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아하세요? :)

늦은 저녁 맥주 한 캔을 곁들인 하루 한편의 영화, 그리고 수다.
영화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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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umentary 69

검은색 거울 _ 가버려라 2020년, 앨 캠벨 / 앨리스 머사이어스 감독

# 0. 2020년 한 해 이슈를 망라한 페이크 다큐멘터리 블랙 코미디 쇼입니다. 만, 코끼리 냉장고 넣기도 아니고 8760시간이 1시간 남짓의 런타임 안에 정리될 리가 없죠. 미리 말씀드리자면 특별한 의미나 깊이 있는 풍자는 기대하지 않으시는 편이 좋습니다. 그저 빌어먹을 2020년을 힘겹게 지나왔을 사람들이 편하게 남 욕하고 놀리는 재미나 누리고 치우는 딱 그 정도 느낌의 킬링 타임 콘텐츠라 이해하시는 편이 적당합니다. '앨 캠벨, '앨리스 머사이어스' 감독, 『가버려라, 2020년 :: Death to 2020』입니다. # 1. '신정원' 감독의 리뷰에서도 말씀드렸듯 코미디야 말로 가장 스포일러에 민감한 장르이기에 최대한 개그 코드에 대한 내용은 말씀드리지 않을 생각입니다. 애초에 해석이 필요할 만..

Documentary/Social 2021.01.23

몽마르트 파파'즈 썬 _ 몽마르트 파파, 민병우 감독

# 0. 아버지는 소싯적 낚시를 참 좋아하셨습니다. 보통 남편이 낚시를 좋아하면 가정생활이 순탄치 않다고들 합니다만 다행스럽게도 저희 어머니는 텐트 안에서 과일 도시락을 까먹으며 라디오를 듣거나 선선한 바람 맞으며 천천히 바닷가 거니는 걸 즐기시는 분이셨기에 갈등은 없었죠. 유별난 아버지 덕분에 저의 유년기를 담은 사진과 영상들은 대부분 멀리 수평선과 방파제, 부둣가에 떠내려온 불가사리를 배경으로 한 것들이었습니다. 벌써 수십 년도 더 된 이야기이지만 지금까지도 가족들이 모일 때면 가끔 찾아보며 즐겁게 담소를 나누곤 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저희 집 홈비디오를 생판 남인 여러분이 보셔도 재미있을까요?! '민병우' 감독, 『몽마르트 파파 :: Montmartre de Papa』입니다. # 1. 가장으로서 ..

나의 의미 _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오, 에드 퍼킨스 감독

# 0. 사고로 기억을 잃은 '알렉스'. 쌍둥이 형제의 과거를 대신 기억하는 '마커스'. 알렉스는 잃어버린 기억을 찾고 싶어 합니다. 마커스는 잊고 싶은 기억을 덮어두고 싶어 합니다. 오래도록 미뤄왔던 두 사람의 만남과 대화를 담은 다큐멘터리입니다. 숨겨진 유년기를 다루는 작품이니만큼 사건의 실체를 알고 보면 감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일종의 반전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이라면 글을 읽기 앞서 영화를 먼저 보실 것을 권합니다. '에드 퍼킨스' 감독,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오 :: Tell Me Who I Am』입니다. # 1. 당사자에겐 외람된 이야기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부모의 도덕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시시합니다. 설마 하니 알렉스 마커스 형제 부모의 비도덕..

고오급 화면보호기 _ 무빙 아트, 루이 슈워츠버그 제작

# 0. 정적인 분위기의 자연 다큐멘터리 시리즈입니다. '루이 슈워츠버그' 제작, 『무빙 아트 :: Moving Art』입니다. # 1. 회차에 따라 시즌에 따라, 대양이나 꽃, 숲, 폭포와 같은 특정한 자연물을 중심으로도 아이슬란드, 아프리카, 훗카이도와 같은 지역으로도 앙코르와트나 코사무이, 마추핏추와 같은 유적이나 문화권으로도 구성됩니다만 그래봐야 작품에 대한 감독의 개입은 구성물을 느슨하게 엮어내는 테마, 그뿐입니다. 기껏해야 오프닝 귀퉁이에 남겨둔 한마디 문장이 전부입니다. 피사체의 미려한 모습을 담아내는 풍성한 구도입니다. 현장음을 최대한 선명하게 담아내는 가운데 이를 효과적으로 조력하는 음악입니다. 고요하고 장엄한 분위기만이 존재합니다. 심장의 박동을 최대한 늦추고, 호흡을 최대한 깊게 만드..

