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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es/Drama

수집형 RPG _ 퓨어 시즌 1, 채널 4 제작

그냥_ 2021. 9. 17.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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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선명한 아이템이 있다.

선명한 아이템 있다.

 

 

 

 

 

 

 

 

채널 4 드라마,

『퓨어 :: PURE』입니다.

 

 

 

 

 

# 1. 

 

선명한 아이템이 있습니다. 성 강박장애를 다룬 드라마군요. 일상에서 실시간으로 소집되는 정보를 최대한 자극적인 형태의 성적 메시지로 재구성해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되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단순히 '저 사람과의 잠자리는 어떨까?' 라는 정도의 수위는 아득히 넘어섭니다. 대상에 대한 분별 능력 역시 전혀 작동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춘기 즈음을 지나며 거치게 되는, 자신이 가진 성적 지향성을 구분하고 해석하고 정의하는 일체의 작업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관객에게 시리즈를 소개하는 첫 번째 화의 첫 번째 시퀀스로, 기념일을 맞은 부모가 자신 혹은 타인과 변태적 성애를 나누는 상상을 연출한 건, 주인공 '마니'가 가지고 있는 강박 장애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선언적으로 표현합니다.

 

 

 

 

 

 

# 2.

 

제어할 수 없는 상상 탓에 일상과 관계가 모두 파괴된다는 위기를 느낀 주인공은 자아를 회복하기 위해 연고도 없는 런던으로 떠납니다. 극은 말초적이고 쾌락적인 상상이 만드는 철학적이면서 절망적인 고통의 역설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아이템들의 나열로 전개됩니다. 존재론적 측면의 철학적 고뇌와, 건조한 정신 병리학적 진단과, 무일푼으로 낯선 도시에 떠나온 젊은이의 경제적 문제와, 연약하게 구축되었다 과격하게 파괴되기를 반복하는 사회적 관계들. 네 층위의 갈등이 각기 다른 위계에서 병렬적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이들 모두를 관통하는 성 강박장애, 소위 PURE-O에 걸린 주인공 '마니'의 심리를 진득하게 탐구하는 드라마라 할 수 있겠네요.

 

반면,

 

 

 

 

 

 

# 3.

 

선명한 아이템만 있습니다. 냉정히 얘기해서 이야기라 할만한 게 아예 없다시피 합니다.  6개 화, 도합 3시간에 달하는 동안 전개라고 할만한 것이 전무합니다.

 

'마니'가 런던에서 몇몇의 인물들을 만났다.

 

가 본 시즌이 가지는 의의의 전부입니다. 물론 시리즈물의 첫 번째 시즌이라는 것이 상당 부분 등장인물 소개에 할당될 수밖에 없다는 건 감안해야 합니다만 그럼에도 이 작품은, 심합니다. 대충 서너 번째 화가 넘어갈 즈음부터 급격히 지루해집니다.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거의 새로운 캐릭터를 모으는 수집형 RPG 카드깡 같다는 인상마저 느끼게 됩니다.

 

 

 

 

 

 

# 4.

 

각화의 전개는 다음의 틀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습니다.

 

⑴ 주인공이 자신의 정신상태를 이해한다는 핑계로 타인에게 일방적인 관계 실험을 강행합니다.

⑵ 실험은 대부분 내가 정말 상대를 원하는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유혹하는 방식이구요.

⑶ 상대가 마음을 열려는 찰나 '음... 이건 좀 아닌가?' 라며 상대를 내팽개치고 떠납니다.

⑷ 그러고는 자신이 얼마나 힘든 지를 관객에게 구구절절 토로하는 데, 관객은 이를 거절할 길이 없죠.

⑸ 무례는 주인공이 범해놓고 마치 자신이 상처 받은 양 런던의 밤거리를 터덜터덜 걷는 동안,

⑹ 뭔가 그럴싸한 형용의 독백을 곁들여주면 하나의 에피소드가 끝납니다.

