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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SF & Fantasy

돈키호테의 선택 _ 더 플랫폼, 갈데르 가스텔루-우루티아 감독

그냥_ 2022. 6. 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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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상승과 하강으로 과격하게 축조해낸 원론적이면서 허무한 계급 우화?!

 

 

 

 

 

 

 

 

갈데르 가스텔루-우루티아 감독,

『더 플랫폼 :: El Hoyo』입니다.

 

 

 

 

 

# 1.

 

선입견이라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유럽 영화하면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은 걸 굳이 그렇게까지 하는 영화들이라는 이미지가 생각나곤 합니다. 가끔은 미술적이고 미학적이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하는 한국의 영화들과 달리 얘네는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건가 싶을 정도로 뒤 없이 내지르는 맛이 있곤 하죠. 이를테면 봉준호가 음흉한 지하실을 숨기고 있는 고급스러운 저택과 똥물이 역류하는 반지하를 섬세하게 계획하는 동안, 갈데르라는 이름의 스페인 감독은 냅다 333층짜리 탑을 쌓아 버리는 식입니다. 미친놈인가 싶죠.

 

# 2.

 

황당할 정도로 노골적인 경제 계급론입니다. 이타적으로 절제한다면 모두가 먹고살 수 있을 양의 음식이 0층에서부터 지하 333층까지 차례차례 옮겨진다는 게 영화적 상상의 알파이자 오메가입니다. 음식을 실은 플랫폼은 그 자체로 각 층에 해당하는 계급의 현실을 이미지화합니다.

 

최상층부에서의 음식은 '유희'입니다. 머리카락 한올 허락하지 않는 셰프들이 공들여 만든 고급스러운 음식과 근사한 와인을 우아하게 소비하죠. 상층부에서의 음식은 '사치'입니다. 이즈음부터 양은 여전히 풍족하지만 잔반이라는 것만은 명확해집니다. 타인이 남긴 것을 먹는다는 모멸감은 역으로 과시적 소비와 아래층에 대한 모욕으로 귀결됩니다. 중층부부터는 '생존'의 문제가 됩니다. 먹고 싶은 것을 먹는 것이 아니라 먹을 수 있는 것이 다행인 단계로 넘어가죠. 과일이든 빵이든 면이든 보이는 것을 보이는 데로 소비하며 다음 달의 상승을 기도하고 하락을 걱정하며 그렇게 평범하다면 평범하게 살아갑니다. 하층부에서 음식은 '빈곤'입니다. 빈 그릇이 하나 둘 늘어가고 빈 그릇을 게걸스레 핥아먹는 것조차 감수해야 하는 단계라 할 수 있죠. 최하층부는 '절망'입니다. 플랫폼엔 빈 그릇과 누군가들이 분풀이한 폭력의 흔적, 한계로 치닫는 정신력과 같은 층 상대에 대한 불신 뿐이죠.

 

 

 

 

 

 

# 3.

 

생존에 필요한 다른 요소들은 배제되어 음식으로 압축됩니다. 여가, 위생, 복장, 의료, 공간, 교류 따위는 사는 데 별 지장이 없다는 식으로 생략됩니다. 각 층에 배치된 이유 또한 우연으로 통제합니다. 출신성분, 노력, 동기, 성격, 철학, 재능 따위의 개인적 캐릭터는 완전히 무시됩니다. 매달 말이면 수면가스가 흘러나와 모든 사람들을 잠재우고 다시 무작위로 층을 뒤섞습니다.

 

학위든, 대체 징역이든 각자는 각자의 목적에 따라 탑으로 들어오지만 이 목적은 당위일 뿐 인물의 인생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6개월이면 6개월, 1년이면 1년 정해진 기간이 지나면 탑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적어도 영화 속에서 살아서 탑을 나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 위로 음식은 저장할 수 없어 반드시 먹어서 소비해야 한다는 설정이 더해집니다. 물리적 소비력의 한계 따위를 은유한다 해야겠죠. 일련의 노골적인 단순화는 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로서의 성격을 선명히 합니다.