삭제하시겠습니까? _ 소셜 딜레마, 제프 올롭스키 감독

# 0. 무수히 많은 하자로 점철된 인격임에도 그나마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만한 장점이라면 소셜 미디어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블로그질을 시작하며 글을 간단히 소개하는 트위터, 페이스북 계정을 만들어 꾸린 적은 있습니다만 그마저도 더 이상 업데이트하고 있지 않죠. 참 잘했어요. 박수 세 번 짝짝짝. '제프 올롭스키' 감독, 『소셜 딜레마 :: The Social Dilemma』입니다. # 1. 다다익선 多多益善. 일반적으로 소통은 언제나 긍정적인 것이라 생각됩니다. 정보를 공유하는 것 역시 언제나 긍정적인 것이라 생각됩니다. 보다 많은 소통과 보다 많은 정보의 공유는 사람들의 시야를 풍부하게 만들고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게 만들어 사회를 보다 평화롭고 풍요롭게 만들 것이라는 건 오랜 시간 동안..

Documentary/Social 2020.09.24

멀리 _ 나의 노래는 멀리멀리, 현진식 감독

# 0. 빨리 말고, 먼저 말고, 잘 말고, 그저 멀리. 멀리멀리. 지희 씨의 노래는 멀리멀리. '현진식' 감독, 『나의 노래는 멀리멀리 :: Free My Soul, Free My Song』입니다. # 1. 기타리스트 '김지희'씨의 다큐멘터리입니다. 우연히 접하게 된 기타와 사랑에 빠진 스물넷의 소녀. '정성하'와 '앤디 맥키'를 동경하는 새내기 기타리스트. 아직은 겁도 많지만 엄마의 뒷모습을 마음으로 연주하는 멋진 딸. 늘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무대 위에서라면 강단 있게 곡을 완주하는 아티스트. 열 마디 말 대신 음악과 밝은 웃음으로 소통하는 그녀는 지적 장애인입니다. # 2. 쓸데없이 부자연스러운 비극이나 연출된 희극 없이 담담히 흘러가는 맛이 좋은 다큐멘터리입니다. 다소 느리기도 하고 때론..

Documentary/Art 2020.09.17

다름을 이야기하는 틀린 영화 _ 존의 컨택트, 매튜 킬립 감독

# 0. 다름과 틀림은 다르다는 상식을, 다름과 틀림을 혼용하는 건 틀렸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다큐멘터리입니다. 머나먼 우주 너머 다른 존재들과의 접촉을 꿈꾸는 '존'은 분명 평범과는 거리가 먼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틀린' 삶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매튜 킬립' 감독, 『존의 컨택트 :: John Was Trying to Contact Aliens』입니다. # 1. 목표는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전부인 것은 아닙니다. 뒤따르는 부나 명예, 인정, 성취, 흔적 따위의 결과물들 역시 중요한 동기가 되곤 하죠. 하지만 '존'의 목표에는 이와 같은 부산물 혹은 불순물이 없습니다. 그의 삶은 형식논리적인 면에서 부나 명예는커녕 최소한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는 행동으로 점철됩..

