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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Drama

가발을 처음 본 머리카락 _ 가발, 아타누 무케르지 감독

그냥_ 2021. 12. 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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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 문학평론가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p.133

 

 

 

 

 

 

 

 

'아타누 무케르지' 감독,

『가발 :: Wig』입니다.

 

 

 

 

 

# 1.

 

인도 국적의 여성 '알리타'가 집 건너 거리에서 몸을 파는 트랜스젠더 매춘부를 만나 성장하는 내용의 드라마입니다. 주인공은 I.T 회사에 다닙니다. 미혼이 흠이 되는 인도 사회에서 자기 삶의 주도권을 쟁취해 나가고자 하는 현대적 인간이죠. 그녀는 이상적입니다. 도전적입니다. 발전적이고 논리적이며 긍정적이고 가치지향적이죠. 하지만 이 인물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다름 아닌 '자기 확신'입니다. 알리타는 충분히 똑똑하고 상냥하지만, 자신만의 철학과 방식의 합리성에 다소 도취되어 있기도 합니다.

 

새로 이사 간 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에는 작금의 인도 사회에 대한 불만이 포함됩니다. 방 안에 숨어든 바퀴벌레를 잡는 컷에 이어 청소부의 모습을 비추는 편집은, 이 인물이 가진 도덕적 결벽과 배타적 공격성이라는 것이 사회적으로도 확장될 수 있음을 은유합니다. 알리타는 창밖에 걸어둔 화분에 물을 줍니다. 흘러내리는 물에 아랫집이 불평하자 되려 욕을 합니다. 그녀는 날씨가 좋은 날 식물에 물을 준다는 '복잡하게 좋은 이유'라는 것이 있음에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단순하게 나쁜 사람들'을 질타합니다. 그녀에게 있어 불평을 늘어놓는 아랫집은 방에서 쫓아내야 하는 바퀴벌레와 본질적으로 그리 다르지 않죠.

 

하지만 진짜 끔찍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거리의 매춘부입니다. 알리타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습니다.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위험한 매춘부를 몰아내 줄 것을 요구합니다.

 

 

 

 

 

 

# 2.

 

어느 날 퇴근길에 쓰러진 사람을 발견합니다. 그 매춘부입니다. 강간과 폭행을 당했다 합니다. 알리타는 다친 그녀를 집으로 들여 치료하고 잠을 재웁니다. 왜 이런 일을 하며 사느냐는 질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털어놓습니다. 이튿날. 날이 밝기도 전에 매춘부는 떠나고 없습니다. 잠자리를 정갈하게 정리하고 빌려 입은 옷을 깨끗이 빨아 널어두고 떠난 모습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저분하고 무례할 것이라는 알리타와 관객의 편견에 금이 가는 순간입니다.

 

'가발'을 두고 갔습니다. 마음에 걸렸던 알리타는 돌려줄 방법을 찾아보지만 쉽지 않습니다. 며칠 지나 다행히도 정돈된 모습의 매춘부가 가발을 찾으러 돌아옵니다. 왜 요즘엔 보이지 않느냐는 알리타의 물음에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에 쫓겨났다' 답합니다. 알리타죠. 자기 확신에 취해 있던 그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합니다. 다른 거리로 자리를 옮겼다 말하는 매춘부는 가발을 다시 쓰고 빈디를 곱게 붙인 후 단아한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창 밖으로 거리를 걷는 매춘부의 모습을 지켜보는 알리타.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 3. 

 

알리타는 낮입니다. 전문가입니다. 현대적 복식입니다. 붉게 물든 방입니다. 긴 머리카락입니다. 그녀는 이상적인 미래의 인도를 대변합니다. 매춘부는 밤입니다. 거리의 창부입니다. 전통적 복식입니다. 노란색 거리입니다. 가발입니다. 그녀는 현실적인 과거의 인도를 대변합니다. 낮과 밤은 공존합니다. 현대적 복장과 전통적 복장도, 붉게 물든 방과 노란색 거리도 공존합니다. 긴 머리카락과 가발 모두 머리카락입니다. 둘 모두 사람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 모두 인도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밤을 모르던 낮. 창부를 힐난하는 전문가. 거리를 모르던 방. 노란빛을 혐오하던 붉은빛. 가발을 처음 본 머리카락의 영화입니다. 온통 붉은빛이었던 알리타는 창문을 수놓은 무지개 빛으로 성장합니다. '단순하게 나쁜 타인'은 하룻밤 사이 '복잡하게 좋은 지인'이 되었다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갑니다.

 

색을 주요하게 다루는 작품에서 인상적인 포인트가 있는데요. 버스의 파란색과 it 기업의 하얀색도 한껏 강조된다는 점입니다. 노란색이라는 새로운 색깔을 몸소 느낀 경험은 그에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색깔들에 대한 가능성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트랜스젠더'나 '매춘부'라는 구체적 속성 너머 그 이상의 다양성에 천착합니다.

 

드라마로서의 퀄리티를 훼손하지 않도록 반전을 적절히 통제하고 있다는 점 역시 감독의 깊이를 엿보게 합니다. 공간과 시간에 대한 묘사는 부드럽게 다뤄 무리하지 않으면서 색감을 통해 메시지에 힘을 싣는 일련의 방식은 능숙하고 유연합니다. 몇몇 부정적인 이미지들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인도는 인구 규모나 경제적, 문화적, 도덕적 수준에 비해 상대적으로 발달된 민주주의 국가이기도 한데요. 이 작품은 그런 인도의 저력을 조금이나마 엿보게 합니다.

 

 

 

 

 

 

# 4.

 

믿기시나요?

투쟁鬪爭과 계몽啓蒙이 없는 다양성 영화입니다.

 

정말 보고 싶었던 영화, 오래도록 기다렸던 다양성 영화입니다. 다양성은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과 사연이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으며 그런 세상을 사는 사람들 역시 나만큼의 합리성과 나만큼의 감수성이 있다는 전제 위에 성립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양성의 스펙트럼을 채우는 타인에는, 약자뿐 아니라 평범한 모든 사람들과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까지 포함됩니다. 편협한 진단과 비현실적인 이상은 아집에 불과합니다. 이상은 현실 앞에 겸손할 때 비로소 가치를 가진다는 상식. 이상의 겸손을 이야기하는 영화란 것이 얼마나 근사한지를 아타누 무케르지는 선보입니다. 아타누 무케르지 감독, <가발>이었습니다.

 

# +5. 

 

문득 그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만약 한국의 양산형 퀴어 영화감독들이었다면 이 아이템을 어떻게 소화했을까요.

 

제3의 무례하고 폭력적인 범인을 등장시킨 후 알리타를 감독 자신의 페르소나 삼아 트랜스젠더 매춘부와 함께 투쟁하러 다니는 영화를 만들었을 거라 확신합니다. 범인의 시체 위에 깃발을 꽂고 자신의 도덕성에 한껏 도취된 감독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관객을 내려다보는 영화들 말이죠. 아니면 '정석적으로' 트랜스젠더 매춘부의 미간에 카메라를 부착시켜 가능한 자극적인 표현들로 관객을 질타할 수도 있을 테죠. 어쩌면 주인공과 매춘부의 배드신을 억지 미학에 구겨 넣은 후 박제된 다양성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자위했을지도 모르겠군요. 어느 쪽이든 처참하긴 매한가지입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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