 

그 외에 기계적 논리는 개무시한 플랫폼 디자인이라거나, 330층에 달하는 탑이 지하로든 지상으로든 어떻게 있을 수 있냐라거나, 음식을 저장할 경우 더워지거나 추워진다는 적당히 나태한 설정이라거나, 수백 명의 사람을 재우고 일거에 뒤섞는다는 무책임한 전개 따위의 설정상 문제가 난립하지만, 의뭉스럽게 넘기는 게 아니라 대놓고 개무시하고 있다 보니 되려 상쾌하게 그러려니 하게 되기도 하는군요.

 

여하튼 일련의 독특한 세계에 '고렝그'라는 이름의 인물과 다수의 관념적 아이템이 투입되어 작품의 메시지를 조직합니다. 달팽이, 학위, 칼, 책, 돈키호테, 개, 설득, 밧줄, 추락, 메시지, 어린아이 따위죠. 영화에 대한 이해는 역시 각각의 개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할 수 있을 겁니다.

 

 

 

 

 

 

# 4.

 

인생 공수래공수거라지만 탑에서의 삶은 템을 하나 끼고 시작합니다. 인물들이 들고 들어온 물건은 각자의 정체성과 시스템에 적응하는 방식을 직접적으로 상징합니다.

 

'칼'은 폭력을 포함한 공격적 방어라는 생존 본능을 투사합니다. 시스템을 인정하고 살아남는 것에 최적화된 방법론이죠. 직전까지 웃고 떠들던 친구 같던 사람이 난처한 처지에 처하자 돌변하는 모습은 과격하기도 하지만 개인에게 있어선 합리적이라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중반부 스쳐 지나는 작은 풀장에 들어 있는 두 사람에게 가운데 먹을 것을 하나 던지자 치고받고 싸우는 장면 역시 맥을 같이 합니다.

 

'개'는 순수하지만 태만하기도 한 낙관적 이상론을 의미합니다. '이모기리'는 시스템을 수용하되 개인의 태도 개선을 모색하는 인물인 것이죠. 개를 데려온 이모기리는 아래층 사람들에게 정해진 배식만큼만 먹으면 최하층까지의 모두가 살 수 있다는 것을 말로 설득하려 합니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일방적으로 타인에게 본능을 억제할 것을 요구하지만 자신의 음식 역시 개와 반반 나눈다는 면에서 정직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최후는 설득의 실패가 아닌 개의 죽음으로 인한 것. 낙관론자는 꿈이 살해당하자 더 이상 생존의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밧줄'은 시스템에서의 탈출을 의미합니다. '바하랏'은 시스템을 부정할 뿐 이탈 이외의 대안은 없다 할 수 있습니다. 이모기리의 안티테제와 같은 인물인데요. 개가 시스템의 최선이라는 '아래로의 방법론'을 대변한다면, 밧줄은 시스템의 부정이라는 '위로의 방법론'이라 할 수 있겠군요. 여하튼 그는 (마음에도 없을) 신의 이름을 빌린 온갖 찬사를 건네지만 끔찍한 모욕을 겪게 됩니다. 좌절한 끝에 주인공의 설득에 이끌려 플랫폼에 올라탔다가 결국 희생당하고 말았죠.

 

 

 

 

 

 

# 5.

 

선생의 '휠체어'는 고고한 학문의 의미와 한계를 동시에 투사합니다. 유일하게 시스템에 대한 고찰을 논한다는 면에서 특별하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이론적이라는 한계도 분명하죠. 선생은 '판나코타'라는 이름의 디저트 푸딩에 메시지를 담을 것을 제안하는데요. 주인공의 마지막 여행에 메시지라는 화두를 제시한다는 면에서 분량은 적지만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할 수 있습니다.