정의란 무엇인가 _ 오버 데어, 장민승 감독

# 0.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마이클 센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아시나요. 저도 분위기에 휩쓸려 그 책과 『완벽에 대한 반론』에, 왠지 제목이 비슷한 '셸리 케이건' 교수의 『죽음이란 무엇인가』까지 한꺼번에 샀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세 권 모두 절반정도 읽다 덮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죠. 책장에 꽂아두면 제법 폼이 나는 책들이라는 것만으로도 돈이 아까운 친구들은 아니니까요. 두껍고 묵직한 덕에 북앤드로도 쏠쏠합니다. 하지만 이글에서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정의는 '센델' 교수의 Justice가 아닙니다. Definition이죠. 지금 낚시하는 거냐구요? 맞는데요? 너 이자식 이과냐구요? 그것도 맞는데요? '장민승' 감독, 『오버 데어 :: over there』입니다. # 1. 오..

Documentary/Art 2020.08.14

American Gook BBong _ 허블 3D, 토니 마이어스 감독

# 0. 과학 다큐멘터리를 좋아합니다. 과학에 대한 학문적 식견이 있어서는 당연히 아니구요. 그냥 구경하는 게 재미있기 때문이죠. "충분히 발전한 과학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 던 아서 클라크의 말처럼 저 같은 무식한 인간에게 있어 현대 과학은 '트릭이 없는 마법'처럼 마냥 신비한 일입니다. '토니 마이어스' 감독, 『허블 3D :: IMAX _ Hubble 3D』입니다. # 1. 퇴역을 눈 앞에 둔 인류 역사 상 최고의 눈. 허블 망원경. 크~ '허블 울트라 딥 필드'와 같은 압도적인 우주적 스케일의 화상과, 이를 최대한 풍성하게 설명하고 묘사할 전문가들의 인터뷰. 황홀한 영상 연출의 조력을 더한 3D IMAX! 짧게 치고 빠지기 적당한 40분의 런타임과, 표현력 죽여주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과학, 감성을 더하다 _ 빙하를 따라서, 제프 올롭스키 감독

# 0. 그걸 봤을 때 깨달았죠. 사람들은 통계나 컴퓨터 모델 프로젝션이 필요한 게 아니라 믿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시각적 증거가 필요하다고요. '제프 올롭스키' 감독, 『빙하를 따라서 :: Chasing Ice』입니다. # 1. 지구 온난화로 인해 급격히 녹아가고 있는 그린란드의 빙하를 저속 카메라로 촬영하는 프로젝트의 여정을 동행한 다큐멘터리입니다. 극지 빙하 조사단 EIS의 환경 사진작가 '제임스 발로그'는 짧게는 6개월 길게는 수년에 걸쳐 녹아내려 후퇴하는 빙하의 모습을 담아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공돌이의 그것답지 않게 대단히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맛이 있는 독특한 작업입니다. 프로젝트를 설명함에 있어 전문적인 과학적 정보들은 의식적으로 배제되어 있습니다. 아주 ..

모자이크 _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아녜스 바르다 감독

# 0. 영화의 제목은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입니다. 영화는 '이삭'의 의미와 '줍는 행위'의 의미와 '사람'의 의미와 '들'의 의미와 이들을 다시 줍고 다니는 '나, 아녜스 바르다'의 의미. 그리고 이 모든 '의미'들 속에서 다시금 자신이 찾던 것들을 주워갈 관객들의 의미를 관조합니다. '아녜스 바르다' 감독,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 Les Glaneurs Et La Glaneuse』입니다. # 1. 작품 속에는 다양한 이삭들이 등장합니다. 땡볕 아래 아녀자들이 생계를 유지하게 했던 밀 이삭. 한숨짓는 싱글맘이 아이들을 먹일 감자. 비루한 행색의 노숙자가 뒤지는 쓰레기통과, 노련한 셰프의 와인이 되어줄 포도. 나눔을 역설하는 오래된 법전에 쓰인 양배추. 예술 작품을 하기 위해 주워지는 잡동사니. 줍..

