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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umentary/Social

괴물과 마주할 수 있을까 _ 고스트 오브 슈거랜드, 바삼 타릭 감독

그냥_ 2020. 3. 1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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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괴물이 되어버린 인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기 나름의 목적들 이를테면 이념이나 재력, 신념, 권력, 쾌락 따위들을 위해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선을 넘어버린 존재들과, 그 존재들을 증언해줄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타인을 가십거리 삼아 평가하고 재단하길 좋아합니다만, 그런 사람들조차도 이런 무지막지한 괴물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만큼은 몸을 사립니다. 어떤 인물의 도덕성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훼손되면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거론하는 사람의 도덕성이 시험되기 때문이죠.

 

 

 

 

 

 

 

 

'바삼 타릭' 감독,

『고스트 오브 슈거랜드 :: Ghosts of Sugar Land』 입니다. 

 

 

 

 

 

# 1.

 

말로 풀어 놓자니 복잡하게 들리긴 합니다만, 사실 어려울 건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경험은 풍부하니까요. 우리도 남부럽지 않은 근현대사의 괴물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공과功過에 대해 이야기해 볼 여지라도 있는 '백범' 선생이나,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같은 다각적인 인물들은 그나마 논평의 대상이라도 될 수 있지만, '이완용'을 비롯한 빼도 박도 못하는 매국노들이나,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의 독재 왕가에 대해서는 거론조차 꺼리는 풍토가 아직 우리 사회에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지금 리뷰를 쓰는 시점을 전후로 KBS가 '김일성'에 대한 시사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겠노라 예고를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죠. "이거이거, 김일성 찬양 방송하는 거 아냐?!" 라면서 말입니다. 우스꽝스러운 건 논란의 시점에 아직 그 방송은 방영조차 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무슨 내용일지도 전혀 모른 채 화를 내고 있었던 거죠.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는 모습은 그 자체로 충분히 희극적입니다. 사람들이 보이는 '김일성'이라는 이름 세 글자에 대한 격앙된 반응은 걱정이나 분노로만 이루어진 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에 가까워 보이죠. '김일성'이라는 인간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인물이 거론되는 상황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 말입니다. 저런, 저도 사상검증이라도 남겨둬야 하려나요? 김일성 개X끼?!

 

# 2.

 

시작부터 얘기가 샛네요. 이 영화는 ISIS에 가담한 가명 '마크'에 대한 친구들의 인터뷰 다큐멘터리입니다.

 

20여분 남짓한 짧은 다큐멘터리를 보고 든 생각은 '감독이 참 용감한 사람이구나'라는 것이였습니다. 감독은 친구들의 입을 빌려 어리고 숫기 없던 흑인 청년이 ISIS에 흘러가기까지의 궤적을 되짚는데요. 그 과정에서 자칫 '마크'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굴이 자신만만하게 공개된 '마크'와 가면을 뒤집어쓴 친구들의 모습은 이런 역설적 상황을 풍자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죠.

 

'동의'와 '이해'는 다릅니다. '동의'하지 않지만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건 충분히 존재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해'를 '옹호'의 동의어로, '옹호'로 오해된 '이해'를 '동의'로 곡해합니다만 그런 몇몇의 사람들이 곡해한다고 해서 '이해'가 그 자체로 잘못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당연하게도 이 '이해'한다는 것이 반드시 해당 행위를 '정당화'한다는 의미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해할 수 있다'라는 건 어디까지나 '납득할만한 인과관계로 인한 개연성은 있다' 정도의 의미일 뿐이죠. 가령, 자기 자식이 참혹한 폭행을 당한 것을 알게 된 부모가 사적 보복을 한다면 우린 그런 판단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죠.

 

그나마 사안이 가벼운 경우엔 사람들은 조금 더 이성적으로 '동의'와 '이해'를 구분합니다. 5시간동안 쓰레기통을 찾아 배회하다 홧김에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의 사정에 대해 '동의'하진 않더라도 '이해'하길 어려워하지는 않죠. 하지만, 사람을 죽인 사람의 사정이라는 걸 이해하는 건 훨씬 두려워하기 마련입니다. 그 잘못이라는 게 ISIS에 가담해 반 인륜적 범죄를 저지르는 거라면 더더욱 두려울 수 있죠. 자칫 매도당할 수 있으니까요.

 

 

 

 

 

 

# 3.

 

감독은 용기를 가지고 아직 상흔이 사그라들지 않은 문제에 현미경을 들이밉니다.

 

'마크'가 그런 곳까지 흘러들어 가게 된 배경을 조명합니다. 라티노들 사이에서 흑인으로서 겪은 인종적 차별. 모태신앙 무슬림들 속에서 후천적으로 이슬람에 감화된 사람의 종교적 고립. 이슬람에 대한 미국 내에서의 사회적 차별. 원하던 안정적인 직장을 유지할 수 없는 경제적 환경 등. 내향적인 내면을 가진 인물이, 배타적인 사회 속에서, 통제되고 교정되고 논쟁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고를 자생적으로 반복 심화 재생산하는 가운데, 그 위로 종교 특유의 가공할만한 신념적 동력이 시너지를 일으킬 때 한 인간의 삶이 어디까지 탈선할 수 있는가를 냉철히 조명합니다.

 

'마크' 만큼이나 내향적인 사람이면서 동시에 '마크'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존재와, 그들과 '마크'를 가르게 된 사회적 환경과 그에 뒤따르는 책임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문제를 제기함으로 인해 자칫 '마크'와 ISIS의 문제를 사회의 탓으로 돌린다거나 심지어 옹호하는 듯 보일 수 있다는 위험을 감독은 단호히 감수하며 과감히 돌파합니다. 이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인 위협의 유치함에 대해 인터뷰이들이 뒤집어쓴 아동용 마스크가 조소를 보냅니다. '마크'는 늘 훌륭한 미국인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말하는 친구들을 모습 뒤로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가 떠오릅니다. 마스크를 쓴 친구들과 전혀 이질감 없이 뒤엉킨 '마크'의 사진이 육중한 무게감을 가집니다. 친구가 극단주의자였는지, 스파이였는지 따위보다는 살아있는지 죽었을지가 궁금하다 말하는 목소리가 육중한 무게감을 가집니다.

 

# 4.

 

... 미국의 영화 감독은 ISIS에 가담한 청년의 친구들을 카메라에 담고, 독일의 감독은 히틀러의 논리로 현대사회를 되짚어가는 동안, 우리는 KBS의 시청자 게시판으로 달려가고 있었다는 게 희극적이고 또 비극적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그렇게나 두려워 하고 있는 걸까요. 우린 언제쯤 이런 담론을 나눌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언제쯤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요. '바삼 타릭' 감독, 『고스트 오브 슈거랜드』이었습니다. 

 

 

 

 

 

 


 

* 본 리뷰는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이 작성한 글이며, 상당 부분에서 객관적이지 않거나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당 글이 가지는 의의의 최대치는 "영화를 좋아하는 팬 중 단 1명의 견해"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리뷰는 영화관에서 직접 관람하거나, WatchaPlay, Netflix, Google Movie 등을 통해 "정상적으로 구매한 영화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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