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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직업병 _ 사라진 시간, 정진영 감독

그냥_ 2021. 6. 23.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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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문소리 감독은 <여배우는 오늘도>를 통해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한 사람의 치열한 현실과 페이소스를 묘사합니다. 김윤석 감독은 <미성년>을 통해 배우의 시선에서 캐릭터를 해석하는 방식을 풍부하게 표현합니다. 그리고 정진영 감독 역시 지금 이야기하려는 영화 <사라진 시간>을 통해 배우가 필연적으로 겪게 될 정체성 갈등을 전개합니다.

 

배우, 특히 배테랑 배우가 영화를 만들면 첫 작품에서 배우 이야기를 하고 싶어 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정진영' 감독,

『사라진 시간 :: Me and Me』입니다.

 

 

 

 

 

# 1.

 

영화 초반 이영은 세 인격에 빙의됩니다. 돌아가신 수혁의 어머니와 코미디언 이주일, 레슬러 역도산이죠. 얼핏 세 인물은 아무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백종렬 감독의 <뷰티 인사이드>처럼 저녁이면 랜덤 하게 찾아오는 각기 다른 인격의 예시인 것만 같죠.

 

감독은 작품의 재미를 위해 의도적으로 세 인물의 관계를 숨기고 있습니다만 사실 뚜렷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남편 수혁의 필요에 종속된 인격들이라는 점입니다. 수혁이 엄마에 대한 부채감을 이야기하자 기다렸다는 듯 엄마가 등장하구요. 시무룩해진 아내를 달래고 싶은 마음이 생겼기에 이주일이 소환됩니다. 마찬가지로 이웃 해균을 집어던져서라도 집안에 들이고 싶지 않았기에 그걸 가능하게 할 역도산이 불러내어지는 식이죠.

 

 

 

 

 

 

# 2.

 

죽은 어머니와 이주일과 역도산이 수혁에 종속되어 있다면 그 인격들을 부르는 이영 역시 수혁의 필요와 연동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말인 즉, 영화 속 인격들은 모두 언제고 다른 인격의 필요에 '연동'되고 '종속'되며 또 '합치'될 수 있다는 뜻이죠.

 

중반부를 지나며 수혁과 이영 부부 모두 '형구'의 정신 속에서 만들어진 가상의 인격임이 드러나게 되는데요. 이는 전반부 세 인격의 의미와 만나 단순한 정신병으로 인한 착각이 아니라 형구에게 수혁과 이영이라는 가상의 인격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었음을 유추하게 합니다. 마찬가지 논리로 부부가 불에 타 죽은 것 역시 형구의 또다른 필요 때문이라는 뜻이 되겠죠. 그리고 예상한 대로 이 필요의 내용은 이후 정신과 의사와의 면담을 통해 친절히 설명됩니다. 찌꺼기가 어쩌구 태워버리는 게 저쩌구 하는 이야기들이죠.

 

 

 

 

 

 

# 3.

 

이주일과 역도산이 수혁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인격이고, 수혁과 이영이 형구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인격이라면, 마찬가지로 형구 역시 또 다른 누군가의 필요에 의한 산물일 수 있을 것이라 추론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자, 하나 물어볼까요. 영화 전반에 걸친 형구의 지독한 고통으로 인해 수혜를 본 인물이 누구죠?

 

네. 이선빈의 '초희'입니다. 자기 분열적 가상의 인격과 역할을 만들어내고 있는 형구의 인식 전체를 초희가 만들어낸 또 다른 가상의 인격이라는 전제 하에서 후반부 온천에서부터의 메타포들을 점검하면 대부분의 상황적 모순이 해결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꿈속의 꿈속의 꿈속의 꿈이라는, 인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물고 물리는 흥미로운 구성의 영화라는 거죠.

 

... 여기까지는 사실 그리 어려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영화를 보신 많은 분들이 이해하셨을 테고 또 몇몇 분들은 콘텐츠로 옮기기도 하셨을 테죠. 피차 아는 이야기를 하는 건 영 재미가 없으니 저는 다소간의 무리를 무릅쓰고서라도 한 발짝 더 나아가 보려 합니다.

 

 

 

 

 

 

# 4.

 

생각해 보면 초희 역시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의 인격입니다. 응? 영화의 마지막은 초희로 끝나지 않나? 누가 초희를 만들었다는 거지? 라 하실 수 있을 텐데요. 딱 한 사람이 더 있죠.

 

카메라 너머에 있는 사람. 이 시나리오를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간 사람.

정진영 감독.

 

초희가 자신의 흐릿한 정체성으로 인한 아픔과 외로움을 공감받기 위한 수단으로 형구를 창조해냈다 한다면, 마찬가지로 영화인 정진영 역시 고통받다 끝내 공감을 얻는 데 성공한 초희의 모습에 비춰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 초희를 만들어내었다 할 수 있습니다. 말인즉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한 감독 개인의 숙명적 외로움이 투사되어 있는 작품일 수 있다는 거죠.

 

 

 

 

 

 

# 5.

 

영화의 오프닝과 앤딩은 조진웅이 천천히 걷는 모습의 수미상관으로 구성되는데요. 아직 영화를 관람하기 전의 관객에게 있어 흑백 화면 속 남자는 '배우 조진웅'으로 인식될 테구요.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보이게 될 컬러 화면 속 남자는 '배역 박형구'로 인식되게 될 겁니다.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조진웅의 모습으로 투영된 배우라는 직업의 두 정체성으로 감싸 놓고 있습니다.