Documentary/Social 2020.06.12

글자를 아니까, 사는 기 더 재밌다 _ 칠곡 가시나들, 김재환 감독

# 0. 내 나이 팔십팔세 마음은 팔팔하다. 우리 사우가 장모님 글씨 차마네예 카이 마음이 또 팔팔해 즌다. 나는 박금분 할매믄서, 학생이다. 학생이다. '김재환' 감독, 『칠곡 가시나들 :: Granny Poetry Club』입니다. # 1. 마을에 한글 학교가 생깃다. 글자를 아니까, 사는 기 더 재밌다. # 2. 공부. 유촌댁 안윤선. 지금 이래 하마 한자라도 늘고 좋지. 원, 투, 쓰리, 포. 영어도 배우고 한번 해보자. # 3. 공부. 등개댁 곽두조. 80 너머가 공부할라카이 보고 도라서이 아차뿌고 눈 뜨만 이차분다. 아들 둘 딸 둘 다 키았는데 그 세월 쪼매 잘 아랐우면 초았을 거로. 우리 미느리가 공부한다고 자꼬 하라칸다. 시어마이 똑똑하라꼬 자꼬 하라칸다. 하라카는 기 고맙다. # 4. 나..

배드에스 안티테제 _ 해브 어 굿 트립, 도닉 케리 감독

# 0. 마약은 하면 안 됩니다. 해보진 않아서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보통 나쁘고 위험하고 건강에도 안 좋고 뭐 그렇다고들 하죠. 하지만 그 나쁘고 위험하다는 이미지 때문에 역으로 그것을 감수하는 순간의 자신이 멋있어 보이는 것만 같은 착각과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도닉 케리' 감독, 『해브 어 굿 트립 :: Have a good trip』입니다. # 1. '제이슨 라이트만' 감독, '아론 에크하트' 주연의 『흡연, 감사합니다』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달변가 사기꾼이 담배 팔다가 아들 숙제 몇 번 도와주고 금연 패치로 암살당할 뻔한 후 컨설턴트로 전업한다는 영화인데요. 그 작품을 보다 보면 주인공 '투페이스'가 대중들에게 담배를 팔아먹기 위해 매스미디어를 활용하는 방식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Documentary/Social 2020.05.20

빈센트 반... 셜록?! _ 반 고흐, 앤드류 휴튼 감독

# 0. 위대한 셰익스피어의 나라여서 그런 걸까요. 영국은 다큐멘터리를 하나 만들어도 이렇게나 '드라마틱하게' 뽑아냅니다. '앤드류 휴튼' 감독, BBC 다큐멘터리, 『반 고흐 :: Van Gogh _ Painted with words』입니다. # 1.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한 전기 다큐멘터리입니다. 만,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다큐라기보다는 내레이터의 해설을 곁들인 재연물에 훨씬 가까운 작품입니다. 주인공 '반 고흐'를 비롯한 등장인물들 대부분이 감성적인 표현을 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것을 넘어 심지어 지 마음대로 '제4의 벽'을 넘나들며 관객과 소통까지 하죠. 연대를 나열하는 건조한 편년체 형식으로 구성함으로써 최대한의 객관성을 확보하는 데 방점을 두는 여타 다큐멘터리들과는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

Documentary/Art 2020.05.12

그림 일기 _ 새들의 노래가 들려요, 트리네 발레비크 호비에르그 감독

# 0. 내전을 겪은 후 라이베리아 난민촌에서 지내고 있는 코트디부아르 출신 아이들과의 대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한 8분짜리 단편 다큐멘터리입니다. '트리네 발레비크 호비에르그' 감독, 『새들의 노래가 들려요 :: When i hear the birds sing』입니다. # 1. 감독은 카메라 앞에 앉은 아이들의 목소리만을 온전히 주목합니다. 그동안 어떤 일을 겪었는지, 지금 심정은 어떠한지, 장래의 꿈은 무엇인지 따위를 질문하고 있습니다만 정작 질문 그 자체 조차 영화 속에 담아내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상황을 부연 설명하는 대목에서 조차 간결한 텍스트를 통해 정보만 전달할 뿐, 그 흔한 내레이터 조차 일절 쓰지 않습니다. 보통의 다큐멘터리들이 높은 현장감을 지향하는 것과는 달리, 이 작품은 현장감을 ..

