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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Thriller

통제력의 상실 _ 리틀 조, 예시카 하우스너 감독

그냥_ 2021. 5. 10.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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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꽃가루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연인과 꽃구경하는 대신 고고하고 시크한 싱글 라이프를 택한 이유죠. 애인 사귈 능력은 되냐구요? 그게 중요한가요? 누가 너랑 사귀겠냐구요? 손님, 싸울래요?!

 

 

 

 

 

 

 

 

'예시카 하우스너' 감독,

『리틀 조 :: Little Joe』입니다.

 

 

 

 

 

# 1.

 

굳이 말하자면 공포 스릴러 영화... 이긴 한데요. 솔직히 무섭다기보다는 '찝찝한 영화' 쪽에 조금 더 가깝습니다. 각기 다른 세 층위의 정서가 하나의 이야기 속에 중첩되어 있는데, 그 실체는 구체적 공포보다는 일련의 과정이 낳게 될 미래에 대한 잠재적 공포에 닿아있기 때문이죠.

 

가장 표면의 테마라 한다면, 역시 유전자 조작 기술과 과학자의 윤리적 일탈로 인한 리스크가 될 테구요. 그다음은 확인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강요된 판단과 허약한 믿음 앞에 놓인 인간의 나약함이라 할 수 있겠죠. 세 번째는 개인을 넘어 인간이라는 종(種, Species) 레벨에서의 자기 주도권 상실에 대한 공포라 할 수 있을 겁니다.

 

 

 

 

 

 

# 2.

 

사실 영화 내에서 앞서 말씀드린 테마를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작품의 호흡 자체가 워낙 느린 편이기도 하거니와, 감독이 런타임을 충분히 투자해 하나하나 친절하게 짚어가고 있기 때문이죠. '앨리스'의 전 남편이 산에 살고 있다는 설정이나, '벨라'의 반려견과 관련된 시퀀스. 주제의식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실험실 패스워드와, 아들 '조'와 그의 여자 친구 '셀마'의 낚시와, 정신치료사와의 대화 등은 모두, 감독이 위의 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연출들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 3.

 

결국은 '통제력의 상실'입니다. 다양한 위계에서의 통제력을 잃어버린 사람의 불안에 대한 영화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과학 기술의 결과가 어떻게 세상을 바꿔나가게 될지 그 통제력을 잃음으로 인해 생기는 불안이구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식물 '리틀 조'를 아들 방에 가져다 두고 싶은 싱글맘 '앨리스'의 욕망을, 아직 안전성에 대한 연구가 완료되지 않은 식물을 시중에 풀어선 안된다는 과학자 '앨리스'의 윤리가 통제하지 못해 생긴 사단이죠. '벨라'를 제외한 동료들 역시 직업윤리 따위보다는 자본의 논리를 대표하는 '꽃 박람회'에 매몰되어 있긴 매한가지구요. 싱글맘으로서의 가족 문제 역시 아들의 선택을 통제하지 못할까 싶어 생긴 불안이죠.

 

만약 우려한대로 꽃가루가 사람을 중독시킨다면, '리틀 조'가 양산되어 퍼져나가게 된 세상에서 '앨리스'를 비롯한 인류 모두는 결국 '리틀 조'의 번식을 위해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게 될 겁니다. 반면 '리틀 조'에 대한 우려가 모두의 말처럼 망상이라 하더라도 이를 걱정하고 의심했던 관객인 '나'의 마음은 확인하고 통제할 방법이 없죠.

 

# 4.

 

구분해야 할 것은 여기서의 통제력이란 지배력과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변화 자체를 장악해서 내 마음대로 운용하겠다'는 폭력적 욕망보다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고 경과를 예측할 수 있는 시야'라는 뜻에 조금 더 가깝죠. 존재의 목적을 빼앗기는 상황. 통제력의 상실 앞에 인간은 얼마나 무기력한가. 를 흩날리는 꽃가루처럼 천천히 스며들듯 탐구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까요.