 

선생이 남겨야 한다 주장했던 메시지는 결국 메시지가 되지 못하고 굶주린 아이의 음식이 됩니다. 선생은 지성적이지만 본질적이지는 못합니다. 음식은 메시지가 아니라 음식일 뿐이니까요. 그가 앉아 있던 휠체어는 아무리 그럴싸한 말을 내뱉는다 하더라도 그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시스템에 순응한 것일 뿐,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 없이는 단 한 발자국도 스스로 나아갈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 6.

 

영화의 서사는 칼과 개와 밧줄과 휠체어의 실패라는

거대한 실패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이 들고 들어온 <맨 오브 라만차>의 주인공 돈키호테의 무모한 도전과도 맥을 같이하는 바가 있는 것이죠. 일련의 실패가 전개되는 동안 주인공 돈키호테가 실패라는 모험을 온몸으로 겪어낸 끝에 내린 최후의 이상적 메시지가 곧 작품의 가치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스스로를 희생한 끝에 올려 보낸 메시지는 미하루가 찾아 헤매던 딸 '말리'입니다. 엄마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죠. 어린아이는 절대 들어올 수 없다는 공간임에도 버젓이 아이는 있고, 사람들을 들여다 보내는 담당자조차 자살하고 마는 공간이라는 것은 '시스템의 결함' 그 자체를 의미한다 할 수 있습니다. 플랫폼을 타고 오르는 말리의 존재는 인본적이고 실질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제기라는 면에서 선생이 제안한 것보다 훨씬 더 탁월한 메시지라 할 수 있겠죠. 어린 아시안 여자 아이라는 가장 연약한 계층의 인물이라는 설정이, 이전까지의 그 어떤 속도보다 더 빠르게 위로 오르는 운동성과 만나 메시지에 폭발력을 더합니다.

 

 

 

 

 

 

# 7.

 

노골적인 사회적 메시지를 가진 영화들 특유의 불같은 분노와 얼음 같은 냉소가 작품을 지배합니다. 과격하고 지저분한 묘사들은 영화의 장르적 의미뿐 아니라 현실 세계에 대한 감독의 문제의식을 강하게 엿보게 합니다. 앞서 실패의 연속이라 말씀드렸듯 영화는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과 아이템을 과격하게 조롱합니다. 상층부와 하층부 가릴 것 없이 인간의 이기심과 폭력성을 냉소합니다. 부조리한 시스템 안에서 하층부의 사람들만 불행한 것이 아니라 상층부의 사람들도 불행합니다. 하층부의 물리적 폭력과 상층부의 모욕적 폭력의 본질은 별반 다르지 않죠.

 

상승을 위해 힘을 합칠 것만 같은 하층부의 사람들은 절망한 채 서로에게 칼을 겨눕니다. 만족하고 행복할 것만 같은 상층부의 사람들이 오히려 더 높은 상승을 꿈꾸죠. 떨어지는 것에는 누구의 동의도 필요하지 않고 중력에 이끌려 끊임없이 가속되지만,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층부 사람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동의를 구하기 위해 온갖 미사여구를 곁들인 찬사를 보내지만 돌아온 것은 똥 무더기일 뿐이었지만요. 우아한 달팽이 요리와 침대에 묶여 달팽이가 되어버린 주인공이 대칭되는 순간 인격이 훼손되는 듯한 감각은 과연 서늘합니다.

 

논외로 이런 류의 영화들의 경우 감독의 이념이 강하게 투사되는 경우가 있는데요. 낙수 효과라거나 분수 효과라거나 하는 식의 단편적 결론에 작품을 처박아 넣지 않는다는 점은 특히 칭찬할만합니다. 몇몇의 경우 선민의식에 뇌가 절여져 '여기 정답이 있잖아, 바보들아!'라는 식으로 끝을 맺기도 합니다만, 감독은 이 같은 누를 범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작품이 유치해지지 않도록 통제하는 데 성공합니다. 갈데르 가스텔루-우루티아 감독, <더 플랫폼>이었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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