Documentary/Social 2020.05.11

세트 메뉴 _ 아폴로 11, 토드 더글라스 밀러 감독

# 0. 필연적으로 '데이먼 샤젤'의 『퍼스트 맨』과 함께 읽힐 수 밖에 없을 텐데요. 『퍼스트 맨』을 기억하며 작품을 보노라면 새삼스레 왜 다큐멘터리가 다큐멘터리로서 사랑받는지, 왜 영화가 영화로서 사랑받는지를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다큐멘터리에 담긴 실제 상황과, 그것이 재연된 『퍼스트 맨』에서의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교차할 때마다 전율이 입니다. 앤딩 크레디트를 보며 길게 할 이야기는 없겠다 싶었습니다. 아니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게 더 정확하겠군요. 지구라는 행성에 우연히 발생한 털 없는 원숭이가 공포이자 숭배이자 신앙이자 동경이었던 달로 날아가 발을 디뎠다. 라는 인류사에 길이 남을 압도적 사건을 기록하고 기억한다는 명분의 정당성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토드 더글라스 밀러' 감독, 『아폴로 ..

새벽이 오리라 _ 체념 증후군의 기록, 존 햅터스 감독

# 0. 배경지식이 전무한 제게 이 다큐는 근래 가장 충격적인 영화로 기억될 듯합니다. 보고 난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무슨 이딴 말도 안 되는 일이 다 있냐."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사자들의 고통을 폄하하거나 희화화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증세와 경과가 너무도 상식을 벗어나 이질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존 햅터스', '크리스틴 사무엘슨' 감독, 『체념 증후군의 기록 :: Life Overtakes Me』입니다. # 1. 언젠가부터 나쁜 버릇이 하나 생겼습니다. 작품을 보기도 전부터 자꾸만 앞질러 추측하게 된다는 것이죠. 『주홍색 연구』에서 달리는 마차 안의 '홈즈'는 근거도 없이 앞질러 선입견을 만드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 했는데요. 제가 딱 그 멍청이가 된 꼴이군요. 무슨 체념에 증후군까지 ..

Documentary/Social 2020.03.28

괴물과 마주할 수 있을까 _ 고스트 오브 슈거랜드, 바삼 타릭 감독

# 0. 괴물이 되어버린 인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기 나름의 목적들 이를테면 이념이나 재력, 신념, 권력, 쾌락 따위들을 위해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선을 넘어버린 존재들과, 그 존재들을 증언해줄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타인을 가십거리 삼아 평가하고 재단하길 좋아합니다만, 그런 사람들조차도 이런 무지막지한 괴물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만큼은 몸을 사립니다. 어떤 인물의 도덕성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훼손되면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거론하는 사람의 도덕성이 시험되기 때문이죠. '바삼 타릭' 감독, 『고스트 오브 슈거랜드 :: Ghosts of Sugar Land』 입니다. # 1. 말로 풀어 놓자니 복잡하게 들리긴 합니다만, 사실 어려울 건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경..

Documentary/Social 2020.03.16

방장 사기맵 _ 아메리카 와일드, 그렉 맥길리브레이 감독

# 0. 천조국, 자연, 경관, 눈뽕, 귀르가즘, 돈지랄, 공공, 다큐멘터리입니다. '그렉 맥길리브레이' 감독, 『아메리카 와일드 :: National Parks Adventure』 입니다. # 1. 광활하다는 말이 옹졸해 보입니다. 트여 있다는 말이 답답해 보입니다. 압도적인 경관이 주는 심미성에 처연하면서 웅장하고 섬세하면서 화려한 현악 연주가 곁들여집니다. "그래, 이게 힐링이지!" 싶은 생각을 하며 기대감이 한껏 부풀어 오르려던 찰나! 세기말 1세대 3D 게임의 향수를 물씬 불러일으키는 극악의 그래픽과 함께 작품의 제목이 쓰입니다. 아, 뭔지 알겠네요. 영화 시작 1분 만에 이 영화는 눈뽕과 귀르가즘 원툴일거라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아무런 주제의식도 연출적 완성도도 섬세한 디렉팅도 없을 것이라..

