사슴..

Film/Comedy 2021.03.02

나는 아니겠지 _ 아름다운 나라, 이시카와 케이 감독

# 0. " 아무래도 이건 좀 아닌 거 같은데 " " 아, 그게 말이죠. 여기만 고치면 되는 게 아니라서요. " " 아... 그럼 다시 붙여야겠네, 그치? "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 영화의 창 부문 초청작 중 마지막 다섯 번째 단편입니다. '이시카와 케이' 감독, 『아름다운 나라 :: 美しい国』입니다. # 1. 반전주의 작품입니다. 과거 군국주의 시대에 대한 교훈을 잊고, 점차 전쟁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된 일본이 평화헌법을 개정하게 된 10년 후 미래를 상정합니다. 사실 상 전쟁 수행이 가능한 정식 군대가 된 자위대가 전쟁을 치르게 되다 못해 젊은이들을 강제로 징집해 전쟁터로 밀어 넣는 세상이죠. 영화는 크게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전쟁 그 자체에 대한 엄중한 경고와, 전쟁을 부추기는..

Film/Drama 2021.02.02

먹어서 응원하자? _ 그 공기는 보이지 않는다, 후지야마 아키요 감독

# 0.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던 이번 영화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한편을 꼽아야 한다면 전 이 작품을 고르겠습니다.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 영화의 창 부문 초청작 중 네 번째 단편입니다. '후지야마 아키요' 감독, 『그 공기는 보이지 않는다 :: その空気は見えない』입니다. # 1. 원자력발전소 폭발사고로 인해 대기가 오염된 세상입니다. 더 이상 지상에서 살 수 없게 된 사람들은 지하로 피신합니다. 엄마 '히토미'와 함께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벙커에서 살게 된 어린아이 '미즈키'의 이야기입니다. 일단 다른 모든 점을 차치하고. 대놓고 원전과 방사능을 거론한 영화를, 그것도 아직 아베 내각이던 시절에, 그것도 그렇게나 보수적인 일본 영화계에서 만들어냈다는 게 조금 놀랍기는 합니다. 타게팅을 외국 영화제 쪽..

Film/Drama 2021.01.30

흐린 기억속의 그대 _ 데이터, 츠노 메구미 감독

# 0. 서정적인 작품입니다. 다른 단편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치열하게 내달리는 작품들이라 한다면, 이 작품은 배우 '스기사키 하나'와 함께 천천히 산책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말인즉 5편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영화의 세 번째 작품으로서 안성맞춤이라는 뜻이죠.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 영화의 창 부문 초청작 중 세 번째 단편입니다. '츠노 메구미' 감독, 『데이터 :: DATA』입니다. # 1. 교복을 입은 딸이 도시락을 싸는 동안 아빠는 출근을 준비합니다. 아빠의 후리가케는 가다랑어 맛, 아니 김계란 맛, 아니 다시 가다랑어 맛입니다. 딸은 '모에'라는 사람과 아빠의 저녁 약속을 묻고, 아빠는 딸에게 셋이서 밥을 먹는 게 어떠냐 제안합니다. 종소리. 작게 보이는 여자의 사진에 가벼운 합장을 올린 후..

Film/Drama 2021.01.29

약속된 유토피아 _ 장난꾸러기 동맹, 키노시타 유스케 감독

# 0. 원래부터 유서깊은 아이템이였습니다만, 갓세돌이 알파고로부터 1승을 따냇던 이후 더더욱 우후죽순 생겨난 AI 시대 절망편을 그린 작품 중 하나입니다.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 영화의 창 부문 초청작 중 두 번째 단편입니다. '키노시타 유스케' 감독 『장난꾸러기 동맹 :: いたずら同盟』입니다. # 1. 오프닝에서부터 쉽게 알 수 있듯, 감시사회에 대한 영화입니다. 사람의 얼굴을 따라다니며 누구인지를 판별하는 것뿐 아니라, 잘못된 행동을 감시하고 교정하는 수준에까지 다다른, 고성능 AI 시스템이군요. 대체로 이와 같은 아이템을 다루는 작품의 경우, 불특정 다수의 구성원으로서 번잡한 도시인을 감시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보편적입니다만, '키노시타 유스케' 감독은 그 대상을 학교를 다니는 어린아이들..