 

감독은 자기 위로를 위해 가상의 인격을 만드는 산고의 시나리오에 두 개의 제목을 붙입니다. 하나는 한국어 제목 <사라진 시간>이구요. 또다른 하나는 영어 제목 <Me and Me>죠. 전자는 타인의 인생을 살았던 과거 연기하는 자신의 시간을 사라진 시간으로 정의한다는 측면에서 내면 깊숙한 곳에 침전된 짙은 외로움과 아픔을 읽게 한다 볼 수 있을 테구요. 후자는 그럼에도 연기된 인격(Me)과 연기하는 인격(Me) 모두 자기 자신이라 말한다는 측면에서 고독감으로부터 일어서고자 하는 의지를 읽게 한다 볼 수 있을 겁니다.

 

 

 

 

 

 

# 6.

 

개봉 후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단번에 와닿는 영화가 아니다" 말하는데요. 이는 자신의 영화가 특별히 고매해 너희 같은 범인들은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는 식의 자뻑 멘트가 아니라, 배우라는 직업군이 가진 고질적인 불안과 아픔과 외로움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측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당연합니다. 타인의 직업병이라는 게 한두 시간 만에 뚝딱 공감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논리적으로 해석되지 않는 난해한 영화적 표현들은 관객에겐 당황스럽지만 배우에겐 일상에 불과합니다. 2030년을 배경으로 한 어느 영화의 한 대사를, 2021년의 지금 현실에서 나도 모르게 인용했다가, 다시 그 표현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다음 작품에 투사하는 직업이 바로 배우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 7.

 

영화를 보며 어떤 일이 진짜냐 가짜냐를 따지고 있다면 길을 잘못 들어서도 한참 잘못 들어섰다는 뜻일 겁니다. 수혁이든 이영이든 형구든 초희든, 이 인물들이 가상의 인격이라는 것보다 '만들어진 인격'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이 붙니 찌꺼기가 어쩌니 하는 대사들, 혹은 뜨개질 인형이나 열린 문과 닫힌 문의 의미, 창문과 벽이 만드는 경계나 연결성을 상징하는 몇몇 메타포 등에 관련된 세부 해석에 발 묶여 있다면 그 역시 한참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 따위 그저 '수학'에 불과하기 때문이죠. 그럴 시간에 네 주인공이 겪는 유사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정서들의 합집합과, 그들 모두를 관통하는 존재의 외로움이라는 교집합에 교감할 수 있도록 집중하는 편이 훨씬 더 유리합니다.

 

# 8.

 

마트로슈카와 같은 작품의 구조를 얼마나 '적절한 타이밍'에 캐치할 수 있느냐가 관객 경험의 8할을 차지하리라 생각됩니다. 정서를 충분히 느끼고 이 정서의 실체가 정체성이 유리된 존재들의 본질적 외로움이라는 걸 나중에 이해해야 온전히 작동하는 영화기 때문이죠. 형구의 혼란에 흠뻑 젖어있다가 홀로 술을 들이켜는 모습에 충분히 가슴 아파한 후, 초희의 재등장과 함께 맥락을 캐치해 나가다가, 초희의 울음을 보며 작품의 구조를 완벽히 이해한 후, 마지막 앤딩 장면의 조진웅에게서 이 영화가 배우에 대한 영화라는 것으로 확장할 수 있어야 영화를 온전히 맛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서가 자리잡기 전에 구조를 먼저 이해해버리면 나중에 끼어들 틈이 없어진 정서는 휘발되어 버리고 남는 건 시니컬한 반응뿐이게 됩니다. "뭐야, 이 짭홀랜드 드라이브는?" 이라거나 "클리셰를 피한답시고 가져온 게 수천 년 전 호접몽이야?" 라는 식으로 말이죠. 역으로 영화가 끝날 때까지 맥락을 잡아내지 못한다면 "씨X, 대체 뭔 소리야?" 라는 화가 치밀어 오를 가능성이 큽니다.

 

 

 

 

 

 

# 9.

 

온전히 보기 위한 몰입의 과정이 정형화되어 있는 작품이라면 감독은 지금보다 더 관객 경험을 확실히 통제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 결국 그 대목에서의 실패가 영화에 대한 수많은 혹평으로 이어지고 말았죠. 초반의 미스터리에서 형구의 드라마로 넘어가는 대목에서의 밀도도 아쉽구요. 결말부 다소 둔탁하고 급작스러운 마무리 역시 관객 친화적이지는 못합니다. 오프닝과 앤딩 또한 호의적으로 해석하긴 했습니다만 파괴력이 떨어진다는 점까지 부정하기는 힘들죠.

 

... 영화를 보고 난 후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고서 이런저런 감상평들을 찾아봤는데요. 평론가들 가운데 이 작품에 대해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역시 얄미운 빨간 안경뿐인 듯 보입니다. 대부분은 꿈이 어쩌구 미로가 어쩌구 하는 표피적인 겉면만 열심히 핥고 있는데 반해, 이동진 평론가만큼은 내가 아닌 나로 살아가야 하는 나날의 아픔이라는 작품의 메시지를 정확히 포착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요. 이 영화는 내(정진영)가 아닌 나(배역)로 살아가야 했던 나날(배우)의 아픔(외로움)입니다. 정진영 감독, <사라진 시간>이었습니다.

 

# + 11. 만약 저의 이해가 감독의 의도와 같다면 이 영화는 초현실적인 표현과 대조적이게도 자신의 과거 경험들을 다수 녹여 낸 상당히 자전적인 작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상컨데 똑같은 시나리오로 수혁과 이영과 형구와 초희 모두를 배우 정진영 혼자서 1인 다역으로 연기한 연극이 있다면 어땟을까. 라는 생각도 하게 되는군요.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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