⑺ 왠지 모르겠지만 다음 에피소드가 시작되면 버림받은 상대는 친구가 되어 있습니다.

 

이 패턴이 조건만 조금씩 바꿔가며 모든 인물들에게 적용됩니다. 레즈비언 '앰버'부터 달콤한 바람둥이 '조'까지 모~두 말이죠.

 

 

 

 

 

 

# 5.

 

그래요,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특히 불쾌한 지점은 주인공이 ⑸ 단계에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면, 작가가 ⑺ 단계를 통해 이 피해자 코스프레에 장단을 맞춰준다는 점입니다. 드라마 속에서 강박장애가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작동한다는 뜻이죠.

 

'앰버'를 비롯한 모든 인물들은 생전 처음 보는 주인공으로부터 최소 민망, 최대 멸시를 당합니다만, 이들 모두 그녀를 이해할만한 근거나 계기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주인공을 돕기를 자처합니다. "런던은 사람들이 타인의 존재를 신겨 쓰지 않는 도시다." 라는 '조'의 말 한마디에 런던에 남기로 결정했노라 '마니'는 말하지만, 실상 서사는 "어차피 다들 모르는 남들이라 마음만 먹으면 평생 안 보고 살 수 있으니 꼴리는 대로 ㅈ같이 살래!" 라는 얼탱이 없는 인식에 더 가까운 모습으로 전개되고 있죠.

 

 

 

 

 

 

# 6.

 

담담한 척하고는 있지만 작품 전반에 걸쳐 주인공에 대한 합리화가 너무 짙게 묻어납니다. '마니'는 아프고 힘들고 가난하고 외로운 이방인이니까. 그녀의 이런 소수자적 특성은 그녀의 모든 행동들을 정당화한다. 라는 터무니없는 믿음 말이죠. 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 PC주의 특유의 언더도그마의 냄새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작품 속 등장인물이나 관객 누구보다도 '작가'가 가장 '마니'를 동정합니다. 관객에 앞서 작가가 그녀를 불쌍한 인물로 결정합니다. 그녀에 대한 불쌍하다는 평가는, 그녀를 공동체를 질책하는 당위의 존재로 격상시킵니다. 이는 주인공이 작품 내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비용도 지불하지 않는 것으로 투영되죠.

 

시작부터 초면의 '앰버'를 엿 먹이지만 일자리는 손쉽게 얻습니다. 회사에서 깽판을 치지만 새로운 기회는 또 그 회사로부터 얻죠. 룸메이트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도 그 룸메이트는 여전히 호구를 자처하고, 막역한 친구는 버려지는 와중에도 이수일과 심순애의 순애보를 찍습니다.

 

드라마 내내 주변의 모든 인물과 설정, 사건들은 당위의 존재인 그녀를 떠받치기 위한 시종에 불과합니다. 서사 속에서 단 1도 기능하지 않는 페미니스트 드립은 특히 노골적인 가운데, 이처럼 PC코드를 거침없이 활용하면서도 유독 표독스러운 방식과 스테레오 타입으로 소비되는 아시안 조연의 활용 따위에는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자기모순 또한 노출하고 있죠. 

 

 

 

 

 

 

# 7.

 

아이템에 취해 이야기는 안 만들고 주장만 하고 있다 보니 그로 인한 시나리오의 공백은 말초적인 컷씬과 조연들 간의 치정으로 적당히 퉁치게 됩니다. 몇 화 지나지 않아 '마니'는 환자가 아닌 철학자가 되고 맙니다. 정신병리학적 질환을 가진 사람의 고통에 대한 묘사보다 자기개발서식 철학 놀음에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합니다. 시리즈의 핵심인 성 강박장애에 대한 표현이라고는 고작, 컷씬 끼워 넣고 얼굴 찡긋 컷씬 끼워 넣고 얼굴 찡긋. 이쯤 되면 작가가 해당 캐릭터를 위해 사례나 배경지식을 취재나 하긴 한 건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죠. 채널 4 드라마, <퓨어>이었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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