켠김에 끝까지 _ 지구의 밤, 알렉스 민턴 감독

# 0. 영화를 본다는 건 생각보다 더 피곤한 일입니다. 특히나 저같이 미취학 아동과의 팔씨름도 장담할 수 없는 극심한 운동 부족이자 미운 7살 부럽지 않은 중증 ADHD 환자에게는 더더욱 말이죠. 아무리 하루가 멀다 하고 볼만큼 영화를 좋아한다 하더라도 가끔 쉬어가는 느낌으로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대로 보는 시리즈물이 하나씩 있으면 썩 유용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상한 용도로 작품을 고를 때는 평소 영화를 볼 때와는 조금은 다른 기준이 필요하죠. '알렉스 민턴' 감독, 『지구의 밤 :: Night On Earth』 입니다. # 1. 너무 길면 곤란합니다. 옴니버스 식으로 각 에피소드들이 따로 놀아주면 더욱 좋죠. 감독이 누구인지보단 돈 많은 제작사 이름값이 더 신뢰할만하구요. 깊은 이야기나 주제의..

갈라파고스의 혁명가 _ 나는 스모 선수입니다, 맷 케이 감독

# 0. 육중하고 단호한 모래산입니다. 화면 너머 한기가 전해질 듯 차갑고 거친 파도입니다. 음울하면서 고압적인 분위기의 짙고 푸른 하늘이 강압적으로 짓누릅니다. 오랜 시간 동안 부서지고 퇴적되었을 보수적인 무언가들과, 잠시도 쉬지 않고 몰아붙이는 거센 풍파가 쉬지 않고 휘몰아치지만 여기 한 명의 스모 선수, 여자 스모 선수 곤 히요리는 굳건히 다리를 내디딘 채 상대를 노려봅니다. 그녀는 상대 선수뿐 아니라 그 뒤의 보이지 않는 사회적인 무언가들까지 모조리 도효 밖으로 밀어내려 합니다.        맷 케이 감독,『나는 스모 선수입니다 :: Little Miss Sumo』입니다.     # 1. 오프닝 연출이 심적적 측면에서도 문학적 측면에서도 사회학적 측면에서도 효과적입니다. 운동선수로서의 모습과, 여..

안구 정화용 _ #캣츠_냥스타그램의 세계, 마이클 마골리스 감독

# 0. 인스타그램 스타가 된 고양이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수백만 팔로워를 거느린 고양이가 입이 떡 벌어질 만한 돈을 벌어 재끼는 걸 보니 여간 배가 아픈 게 아니군요. 역시 사람이든 동물이든 간에 일단 귀엽고 봐야 합니다. 영화가 끝나기 무섭게 분노에 휩싸여 이런 징그러운 몰골로 낳아주신 부모님께 손해배상을 요청해 봤지만, 돌아온 건 고양이 영화를 보고 웬 개소리냐는 핀잔과, 한번 더 미친 소리를 했다간 먹여주고 재워 준데 대한 비용 청구를 하겠다는 엄포뿐이었습니다. 엄마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마이클 마골리스' 감독, 『#캣츠_냥스타그램의 세계 :: #CATS_THE_MEWVIE』 입니다. # 1. 기본적으로 고양이 예찬 다큐멘터리이자 눈뽕 영화입니다만, 나름 사회과학적이면서 경제학적인 영화이기..