Film/Drama 2021.01.28

에피타이저 _ 플랜 75, 하야카와 치에 감독

# 0. 을 보고 난 후 뜬금없이 옴니버스 영화에 뽐이 왔네요. 적당한 영화가 어디 없을까 하며 OTT를 뒤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 영화의 창 부문 초청작 중 첫 번째 단편입니다. '하야카와 치에' 감독, 『플랜 75 :: Plan 75』입니다. # 1.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습니다. 하나에는 [찬성] 다른 하나에는 [반대]라는 글귀가 적혀있군요. 감독은 처음엔 반대의 의자에 앉는 것이 좋지 않을까? 라 관객을 설득합니다. 그런가 싶어 의자에 앉았더니 다시 찬성의 의자에 앉는 것이 옳지 않겠냐며 설득합니다. 갸우뚱하며 의자를 바꿔 앉았더니 감독은 다시금 반대의 의자에 앉을 것을 권합니다. 관객은 짧은 런타임 안에서 주제에 대한 찬성과 반대라는 ..

Film/Drama 2021.01.24

우희에게 _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 임오정 감독

# 0. 연락 드럽게 안 하는 우희가 개 구하러 담 넘는 영화입니다. 제44회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작, 옴니버스 영화 중 세 번째 단편, 입니다. '임오정' 감독,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 :: Call If You Need Me』입니다. # 1. 세 단편 중 가장 이질적입니다. 강동완 감독의 이 연극, 김한라 감독의 이 동화라 한다면 임오정 감독의 영화는 에세이 쪽에 조금 더 가까워 보입니다. 작가의 통제하에 있는 조직된 이야기라는 느낌이 강한 두 작품에 비해 이 영화는 훨씬 일상성이 강조된 구체적인 서사와 표현으로 전개됩니다. 앞선 두 편에서의 피크닉은 각각 캠핑장과 울릉도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그려집니다만, 이 작품에선 독특하게도 그 역할을 [인물]이 대신합니다. 영신이죠. 그녀는 그녀가 가진 풍부한..

Film/Drama 2021.01.15

오그리 토그리 _ 대풍감, 김한라 감독

# 0.  남중, 남고, 공대, 군대를 나온 모솔 남자가 '여고 생활에 대한 시나리오'를 쓰면... 이런 비슷한 게 나오지 않을까요? 제44회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작, 옴니버스 영화 중 두 번째 단편, 입니다.       '김한라' 감독,『대풍감 :: The Silver Lining』입니다.     # 1.  내러티브를 이해하는 게 어려운 영화는 아닙니다. 대풍감이라는 지역 명소에 얽힌 설화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그곳을 찾아가는 밝고 건강한 청년들의 여행기라는 이미지를 엮은 후, 순풍 불면 쭉쭉 나아갈 수 있다 뭐 이런 류의 응원 메시지라는 뼈대 위에, 굳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설정의 집 나간 아빠와 빛이 뿜어져 나오는 열린 문으로 나가는 벌레 등의 메타포를 집어넣어 요리조리 적당히 만들면 아이 ..

Film/Drama 2021.01.13

전봇대를 지나 다리를 건너 _ 돌아오는 길엔, 강동완 감독

# 0. 제44회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작, 옴니버스 영화 중 첫 번째 단편입니다. 처음엔 세편을 묶어 하나의 글로 써볼까 했습니다만 '일상을 벗어나 관계와 삶을 돌아본다'는 느슨한 테마만 공유할 뿐 각 작품이 추구하는 바와 결이 전혀 다르다 느꼈기에 따로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 나눠 쓰게 되었네요. '강동완' 감독, 『돌아오는 길엔 :: On the Way Back』입니다. # 1. 앞만 바라보고 있는 뒷모습입니다. 네 사람은 영화 시작부터 끊임없이 말을 하지만 어느 누구의 것 하나 원만한 대화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가족은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할 뿐 듣고 싶지 않은 말은 외면하는 가운데, 자신의 말이 전달되지 않는 것에는 또 상처 받고 있습니다. 작품의 키워드는 단절입니다. 캠핑장에 도착한 ..

Film/Drama 2021.01.12

티타임 ⅲ _ 두 교황,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

티타임 ⅰ _ 두 교황,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 # 0. 일 년 내내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커피를 많이 마시곤 합니다만, 손발이 얼어붙을 듯한 추운 겨울 한정으로는 따뜻한 차를 조금 더 자주 즐기곤 합니다. 찬장 가득 쟁여둔 티백을 하나 꺼내 morgosound.tistory.com 티타임 ⅱ _ 두 교황,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 티타임 ⅰ _ 두 교황,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 # 0. 일 년 내내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커피를 많이 마시곤 합니다만, 손발이 얼어붙을 듯한 추운 겨울 한정으로는 따뜻한 차를 조금 더 자주 즐기 morgosound.tistory.com # 30. 은 교황과 추기경이라는 직책이 작동하는 '논리의 공간'입니다. 은 자연인으로서의 삶의 여정이 주요하게 작동하는 '심리적 공간'..

Film/Drama 2021.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