 

다만, 그래서 이 통제력의 상실로부터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 가. 라는 전개? 혹은 발전? 은 희미한 작품이라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부정하는 건 잘못이죠." 라는 상담사 마지막 말은, 감독이 '진짜 모습'을 어떤 것으로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관객에게 미뤄두고 있는 셈이니까요. 영화를 보고 난 후, 말로 설명하기 힘든 찝찝함과 난해함이 느껴지는 데에는 일련의 결말 역시 기여하고 있습니다.

 

 

 

 

 

 

# 5.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 다시 영화로 돌아와 볼까요? 말씀드린 통제력의 상실로 인한 세 층위의 공포라는 것은 모두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공포입니다. 말인즉, 제 아무리 다각적 함의가 풍부하게 투영되어 있다 하더라도, 메시지의 착시를 걷어내고 나면 영화의 물리적 서사는 <유전자 조작 꽃을 만들었다>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죠.

 

 

 

 

 

 

# 6.

 

물론 감독은 이 빈곤한 서사와 장르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 있긴 합니다. 각 컷들이 '리틀 조'에 의해 잠식되어 가는 다양성의 꽃처럼 보이게끔 만든 심미적 공간 연출과, 그와 최대한 대조적으로 느껴지도록 한 그로테스크한 느낌의 '리틀 조'를 공들여 디자인합니다. 몰개성을 표현하기 위한 패턴화 된 배치 등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미장센. 개미집과 같은 구체적 아이템을 적극 활용한 메타포. 불쾌하고 불안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일본풍 타악 사운드와, 사운드의 리듬과 강하게 조응하는 과감한 영상 구성과 편집. 갑자기 낙사하는 '벨라'와 원펀맨 빙의한 '크리스' 등의 의외성을 적극 활용하기도 합니다. 만,

 

그럼에도 장르적 빈곤이 충분히 만족되었는가는 개인적으로 의문입니다. 말씀드린 수단들조차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상당수 반복적으로 활용되고 있기에 일정한 런타임이 지나고나서부터는 급격히 약빨이 떨어지며 지루해진다는 점 역시 부정할 수 없죠. 안 그래도 추상적인 메시지의 영화가 그 결말마저 모호하게 열려 있는 바람에 더더욱 힘없이 주저 않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 7.

 

불쾌한 이미지, 우울한 세계관, 딱딱한 표현, 독창적 사운드, 난해한 주제의식까지. 여러모로 <킬링 디어>, <더 랍스터> 등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스러운 느낌적인 느낌도 연상되는데요. 동시에 왠지 모르게 심심한 순한 맛 같은 아쉬움이 드는 것은 바로 이 핵심 서사의 빈곤함 때문이라 해야겠네요. 이야기가 조금 더 확장되어 있다거나, 아니면 차라리 콤팩트 하게 1시간 남짓의 작품이었다면 감상이 조금은 달랐을까 싶은 생각이 끝내 가시질 않는군요.

 

 

 

 

 

 

# 8.

 

분명 표현 심미적이고, 메시지 흥미롭고, 연기 나쁘지 않습니다. 영화 메시지의 소구력이 강하게 작동한 특정 관객층에겐 충분히 인상적인 영화가 될 정도의 완성도는 구비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표현으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특별하다거나, 메시지가 대체할 수 없을 정도로 독창적이거나 깊이가 있는 것까지는 아닙니다. 영화 전반을 홀로 이끌어가는 '앨리스' 역의 '에밀리 비샴'의 연기가 썩 안정적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연기 보는 것만으로도 본전 찾았다 할 수 있을 만큼, '칸'을 먹을 만큼 특별한 성취인가? 라 물으신다면 저는 조금 회의적이기도 하구요. 글쎄요. 웰메이드이긴 한데... 성향과 무관하게 "그래서 이 영화 재미있어?"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 힘든 영화랄까요. '예시카 하우스너' 감독, <리틀 조>였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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