Documentary/Social 2020.02.13

이런 문제가 있다 _ 3분간의 허그, 에베라르도 곤잘레스 감독

# 0. 늦은 밤 전화를 합니다. 다음날 해가 뜹니다. 약속된 장소에는 행사가 서서히 준비됩니다. 저 멀리 그리운 얼굴들이 보입니다. 누군가는 손을 흔들고, 누군가는 마른 입을 다시고, 누군가는 소리쳐 부르기도 합니다. 드디어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찰나와 같은 3분. 그만 돌아가야 한다는 행사 안내가 울립니다. 차마 놓지 못하는 손을 붙잡은 채 팔을 길게 뻗어 보지만, 그래도 돌아가야만 합니다. 행사는 끝났습니다. 해가 진 저녁. 빈 행사장만이 덩그러니 스크린에 남았습니다. '에베라르도 곤잘레스' 감독, 『3분간의 허그 :: A 3 Minute Hug』 입니다. # 1. 영화는 그렇게 막을 내립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떨어져 지내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모습과 잠시 동안의 만남과 돌아서..

왜 때문에 우리는 _ 로레나 - 샌들의 마라토너, 후안 카를로스 룰포 감독

# 0. 소녀가 달립니다. 화려하면서도 순박한 무늬가 그려진 품이 넓은 치마를 두르고, 맑고 어린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둔탁한 발을 낡은 샌들에 얹고 달립니다. 숨 막히게 만드는 깨끗한 산등성이를 넘어 소녀는 힘차게 내달립니다. '후안 카를로스 룰포' 감독, 『로레나 - 샌들의 마라토너 :: Lorena, La de Pies Ligeros』입니다. # 1. 마라톤에 대한 영화입니다만 사운드에 대한 이야기를 우선 하지 않을 수가 없겠네요. 다양한 음향 효과를 위해 영화를 만든 건가 싶을 정도로 다채로운 소리의 활용이 펼쳐집니다. 날카롭게 찌르는 현악 연주가 숨 막힐 듯 깊게 드리워진 산세와 함께 관객의 이목을 끕니다. 힘차게 내달리는 소녀의 모습과 넓은 화각의 공중촬영 영상 뒤로 경건하고 극적인 현악 연..

에피타이저 탕수육 _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아녜스 바르다 / JR 감독

# 0. 사실 작년에 본 영화입니다. 독립극장의 예술영화관에서 봤었죠. 하지만 리뷰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꿀잠을 잣기 때문입니다. 나랑 안 맞는 영화였나 보다 하며 잊고 지냈는데요. 최근 넷플릭스에 이 영화가 걸렸더라구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이 영화의 무엇이 20년 차 모범 불면증 환자인 저마저 숙면에 빠트리게 한 것일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쌩돈 들여 간 영화관에선 잠을 쳐 잔 영화를 스트리밍으로 다시 보고 말았습니다. 물론 2017` 칸 특별부문 초청작이라는 걸 알고선 마음이 조금 더 동하기도 했구요. 권위에 굴복한 것 맞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아녜스 바르다', 'JR' 감독,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 Visages, Villages』입..

Documentary/Art 2019.10.06

컨트리 뮤직 메들리 _ 하늘 높이, 오틸리아 포르틸로 파두아 감독

# 0. 경쾌한 컨트리 음악 같은 다큐멘터리입니다. 현란하면서 푸근한 중저음의 기타 소리, 늘어난 테이프처럼 몸을 기대게 만드는 나무의자, 붉은빛과 노란빛이 연인처럼 뒤엉켜 펼쳐지는 노을, 희끗희끗한 덥수룩 수염의 다소 마초적인 할아버지의 느낌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들의 자유로움과, 새들이 살아 숨 쉬는 자연의 평화로움과, 그들을 관찰하는 사람들의 여유로움이 37분간 잔잔한 메들리처럼 흐릅니다. '오틸리아 포르틸로 파두아' 감독, 『하늘 높이 - 국경의 철새들 :: Birders』 입니다. # 1. 우리말 제목은 입니다만 원제는 입니다. Bird + er + s. 직역하자면 '새... 사람' 쯤 되려나요? 접미사 '-er'은 행위자를 의미합니다. manager, player, employer 등 대부분 ..

꺼졌으면 좋겠네 _ 람다스, 고잉 홈, 데릭 펙 감독

# 0. 솔직히 람 다스가 누군지 모릅니다. 하버드대 교수였다는 데 어디 가봤어야 알죠.         데릭 펙 감독,『람다스, 고잉 홈 :: Ram Dass, Going Home』 입니다.     # 1.  대충 구글 신께 물어보니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깨어난 영적 지도자라 그러네요. 영혼도 누가 지도해줘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前 직업이 교수였다니 직무 특성을 살렸나 보군요. 여튼, 그러려니 하겠습니다. 이 양반이 이 다큐멘터리 이전에 어떤 작업을 어떤 태도로 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알 바가 아니죠. 전 이 다큐멘터리에 드러난 인상을 바탕으로만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까놓고 말해서 좀 꺼졌으면 좋겠습니다. 다큐멘터리는 약쟁이 노인네가 뇌졸중으로 오늘내일하다가 살아난 후 현타가 왔다는 이..

블랙 코미디 _ 첼시의 백인 특권 전격 해부, 알렉스 스테이플튼 감독

# 0. 첼시는 능청스럽게 '백인스러움'을 연기합니다. 여기에서의 '백인스러움'이란 무신경하고 단편적이며 자기 확신이 강하고 자의식이 과잉되어 있고 철없어 보일 정도로 낙관적이고 오지랖을 부리고 무례하게 따지고 드는, 학습된 더 훌륭한 백인으로서의 행동 양식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알렉스 스테이플튼 감독, 『첼시의 백인 특권 전격 해부 :: Hello, Privilege. It's Me, Chelsea.』입니다. # 1. 백인의 특권을 전격 해부 하겠다 말하는 동안 유색인종 가사도우미와 운전기사는 존재 자체로 풍자적입니다. 불편을 감수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의 최대한의 도덕적 무장을 위한 위선을 꼬집습니다. 스스로 희화되는 걸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모른척 뻔뻔하게 연기하는 '..

Documentary/Social 2019.09.22

물아일체 _ 바다의 사냥꾼 자고, 제임스 리드 / 제임스 모건 감독

# 0. 평생 물질 하며 살아온 노인의 전기물이란 아이스크림 위에, 압도적인 눈뽕이란 에스프레소를 끼얹은 아포가토입니다. 서사성이 강조된 재연 영화와 자연 다큐가 하나처럼 융화되어 있습니다. 극과 극처럼 보이는 생태 다큐와 전기물의 콜라보레이션이라, 독특하군요. '제임스 리드', '제임스 모건' 감독, 『바다의 사냥꾼 자고 :: JAGO a life underwater』 입니다. # 1. 말레이시아 바자우족의 노인 '로하니'가 자신이 살아온 삶을 풀어놓습니다. 증언에 예술적 역량을 더해 환상적인 그림을 선사합니다. 어리고 젊은 시절 '로하니'의 역동성과, 온몸으로 운동하는 인간의 심미성과, 그런 심미적 존재가 대자연과 어우러지는 순간의 감동이 경탄을 자아냅니다. 평온한 인터뷰와 과거의 재연 사이를 반복적..

조니 뎁 & 케이트 윈슬렛 _ 신비의 바다, 하워드 홀 감독

# 0. 북중미 해양 생태계를 배경으로 한 '아동용' 자연 다큐멘터리입니다. 해양 생물들의 모습이 어른들 눈에도 충분히 신기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아이들의 입에서 '우와' 소리를 내는 걸 목적으로 합니다. 현학적이거나 철학적인 메시지 따위는 추구하지 않고 추구할 수도 없습니다. 요즘 나오는 대부분의 다큐멘터리들이 학술적 정보공유와 정치 담론 혹은 철학적 주제의식을 전달하기 위한 것들이라는 걸 생각할 때, 분명 이질적이긴 합니다. 이 다큐멘터리가 나온 게 2008년인데요. 대체 10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진지충들이 이렇게나 많아진 걸까요. '하워드 홀' 감독, 『신비의 바다 :: Deep Sea 3D』입니다. # 1. '조니 뎁'과 '케이트 윈슬렛'이 연기하듯 주고받는 내레이션이 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